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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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는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 중이던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포함한 승객 781명과 승무원 60명을 태운 시운마루호가 세토 내해에서 안개 속에서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다이산 우코마루와 충돌하여 발생한 해상 사고이다. 이 사고로 168명이 사망했으며, 특히 아동·학생 희생자가 많았다.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하고, 세토 대교 건설 및 수영 교육을 강화하는 등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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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 |
|---|---|
| 사고 개요 | |
| 이름 | 시운마루 호 침몰 사고 |
| 원어 이름 | 紫雲丸事故 (시운 마루 지코) |
| 영문 이름 | Shiun Maru disaster |
| 발생일 | 1955년 5월 11일 |
| 위치 | 일본 |
| 좌표 | #좌표는 출력하지 않음, google_map으로 대체 |
| 유형 | 선박 충돌 사고 |
| 원인 | 짙은 안개와 레이더 부족 |
| 사망자 | 168명 |
| 기타 | 수학여행 중이던 학생 다수 포함 |
| 관련 사건 | 우코마루 와의 충돌 |
| 관련 선박 | |
| 우코마루 | #일본어 템플릿은 제거하고, 텍스트만 남김 |
| 참고 자료 | |
| 뉴스 기사 | '수학여행참사’ 일본 시운마루호 침몰 59년 |
| 웹사이트 | Dead ferry tragedy victims get graduation certificates after 50 yrs |
2. 사고 발생 이전의 시운마루
1950년 3월 25일, 우노를 정각보다 20분 늦은 0시 35분에 출항한 하행 화물 1021편(와시우마루)과, 다카마쓰를 정각 10분 늦은 0시 10분에 출항한 상행 화물 1020편(시운마루)이 0시 58분에 나오시마와 코진지마에 끼인 좁은 해역에서 충돌했다. 와시우마루가 시운마루의 옆면에 충돌하는 형태였으며, 시운마루는 전복되어 1시 4분에 완전히 침몰했다. 승무원 72명 중 7명이 사망했다.[2] 그 후 시운마루는 인양되어 연락선으로 복귀했다.
1951년 8월, 다카마쓰항 내에서 「제2유스마루」와 충돌하여 이후 레이더가 설치되었다.
1952년 4월, 다카마쓰항 외에서 버려진 돌에 접촉하여 자이로컴퍼스가 설치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다카마쓰항 내에서 「후쿠우라마루」와 접촉하였다.
2. 1. 4번의 사고
1950년 3월 25일, 우노를 정각보다 20분 늦은 0시 35분에 출항한 하행 화물 1021편(와시우마루)과, 다카마쓰를 정각 10분 늦은 0시 10분에 출항한 상행 화물 1020편(시운마루)이 0시 58분에 나오시마와 코진지마에 끼인 좁은 해역에서 충돌했다. 와시우마루가 시운마루의 옆면에 충돌하는 형태였으며, 시운마루는 전복되어 1시 4분에 완전히 침몰했다. 승무원 72명 중 7명이 사망했다.[2] 그 후 시운마루는 인양되어 연락선으로 복귀했다.1951년 8월, 다카마쓰항 내에서 「제2유스마루」와 충돌하여 이후 레이더가 설치되었다.
1952년 4월, 다카마쓰항 외에서 버려진 돌에 접촉하여 자이로컴퍼스가 설치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다카마쓰항 내에서 「후쿠우라마루」와 접촉하였다.
3. 1955년 침몰 사고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현 초등학생과 고치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세토 내해를 지나고 있었다. 세토 내해는 혼슈와 시코쿠, 규슈로 둘러싸인 해역으로 동서로 450km로 길고 평균 수심은 31m로 얕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도 빠른 곳이었다.[12] 사고 당일,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꼈음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강행했다. 같은 항로의 반대편에서는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가 운행하고 있었다.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했으며, 안개로 인해 시야가 나빠 레이다만 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회피했으나, 모두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충돌하고 말았다.[12]
사고는 1955년(쇼와 30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상행 제8편으로 운항 중이던 시운마루호가 같은 우코 연락선・하행 153편 대형 화물차 운항선 "다이산 우코마루"와 충돌하여 발생했다. 이 사고는 국철 전후 5대 사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큰 피해를 낳았으며, 수학여행 중인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키노에 정립 남소학교(현・도요타군 오사키카미지마정립 키노에 초등학교)의 아동 등을 중심으로 사망자 168명이 발생했다.[3]
3. 1. 사고 경위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현 초등학생과 고치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세토 내해를 지나고 있었다. 세토 내해는 혼슈와 시코쿠, 규슈로 둘러싸인 해역으로 동서로 450km로 길고 평균 수심은 31m로 얕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도 빠른 곳이었다.[12] 사고 당일,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꼈음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강행했다. 같은 항로의 반대편에서는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가 운행하고 있었다.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했으며, 안개로 인해 시야가 나빠 레이다만 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회피했으나, 모두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충돌하고 말았다.[12]사고는 1955년(쇼와 30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상행 제8편으로 운항 중이던 시운마루호가 같은 우코 연락선・하행 153편 대형 화물차 운항선 "다이산 우코마루"와 충돌하여 발생했다. 이 사고는 국철 전후 5대 사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큰 피해를 낳았으며, 수학여행 중인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키노에 정립 남소학교(현・도요타군 오사키카미지마정립 키노에 초등학교)의 아동 등을 중심으로 사망자 168명이 발생했다.[3]
5월 11일, 세토 내해 연안 해상에는 짙은 안개 경보가 발표되었고, 시야는 50미터 이하로 예상되었다. 오전 6시 10분, 우노항에서 대형 화물차 운항선 "제3 우코마루"(총 톤수: 1,282톤)가 하행 153편으로 출항했다. 당시 날씨는 흐리고 안개와 바람도 없었으며, 파도는 잔잔했다. 오전 6시 20분경, 다카마쓰 지방 기상대의 짙은 안개 경보가 무선 전화로 전해졌고, 제3 우코마루는 마린 레이더를 대기시켰다. 6시 35분경 시야가 400미터에서 500미터가 되자, 제3 우코마루는 안개 신호 발신을 시작했다.
오전 6시 40분, 시운마루・나카무라 마사오 선장은 브릿지 앞에서 시야를 확인했을 때 400미터에서 500미터 앞의 어선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출항을 결정했다. 같은 시각, 승객 781명, 승무원 60명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상행 8편으로 다카마쓰항을 출항했다. 오전 6시 51분경, 안개가 짙어져 시야는 100미터 정도가 되었다. 제3 우코마루 수석 운전사가 레이더상 2,500미터의 선수 방향 지시선상에 시운마루를 확인했다. 이때 우코마루는 해상 충돌 예방 규칙에 따라 항로를 140도로 변경했다.
오전 6시 53분, 거리 1,700미터로 접근했을 때, 제3 우코마루에서는 시운마루의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시운마루의 안개 중 기적 소리가 좌현 방향에서 들려왔다. 제3 우코마루는 동서 방향으로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하고 전속력으로 항행을 계속했다.
오전 6시 56분, 제3 우코마루 좌현 30도 100미터 전방에 갑자기 좌측으로 회두하는 시운마루가 나타났다. 이후 해난 심판에서 시운마루의 좌회전 이유는 최대의 초점 중 하나가 된다. 제3 우코마루・미야케 미노루 선장은 즉시 기관 정지, 좌현타를 지시했지만, 5도 정도 회두한 지점에서 우코마루의 선수 부분이 시운마루 우현 선미 부근에 격돌했다.[3] 충돌 지점은 북위 34도 22분 36.0103초 동경 134도 0분 57.8319초, 침몰 지점은 북위 34도 22분 36.0978초 동경 134도 1분 2.0969초였다.[3]
3. 2. 충돌 및 침몰
1955년 5월 11일, 세토 내해를 지나던 시운마루호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출발을 강행했다.[12] 같은 항로 반대편에서는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가 운행 중이었다.[12]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했으며, 안개로 시야가 나빠 레이다에만 의존하고 있었다.[12]6시 40분, 시운마루의 나카무라 마사오 선장은 400~500m 앞 어선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출항을 결정했다.[4] 6시 51분경, 안개가 짙어져 시야는 100m 정도가 되었다.[3] 제3우코마루는 6시 35분경부터 안개 신호를 발신하기 시작했다.[3]
6시 51분경, 제3우코마루는 레이더로 2,500m 전방에서 시운마루를 확인하고 해상 충돌 예방 규칙에 따라 항로를 140도로 변경했다.[3] 6시 53분, 1,700m까지 접근했으나 여전히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3] 제3우코마루는 시운마루의 기적 소리가 좌현 방향에서 들려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 전속력 항해를 계속했다.[3]
6시 56분, 제3우코마루 좌현 30도, 100m 전방에서 갑자기 좌회전하는 시운마루를 발견했다.[3] 제3우코마루의 미야케 미노루 선장은 즉시 기관 정지, 좌현타를 지시했지만, 우코마루의 선수가 시운마루 우현 선미 부근에 충돌했다.[3] 충돌 지점은 였다.[3]
제3우코마루의 선수는 시운마루 우현 기관실을 70도 각도로 ভেদ었다.[4] 기관실에서는 복수기와 주 배전반이 폭발, 선내 정전이 발생하고 침수가 시작되었다.[4] 승무원들은 수밀문을 닫으려 했으나 전원 차단으로 작동하지 않았다.[4]
제3우코마루는 시운마루의 침수를 막기 위해 좌현타를 최대로 유지하고 전속 전진하여 시운마루를 계속 밀었다.[4] 승객들은 제3우코마루로 피신했으나, 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이 선내에 남겨졌다.[4] 인솔 교사 중 일부는 제3우코마루로 피난했다가 다시 선내로 돌아가 희생되기도 했다.[4]
아사히 신문사 보도 사진 기자는 구조 요청하는 승객들을 촬영하여 논란이 되었다.[4] 시운마루는 충돌 후 몇 분 뒤인 7시 2분경 전복, 침몰했다.[4] 나카무라 선장은 퇴선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침몰했다.[4]
현지 어부 시마타니 쿠니타로는 충돌 직후 구조 활동을 시작하여 50명 가까운 조난자를 구조했다.[4] 오카야마현 고지마군 고토우라정 (현 구라시키시 고지마 지역) 부인회 85명도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 문부성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4]
3. 3. 구조 활동
1955년 5월 11일 세토 내해에서 발생한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당시, 제3 우타카마루는 충돌 직후 시운마루의 침몰을 예견하고 좌현 타륜을 최대로 유지한 채 기관을 전속 전진시켜 시운마루를 계속 밀어 침수를 완화하려 시도했다.[4] 승객들은 제3 우타카마루로 피신했으나, 선내에는 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인솔 교사 중 일부는 제3 우타카마루로 피난했다가 다시 돌아가 아이들을 구조하려다 희생되기도 했다.[4]구명조끼는 아이들이 손이 닿기 어려운 곳에 보관되어 있었고, 사용법을 모르거나 착용할 틈 없이 바다에 던져진 아이들이 많아 피해가 커졌다.[4] 아사히 신문사의 보도 사진 기자는 도움을 요청하는 승객들을 촬영하여 비판을 받았고, 이는 "인명 구조와 보도"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4]
사고 현장 근처에서 오징어 낚시를 하던 어부 시마타니 쿠니타로는 충돌음을 듣고 즉시 자신의 어선(1.5톤)을 몰아 사고 발생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4] 그는 다카마츠항에서 지원 선박이 올 때까지 50명 가까운 조난자를 구조했다. 오카야마현 고지마군 고토우라정 (현 구라시키시 고지마 지역)의 부인회 85명도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 문부성으로부터 표창과 금일봉을 받았다.[4]
시운마루는 충돌 후 몇 분 뒤인 오전 7시 2분경 좌현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나카무라 선장은 퇴선을 거부하고 브리지에 남아 배와 함께 침몰했다.[4]
3. 4. 희생자
이 사고의 희생자는 168명에 달했으며, 그중 아동·학생 희생자는 100명이었다.[12] 희생자 내역은 다음과 같다.- 시운마루 관계자 2명 (선장 외 1명)
- 일반 승객 58명
- 수학여행 관계자 108명 [아동·학생 100명 (남자 19명, 여자 81명) 인솔 교원 5명 관계자 (부모) 3명]
- * 에히메현 미요시정립 쇼나이 초등학교 (현: 사이조 시립 쇼나이 초등학교): 30명 (아동 77명 중 29명, PTA 회장 1명)
- * 고치현 고치 시립 난카이 중학교: 28명 (3학년 117명 중 28명)
- * 히로시마현 키에정립 남 초등학교 (현: 오사키카미지마정립 키에 초등학교): 25명 (6학년 97명 중 22명, 인솔 교원 3명)
- * 시마네현 마쓰에 시립 카와츠 초등학교: 25명 (6학년 58명 중 21명, 인솔 교원 5명 중 2명, 부모 3명 중 2명)
특히 아동·학생 희생자 100명 중 81명이 여자였다.[5] 현장에서는 잇따라 아동·학생의 유해가 반출되었지만, 그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서, 반출 활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상황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4. 사고 원인 및 심판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현 초등학생과 고치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세토 내해를 지나고 있었다. 세토 내해는 혼슈와 시코쿠, 규슈로 둘러싸인 해역으로 동서로 450km로 긴 데다 평균 수심은 31m로 얕은 곳이었다. 해당 해역은 조수 간만의 차도 크고 조류도 빠른 곳이었다. 사고 당일,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끼었는데도 불구하고 출발을 강행했다. 하지만 같은 항로의 반대편에서는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가 운행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했으며, 안개로 인해 시야가 나빠 레이다만 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회피했으나, 모두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충돌하고 말았다.[12]
1955년(쇼와 30년)부터 고베 해난심판청에서 시운마루 침몰 사고의 해난심판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956년(쇼와 31년) 1월에 재결이 내려졌으나, 재결에 불복하여 1960년(쇼와 35년) 6월부터 고등해난심판청에서 제2심이 개정되었고, 8월에 재결이 내려졌다. 재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 건 충돌은 시운마루 1등 운전사 겸 선장 나카무라 마사오 및 다이산 우코 마루 선장 미야케 미노루의 운항에 관한 각 직무상 과실에 기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된 원인은 시운마루의 항행에 기인하는 점이 많았다고 여겨지지만, 나카무라 선장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러한 항행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결국 명확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추정의 영역에 머물렀다. 그중에서도 최대 원인은 직전의 좌선회였지만, 이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직전의 레이더에서 지침의 약간 오른쪽으로 다이산 우코 마루가 확인된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4. 1. 사고 원인
시운마루호는 세토 내해를 지나던 중, 안개가 낀 상황에서도 출발을 강행했다. 같은 항로 반대편에서는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가 운행 중이었다.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했으며, 안개로 시야가 나빠 레이다에만 의존했다. 서로 접근을 인지하고 회피 기동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충돌하고 말았다.[12]고베 해난심판청의 1956년 1월 재결과, 1960년 8월 고등해난심판청의 제2심 재결에 따르면, 충돌은 시운마루 1등 운전사 겸 선장 나카무라 마사오 및 다이산 우코 마루 선장 미야케 미노루의 운항 과실에 기인하여 발생했다.[12]
주된 원인은 시운마루의 항행에 있었지만, 나카무라 선장의 사망으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충돌 직전 좌선회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레이더에 다이산 우코 마루가 약간 오른쪽에 확인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사고의 구체적인 원인으로는 다음 사항들이 지적된다.[12]
- 시운마루호가 다카마쓰항 출항 직후, 500미터 직진하여 북서쪽 기준 항로를 잡아야 했음에도 100미터 정도만 나아가 북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점.
- 짙은 안개 속에서 시운마루호와 제3 우타카마루 모두 해상 충돌 예방법 규정을 어기고 과속 운항한 점.
- 나카무라 선장이 짙은 안개 속에서 육안으로 확인해야 함에도 마린 레이더 관측에만 전념한 점.
- 오전 6시 55분경 갑자기 엔진이 멈춘 점 (짙은 안개로 인한 속력 감소 의도로 추정).
- 충돌 직전 갑자기 뱃머리를 좌측으로 변경한 점.
4. 2. 해난 심판
1955년 5월 11일, 아이치현 초등학생과 고치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세토 내해를 지나던 중 일본국유철도의 화물선 제3우코마루와 충돌했다.[12] 세토 내해는 혼슈와 시코쿠, 규슈로 둘러싸인 해역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빠른 곳이었다. 사고 당일,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낀 상황에서도 출발을 강행했고, 두 선박 모두 규정 속도를 초과하여 운항하던 중 충돌했다.[12]1955년부터 고베 해난심판청에서 시운마루 침몰 사고의 해난심판이 시작되었다. 1956년 1월 재결이 내려졌으나, 이에 불복하여 1960년 6월부터 고등해난심판청에서 제2심이 개정되었고, 8월에 재결이 내려졌다. 재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주된 원인은 시운마루의 항행에 기인하는 점이 많았다고 여겨지지만, 나카무라 선장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러한 항행을 한 이유는 명확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추정의 영역에 머물렀다. 특히 직전의 좌선회는 수수께끼로 남겨졌으며, 직전의 레이더에서 지침의 약간 오른쪽으로 다이산 우코 마루가 확인된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4. 3. 형사 재판
1963년 3월 19일, 다카마쓰 고등재판소는 시운마루 항해사와 제3우코마루의 미야케 미노루 선장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12] 검찰과 피고 모두 최고재판소에 상고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되었다.[12]5. 사고의 여파와 영향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했다.[12] 두 선박이 충돌하지 않도록 연안 항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분리했다. 세토대교는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이러한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짙은 안개가 낄 경우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선(停船) 권고' 역시 엄격히 적용했다.[12] 선박의 복원력과 관련된 규칙도 만들어졌는데, 이 규칙을 바탕으로 국제 해사 기구에서는 국제적인 규칙을 제정한다.
사고 이후 세토 내해는 선원 실습생의 훈련 장소로 바뀌었다.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당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점을 두고 일본 문부성은 각 학교마다 수영장을 두어 수영 교육을 강화했다.[12][13]
이 사고는 전년에 발생한 도야마루 호 침몰 사고와 맞물려 국철에 큰 교훈을 안겨주었고, 연락선의 선체 구조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실시되었다. 또한 이에 따라 기존에 행해지던 연락선에 의한 객차의 해상 운송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우코 항로에서 상하 항로의 완전 분리가 실시되었다(우코 동항로가 북행, 우코 서항로가 남행). 사고가 잇따라 발생한 것에 대해 나가사키 소노스케총재가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후임에는 소고 신지가 취임했다. 항로를 관할하는 시코쿠 지사(후 시코쿠 총국)에는 새로 우코 선박 관리부가 설치되었다.
이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의 보도를 접한 쇼와 천황이 사고 희생자 및 피해자에게 금일봉을 특별히 하사했다[6]。
사고 후, 해상보안부에 의한 정선 권고 기준이 엄격해지면서 우코 연락선은 일절 인명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초여름부터 장마에 걸쳐 짙은 안개로 인해 잦은 정선 권고가 나오게 된 것이 수송상의 장애가 되었고, 세토 대교의 건설 기운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는 혼슈 시코쿠 연락교의 3개 계획 노선 중 고지마·사카이데 노선이 처음으로 건설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8년에 세토 대교가 개통되어 시코쿠의 관광과 경제에 혜택을 가져다주었지만, 혼슈로의 젊은이 유출을 초래했다. 특히 가가와현에서 오카야마현을 중심으로 인구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7]。
현재는 위령비가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니시호초에 건립되어 사고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교사 3명, 어린이 22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키에초립 미나미 초등학교 교정에는 1956년(쇼와 31년) 4월 28일에 희생자 기념관이 세워져 희생된 교사, 어린이의 유영 등이 놓여 있었다. 후에 구 키에 초등학교와 통합하여 키에초립 키에 초등학교가 되었지만, 더욱이 2003년(헤이세이 15년)에 키에·오사키·히가시노 3개 정 합병으로 오사키카미지마정립 키에 초등학교가 되었다(부지 등은 미나미 초등학교의 것을 답습). 2002년(헤이세이 14년)에는 시운마루 기념관의 신축 낙성식을 맞이했다.
본 사고로 인해 "일본의 학교에 수영 수업이 널리 퍼졌다"는 자료가 있지만, 학교에 풀을 설치하는 것은 이후의 스포츠 진흥법에 의한 시설 정비비 증가와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자치단체의 세수 증가가 요인이라는 의견이 있다[8]。한편, 본 사고를 계기로 아동의 수영 능력 향상을 바라는 민의가 확산된 것을 보여주는 문헌은 산견된다. 제22회 국회의 중·참의 복수의 문교위원회[9]에서는, 같은 해 7월의 하시키타 중학교 수난 사건과 함께, 교원의 수영 지도 능력의 문제, 풀 건설의 문제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마쓰야마의 향토 자료 연구자인 객야 스미히로는 자신의 칼럼[10]에서, 토요시(현: 사이조시)립 쇼나이 초등학교의 사고의 전말에 이어 "교훈을 살려, 현민 모두 수영, 교사의 채용 시험에 수영 실기를…. 현 내의 학교에서는 풀의 설치를 서둘렀다."라고 썼다. 객야는 전 에히메 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당시에도 정력적으로 취재에 임했다.
어린이 3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쇼나이 초등학교는 2004년(헤이세이 16년) 5월 사고 50주기에 추도록 "이데타치시마마"를 발행했다. 여기에는 사고의 생존자인 동창생의 필체로, "학교에 풀은 없었다", "전원이 수영을 배운다는 상황은 아니었고, 일부에는 수영을 못하는 아이나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학생은, 상급생이 되면서, 강이나 연못에서의 수영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학생의 희생자가 많았던 한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회가 적혀 있다.
5. 1. 선박 안전 기준 강화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했다.[12] 두 선박이 충돌하지 않도록 연안 항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분리했다. 세토대교는 시운마루호 사고 이후 이러한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짙은 안개가 낄 경우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선(停船) 권고' 역시 엄격히 적용했다.[12] 선박의 복원력과 관련된 규칙도 만들어졌는데, 이 규칙을 바탕으로 국제 해사 기구에서는 국제적인 규칙을 제정한다.
사고 이후 세토 내해는 선원 실습생의 훈련 장소로 바뀌었다. 일본 문부성은 각 학교마다 수영장을 두어 수영 교육을 강화했다.[12][13]
5. 2. 세토 대교 건설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하고 연안 항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분리했다.[12] 짙은 안개가 낄 경우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선(停船) 권고'도 엄격히 적용되었다.[12]이러한 조치와 더불어, 시운마루호 사고와 같은 선박 충돌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세토 대교가 건설되었다. 초여름부터 장마철에 걸쳐 짙은 안개로 인해 잦은 정선 권고가 내려지면서 수송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는 세토 대교 건설의 필요성을 더욱 높였다.[7] 1988년 세토 대교가 개통되면서 시코쿠 지역의 관광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혼슈로의 젊은이 유출, 특히 가가와현에서 오카야마현을 중심으로 인구 유출이 계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7]
5. 3. 수영 교육 강화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 문부성은 각 학교마다 수영장을 설치하고 수영 교육을 강화했다.[12][13] 이 사고를 계기로 아동의 수영 능력 향상을 바라는 여론이 확산되었다.[9]제22회 국회 중의원 및 참의원 문교위원회[9]에서는 하시키타 중학교 수난 사건과 함께 교원의 수영 지도 능력 문제, 수영장 설치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마쓰야마의 향토 자료 연구자인 객야 스미히로는 자신의 칼럼[10]에서, "교훈을 살려 현민 모두 수영, 교사 채용 시험에 수영 실기를…. 현 내의 학교에서는 풀 설치를 서둘렀다."라고 썼다. 객야는 전 에히메 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운마루 사고 당시 취재를 담당했다.
하지만 "일본의 학교에 수영 수업이 널리 퍼졌다"는 주장은 스포츠 진흥법에 의한 시설 정비비 증가와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자치단체의 세수 증가가 주요 요인이라는 의견도 있다.[8] 어린이 3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쇼나이 초등학교 동창생은 "학교에 풀은 없었다", "전원이 수영을 배운다는 상황은 아니었고, 일부에는 수영을 못하는 아이나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학생은, 상급생이 되면서, 강이나 연못에서의 수영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학생의 희생자가 많았던 한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5. 4. 위령 사업
다카마쓰시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했다. 또한 두 선박이 충돌하지 않도록 연안 항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분리했다. 세토대교는 시운마루호 사고 이후 이러한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짙은 안개가 낄 경우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선(停船) 권고' 역시 엄격히 적용했다. 선박의 복원력과 관련된 규칙도 만들어졌는데, 이 규칙을 바탕으로 국제 해사 기구에서는 국제적인 규칙을 제정한다.
사고 이후 세토 내해는 선원 실습생의 훈련 장소로 바뀌었다. 시운마루호 사고 당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점을 두고 일본 문부성은 각 학교마다 수영장을 두어 수영 교육을 강화했다.
5. 5. 사회적 논쟁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이후 일본은 선박 안전 기준을 강화했다. 두 선박이 충돌하지 않도록 연안 항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분리했으며, 짙은 안개가 낄 경우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선(停船) 권고'를 엄격히 적용했다.[12] 선박의 복원력과 관련된 규칙도 만들어졌는데, 이 규칙을 바탕으로 국제 해사 기구에서는 국제적인 규칙을 제정한다.[12]사고 이후 세토 내해는 선원 실습생의 훈련 장소로 바뀌었다. 시운마루호 사고 당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점을 두고 일본 문부성은 각 학교마다 수영장을 두어 수영 교육을 강화했다.[12][13] 세토대교는 시운마루호 사고와 같은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6. 한국의 시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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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ead ferry tragedy victims get graduation certificates after 50 yrs
http://www.japanaddi[...]
2009-12-18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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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日本の重大海難(汽船紫雲丸機船第三宇高丸衝突事件) - 海難審判所ホーム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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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성 해난심판소
2018-09-24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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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第三部 修学旅行そして紫雲丸乗船
http://idetachi.a.la[...]
[6]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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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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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행물
学校プールの共同利用と跡地活用の可能性 ―1学校に1プールを問い直す―
https://www.toyo.ac.[...]
南学(東洋大学投稿論文)
2022-05-2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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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2回国会 参議院 文教委員会 第4号 昭和30年5月14日
https://kokkai.ndl.g[...]
[10]
뉴스
松山・わすれかけの風景
愛媛新聞
1997-08-29
[11]
뉴스
‘수학여행참사’ 일본 시운마루호 침몰 59년
https://news.naver.c[...]
KBS
2014-05-11
[12]
뉴스
"[세월호 100일] 하는 짓 밉지만 ‘안전’은 배워야"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4-07-24
[13]
뉴스
세월호 침몰사고, 비극적 수학여행 참사 日시운마루호 사례 어땠나…
http://tvdaily.asiae[...]
티브이데일리
201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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