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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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계계는 중화권에서 불린 명칭으로, 신광서군벌이라고도 불렸으며, 린후가 이끌던 호국군 제6군에서 시작되었다. 리쭝런, 황샤오훙, 바이충시가 연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쑨원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으로 구계계군벌에서 분리되었다. 신계계는 광서를 통일하고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북벌 참여와 국민정부와의 갈등을 겪었다. 이후 장계전쟁과 중원 대전을 거치며 장제스 정부와 관계를 유지하며 광서를 통치했다. 양광사변과 중일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신계계의 주요 인물들은 미국, 타이완, 중국 본토 등으로 흩어졌고, 잔당의 저항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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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계 | |
|---|---|
| 기본 정보 | |
| 활동 기간 | 1922년 ~ 1953년 (32년간) |
| 국가 | 중화민국 |
| 충성 | 중국국민당 국민정부 |
| 종류 | 육군 |
| 참전 | 북벌 중일 전쟁 국공 내전 |
| 주요 지휘관 |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 황쉬추 리핀셴 |
| 신계계 (新桂系) | |
| 로마자 표기 | Sin Gye-gye |
| 역사 | |
| 기간 | 1922년 ~ 1953년 |
| 이전 | 계계군벌 |
| 이후 | 해체 |
2. 명칭
중화권에서는 '''신계계'''(新桂系)로 불렸으며, 지역 명칭을 따서 '''신광서군벌'''이라고도 불렸다.[1]
린후가 이끌던 호국군 제6군의 통수권자였던 리쭝런은 제2차 월계 전쟁 이후 상관을 따라 광동으로 가는 것을 꺼리고, 1,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광서의 육만대산에 들어가 세를 키웠다. 1922년 5월, 리쭝런은 황샤오훙, 바이충시와 연합하여 '광서자치군 제2로 총사령'을 자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1] 리쭝런의 군은 옥림(위린), 용서(룽셴) 등 7개 현과 시를 장악했으며, 동맹군을 통합한 뒤 그 병력을 3,000여 명까지 늘렸다.[1] 그 후 루룽팅의 조직 개편을 명목상 받아들여 ''''광서 육군 제5독립여''''로 개칭했다.[1] 이 기간 동안 리쭝런은 옥림간부교습소와 사관교도대대를 창설하여 장교, 부사관 및 사병을 훈련시켜 신계계군 전력의 토대를 마련했다.[1] 이윽고 리쭝런 연합군은 6,000여 명 이상의 병력으로 성장했다.[1]
1924년 5월 23일, 리쭝런은 '통일광서선언'을 발표하고 무력으로 광서를 통일하기 시작했다. 리쭝런, 황샤오훙, 바이충시는 '합종연횡' 전략을 채택하여 먼저 루융가오의 군대를 제거하고, 그 후 루룽팅과 션훙잉이 격전을 벌인 틈을 타 션훙잉과 협공하여 그해 가을 루룽팅군을 격파하고 성도 난닝을 점령했다. 1925년 4월, 션훙잉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여 광서를 통일하였다. 이로써 구계계군벌은 막을 내렸다.[1]
1926년 7월, 북벌이 시작되면서 신 광서파의 제7군 주력 부대는 후난과 후베이로 북상했다. 팅쓰차오, 허성차오 전투 이후, 북벌군의 주력인 국민혁명군 제4군 및 제7군은 베이양 군벌의 우페이푸의 주력을 격파하고 우창을 포위했다. 9월, 제7군은 장시성에서 쑨촨팡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장시를 점령했다.
1929년 중원 대전에 참가했으나, 장제스에게 패배했다. 이후 황샤오훙을 장제스에게 보내는 등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며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의 3인 체제를 확립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광서를 통치하며 '삼자(三自)와 삼우(三寓) 정책'을 통해 자경단 제도 개선, 예비군 모집 등 광서의 발전을 추구했다.
1936년, 신광서파는 광저우 국민정부의 천지탕과 함께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적인 행위였다는 주장과, 일본의 군수물자 원조를 받아 병력을 증강하여 장제스에 저항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1] 양광사변은 위한모 등이 장제스에게 매수되면서 실패했고, 신광서파는 장제스가 중화민국의 지도자임을 인정하고 중일 간 군사 충돌 발생 시 장제스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장제스는 신광서파의 광시성 통치를 인정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신계계군벌은 안후이성에서 인민해방군과 전투를 벌였다.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이 '천리약진 대별산' 작전을 감행하자, 국민정부 중앙군, 윈난의 뎬군, 광시의 계군, 광둥의 웨군 등은 해방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해방군은 강력한 중앙군이나 계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취약한 웨군, 뎬군을 공격하여 국민정부의 대별산 지역 진격을 저지했다. 해방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신계계는 안후이성에서 부대를 철수했다.[1]
3. 창설
1923년 6월, 바이충시는 광저우에서 쑨원을 방문하였고, 쑨원의 지원을 받은 황샤오훙은 '광서토적총지휘'라는 자격으로 우저우를 점령했다.[1] 신계계군벌은 정치적으로 구계계군벌에서 공식적으로 분리되어 광서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1] 같은 해 10월, 리쭝런, 황샤오훙, 바이충시는 재편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고, 부대는 '광서정계토적연군'으로 개칭되었다.[1] 1924년 초, 쑨원은 리쭝런을 광서성수정독판으로, 황샤오훙을 수정회판에, 바이충시를 군참모장으로 임명했다.[1]
4. 굴기
신계계군벌과 션훙잉이 결전을 벌이는 동안, 쑨원은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전계군벌의 탕지야오는 월계군벌의 천중밍, 덩벤인, 류젠환 등과 연합하여 광저우 국민당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리쭝런은 탕지야오와의 협력을 거절했고, 탕지야오는 룽윈, 루한, 탕지유 등에게 7만 명의 운남군을 이끌고 구이저우를 거쳐 광서로 진입하게 했다. 1925년 2월부터 7월까지 쿤룬관, 류저우, 샤푸, 난닝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신계계군벌은 운남군을 격파했다. 7월 22일, 운남군 잔당은 운남으로 패주했다. 차이어가 훈련시키고 장비가 잘 갖춰졌던 운남군은 이로 인해 힘을 잃게 되었다.[1]
5. 북벌 참여와 국민정부와의 갈등
1927년 초, 제7군은 강남으로 이동하여 안칭, 강남, 량후 지역을 국민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제7군은 "강철의 7군"으로, 국민혁명군 제4군은 "철의 4군"으로 불렸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를 처형했다. 신 광서파도 대량의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원을 처형하여("청당"이라 칭함) 공산당의 원한을 샀다. 우한의 왕징웨이는 쑨원의 용공 정책을 지속하여 장제스의 국민당 당적 박탈과 모든 직무 제명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난징 국민정부와 우한 국민정부가 대립했지만(닝한 분열), 곧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도 청당을 실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은 끝났다.
8월, 장제스의 양보로 난징 국민정부와 우한 국민정부가 합병하고(닝한 합병), 제7군은 룽탄 전투에서 쑨촨팡의 부대를 격파했다. 쑨촨팡은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고 정치계에서 사라졌다.
9월, 신광서파는 탕성즈와 권력 다툼을 벌여 녕한전쟁이 발발했다. 탕성즈는 패배하고 그의 군대는 계군에 흡수되었다. 신광서파는 광시에서 량후, 광둥성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928년 4월, 리쭝런은 국민정부 제4집단군 총사령관 겸 우한 정치분회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제4집단군은 계군 직계 부대와 전 탕성즈의 량후 부대로 구성되어 약 20만의 병력을 보유했다.
1928년, 국민당은 장제스,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의 공동 지휘 하에 북벌(제2차 북벌)을 감행하여 봉천군벌의 장쭤린을 공격했다. 국민혁명군은 허베이, 허난을 점령했고, 6월 4일, 장쭤린은 관동군에 의해 폭살되었다(장쭤린 폭살 사건). 아들 장쉐량은 이치를 통해 봉천군벌의 국민정부 귀속을 선언하여 형식상 국민정부가 전국 통일을 달성했다. 신광서파의 세력권은 허난, 허베이까지 확대되었다.
1929년, 장제스와 신광서파는 국민정부의 지도권을 놓고 장계전쟁을 벌였다. 허베이의 계군은 탕성지의 영향력으로 와해되었고, 바이충시는 단독으로 도망쳤다. 장제스는 리밍루이를 이용해 위쭤보를 배반하게 하고, 각 방면의 정치 세력과 군벌과 함께 광시를 포위 공격했다.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국외로 도망쳤다.
장제스는 위쭤보, 리밍루이에게 광시성을 통치하도록 했지만, 두 사람은 친공 성향으로 덩샤오핑, 천하오런 등 공산당원을 받아들였다. 장제스는 1929년 10월 두 사람의 부대를 격파했고, 위쭤보는 홍콩으로, 덩샤오핑은 상하이로 도망쳤다. 리밍루이는 바이써와 룽저우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백색 무장 봉기와 룽저우 무장 봉기) 홍7군과 홍8군을 창립했다.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광시로 돌아와 일부를 장악했다. 장제스는 광둥군에게 광시 진격을 명령했지만, 신광서파는 장파쿠이의 군대와 연락하여 광둥으로 진격, 계장공월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장제스가 후한민을 구속하면서 사태는 종식되었다.
1930년, 신광서파는 쭤장유장 근거지로 진격하여 홍7군과 홍8군을 격파했다. 홍8군은 홍7군에 편입되었고, 홍7군은 중앙 혁명 근거지로 향했다. 광시 내 공산당 활동은 침체되었고, 공산당 세력은 일소되었다. 신광서파는 중원대전에 참가했지만, 서북파, 산시파와 함께 장제스에게 격파되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부 파벌을 약화시키고 국민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신광서파는 리, 바이, 황샤오훙 3인의 체제를 확립했다. 황샤오훙은 장제스 밑에서 일했지만, 실질적으로 실각했다. 황쉬추가 황샤오훙의 후계자 지위를 얻어 리, 바이, 황 이후의 체제를 안정시켰다.
6. 중원 대전과 광서 통치
아편 매매를 통해 수입을 증가시키고, 공산당과 야오족을 탄압하기도 했다. 홍군의 대장정 기간 동안, 홍군과 장제스 중앙군 모두에게 자국 영역 진입을 불허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7. 양광사변과 중일 전쟁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신광서파는 부대를 국민혁명군 제11집단군, 제21집단군에 합류시켜 참전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장쑤성 북부까지 후퇴하기도 했다. 리쭝런은 제5전구 사령관을 맡아 회하 유역과 산둥 남부를 담당했다. 쉬저우 전역, 우한 회전 등에 참전했으며, 타이얼좡 회전에서는 리쭝런이 직접 전투에 임하여 중앙군 탕언보 군단을 지휘, 일본군을 측면 공격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신광서파 부대는 안후이 다비 산맥 지역에 주둔하며 유격전을 벌였으나, 리황 전역에서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다. 예샹구이 전역에서는 부대 유지 전략과 광시성에 계군을 충분히 주둔시키지 않아 일본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반격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구이저우와 류저우를 점령했지만,[1] 중국군 주력은 전투를 회피했고, 일본군은 보급선 문제와 물자 부족으로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2]
8. 국공 내전과 멸망
1947년, 리쭝런은 중화민국 부총통이 되었고, 바이충시는 화중 초토사령관에 임명되어 30만 명에 가까운 부대를 지휘했다.[1]
1948년 겨울, 랴오선 전역, 화이하이 전역, 핑진 전역 등 3대 전역 이후, 장제스의 중앙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신계계는 국민당 내 최대 세력이 되었다. 리쭝런은 장제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화민국 총통 대행 신분으로 공산당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미 장강 이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인민해방군은 도강전역을 시작했고, 국민정부의 장강 방어선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반년 후, 장난 지역은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다.[1]
바이충시의 지휘로 후베이, 후난에서 해방군은 계군의 주력을 궤멸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계군은 천밍런이 공산당에 투항했을 때 공격을 받아 5만 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샹난의 칭수핑에서도 해방군 제4야전군을 무리하게 진격시켜 계군의 주력군에 포위 공격을 받아 3천 명의 손실을 입었다.[1]
1949년 10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형보전역을 시작하여 계군 주력 부대인 제7군과 기타 부대 약 5만 명을 패배시켰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계군은 광시로 퇴각했다. 이후 제4야전군은 장거리 추격을 하여, 제2야전군, 제1야전군과 공동으로 레이저우반도, 귀주 등지의 계군을 포위했다. 곧이어 광시성에 진공하여 계군 10여만 부대를 소멸시켰다. [1]
신계계 잔당은 1950년대 중반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그 중 중조배가 궁청에서 일으킨 폭동은 큰 피해를 낳았으나 진압 후 중조배는 처형되었다. 각지의 저항이 진압되면서 광시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인민해방군이 광시성을 점령한 후, 약 5만 명의 계군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미얀마 등으로 탈출하여 대만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편입되었다.[1]
8. 1. 신계계군벌 이후
리쭝런은 1965년 중국 대륙으로 돌아와 1969년 사망했다. 바이충시는 타이완에서 1966년 사망했다. 황샤오훙은 반우파 투쟁으로 박해받아 1966년 자살했으나, 1982년 명예 회복되었다. 황쉬추는 1975년 홍콩에서 사망했다.[1]
참조
[1]
서적
伊藤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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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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