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기다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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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루기다케산은 일본 북알프스에 위치한 산으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한에서 처음 명칭이 언급되었다. 다양한 표기법으로 사용되다 2004년부터 '剱岳'으로 통일되었다. 예로부터 산악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다테야마 신앙과 관련되어 등산이 제한되기도 했다. 1907년 육군 측량대에 의해 최초로 등정되었으며, 그 이전에도 등정 기록과 유물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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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기다케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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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쓰루기다케 |
한자 | 剱岳 |
![]() | |
위치 | 일본 도야마현 가미이치정, 다테야마정 |
산맥 | 히다산맥 |
지리 | |
높이 | 2,999m |
기타 정보 | |
목록 | 주부 산악국립공원 |
2. 지명 유래 및 표기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긴키 지역의 사찰과 다이묘에게 보낸 서한에서 '쓰루기'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서한에는 "선봉이 동쪽으로 다테야마 쓰루기의 산기슭까지 모두 방화하게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7] 예전에는 剱岳(劒嶽) 외에도 劔ヶ嶽, 劔峰, 劔山 등의 명칭도 사용되었다.[7]
「剱」 자에는 다양한 이체자가 존재하며, 「剱」이나 상용 한자체인 「剣」 외에도 劍, 劒, 劔, 釼 등 10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가 있었다.[7][8] 1913년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지형도에서는 「劔」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고,[8] 국토지리원의 지형도에서는 몇 차례의 변경을 거쳐 2003년까지 「剱」의 편과 「劒」의 방을 조합한 글자체가 채택되었다.[8][9]
가미이치정은 1989년에 「剱岳」라는 표기로 통일하기로 결정했으나, 국토지리원이나 언론 기관, 마을 내의 출판물에서도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다.[10] 2003년, 가미이치정은 다시 「剱岳」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고, 다테야마정의 동의를 얻은 후 2004년에 발행된 지형도부터 「剱岳」로 표기가 변경되었다.[9] 일반적으로는 상용 한자표의 글자를 사용해 「剣岳」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 올바른 표기는 「剱岳」이다.
2. 1. 명칭의 기원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긴키 지역의 사찰과 다이묘에게 보낸 서한에서 '쓰루기'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서한에는 "선봉이 동쪽으로 다테야마 쓰루기의 산기슭까지 모두 방화하게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7] 예전에는 剱岳(劒嶽) 외에도 劔ヶ嶽, 劔峰, 劔山 등의 명칭도 사용되었다.[7]「剱」 자에는 다양한 이체자가 존재하며, 「剱」이나 상용 한자체인 「剣」 외에도 劍, 劒, 劔, 釼 등 10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가 있었다.[7][8] 1913년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지형도에서는 「劔」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고,[8] 국토지리원의 지형도에서는 몇 차례의 변경을 거쳐 2003년까지 「剱」의 편과 「劒」의 방을 조합한 글자체가 채택되었다.[8][9]
가미이치정은 1989년에 「剱岳」라는 표기로 통일하기로 결정했으나, 국토지리원이나 언론 기관, 마을 내의 출판물에서도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다.[10] 2003년, 가미이치정은 다시 「剱岳」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고, 다테야마정의 동의를 얻은 후 2004년에 발행된 지형도부터 「剱岳」로 표기가 변경되었다.[9] 일반적으로는 상용 한자표의 글자를 사용해 「剣岳」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 올바른 표기는 「剱岳」이다.
2. 2. 다양한 표기법
쓰루기다케산은 剱岳(劒嶽) 외에도 劔ヶ嶽, 劔峰, 劔山 등의 명칭도 사용되었다.[7] 「剱」 자에는 劍, 劒, 劔, 釼 등 10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가 있었다.[7][8] 1913년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지형도에서는 「劔」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고,[8] 국토지리원의 지형도에서는 몇 차례 변경을 거쳐 2003년까지 「剱」의 편과 「劒」의 방을 조합한 글자체가 채택되었다.[8][9] 가미이치정은 1989년에 「剱岳」라는 표기로 통일하기로 결정했으나, 국토지리원이나 언론 기관 등에서는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다.[10] 2004년부터 다테야마정의 동의를 얻은후 공식적으로 「剱岳」로 표기가 변경되었다.[9]3. 신앙
쓰루기다케는 예로부터 다테야마슈겐이라 불리는 산악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오야마 신사의 제신 중 한 기둥인 아메노타지카라오(타치오텐진쓰루기다케신・혼지 후도묘오)의 신체로서 신앙을 모아왔다.[3] 한편, 다테야마 신앙에서는 "바늘산 지옥"으로 여겨져, 다테야마 연봉의 다른 봉우리에서 참배하는 산으로 간주되었으며, 등산은 허용되지 않았다.
후카다 큐야는 만엽집에 나오는 "다테야마"에 대해, 이것은 현재의 다테야마가 아니라 아마도 지금의 쓰루기다케일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3]
3. 1. 다테야마 신앙과의 관계
쓰루기다케는 예로부터 다테야마슈겐이라 불리는 산악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오야마 신사의 제신 중 한 기둥인 아메노타지카라오(타치오텐진쓰루기다케신・혼지 후도묘오)의 신체로서 신앙을 모아왔다.[3] 다테야마 신앙에서는 '바늘산 지옥'으로 여겨져, 다테야마 연봉의 다른 봉우리에서 참배하는 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일반인의 등산은 허용되지 않았다.[3]후카다 큐야는 만엽집에 나오는 "다테야마"에 대해, 이것은 현재의 다테야마가 아니라 아마도 지금의 쓰루기다케일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3]
3. 2. 후카다 큐야의 견해
후카다 큐야는 만엽집에 나오는 "다테야마"에 대해, 현재의 다테야마가 아니라 지금의 쓰루기다케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3] 쓰루기다케는 다테야마슈겐이라 불리는 산악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오야마 신사 제신 중 하나인 아메노타지카라오(타치오텐진쓰루기다케신, 후도묘오)의 신체로 신앙을 받았다. 다테야마 신앙에서는 "바늘산 지옥"으로 여겨져 등산이 허용되지 않았다.4. 역사
구카이(홍법대사)가 짚신 천 켤레(혹은 삼천 켤레 또는 육천 켤레)를 신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3] 근대 등산의 역사는 짧지만, 오래전부터 이 산 자체가 ‘부동명왕’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수행자들이 오르곤 했다.[11]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등정은, 육군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측량관 시바자키 요시타로가 이끄는 측량대에 의한 것이다. 1907년(메이지 40년) 7월 13일, 측량대의 측량부 이쿠타 노부 등이 나가지로 설계 루트를 통해 본봉(주봉)에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1907년 7월 28일에는 시바자키 일행이 등정했다. 이 등정 날짜는 오랫동안 불명확했으나, 2007년(헤이세이 19년)에 ‘사등참표고정수부(四等覘標高程手簿)’가 발견되면서 시바자키의 등정 날짜가 밝혀졌다.[12] 이때의 안내인은 현지에 거주하던 우지 나가지로였다. 그러나 우지는 신앙상의 이유로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서 기록도 없으며, 닛타 지로가 ‘쓰루기다케 점의 기록(劒岳 点の記)’을 집필할 때의 자료 등에 전해진 기록이 있을 뿐이다.[13]
시바자키 측량대 이전에도 몇 가지 등산 기록이나 전설, 구전이 존재했다.[13] 이쿠타 일행이 최초로 정상에 올랐을 때, 녹슨 철검과 동제 삿갓머리가 발견되었다.[14][15] 당시 감정에서는 이 유물이 나라 시대 후반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에 걸쳐 등정했던 수행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는 오래된 모닥불 흔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다테야마 수행의 귀중한 증거로서 시바자키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1959년에 삿갓머리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6] 시바자키 사후, 유족에 의해 기증되어 다테야마정 아시쿠라지의 다테야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바자키 일행은 등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무거운 삼각점 표석이나 특히 부피가 큰 망루를 세우기 위한 통나무를 운반할 수 없었고, 산 정상에는 섰으나 삼등 삼각점을 설치하는 것은 단념하고, 정상에는 표석이 없는 사등 삼각점을 놓았다. 또한 삼각점의 설치 장소를 기재하는 ‘점의 기록(点の記)’ 작성은 삼등 이상이라는 규정이 있어, 쓰루기다케의 점의 기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4. 1. 초기 등정 기록
구카이(홍법대사)가 짚신 천 켤레(혹은 삼천 켤레 또는 육천 켤레)를 신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3] 근대 등산의 역사는 짧지만, 오래전부터 이 산 자체가 ‘부동명왕(不動明王)’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수행자들이 오르곤 했다.[11]육군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측량관 시바자키 요시타로가 이끄는 측량대에 의한 등정이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1907년(메이지 40년) 7월 13일, 측량대의 측량부 이쿠타 노부 등이 나가지로 설계 루트를 통해 본봉(주봉)에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시바자키 일행이 등정했는데, 이 등정 날짜는 오랫동안 불명확했으나, 2007년(헤이세이 19년)에 ‘사등참표고정수부(四等覘標高程手簿)’가 발견되면서 밝혀졌다.[12] 이때 안내인은 현지에 거주하던 우지 나가지로였으나, 신앙상의 이유로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닛타 지로가 ‘쓰루기다케 점의 기록(劒岳 点の記)’을 집필할 때의 자료 등에 전해진 기록이 있을 뿐, 어떠한 문서 기록도 없다.[13]
시바자키 측량대 이전에도 몇 가지 등산 기록이나 전설, 구전이 존재했다.[13] 이쿠타 일행이 최초로 정상에 올랐을 때, 녹슨 철검과 동제 삿갓머리가 발견되었다.[14][15] 당시 감정에서는 이 유물이 나라 시대 후반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에 걸쳐 등정했던 수행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는 오래된 모닥불 흔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다테야마 수행의 귀중한 증거로서 시바자키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1959년에 삿갓머리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6] 시바자키 사후, 유족에 의해 기증되어 다테야마정 아시쿠라지의 다테야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바자키 일행은 등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무거운 삼각점 표석이나 망루를 세우기 위한 통나무를 운반할 수 없었고, 산 정상에는 섰으나 삼등 삼각점을 설치하는 것은 단념하고, 정상에는 표석이 없는 사등 삼각점을 놓았다. 또한 삼각점의 설치 장소를 기재하는 ‘점의 기록(点の記)’ 작성은 삼등 이상이라는 규정이 있어, 쓰루기다케의 점의 기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4. 2. 근대 측량과 등산
구카이(홍법대사)가 짚신 천 켤레(혹은 삼천 켤레 또는 육천 켤레)를 신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라는 전설이 있다.[3] 근대 등산의 역사는 짧지만, 오래전부터 이 산 자체가 ‘부동명왕’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수행자들이 오르곤 했다.[11]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등정은, 육군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측량관 시바자키 요시타로가 이끄는 측량대에 의한 것이다. 1907년(메이지 40년) 7월 13일, 측량대의 측량부 이쿠타 노부 등이 나가지로 설계 루트를 통해 본봉(주봉)에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1907년 7월 28일에는 시바자키 일행이 등정했다. 이 등정 날짜는 오랫동안 불명확했으나, 2007년(헤이세이 19년)에 ‘사등참표고정수부(四等覘標高程手簿)’가 발견되면서 시바자키의 등정 날짜가 밝혀졌다.[12] 이때의 안내인은 현지에 거주하던 우지 나가지로였으나, 신앙상의 이유로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서 기록도 없으며, 닛타 지로가 ‘쓰루기다케 점의 기록(劒岳 点の記)’을 집필할 때의 자료 등에 전해진 기록이 있을 뿐이다.[13]
시바자키 측량대 이전에도 몇 가지 등산 기록이나 전설, 구전이 존재했다.[13] 이쿠타 일행이 최초로 정상에 올랐을 때, 녹슨 철검과 동제 삿갓머리가 발견되었다.[14][15] 당시 감정에서는 이 유물이 나라 시대 후반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에 걸쳐 등정했던 수행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는 오래된 모닥불 흔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다테야마 수행의 귀중한 증거로서 시바자키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1959년에 삿갓머리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6] 시바자키 사후, 유족에 의해 기증되어 다테야마정 아시쿠라지의 다테야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바자키 일행은 등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무거운 삼각점 표석이나 특히 부피가 큰 망루를 세우기 위한 통나무를 운반할 수 없었고, 산 정상에는 섰으나 삼등 삼각점을 설치하는 것은 단념하고, 정상에는 표석이 없는 사등 삼각점을 놓았다. 또한 삼각점의 설치 장소를 기재하는 ‘점의 기록(点の記)’ 작성은 삼등 이상이라는 규정이 있어, 쓰루기다케의 점의 기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4. 3. 이전 등정 기록 및 유물
구카이(홍법대사)가 짚신 천 켤레(혹은 삼천 켤레 또는 육천 켤레)를 신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라는 전설이 있다.[3] 근대 등산의 역사는 짧지만, 오래전부터 이 산 자체가 ‘부동명왕’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수행자들이 오르곤 했다.[11]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등정은, 육군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측량관 시바자키 요시타로가 이끄는 측량대에 의한 것이다. 1907년(메이지 40년) 7월 13일, 측량대의 측량부 이쿠타 노부 등이 나가지로 설계 루트를 통해 본봉(주봉)에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1907년 7월 28일에는 시바자키 일행이 등정했다. 이 등정 날짜는 오랫동안 불명확했으나, 2007년(헤이세이 19년)에 ‘사등참표고정수부(四等覘標高程手簿)’가 발견되면서 시바자키의 등정 날짜가 밝혀졌다.[12] 이때의 안내인은 현지에 거주하던 우지 나가지로였다. 그러나 우지는 신앙상의 이유로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서 기록도 없으며, 닛타 지로가 ‘쓰루기다케 점의 기록(劒岳 点の記)’을 집필할 때의 자료 등에 전해진 기록이 있을 뿐이다.[13]
시바자키 측량대 이전에도 몇 가지 등산 기록이나 전설, 구전이 존재했다.[13] 이쿠타 일행이 최초로 정상에 올랐을 때, 녹슨 철검과 동제 삿갓머리가 발견되었다.[14][15] 당시 감정에서는 이 유물이 나라 시대 후반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에 걸쳐 등정했던 수행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는 오래된 모닥불 흔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다테야마 수행의 귀중한 증거로서 시바자키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1959년에 삿갓머리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6] 시바자키 사후, 유족에 의해 기증되어 다테야마정 아시쿠라지의 다테야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바자키 일행은 등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무거운 삼각점 표석이나 특히 부피가 큰 망루를 세우기 위한 통나무를 운반할 수 없었고, 산 정상에는 섰으나 삼등 삼각점을 설치하는 것은 단념하고, 정상에는 표석이 없는 사등 삼각점을 놓았다. 또한 삼각점의 설치 장소를 기재하는 ‘점의 기록(点の記)’ 작성은 삼등 이상이라는 규정이 있어, 쓰루기다케의 점의 기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4. 4. 삼각점 설치
구카이(홍법대사)가 짚신 천 켤레를 신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3] 1907년(메이지 40년) 7월 28일, 육군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측량관 시바자키 요시타로가 이끄는 측량대가 등정했다.[12] 이때 현지 안내인 우지 나가지로는 신앙상의 이유로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13]시바자키 일행은 등정의 어려움으로 삼등 삼각점 설치를 단념하고 사등 삼각점을 설치했다. 산 정상에는 표석이 없는 사등 삼각점을 놓았으며, 삼각점의 설치 장소를 기재하는 ‘점의 기록(点の記)’은 삼등 이상이라는 규정이 있어 작성되지 않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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剱岳の標高は、2,999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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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主な山岳標高(富山県の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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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土地理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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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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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日本百名山登山ガイド〈上〉
山と溪谷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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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山連峰:日本初の「氷河」、学会が認定
http://mainichi.jp/s[...]
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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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国内7カ所目の氷河確認 北アルプス、唐松沢雪渓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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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山カルデラ砂防博物館研究紀要 第13号 2011・2012年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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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山県立山カルデラ砂防博物館
[8]
웹인용
「剱岳」と「劔岳」と「剣岳」,どちらが正しい?
https://www.ninomiya[...]
二宮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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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剱岳」等の表記を修正
http://www.gsi.go.jp[...]
2024-11-04
[10]
웹인용
「剣岳」の表記まちまち、上市町長「剱」に統一を要請
http://www.c-crews.c[...]
2024-11-04
[1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山名辞典 修訂版
三省堂
[12]
서적
剣岳に三角点を!
桂書房
[13]
서적
山案内人 宇治長次郎
桂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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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銅錫杖頭附鉄剣(剱岳発見) - とやま学遊ネット
https://www.tkc.pref[...]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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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銅錫杖頭附鉄剣(剣岳発見) | 文化遺産検索 | とやまの文化遺産
https://toyama-bunka[...]
2022-07-09
[16]
문서
上市町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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