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우악 소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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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우악 소요사건은 1832년과 1835년, 텍사스 아나우악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무력 충돌을 의미한다. 1832년 제1차 소요사건은 멕시코 정부의 이민 제한, 관세 부과, 군사적 통제 강화에 대한 텍사스 정착민들의 불만으로 시작되었다. 윌리엄 B. 트래비스 등의 체포를 계기로, 텍사스인들은 무력 시위를 벌였고, 멕시코 군과의 충돌 끝에 피에드라스 대령의 중재로 텍사스인들의 요구가 일부 수용되었다. 1835년 제2차 소요사건은 텍사스 상인들의 불공정한 세금 부과에 대한 반발로 발생했으며, 트래비스가 이끄는 텍사스 민병대가 멕시코 군을 제압하고 텍사스인들을 석방했다. 이 사건들은 텍사스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텍사스인들의 자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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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우악 소요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아나우악 소요 |
다른 명칭 | 아나우악 불안 |
위치 | 텍사스주 아나우악 |
날짜 | 1832년, 1835년 |
원인 | 멕시코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관세 징수, 윌리엄 B. 트래비스의 체포 |
결과 | 멕시코군의 항복, 텍사스 독립 운동의 촉발 |
교전 세력 | |
교전 1 (1832) | 텍사스 정착민 멕시코 군 |
교전 2 (1835) | 텍사스 정착민 멕시코 군 |
주요 인물 | |
텍사스 정착민 |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 프랭크 W. 존슨 패트릭 잭 |
멕시코 군 | 후안 데 라스 카사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관련 전투 | |
1832년 | 벨라스코 전투 |
1835년 | 곤잘레스 전투 골리아드 전투 콘셉시온 전투 베하 전투 |
2. 배경
멕시코가 멕시코 독립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으로부터의 이민을 합법화했다. 엔프레사리오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을 멕시코령 텍사스에 정착시키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텍사스에 거주하는 미국인 수가 증가하면서, 멕시코 당국은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할 것을 점차 우려하게 되었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에서의 이민이 합법화되면서 텍사스로 이주하는 미국인이 급증했다. 멕시코 당국은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할 것을 우려하여 1830년 4월 6일, 미국으로부터의 이민을 제한하고 관세를 부과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의 집행을 위해 멕시코군 장교 후안 데이비스 브래드번이 갤버스턴만의 아나우악에 새로 설치된 관세 사무소와 주둔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래드번은 1830년 10월, 트리니티 강 하구 30피트 높이 절벽 위에 요새 겸 관세 사무소를 건설했다.
1830년 4월 6일, 멕시코 정부는 미국에서 텍사스로의 이민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엔프레사리오 계약을 취소하고, 관세 징수를 위해 텍사스에 세관을 설치하도록 규정했다.[1] 원래 미국 시민이었던 멕시코 군 장교 후안 데이비스 브래번이 갈베스턴 만의 새로운 세관 및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1830년 10월, 브래번은 트리니티 강 하구의 약 9.14m 높이 절벽 위에 주둔지를 건설했으며, 이곳은 아나우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래번은 임기 초기부터 텍사스 내 미국계 정착민들의 입지 확장을 경계하는 이들에게 미움을 샀다. 그는 아나우악 인근 정착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부여하려는 주 토지 위원의 노력을 반대했다. 1824년 멕시코 헌법은 해안선으로부터 약 41.84km 이내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이 범위 안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 비록 위원이 결국 토지 소유권을 부여했지만, 미국계 정착민들은 멕시코 법을 엄격히 시행하려는 브래번에 대해 분노했다.[4]
1832년 1월, 브래번은 자신의 관할 구역 내 10명의 남성이 텍사스를 멕시코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시점부터 브래번은 미국계 정착민들과 그들의 의도에 대해 점점 더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텍사스 분리 음모의 일부로 여기게 되었다.[5] 1832년 6월, 브래번 휘하의 군인 두 명이 미국계 여성 정착민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정착민들은 브래번에게 가해 군인들을 처벌을 위해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6] 이 사건 이후, 지역 주민들은 표면적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습격으로부터 정착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텍시안 민병대 중대를 조직했다.[7] 멕시코 법은 주민들의 민병대 창설을 금지했으므로, 브래번은 주동자인 패트릭 잭을 체포했다. 그러나 살해 협박을 받은 후 브래번은 잭을 석방해야 했다.[8]
3. 1832년 제1차 소요사건
브래드번은 임기 초기부터 정착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1824년 멕시코 헌법에 따라 해안선으로부터 26마일 이내 정착이 금지되었다는 이유로 아나우악 인근 정착민들의 토지 소유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정착민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1832년 1월에는 텍사스 분리를 원하는 인물 명단을 입수하면서 모든 사건을 미국의 음모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1832년 6월, 브래드번 휘하의 군인 두 명이 정착민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브래드번은 가해자 처벌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정착민들은 인디언 습격 방어를 명분으로 민병 조직을 만들었다. 멕시코 법률상 민병 조직은 불법이었기에 브래드번은 주동자 중 한 명인 패트릭 잭을 체포했으나, 살해 협박에 못 이겨 곧 석방했다.
갈등은 노예제도 문제로 더욱 고조되었다. 노예제를 금지하는 멕시코 법을 엄격히 적용하려 했던 브래드번은 1831년 8월, 루이지애나에서 도망쳐 온 노예 두 명을 보호했다. 노예 소유주가 변호사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를 통해 노예 반환을 요구하자,[38] 브래드번은 1832년 5월, 트래비스가 루이지애나에서 무장 집단이 온다는 거짓 경고 편지를 보냈다고 의심하여 그를 체포했다.[39] 브래드번은 트래비스를 반역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마타모로스로 보내려 했으며, 이는 유죄 판결 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다.[40] 멕시코 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정착민들은 영장이나 명확한 혐의 제시 없이 체포되고 배심원 재판 기회도 없이 군사 재판에 넘겨지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미국의 권리장전과 같은 권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41] 이후 패트릭 잭 역시 브래드번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40] 트래비스와 잭의 체포는 정착민 사회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3. 1. 전개
1831년 8월,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멕시코 법률을 강하게 지지하던 브래드번은 루이지애나에서 도망친 노예 두 명을 보호했다. 노예 소유주가 반환을 요구하며 현지 변호사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에게 의뢰하자,[38] 브래드번은 1832년 5월 트래비스를 체포했다. 이는 트래비스가 루이지애나에서 무장 집단이 온다는 거짓 경고 편지를 보낸 혐의 때문이었다.[39] 브래드번은 트래비스를 반역 혐의로 군사 재판에 넘기기 위해 마타모로스로 보내려 했으며, 이는 유죄 판결 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다.[40] 멕시코 법률에 익숙하지 않았던 정착민들은 영장이나 명확한 혐의 없이 체포되고 배심원 재판도 없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권리장전과 같은 권리가 보장될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41] 패트릭 잭 역시 브래드번을 협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40]
처음에는 관망하던 주민들도 브래드번이 트래비스와 잭, 그리고 이들의 변호인에게 증언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자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잭의 형은 브래조리아에서 아나우악으로 행진할 민병대를 조직했고, 주변 정착지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브래조리아 의원 중 한 명인 존 오스틴은 브라조스 주둔군 사령관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과 상의했고, 우가르테체아는 구금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라고 조언했다.[42]
그러나 브래드번의 부하들은 법률상 민간인에게 피고인을 인도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브래조리아 주민들이 일단 돌아간 후, 멕시코군 측에서 말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멕시코군은 절도 혐의로 지역 주민 두 명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브래조리아 대표단과 분노한 시민들은 다시 아나우악으로 향했고,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캠프를 설치하고 프랭크 W. 존슨을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곧 정찰을 나온 멕시코 기병 19명을 포로로 잡았다.[43][44]
6월 10일, 텍사스 민병대는 아나우악 북쪽의 건물을 점거했다. 브래드번은 이들의 목표가 단순히 포로 석방을 넘어 전면적인 봉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트래비스와 잭을 땅에 묶고 총을 겨누며, 민병대가 공격하면 이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트래비스는 존슨에게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라고 외쳤다.[45] 이어진 협상에서 텍사스 측은 트래비스 등 구금된 민간인과 텍사스 측이 잡은 멕시코군 포로의 교환을 제안했다.[44] 멕시코 측은 포로 교환 외에 텍사스 민병대가 터틀 배이유까지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46] 협상 결과 대부분의 민병대는 터틀 배이유로 철수했지만, 15명에서 30명 정도가 마을에 남았다. 브래드번은 이를 협정 위반으로 간주하고 2시간 내 퇴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 텍사스인들은 이를 단순한 위협으로 여겼으나, 그들이 점거했던 건물에는 멕시코군의 무기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다.[47]
브래드번의 경고 후 아나우악의 여성과 아이들은 마을을 떠났다. 멕시코군은 곧 남아있던 텍사스인들에게 발포했고, 이 교전으로 멕시코 군인 5명과 텍사스인 1명이 사망했다. 이후 텍사스인들은 터틀 배이유에 모여 브래조리아에서 대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6월 13일, 텍사스인들은 《터틀 배이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연방주의자이며, 멕시코의 연방주의파 장군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민간 정부가 아닌 군대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당시 중앙집권 정부를 비판했다.[19] 텍사스인들이 대포를 기다리는 동안, 브래드번은 북쪽으로 약 약 321.87km 떨어진 나코도체스의 피에드라스 대령과 서쪽으로 약 약 482.80km 떨어진 산안토니오의 엘로수아 대령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6월 19일, 피에드라스 대령은 약 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나우악으로 출발했다.[20]
한편, 존 오스틴과 그의 부하들은 대포를 가져오기 위해 브래조리아로 돌아갔다. 6월 20일, 그는 주민들을 모아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결의를 다졌다. 오스틴은 브라조스강 하구의 벨라스코 요새를 지키던 우가르테체아 대령에게 합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6월 26일 요새를 공격했다. 이 전투는 벨라스코 전투로 알려졌으며,[21] 다음 날 아침 우가르테체아는 무기를 남겨두고 마타모로스로 퇴각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22]
피에드라스 대령이 아나우악에서 약 약 48.28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존슨에게 사절을 보내 브래드번에 대한 불만 사항 목록을 전달받았다.[22] 피에드라스는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에 나섰고, 다음과 같은 조건에 합의했다.
6월 28일, 텍사스 측이 이 조건들을 수락했고, 7월 1일 피에드라스의 부대가 아나우악에 입성했다.[23]
3. 2. 벨라스코 전투
존 오스틴 등은 터틀 바이유 결의안 채택 이후 대포를 확보하기 위해 브라조리아로 돌아갔다.[21] 6월 20일, 그는 브라조리아 주민들을 소집하여 멕시코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투표를 실시했다. 오스틴은 브라조스 강 하구의 작은 벨라스코 요새를 지휘하던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에게 연방주의 운동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으나, 우가르테체아는 이를 거절했다.[21]
이에 6월 26일, 오스틴이 이끄는 텍사스 민병대는 우가르테체아가 주둔한 벨라스코 요새를 공격했다. 이 사건은 벨라스코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21] 다음 날 아침인 6월 27일, 멕시코군은 항복했다. 우가르테체아와 그의 부하들은 모든 무기를 남겨두고 마타모로스로 돌아가는 조건에 동의했다.[22] 이 전투의 결과로 텍사스 측은 필요했던 대포를 확보할 수 있었다.
3. 3. 피에드라스 대령의 중재
6월 13일 터틀 배이유에 모인 텍시언들은 〈터틀 배이유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멕시코의 연방주의자이며, 반란을 일으킨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민간 정부가 아닌 군대의 힘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당시 멕시코 중앙 정부를 비판했다.[19] 텍시언들이 브래조리아에서 대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브래드번은 북쪽으로 약 321.87km 떨어진 나코도체스의 호세 데 라스 피에드라스 대령과 서쪽으로 약 약 482.80km 떨어진 샌안토니오의 엘로수아 대령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6월 19일, 피에드라스 대령은 약 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래드번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다.[20]
한편, 존 오스틴과 그의 부하들은 대포를 확보하기 위해 브래조리아로 돌아갔다. 6월 20일, 그는 주민들을 모아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오스틴은 브래조스 강 하구의 작은 벨라스코 요새를 지키던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에게 합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6월 26일, 브래조리아 주민들은 요새를 공격했고, 이는 벨라스코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21] 다음 날 아침, 우가르테체아는 자신과 부하들이 마타모로스로 돌아가는 대신 대포는 남겨두는 조건으로 항복했다.[22]
피에드라스 대령이 아나우악에서 약 48.28km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그는 존슨에게 대표단을 보내 브래드번에 대한 불만 사항을 전달받았다.[22] 피에드라스는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에 나섰고, 다음과 같은 조건에 합의했다.
항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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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에 시의회 (ayuntamiento) 재설립 | |
아나우악에 구금된 민간인들을 민간 당국에 인도 | |
브래드번 대령 해임 및 피에드라스 대령이 후임자 지명 |
6월 28일, 텍시언들이 이 조건들을 수락했고, 7월 1일 피에드라스 대령의 부대가 아나우악에 입성하여 사태를 수습했다.[23]
3. 4. 여파
6월 28일 피에드라스 대령은 정착민 대표 존슨과의 협상을 통해 자유 마을 자치 회의(ayuntamiento|아윤타미엔토es) 재건, 체포된 민간인의 민정 당국 인도, 브래드번 해임 등에 합의했다.[46] 7월 1일 피에드라스 부대는 아나우악에 입성했으나, 브래드번의 후임으로 지명된 펠릭스 마리아 수바런 중령이 지명을 거부하여 피에드라스가 임시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24] 7월 2일 체포되었던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 등 텍시언들은 민정 당국에 인도되었고, 일주일 안에 모두 불기소되어 풀려났다.[23]7월 8일 피에드라스는 나코그도체스로 돌아가면서 코르티나 중위를 후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48] 그러나 피에드라스가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나우악 주둔군 대부분은 연방주의 지지를 선언하며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25] 코르티나는 브래드번에게 지휘권 복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26][27] 브래드번은 암살 위협 속에서 텍사스를 떠나려 했으나 현지 선장들의 거부로 실패했고,[25] 7월 13일 수바런이 중앙정부 지지 장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자 결국 걸어서 루이지애나로 도주했다.[28][49]
한편, 6월 26일 존 오스틴이 이끄는 텍시언 부대는 벨라스코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42] 나코그도체스로 돌아온 피에드라스 역시 8월 1일 연방주의 지지를 거부하다가 텍사스 민병대에게 공격받아 나코도체스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연방주의 지지를 강요당했다.[30][5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특히 벨라스코 전투와 나코도체스 전투에서의 패배 및 군대의 철수로 텍사스 동부에서 멕시코 군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31][52] 역사가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래드번의 과잉 대응이 오히려 텍시언들의 저항 의지를 부추겨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9][50] 소요 중 채택된 터틀 배이유 결의안은 다른 텍사스 정착촌에도 영향을 미쳐 연방주의와 산타 안나 지지 운동을 확산시켰다.[29] 멕시코 군대의 부재는 텍사스 정착민들의 정치적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고,[31][52] 이는 텍사스 전체의 공동 목표를 논의하기 위한 첫 시도인 1832년 회담 개최로 직접 이어졌다.[32][53]
4. 1835년 제2차 소요사건
1차 소요사건 이후 3년이 지난 1835년 6월 말, 아나우악에서는 또다시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멕시코 당국과 텍사스 정착민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이 시기 아나우악 지역에는 많은 수의 앵글로계 미국인 정착민들이 이주해 있었고, 이들의 증가와 불복종적인 태도는 멕시코 당국의 우려를 샀다.[33] 특히, 모든 항구에서 관세가 동일하게 징수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정착민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지역 상인이자 선장이었던 앤드루 브리스코는 이러한 불공정한 관세 징수에 항의하며 의도적으로 새로운 멕시코군 사령관 안토니오 테노리오 대위를 시험하는 행동을 했다. 브리스코는 자신의 배에 평형재만 싣고 마치 무거운 화물을 운반하는 것처럼 꾸몄고, 이를 조사한 테노리오는 격분하여 브리스코와 그의 동료 드윗 클린턴 해리스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멕시코 군인이 발포하여 텍시언 청년 윌리엄 스미스가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체포 사건은 윌리엄 B. 트래비스를 비롯한 일부 급진적인 정착민들의 무력 대응을 촉발했으며, 결국 멕시코 주둔군이 아나우악에서 일시적으로 축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54][55][34][35][36][37] 비록 트래비스의 행동이 모든 정착민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멕시코 중앙 정부와 텍사스 정착민 간의 긴장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1. 전개
1835년 6월 말, 아나우악에서는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두 번째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아나우악 지역에는 많은 수의 앵글로 정착민들이 이주해 있었고, 새로운 멕시코군 사령관인 안토니오 테노리오 대위는 이들의 불복종적인 태도에 불안감을 느껴 상부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반세금 시위와 청원을 벌이며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텍사스 시민"으로 알려진 단체가 이러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33]이 단체의 일원이자 지역 상인이었던 앤드루 브리스코는 모든 항구에서 관세가 균등하게 부과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테노리오 대위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배에 평형재만 싣고 마치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예상대로 테노리오의 부하들이 배를 조사했고, 속임수를 알게 된 테노리오는 격분하여 브리스코와 그의 동료 드윗 클린턴 해리스를 체포했다. 이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멕시코 군인들은 발포하여 텍시언 청년 윌리엄 스미스에게 부상을 입혔다.
브리스코와 해리스의 체포 소식은 급진적인 정서가 퍼져나가던 샌펠리페데오스틴에 전해졌고, 지역 사회의 분노를 샀다. 정치 지도자 피터 밀러는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윌리엄 B. 트래비스에게 텍시안 민병대 중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트래비스는 즉시 민병대를 소집하여 해리스버그에서 오하이오 호라는 선박을 징발하고 대포를 실어 아나우악으로 향했다. 트래비스가 이끄는 25명의 민병대는 아나우악에 도착하여 40여 명의 멕시코 군대를 신속하게 항복시키고 무장을 해제했다. 이후 체포되었던 브리스코와 해리스를 석방하고 멕시코 군대를 아나우악에서 추방했다.[54][55][34][35][36][37]
그러나 트래비스의 이러한 행동은 텍사스 정착민 사회 전체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당시 멕시코시티에 있던 텍사스의 저명한 엠프레사리오인 스티븐 F. 오스틴의 안전을 염려하여, 트래비스는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그해 여름 말, 멕시코 군 당국은 트래비스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정착민들은 이를 거부하며 트래비스를 보호했다.
이후 트래비스는 1836년 알라모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스티븐 F. 오스틴은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 국무장관을 잠시 역임하는 등 텍사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4. 2. 여파
트래비스의 행동은 당시 텍사스 정착민 사회 전체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결국 트래비스는 멕시코시티에 머물고 있던 스티븐 오스틴[55]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오스틴은 당시 스페인과 멕시코 정부로부터 엠프레사리오 자격을 얻어 텍사스 지역에 미국인 정착을 주도하던 핵심 인물이었다.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멕시코 중앙 정부와 텍사스 정착민 사이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해 여름, 멕시코 군 당국은 트래비스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겠다며 그의 신병 인도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55] 그러나 텍사스 정착민들은 멕시코 정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며 트래비스를 보호했다. 이는 멕시코 정부의 통제 강화 시도에 대한 정착민들의 반감과 불신이 깊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이후 트래비스와 오스틴은 텍사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이어갔다. 트래비스는 다음 해인 1836년 알라모 전투에서 멕시코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텍사스 독립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스티븐 오스틴은 텍사스 공화국이 수립된 후 초대 국무장관을 잠시 역임하며 텍사스 발전에 기여했다.
5. 결과 및 영향
1832년 첫 번째 소요 이후, 브래드번의 후임으로 지명된 펠릭스 마리아 수바란 중령은 자리를 거부했다.[24] 결국 피에드라스 대령이 임시로 아나우악 수비대를 지휘했다. 7월 2일, 피에드라스는 브래드번이 체포했던 트래비스 등 죄수들을 민간 당국에 넘겼고, 일주일 안에 그들은 기소 없이 풀려났다.[23] 7월 8일, 피에드라스는 나코도체스로 떠나면서 아나우악 수비대 지휘권을 코르티나 중위에게 넘겼다.
피에드라스가 떠난 지 사흘 후, 아나우악의 멕시코 군대 대부분은 산타 안나를 지지하는 연방주의를 선언했다.[25] 군인들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코르티나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어 브래드번에게 지휘권 복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26] 브래드번은 대신 수바란에게 책임을 맡으라고 권고했다.[27]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브래드번은 텍사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현지 선장들이 그의 항해를 거부하자[25], 7월 13일 수바란이 중앙 정부 지지 장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한 날 밤, 브래드번은 고용된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걸어서 루이지애나로 도피했다. 다른 중앙 정부 지지 장교들도 망명을 요청해야 했다.[28]
역사가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래드번이 과잉 대응하여 지역의 불만 분자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29] 이 사건의 결과로 채택된 터틀 베이유 결의안은 다른 텍사스 지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곳에서 산타 안나 지지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피에드라스가 나코도체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시민들이 텍시안 민병대를 조직하는 것을 발견하고 해산을 명령했지만 거절당했다. 오히려 지역 의회(Ayuntamiento)가 자체 민병대를 조직했다. 8월 1일, 연합 민병대는 피에드라스에게 연방주의 지지를 맹세하라고 요구했고, 그가 거부하자 나코도체스 전투가 발발했다. 며칠 후 텍시언들은 피에드라스와 그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았다.[30] 멕시코 군인들의 항복과 내륙으로의 퇴각으로 동부 텍사스에는 멕시코 군대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이는 텍사스 정착민들의 정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31] 곧이어 텍사스 각지의 대표들이 모여 공동 목표를 논의하는 첫 시도인 1832년 협약이 조직되었다.[32]
1835년 6월 말, 관세 문제로 두 번째 소요가 발생했다. 지역 상인 앤드류 브리스코우가 불균등한 관세 부과에 항의하며 고의로 빈 배를 무거운 짐을 실은 것처럼 위장하여 안토니오 테노리오 대위의 조사를 유도했다. 속임수가 드러나자 테노리오는 브리스코우와 그의 동료 데윗 클린턴 해리스를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텍시언 청년 윌리엄 스미스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샌펠리페데오스틴에 전해져 분노를 일으켰고, 정치 지도자 피터 밀러는 트래비스에게 민병대 조직을 위임했다. 트래비스는 민병대를 이끌고 배를 징발하여 아나우악으로 가서 40여 명의 멕시코 군대를 항복시키고 무장 해제시킨 뒤, 체포된 텍시언들을 석방하고 멕시코 군대를 추방했다.[54][55]
그러나 트래비스의 이러한 군사 행동은 당시 텍사스 정착민 사회 전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특히 멕시코시티에 있던 스티븐 F. 오스틴의 안전을 고려하여 트래비스는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그해 여름, 멕시코 군 당국은 군사 재판을 위해 트래비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정착민들은 이를 거부하며 트래비스를 보호했다.
아나우악 소요 사건은 텍사스 정착민들에게 멕시코 중앙 정부의 통치에 대한 저항 의지를 심어주고, 자치와 독립을 향한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트래비스는 이 사건들을 통해 텍사스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으며, 다음 해 알라모 전투에서 전사하며 텍사스의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오스틴 역시 초기에는 멕시코 정부와의 협상을 통한 안정을 추구했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점차 텍사스 독립 지지 입장으로 기울었고, 이후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 국무장관을 잠시 역임하는 등 텍사스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처럼 아나우악 소요 사건은 텍사스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6. 평가
브래드번의 역할에 대해서는 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가 엇갈린다. 역사학자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래드번이 과잉 대응함으로써, 패트릭 잭이나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와 같이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인물들을 오히려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9][50] 브래드번의 강경한 정책과 대응은 텍사스 정착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소요를 유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사건의 결과로 나온 터틀 베이유 결의안은 다른 텍사스 정착촌에도 영향을 미쳐, 산타 안나를 지지하는 연방주의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나코도체스 전투 이후 동부 텍사스에서 멕시코 군대가 철수하면서, 정착민들은 더욱 활발하게 정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31][5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32년 협약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텍사스 정착민들이 공동의 목표를 논의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중요한 사건이었다.[32][53]
종합적으로 아나우악 소요사건은 멕시코 중앙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한 텍사스 정착민들의 불만을 표출하고 자치 의식을 고취시킨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멕시코 정부에 대한 저항 의지를 강화하고 텍사스인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텍사스 혁명과 텍사스 독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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