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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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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주는 1828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의 영토에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1826년부터 182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이후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출신 군사 지도자 이반 파스케비치가 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예레반 백작' 칭호를 받았다. 아르메니아주는 러시아의 코카서스 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인인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통해 코카서스 지역의 무슬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설치되었다. 1829년에는 발트 독일인 탐험가 프리드리히 파로트가 아라라트 산 등반을 시도했고, 아르메니아 작가 하차투르 아보비안과 함께 성공했다. 아르메니아주의 인구는 아르메니아인과 무슬림으로 구성되었으며, 1832년 조사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다. 1840년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인 중심의 행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인해 아르메니아인들의 불만이 제기되었고, 결국 아르메니아주는 조지아-이메레티아 지방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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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주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르메니아주
러시아어 이름Армянская область (아르먄스카야 오블라스티)
아르메니아어 이름Հայկական մարզ (하이카칸 마르즈)
아제르바이잔어 이름 (아랍 문자)ارمنی ولایتی (에르마니 빌라야티)
아르메니아주의 문장
아르메니아주의 문장
설치1828년
폐지1840년
수도예레반 (Эривань, 에리반)
면적31,672 km²
인구 (1832년)164,500명
역사
설립1828년 3월 21일
폐지1841년
이전예레반 칸국
소속
국가러시아 제국
속령캅카스
후신
후신그루지야-이메레티아 현

2. 역사적 배경

1826년-1828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어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5][6] 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우크라이나 출신 군사 지도자 이반 파스케비치는 "예레반 백작" 칭호를 받았다.[3][5] 이는 러시아 제국의 아르메니아 점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러시아는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통해 이란의 "완전한 복종"을 강요하였고, 이는 가자르 왕조와의 새로운 잠재적 분쟁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8]

1838년 아르메니아주 예레반에서 이란의 왕세자 나세르 알딘 미르자 (후에 )와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만남을 기념하는 거울 케이스의 내부 패널. 중앙 장면은 7살 된 왕자가 차르의 무릎에 앉아 있고 수행원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854년 테헤란에서 모하마드 에스마일 에스파하니가 제작


1829년, 발트 독일인 탐험가이자 도르파트 대학교(타르투)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파로트는 아라라트 산 등반 탐험의 일환으로 아르메니아주를 방문했다. 아르메니아 작가 하차투르 아보비안과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로트는 기록상 최초로 아라라트 산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아후리(현대 예니도안)에 있는 성 하코브 아르메니아 수도원에서 등반을 시작했다.[9]

2. 1.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투르크멘차이 조약

1826년-1828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어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5][6] 이 전쟁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 출신 군사 지도자 이반 파스케비치는 "예레반 백작" 칭호를 받았다.[3][5]

러시아는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통해 이란의 "완전한 복종"을 강요당했으므로, 가자르 왕조와의 새로운 잠재적 분쟁에서 자유로웠다.[8]

1829년, 발트 독일인 탐험가 도르파트 대학교(타르투)의 프리드리히 파로트는 아라라트 산 등반 탐험의 일환으로 주를 방문했다. 아르메니아 작가 하차투르 아보비안과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로트는 기록상 최초로 아라라트 산을 등반했는데, 이는 아후리(현대 예니도안)에 있는 성 하코브 아르메니아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9]

2. 2. 아르메니아주 설치 (1828년)



아르메니아주는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따라 1826-1828년의 러시아-이란 전쟁 이후 가자르 왕조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한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의 영토에 설치되었다.[5][6] 우크라이나 출신 군 지도자 이반 파스케비치는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주가 창설된 해에 "예레반 백작"이 되었다.[3][5]

아르메니아주 창설은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동안 러시아를 지지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상하고자 했던 친아르메니아 성향의 러시아 관리들에 의해 장려되었다.[7] 러시아는 기독교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 통치를 선호하여 코카서스의 다수 무슬림에 대한 러시아 통치를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7]

1828년 제2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과 카자르 왕조 사이에 같은 해 2월 10일에 체결된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카자르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와 의 구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같은 해 3월 21일, 러시아 제국은 그 할양지에 아르메니아주를 창설했다[24][30][31][32]

역사학자 조지 부르누티안에 따르면, 러시아는 "모든 의도와 목적을 위해" "이전 이란의 행정 구조"를 변경하는 것을 자제했다.[8] 이전의 많은 고위 무슬림들이 그들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허용되었고, 심지어 러시아 군 계급을 받아 부지사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란의 "나예브" 직급과 동등했다.[8]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통해 이란이 "완전한 복종"을 강요당했으므로, 러시아는 가자르 왕조와의 새로운 잠재적 분쟁에서 자유로웠다.[8] 따라서,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주는 트빌리시에 본부를 둔 러시아 코카서스 행정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중앙 러시아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8]

1829년, 발트 독일인 탐험가 도르파트 대학교(타르투)의 프리드리히 파로트는 아라라트 산 등반 탐험의 일환으로 주를 방문했다. 아르메니아 작가 하차투르 아보비안과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로트는 기록상 최초로 아라라트 산을 등반했는데, 이는 아후리(현대 예니도안)에 있는 성 하코브 아르메니아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9]

아르메니아주의 중심지는 최대 도시인 예레반으로, 그 인구는 약 1만 3천 명에 달했으며, 그 절반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 그 외의 도시로는 세반 호 남쪽에 있는 나히체반이 있다. 가 위치한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인에게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아르메니아주의 통치 기구는 두 명의 러시아인 군인, 아르메니아인과 무슬림에서 한 명씩의 대표, 그리고 집행·재무·경제·사법을 담당하는 세 명의 고문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무슬림 대표는 터키인, 타타르인 (아제르바이잔인), 페르시아인 및 쿠르드족 중에서 협의하여 선출되었다. 특별 위원은 세금 및 관세 징수를 담당했다.

2. 3. 이란의 행정 구조 유지

아르메니아주에는 소수의 러시아 관리만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란 통치 하에서 봉사했던 이전의 무슬림 행정관과 통역관에게 의존했다.[8] 토지 소유권, 세금 및 사법 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많은 행정 사무소에서 페르시아어 또는 현지 터키 방언이 계속 사용되었다.[8]

2. 4. 러시아의 코카서스 정책 변화

1828년 제2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카자르 왕조 사이에 체결된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따라, 가자르 왕조가 지배하던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5][6]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주가 설치되었으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반 파스케비치는 "예레반 백작" 칭호를 받았다.[3][5]

러시아는 코카서스 지역의 다수 무슬림에 대한 통치를 지지할 세력으로 기독교도인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주목했다.[7] 역사학자 조지 부르누티안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전 이란의 행정 구조를 변경하는 것을 자제했다.[8] 이전의 많은 고위 무슬림들이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허용되었고, 심지어 러시아 군 계급을 받아 부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8] 1829년, 발트 독일인 탐험가 프리드리히 파로트는 아라라트 산 등반 탐험의 일환으로 주를 방문했다. 아르메니아 작가 하차투르 아보비안과 함께 파로트는 기록상 최초로 아라라트 산 등반에 성공했다.[9]

1840년, 러시아 정부는 지역 법률과 관습을 무시하고 러시아인 중심의 행정 체제를 구축하는 법령을 발표했다.[8] 이는 특히 이란에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불만을 샀으며,[10] 이란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주의 무슬림 행정관들의 가혹한 조치에 대한 러시아 관리들의 불만도 있었다.[8] 결국,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주의 지위를 종료하고 조지아-이메레티아 지방에 병합했다.[3][8]

1844년 북 코카서스와 남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8] 코카서스 총독부가 재설립되었고, 1849년에는 예레반 지방이 설치되어 이전 예레반과 나흐치반 칸국의 영토를 포함하게 되었다.[11][12]

2. 5. 프리드리히 파로트의 아라라트 산 등반 (1829년)

1829년, 발트 독일인 탐험가 프리드리히 파로트는 아라라트 산 등반을 시도했다. 이 탐험에는 훗날 아르메니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차투르 아보뱐이 동행했다. 파로트의 탐험은 아라라트 산 등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아르즈룸 여행기''(A Journey to Arzrum)에서 이 탐험을 언급했으며, 아보뱐은 ''아르메니아의 상처''(Wounds of Armenia)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3. 인구 구성 변화

14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인은 동아르메니아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티무르의 정복 전쟁의 결과, 14세기 말까지 이들 영토는 튀르크계 민족의 항구적인 정착지가 되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바뀌었다. 아르메니아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 남은 아르메니아인에게 이것은 직접적인 이민족·이교도에 의한 지배의 시작이었다.[36] 동아르메니아에서의 이란계 왕조에 의한 장기간의 지배 기간(1555년1828년)동안, 현지 아르메니아인은 이란 국내의 무슬림 다수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아르메니아 주에는 무슬림 이주가 장려되었다.[37]

1826-1828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직후, 러시아는 "예레반과 나히체반의 이전 이란 칸국을 새로 형성된 아르메니아주로 통합"했다.[13] 투르크멘차이 조약 제15조는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이란 국민에게 러시아 제국으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 조항은 코카서스에 러시아-오스만 국경에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 방어선"을 구축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과 그들을 지지하는 러시아 내부의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되었다.[19]

투르크멘차이 조약 체결 후 아르메니아인의 러시아 이주. 블라디미르 모쉬코프 그림


동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제국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 영토 내 아르메니아인의 귀환 또는 이주를 장려했다.[38] 1804년 이후, 또는 17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란 영토 내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의 포로는 귀환이 허가되었다.[38] 1832년까지 약 4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르메니아주에 정착했다.[39] 아르메니아 주의 설치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였다.[33]

1832년 러시아의 조사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주의 총 인구는 164,450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이 82,377명(50.09%), 무슬림이 82,073명(49.91%)이었다.[19]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 체결 이후 1831년까지 35,56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카자르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주에서, 러시아-튀르크 전쟁 (1828-1829)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바야지트와 카르스에서 21,666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르메니아주로 이주했다.[19]

1833년 러시아 제국의 코카서스 지도


아르메니아주 무슬림의 대다수는 시아파였다.[22] 러시아인들이 "타타르족"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튀르크어 사용 자캅카스 무슬림(시아파 및 수니파)을 지칭했다.[22]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 1918년 이후, 특히 소련 시대에 스스로를 "아제르바이잔인"으로 규정했다.[22]

3. 1. 아르메니아주 설치 이전의 인구 구성

1826-1828년 러시아-이란 전쟁 직후, 러시아는 예레반 칸국과 나흐치반 칸국을 통합하여 아르메니아주를 설치했다.[13] 1829년부터 1832년까지 실시된 이반 쇼팽의 러시아 조사에 따르면, 이란 통치 말기 예레반 칸국의 무슬림 인구는 49,875명(71.5%), 아르메니아 원주민은 20,073명(28.5%)이었다.[13][15] 나흐치반 칸국의 무슬림 인구는 24,385명(83%), 아르메니아인은 5,078명(17%)이었다.[13] 러시아 정복 직전, 러시아령 아르메니아 오블라스트(예레반과 나흐치반 칸국)의 총 인구는 99,411명이었으며, 이 중 무슬림이 74,260명(75%), 아르메니아인이 25,151명(25%)이었다.[16]

아르메니아 민족은 예레반 칸국의 키르크-불라그, 사르다라바드, 카르비-바사르와 나흐치반 칸국의 아굴리스/아쿨리스에서만 다수를 차지했다.[18] 14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인은 동아르메니아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티무르의 정복 이후 튀르크계 민족의 정착으로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36] 이란계 왕조는 아르메니아 주에 무슬림 이주를 장려했다.[37]

3. 2. 아르메니아인 이주와 정착

1826-1828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직후, 러시아는 "예레반과 나히체반의 이전 이란 칸국을 새로 형성된 아르메니아주로 통합"했다.[13] 투르크멘차이 조약 제15조는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이란 국민에게 러시아 제국으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19] 이 조항은 코카서스에 러시아-오스만 국경에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 방어선"을 구축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과 그들을 지지하는 러시아 내부의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되었다.[19] 이주민들은 재산을 이송하거나 판매할 자유를 얻었으며, 부동산을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5년의 기간이 주어졌다.[19]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마을에 아르메니아어로 공고문을 배포하고, 아르메니아 출신 코사크를 포함한 러시아 군인들을 통해 이란을 떠나도록 설득했다.[19]

이반 쇼팽이 1829년부터 1832년까지 실시한 러시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정복 직전 러시아가 관할하게 될 아르메니아 오블라스트(예레반과 나히체반 칸국)의 총 인구는 99,411명이었으며, 이 중 74,260명(75%)이 무슬림이었고 25,151명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25%).[16] 아르메니아 민족은 예레반 칸국의 15개 ''마할'' 중 3개(키르크-불라그, 사르다라바드, 카르비-바사르)와 나히체반 칸국의 10개 ''마할'' 중 1개(아굴리스/아쿨리스)에서만 다수를 차지했다.[18]

동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제국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 영토 내 아르메니아인의 귀환 또는 이주를 장려했다.[38] 1804년 이후, 또는 17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란 영토 내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의 포로는 귀환이 허가되었다.[38] 18세기 초부터 러시아, 조지아, 카라바흐의 "소수의" 아르메니아 유력자들이 동족을 무슬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러시아의 보호 아래 두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얻으려 노력해 왔으며,[19] 조지아와 카라바흐에서 온 아르메니아 자원병들도 러시아-이란 전쟁 동안 러시아군에 합류했다.[19] 1832년까지 약 4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르메니아주에 정착했다.[39] 아르메니아 주의 설치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였다.[33] 14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인은 동아르메니아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티무르의 정복 전쟁의 결과, 14세기 말까지 이들 영토는 튀르크계 민족의 항구적인 정착지가 되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바뀌었다.[36]

3. 3. 1832년 인구 조사 결과

1832년 러시아의 조사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주의 총 인구는 164,450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이 82,377명(50.09%), 무슬림이 82,073명(49.91%)이었다.[19] 이로써 아르메니아인들은 사파비 왕조아바스 1세(1588년~1629년)에 의한 강제 이주 이후 2세기 만에 역사적 고향의 일부에서 무슬림과 거의 동등한 수를 이루게 되었다.[19] 14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인은 동아르메니아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티무르의 정복 전쟁의 결과, 14세기 말까지 이들 영토는 튀르크계 민족의 항구적인 정착지가 되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36]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 체결 이후 1831년까지 35,56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카자르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주에서, 러시아-튀르크 전쟁 (1828-1829)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바야지트와 카르스에서 21,666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르메니아주로 이주했다.[19] 다른 자료에 따르면, 4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란에서, 9만 명이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하여 주로 아르메니아주에 정착했다고 한다.[20] 1804년 이후, 또는 17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란 영토 내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의 포로는 귀환을 허가받았다.[38] 1832년까지 약 4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주 내에서 정착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39]

러시아-이란 전쟁 (1826-1828) 동안 영토를 떠났던 7,813명의 타타르족과 쿠르드족 유목민도 1832년까지 목초지로 돌아왔다.[19] 아르메니아주 무슬림의 대다수는 시아파였으며,[22] 러시아인들이 사용한 "타타르족"이라는 용어는 튀르크어 사용의 자캅카스 무슬림(시아파 및 수니파)을 지칭했다.[22] 1918년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 후, 특히 소련 시대에 타타르족은 스스로를 "아제르바이잔인"으로 규정했다.[22]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통치하에서의 삶에 불만을 품고 나중에 고국을 떠나 이란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타브리즈에서 왕세자 아바스 미르자와 그의 후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21]

3. 4. 무슬림 인구 구성

아르메니아주 무슬림의 대다수는 시아파였다.[22] 러시아인들이 "타타르족"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튀르크어 사용 자캅카스 무슬림(시아파 및 수니파)을 지칭했다.[22]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 1918년 이후, 특히 소련 시대에 스스로를 "아제르바이잔인"으로 규정했다.[22] 1918년 이전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단어는 이란의 아제르바이잔 지역만을 지칭했다.[23] 타타르족은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과 달리 고유 문자가 없었고 페르시아-아랍 문자를 사용했다.[22]

14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인은 동아르메니아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나,[36] 티무르의 정복 전쟁 이후 14세기 말에는 튀르크계 민족이 정착하면서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36] 동아르메니아에서의 이란계 왕조에 의한 장기간의 지배 기간(1555년1828년)동안, 현지 아르메니아인은 이란 국내의 무슬림 다수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아르메니아 주에는 무슬림 이주가 장려되었다.[37]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이란과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아르메니아 주 귀환 및 이주를 장려했고, 1804년 또는 1795년부터 이란 내 아르메니아인 포로의 귀환도 허가했다.[38] 그 결과, 아르메니아 주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증가했다. 1831년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1828-1829)의 결과로 바야지트와 카르스의 파샬리크에서 21,666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추가로 이주했다.[19] 1832년에는 약 4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주 내에 정착했다.[39] 다른 자료에 따르면, 4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란에서, 9만 명이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하여 주로 아르메니아주에 정착했다고 한다.[20]

4. 통치 구조

아르메니아주에는 소수의 러시아 관리만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란 통치하에서 봉사했던 이전의 무슬림 행정관과 통역관에게 의존했다.[8] 토지 소유권, 세금 및 사법 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많은 행정 사무소에서 페르시아어 또는 현지 터키 방언이 계속 사용되었다.[8]

4. 1. 통치 기구

아르메니아주에는 소수의 러시아 관리만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란 통치하에서 봉사했던 이전의 무슬림 행정관과 통역관에게 의존했다.[8] 토지 소유권, 세금 및 사법 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많은 행정 사무소에서 페르시아어/페르시아어fa 또는 현지 터키 방언이 계속 사용되었다.[8]

5. 문화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주, 더 나아가 동아르메니아의 최대 도시였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인에게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아르즈룸 여행기"는 1835년에서 1836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하차투르 아보뱐의 "아르메니아의 상처"는 1841년에 쓰여졌다.

5. 1. 중심 도시와 종교 중심지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주, 더 나아가 동아르메니아의 최대 도시였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인에게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5. 2. 문학 작품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아르즈룸 여행기"는 1835년에서 1836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하차투르 아보뱐의 "아르메니아의 상처"는 1841년에 쓰여졌다.

참조

[1] 서적 Atlas of the Ethno-Political History of the Caucasus Yal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Armenians: From Kings and Priests to Merchants and Commissars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Khanate of Erevan Under Qajar Rule, 1795-1828 Mazda Publishers 1992
[4] 문서 Tsutsiev, p. 16.
[5] 서적 The Ghost of Freedom: A History of the Caucasu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Russia and Iran, 1780–1828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7]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8]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9] 서적 Journey to Ararat Gomidas Institute 2016
[10]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1] 문서 Tsutsiev,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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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4]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5] 문서 Bournoutian, p. 48.
[16]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7]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8]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19]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20] 서적 The Caspian Region, Volume 2: The Caucasus Routledge 2004-06-25
[21]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22]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23] 서적 Armenia and Imperial Decline: The Yerevan Province, 1900-1914 Routledge 2018
[24] 문서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законов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собрание 2-е, т. XV, ст. 13368
[25] 서적 Atlas of the Ethno-Political History of the Caucasus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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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The Khanate of Erevan Under Qajar Rule, 1795-1828 Mazda Publishers 1992
[28] 문서 О. П. Маркова. Россия, Закавказье и международные отношения в XVIII веке. - Наука,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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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Акты Кавказской Археографической Комиссии. т. VII, док. №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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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Russia and Iran, 1780–1828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33] 서적 Armenia on the Road to Independence, 1918
[34] 서적 Journey to Ararat :en:Gomidas Institute 2016
[35] url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законов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собрание 2-е, т. XV, ბრძ. 13.368, გვ. 237 http://www.nlr.ru/e-[...]
[36] 간행물 The Population of Persian Armenia Prior to and Immediately Following its Annexation to the Russian Empire: 1826-1832 Conference on "NATIONALISM AND SOCIAL CHANGE IN TRANSCAUCASIN" 1980
[37] 서적 История Востока. В 6 томах. Том 3. Восток на рубеже средневековья и нового времени. XVI-XVIII вв. Глава 5. Государство Сефевидов в XVI — начале XVIII в.: Исмаил так и не преуспел в своих попытках ослабить власть кызыл-башских эмиров, которые безраздельно господствовали в Сефевидском государстве. По сути дела, весь Иран и прочие страны, непосредственно подчиненные кызылбашам, были разделены между главами тех или иных «племен» на владения улька. Кроме того, обширные территории передавались в пользование воинам, членам* этих «племен». С таких территорий старое население, как правило, изгонялось. Так происходило в Армении и некоторых других областях.
[3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39] 문서 Bournoutian,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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