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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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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1세는 1571년 사파비 왕조의 샤로 즉위하여 1629년 사망한 이란의 군주이다. 그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키질바시 세력을 억누르고, 굴람 제도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겨 도시를 발전시켰다. 또한, 유럽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무역을 증진하고 예술을 장려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지만, 그의 사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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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1세
기본 정보
샤 عباس 1세, 16세기 또는 17세기 초상화
샤 عباس 1세, 16세기 또는 17세기 초상화
칭호샤한샤-이 이란 (이란의 왕중왕)
젤롤라 (신의 그림자)
사헤브-이 케란-이 알라 (길조의 결합의 지고한 군주)
전체 이름아바스 1세 대왕
로마자 표기'Abbās-e Bozorg
통치
이란의 샤
재위 기간1587년 10월 1일 – 1629년 1월 19일
대관식1588년
이전 통치자모함마드 호다반다
다음 통치자사피
생애
출생1571년 1월 27일
출생지헤라트, 사파비 제국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사망1629년 1월 19일 (57세)
사망지베흐샤르, 마잔다란, 사파비 제국
매장지샤 아바스 1세 영묘, 카샨, 이란
가족
배우자오글란 파샤 하눔
야한 베굼
파크르 자한 베굼
마르타 공주
파티마 술탄 베굼
타마르 아밀라호리
자녀하위 참조
왕가사파비 왕조
아버지모함마드 호다반다
어머니카이르 알-니사 베굼
종교
종교시아 이슬람교

2. 생애

1571년 1월 27일 헤라트에서 모하마드 호다반다와 카이르 알-니사 베굼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바스의 아버지는 사파비 왕조의 2대 샤인 타흐마스프 1세의 장남이었고, 어머니는 마잔다란주의 지방 통치자 가문 출신이었다.

18개월 때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져 시라즈로 보내졌고, 헤라트의 명목상 지사로 임명되었다. 아바스는 키질바시 수호자로부터 군사 기술을 배웠고,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출신 노예들과 함께 교육받았다.

1576년 타흐마스프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여 왕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하이다르 미르자 사파비가 즉위했으나 곧 살해되었고, 이스마일 2세가 즉위했다. 이스마일 2세는 숙청을 단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바스의 수호자도 살해되었다.

1577년 이스마일 2세가 사망하고, 알리-콜리 칸 샴루가 헤라트의 지사가 되어 아바스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1578년 모하마드 호다반다가 샤로 즉위했으나, 무능력하여 권력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아바스의 어머니 카이르 알-니사 베굼이 실권을 잡았으나, 1579년 키질바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아바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키질바시의 권력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바그다드를 공격하고, 영국과 협력하여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탈환했다. 외국인을 우대하여 유럽 여러 나라와 친선을 꾀하고, 국내 정치 개혁과 상업 장려에 힘써 이슬람 교국의 부흥에 힘썼다.

즉위 후, 투르크계 키질바시 군단을 억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영국인 셜리 형제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포병대를 편성하고, 우즈베크족을 격파하여 헤라트와 메셋을 합병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바그다드 등을 회복하고, 1620년에는 호르무즈에서 포르투갈인을 몰아냈다.

수도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여 이란의 경제 발전에 힘썼다. 이스파한은 그의 치세 아래 크게 발전했다. 봉건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상비군을 설치하여 군대를 재편했으며,[137] 러시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에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아바스 대제가 죽으면서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138]

2. 1. 초기 생애

1572년, 겨우 1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타흐마스프 1세에게서 이란 북동부 호라산 총독에 임명되었다.[6] 이는 아버지가 호라산의 군사 귀족 (퀴질바시)과 충돌하여 파르스로 전속된 아버지의 후임으로서의 인사 이동이었다. 어린 아바스를 대신하여 퀴질바시가 모든 것을 처리했고, 아바스는 호라산에서 퀴질바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1576년에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후계자 다툼이 시작되었고, 즉위한 숙부 이스마일 2세가 다음 해 1577년에 급사하자 아버지가 샤가 되었지만, 맹인이어서 정치를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실권을 잡고 퀴질바시와 대립하며 정치를 행했지만, 아바스는 그들과 무관하게 호라산에 머물렀다.[7]

그러나 이 무렵, 왕조는 대제 쉴레이만 1세 치하에서 최성기를 맞이한 오스만 제국의 침공 (Ottoman–Safavid War (1532–55)|오스만-사파비 전쟁 (1532년-1555년)|제1차 오스만-사파비 전쟁영어)으로 아제르바이잔이나 이라크를 잃고 쇠퇴하고 있었다. 제1차 오스만-사파비 전쟁은 이미 할아버지 대에 화의가 성립되었지만, 사파비 왕조가 혼란 상태에 있는 것을 호기로 본 오스만 제국이 이란을 침공 (Ottoman–Safavid War (1578–1590)|오스만-사파비 전쟁 (1578년-1590년)|제2차 오스만-사파비 전쟁영어), 어머니가 퀴질바시에게 암살당하는 등 사파비 왕조는 위기를 맞았다.

2. 2. 즉위와 권력 장악

عباس یکمfa는 1588년 호라산의 키질바시에 의해 옹립되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17세에 즉위했다.[10] 아바스 1세는 사파비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우선 내정 개혁을 실시했다. 왕조 창건 이래 권력을 휘두르던 키질바시를 탄압하여 정치에서 멀리하고, 대신 노예 신분의 뛰어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지방 장관에도 가문이 아닌 능력이 중시되어 노예 계급 출신이 다수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바스가 즉위할 당시, 사파비 왕조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서부와 북서부의 광대한 영토(주요 도시인 타브리즈 포함)를 점령했고, 우즈베크족은 북동부의 호라산 절반을 유린하고 있었다.[137] 이란 내부에서는 키질바시의 여러 파벌들이 다툼을 벌여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138]

이러한 상황에서 아바스는 먼저 어머니를 살해한 자들을 처단하고,[11]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던 무르시드 쿨리 칸을 제거했다.[14][15] 이후, 아바스는 1590년 오스만 제국과 이스탄불 조약을 체결하여 아제르바이잔, 카라바흐, 간자, 다게스탄 및 카라자다흐는 물론 조지아, 루리스탄, 쿠르디스탄의 일부 지역을 양도하는 굴욕적인 평화를 맺었다.[16][17][18] 이를 통해 내부의 질서를 재건하고 외적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1572년, 겨우 1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타흐마스프 1세에게서 이란 북동부 호라산 총독에 임명되었다. 어린 아바스를 대신하여 키질바시가 모든 것을 처리했고, 아바스는 호라산에서 키질바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1576년에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후계자 다툼이 시작되었고, 즉위한 숙부 이스마일 2세가 다음 해 1577년에 급사하자 아버지가 샤가 되었지만, 맹인이어서 정치를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실권을 잡고 키질바시와 대립하며 정치를 행했지만, 아바스는 그들과 무관하게 호라산에 머물렀다.

1581년 호라산에서 샤로 선포된 아바스 1세.


카즈빈에서 샤 아바스 1세의 즉위.


젊은 시절의 샤 아바스 초상화.

3. 개혁

아바스 1세는 사파비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왕조 초기부터 권력을 쥐고 있던 키질바시 세력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고, 영국인 셜리 형제(앤서니 셜리, 로버트 셜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포병대를 편성하는 등 군사 개혁에도 힘썼다.[43] 특히, 굴람 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키질바시의 군사적 독점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강화했다.

1598년에는 수도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는 등 경제 발전에도 힘썼다.[137]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바그다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회복하고, 1620년에는 호르무즈에서 포르투갈인을 몰아내는 등 군사적 성과도 거두었다.[137] 또한, 영국과 협력하여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탈환하고, 유럽 국가들과 친선을 꾀하는 등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다.

3. 1. 중앙 집권화와 굴람 제도

도미니쿠스 쿠스토스의 구리 조각 ''페르시아의 샤 아바스'' (''Atrium heroicum Caesarum''에서 발췌, 1600–1602년 출판)


1572년, 아바스 1세는 겨우 1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타흐마스프 1세에게서 이란 북동부 호라산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는 아버지가 호라산의 군사 귀족 (퀴질바시)과 충돌하여 파르스로 전속된 후임으로서의 인사 이동이었다. 어린 아바스를 대신하여 퀴질바시가 모든 것을 처리했고, 아바스는 호라산에서 퀴질바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1576년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후계자 다툼이 시작되었고, 이스마일 2세1577년 급사하자 아바스의 아버지가 샤가 되었다. 하지만 맹인이어서 정치를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실권을 잡고 퀴질바시와 대립했으나, 아바스는 그들과 무관하게 호라산에 머물렀다.

1588년, 아바스 1세는 호라산의 퀴질바시에 의해 옹립되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17세에 즉위했다. 아바스 1세는 사파비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우선 내정 개혁을 실시했다. 왕조 창건 이래 권력을 휘두르던 퀴질바시를 탄압하여 정치에서 멀리하고, 대신 노예 신분의 뛰어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지방 장관에도 가문이 아닌 능력이 중시되어 노예 계급 출신이 다수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즉위 후, 아바스 1세는 국내에서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계 키질바시족의 군단을 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에 힘썼다. 또한 영국인 셜리 형제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포병대를 편성했다.[43]

앤서니 밴 다이크가 그린 로버트 셜리와 앤서니 셜리 (1622년 그림).


키질바시사파비 왕조 초기부터 사파비 군대의 중추를 담당했으며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그 결과 왕조 초기의 실질적인 권력은 키질바시가 쥐고 있었고, 샤는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아바스는 키질바시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샤 타흐마스프 1세가 도입한 이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인 ''굴람''(문자 그대로 "노예")에게 의지했다. 샤는 이 노예들로 최대 37,000명의 군인을 구성했으며, 이 군대는 전적으로 국고에서 지원되었다. 이는 키질바시가 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권력을 크게 약화시켰다.[19] 이웃한 오스만 제국예니체리와 마찬가지로, ''굴람''은 주로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이었으며, 이들은 대규모로 이란에 유입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샤에게만 충성을 바쳤다.[20][21] 아바스 치하에서 이란 사회의 새로운 집단(이른바 ''제3 세력'')[22]은 영향력과 권력이 커졌고, 수천 명의 민족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이란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정부, 왕실, 군대의 핵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바가르샤파트 에치미아진 대성당에 있는 아바스 1세의 초상화.


아바스는 어린 시절 경쟁하는 키질바시 세력에게 이용당한 경험을 통해[21] 키질바시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지 않으면 꼭두각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3 세력''이라는 새로운 집단의 영향력과 권력 성장을 장려했다. 아바스 치세 동안에만 약 13만 명에서 20만 명의 조지아인,[27][28] 수만 명의 체르케스인, 약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29][30] 코카서스에서 페르시아 중심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상당수가 이란 사회에서 역할과 책임을 맡았으며, ''굴람'' 군단을 포함하여 국가의 가장 높은 지위도 차지했다. 이들은 이란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여 장인, 농부, 가축 사육자, 상인, 군인, 장군, 지사 및 소작농이 되었다.[31] 굴람 노예 제도의 일환으로 아바스는 굴람 군사 군단(''ḡolāmān-e ḵāṣṣa-ye-e šarifa'', "왕실 종"이라고도 함)을 타흐마스프 시대의 수백 명에서 15,000명의 고도로 훈련된 기병[32]으로 크게 확장했으며, 이는 4만 명의 코카서스 굴람으로 구성된 군사 부대의 일부였다. 아바스는 키질바시 지방 총독의 수를 줄이고 체계적으로 이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 지역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권력을 약화시켰다. 대부분은 샤에게 충성하는 굴람으로 대체되었다.

1595년 조지아인 출신 알라베르디 칸은 파르스의 총독으로 임명되며 사파비 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고,[33] 1598년에는 모든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면서 권력이 절정에 달했다.[34] 굴람 제도는 샤가 경쟁 관계인 키질바시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예산 문제도 해결했다.[21] 키질바시 지도자들이 통치하던 지방에 대한 샤의 완전한 통제를 회복함으로써 지방 수입은 왕실 금고를 보충했고, 정부 관리들이 세금을 징수하여 왕실 금고에 직접 송금했다. 하렘에서는 체르케스인과 조지아인이 투르크만 세력을 빠르게 대체했고, 그 결과 실력주의 사파비 관료제와 사파비 왕조 궁정에 상당한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35][36]

3. 2. 군사 개혁

아바스 1세는 즉위 후 국내에서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계 키질바시족의 군단을 억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또한 영국인 셜리 형제(앤서니 셜리와 로버트 셜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포병대를 편성했다.[43]

사파비 왕조 초기에는 키질바시가 군대의 중추이자 정부 요직을 차지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고, 샤는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샤 타흐마스프 1세가 도입한 ''굴람''(노예)을 활용했다. 이들은 주로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예니체리와 유사하게 군대, 왕실, 행정부에 복무하며 샤에게만 충성했다.[20][21] 아바스 1세는 이들 굴람으로 최대 37,000명의 군인을 구성하여 국고에서 지원했으며, 이는 키질바시의 군사 독점을 약화시켰다.[19]

타흐마스프 1세는 1540년에서 1555년 사이에 코카서스 지역을 여러 차례 침공하여 많은 수의 기독교 체르케스인과 조지아인 노예를 포획했다.[23] 이들은 사파비 군사 노예 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24]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아바스 1세는 이러한 굴람 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키질바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아바스 1세는 굴람 군단을 15,000명의 고도로 훈련된 기병으로 확장했으며,[32] 4만 명의 코카서스 굴람으로 구성된 군사 부대의 일부였다. 그는 키질바시 지방 총독의 수를 줄이고 굴람으로 대체했다. 1595년 조지아인 출신 알라베르디 칸은 파르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598년에는 모든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34]

아바스 1세는 군대 개편을 통해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었다.[38] 그는 10,000~15,000명의 기병, 12,000명의 머스킷총병 군단(투팡치얀),[20] 12,000명의 포병 군단(투프치얀)[20], 그리고 3,000명의 개인 경호대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다.[41][42] 또한 대포의 수를 크게 늘려 한 번의 전투에서 500문의 대포를 배치할 수 있었다.[42] 1600년부터 알라베르디 칸은 로버트 셜리와 함께 군대를 추가로 재편하여 '굴람'의 수를 25,000명으로 늘렸다.[44]

3. 3. 경제 개혁과 이스파한 천도

1598년 수도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하였다. 신도시와 구 시가지 중간에 "왕의 광장"을 중심으로 مسجد شاه (اصفهان)|왕의 모스크|label=왕의 모스크fa (현재 이맘 모스크) 등의 모스크가 늘어선 공공 공간이 건설되었고,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궁정 사람들 외에도 아르메니아 상인과 인도 상인 등 원격지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이향 출신자들이 정착하여 이스파한의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다.[137]

아바스 1세는 영국과 함께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빼앗고, 외국인을 우대하여 유럽 여러 나라와의 친선을 꾀하였다. 나라 안에서는 정치 개혁과 상업 장려에 힘써 이슬람 교국의 부흥에 전력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자인 타타르인의 연합군과 싸워 바그다드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즉위 후, 국내에서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 계(系) 키질바시족(族)의 군단(軍團)을 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에 노력하였다. 또한 영국인 셜리 형제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포병대(砲兵隊)를 편성했다. 동이란에 있어서는 우즈베크족(族)을 쳐서 헤라트나 메셋을 합치고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싸워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바그다드 등을 회복했다. 또한 1620년에는 호르무즈에서 포르투갈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137]

각지에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여 이란의 경제 발전에 노력하였다. 봉건 제후들의 세력은 제왕에도 필적할 정도의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삭감하는 데에 성공한 아바스는 자신의 군대 재편에 착수하여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종래의 군단 대신에 상비군을 설치하고 그들에게 대포를 장비시켰다.[137] 나아가서 그는 영국인 여행자의 중개로 오스만의 적국인 러시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유럽 나라들의 군주들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아바스 대제가 죽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게 된다.[138]

아바스 1세의 치세 아래 이스파한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큰 번영을 이루어 "세계의 절반"(에스파한 네스페 자한)이라고 칭송받았다.

4. 정복 전쟁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 우즈베크족, 포르투갈 등 주변 강대국들과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다.

상대시기주요 내용 및 결과
우즈베크족1598년 ~ 1603년경호라산 지역을 놓고 우즈베크족과 전쟁을 벌였다. 1598년 마슈하드를 쉽게 탈환하고, 헤라트에서 우즈베크 군대를 유인하여 격파했다. 1599년까지 헤라트마슈하드를 정복하고 발흐까지 진출했으나, 곧 발흐를 상실하고 호라산 대부분을 지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1603년 ~ 1638년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1603년 아제르바이잔을 탈환하고 타브리즈 등 이라크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1605년 수피얀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1612년 나수흐 파샤 조약으로 아마스야 조약 당시의 국경을 회복했으나, 1615년 전쟁을 재개하여 1618년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 1623년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나, 1638년 아바스 1세 사후 오스만 제국에 다시 빼앗겼다.
조지아1614년 ~ 1626년카케티와 카르틀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조지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1614년 반란을 일으킨 테이무라즈 1세와 루아르사브 2세를 진압하고, 1616년까지 대규모 학살과 추방을 통해 카케티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다. 1625년 기오르기 사아카제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조지아는 아바스 1세 사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포르투갈1602년, 1622년1602년 바레인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냈다. 1622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호르무즈를 탈환하고 무역 중심지를 반다르 아바스로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다.
무굴 제국1620년 ~ 1622년1620년 외교적 사건으로 무굴 제국과 전쟁이 발발했다. 1622년 기습 공격으로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러한 정복 전쟁을 통해 아바스 1세는 사파비 왕조의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강화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제르바이잔바그다드를 되찾은 것은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조지아 원정을 통해 이란의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고, 포르투갈페르시아만에서 몰아내어 해상 무역로를 확보하려 했다.

4. 1. 우즈베크족과의 전쟁

1598년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칸국 샤이바니 왕조의 압둘라 2세가 사망하자, 그 쇠퇴를 틈타 제국의 북서쪽을 위협하던 우즈베크족을 토벌하여 호라산 지방을 빼앗았다. 이로 인해 북서쪽 국경이 안정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이 가능하게 되었다.[47]

아바스 1세는 즉위 후, 국내에서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 계(系) 키질바시족(族)의 군단(軍團)을 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에 힘썼다. 또한 영국인 셜리 형제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포병대(砲兵隊)를 편성했다.[137]

아바스 1세의 개혁된 군대와 함께한 첫 번째 원정은 호라산을 점령하고 황폐화시키던 우즈베크족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1598년 4월, 그는 공격을 시작했다. 이 지역의 두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마슈하드는 쉽게 탈환했지만, 우즈베크 지도자 디 모하메드 칸은 다른 주요 도시인 헤라트의 성벽 뒤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바스는 후퇴하는 척하며 우즈베크 군대를 도시 밖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1598년 8월 9일,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우즈베크 칸이 부상을 입고 그의 군대는 후퇴했다 (칸은 퇴각 중에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47]

1599년까지 아바스는 헤라트마슈하드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발흐까지 동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것은 짧은 기간의 승리였고, 결국 그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새로운 최고 통치자인 바키 무하마드 칸이 발흐를 재정복한 후 이 정복지의 일부만 통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아바스는 자신의 군대가 여전히 우즈베크족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603년까지 전투선은 안정되었지만, 페르시아 신식 포병의 대부분을 적에게 잃었다. 아바스는 헤라트, 사브제바르, 파라, 니사를 포함한 호라산의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다.[48]

아바스의 북동쪽 국경은 당분간 안전해졌고, 그는 서쪽에 있는 오스만 제국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49] 우즈베크족을 물리친 후, 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겼다.[38]

4. 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아바스 1세 통치 기간의 중요한 부분이다. 즉위 초,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아제르바이잔이라크 등 주요 영토를 상실하고 쇠퇴하고 있었다. 아바스 1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정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한 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1603년,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3차 오스만-사파비 전쟁) 메흐메트 3세아흐메트 1세와 싸워 빼앗겼던 아제르바이잔을 되찾고, 타브리즈 등 이라크의 주요 도시들을 탈환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특히, 이란군은 처음으로 대포를 훌륭하게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53] 1604년에는 예레반을 함락시키며 코카서스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54] 1605년 수피얀 전투에서는 오스만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55]

1612년,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 나수흐 파샤 조약을 체결하여 아마스야 조약 당시의 국경을 회복하고 오스만 측에 비단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615년, 사파비 왕조는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했으며, 1618년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어 아제르바이잔 등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623년, 아바스 1세는 다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바그다드를 탈환하고 100년 만에 사파비 왕조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는 새로운 오스만 술탄 무라드 4세 즉위 초기의 혼란을 틈타 시아파 성지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61] 비록 1624년 조지 사아카제가 이끄는 조지아의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62] 이듬해 구원군을 파견하여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다.[62]

하지만 1638년 아바스 1세 사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이란-터키 및 이란-이라크 국경과 거의 동일한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4. 3. 조지아 원정과 반란 진압

1614년에서 1616년 사이, 오스만-사파비 전쟁 동안, 아바스는 루아르사브 2세와 테이무라즈 1세 (''타흐무라스 칸''이라고도 알려짐)가 이끄는 카케티 왕국의 반란을 진압했다.[63] 이들은 아바스의 충실한 조지아 신하들이었다.

1606년, 아바스는 카르틀리 귀족들과 테이무라즈의 어머니인 케테반의 요청에 따라 이 조지아인들을 사파비의 봉신인 카르틀리와 카케티의 왕위에 임명했다. 두 사람 모두 다루기 쉬운 젊은이들처럼 보였다.[63] 그러나 샤와 조지아 왕들 사이에는 곧 긴장이 고조되었다. 1613년, 샤가 그들을 마잔다란에서 사냥에 동참하도록 소환했을 때, 그들은 감금되거나 살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나타나지 않았다.[35] 1614년 3월, 이란 군대가 두 영토를 침공했고, 두 동맹 왕은 오스만의 봉신인 이메레티로 피난을 요청했다.[63] 이스칸데르 베그 문쉬에 따르면, 아바스는 가장 신뢰하는 신하이자 ''골람''인 두 사람의 배신에 격분했다.[35] 그는 30,000명의 카케티 농민들을 이란으로 추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더 2세의 손자인 제시 (''이사 칸''이라고도 알려짐)를 카르틀리의 왕위에 임명했다.[35][63] 이스파한 궁정에서 자랐고 무슬림인 제시는 샤에게 완전히 충성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바스는 도망친 왕들을 넘겨주지 않으면 이메레티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의 통치자들은 그의 요구를 공동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루아르사브는 자발적으로 샤에게 항복했다. 아바스는 처음에는 그를 잘 대했지만 루아르사브와 테이무라즈가 오스만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아르사브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루아르사브가 거부하자 그는 감옥에 갇혔다.[63]

테이무라즈는 1615년 오스만-사파비 적대 행위가 재개되는 틈을 타 동부 조지아로 돌아와 사파비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오스만 군대가 사파비 침공을 연기하자 아바스는 군대를 보내 테이무라즈를 격파하고 오스만과의 휴전을 성사시킨 후 침공을 재개했다.[63] 이로써 이란의 지배가 동부 조지아에 완전히 회복되었다.[64] 카케티에 대한 징벌 원정에서 그의 군대는 약 60,000~70,000명,[27][65] 또는 100,000명[63]의 조지아인을 살해했고, 이란으로 2배나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어 카케티 인구의 약 3분의 2가 제거되었다.[66][63] 1617년에는 더 많은 난민들이 체포되었다.[63] 1619년, 아바스는 충성스러운 시몬 2세 (''세마윤 칸'')를 카케티의 꼭두각시 통치자로 임명하고 반항적인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의 총독들을 배치했다.[35]

아바스는 이 지역을 확보한 후 테이무라즈와 루아르사브의 완강함에 대한 보복을 했다. 그는 테이무라즈의 아들들을 거세했고, 두 아들은 곧 사망했다.[63] 1622년에 루아르사브를 처형했고, 1624년에는 샤에게 협상가로 보내졌던 케테반이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아 고문을 받아 죽게 했다.[67][68][63] 한편 테이무라즈는 오스만과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요청했다.[63]

1625년 초, 아바스는 카케티 봉기가 임박했다는 경고를 받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그는 거짓 구실로 카케티 군인들을 유인한 다음 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장군인 기오르기 사아카제를 포함한 모든 무장한 카르틀리인들을 처형할 계획을 세웠지만 사아카제는 택배를 가로채 음모를 밝혀냈다. 사아카제는 조지아인들에게 망명하여 페르시아인들을 카르틀리와 카케티에서 몰아내고 테이무라즈를 두 영토의 왕으로 옹립하는 데 성공한 새로운 반란을 이끌었다. 아바스는 6월에 반격을 가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테이무라즈를 폐위시켰지만, 조지아인들에게 군대의 절반을 잃었고 이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포기한 채 카르틀리와 카케티를 봉신국으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아카제와 테이무라즈는 1626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고 이란군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몰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63] 따라서 조지아 영토는 아바스 사후까지 사파비의 침략에 계속 저항했다.[64]

4. 4. 포르투갈과의 전쟁

오스만 투르크와 그 동맹자인 타타르인의 연합군과 싸워 바그다드를 공격하였다. 영국과 함께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빼앗고, 외국인을 우대하여 유럽 여러 나라와의 친선을 꾀하였다.

호르무즈 섬은 1622년 호르무즈 점령에서 잉글랜드-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6세기 동안, 포르투갈페르시아만에 기지를 건설했다.[75] 1602년, 이맘 쿨리 칸 운딜라제가 지휘하는 이란군은 바레인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냈다.[76] 1622년, 잉글랜드 선박 4척의 도움으로, 아바스 1세는 호르무즈를 포르투갈로부터 탈환했다.[77] 그는 무역 중심지를 내륙의 새로운 항구인 반다르 아바스로 대체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78]

잉글랜드 왕국(제임스 1세)와 결탁하여, 로버트 셜리의 지도 아래 무기가 근대화되자, 1622년포르투갈 왕국과 싸워 호르무즈 섬을 탈환했다.(호르무즈 점령)

4. 5. 무굴 제국과의 관계

사파비 왕조는 전통적으로 호라산 지방을 탐냈던 우즈베크족에 대항하여 인도의 무굴 제국과 동맹 관계였다. 무굴 제국 황제 후마윤은 아바스의 할아버지인 샤 타흐마스프에게 왕위를 되찾는 것을 도와준 보상으로 칸다하르 지방을 주었다.[69][70] 1590년, 이란의 혼란을 틈타 후마윤의 후계자인 악바르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아바스는 칸다하르를 되찾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굴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71] 마침내 1620년, 이란 대사가 황제 자항기르 앞에서 허리를 굽히기를 거부한 외교적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72] 인도는 내전에 휘말렸고, 아바스는 1622년에 칸다하르라는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를 되찾기 위해서는 기습 공격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령 후, 그는 자항기르에게 매우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이 정당하게 자신의 것을 되찾았을 뿐이며 더 이상의 영토 야심은 없다고 주장했다.[73][74] 자항기르는 달래지지 않았지만, 그 지방을 되찾을 수 없었다. 아바스의 어린 시절 친구인 간지 알리 칸은 1624/5년 사망할 때까지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5. 문화 정책

아바스 1세는 즉위 후 투르크계 키질바시족의 군단을 억누르고 이란인 관료를 육성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영국인 셜리 형제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포병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동쪽으로는 우즈베크족을 격파하고 헤라트와 메셋을 합병했으며,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바그다드 등을 되찾았다. 1620년에는 호르무즈에서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137]

1598년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여 이란의 경제 발전에 힘썼다. 특히 이스파한은 아바스 1세의 치세 아래 크게 발전했다. 봉건 제후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상비군을 설치하여 대포로 무장시켰으며,[137] 러시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에 사절을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외교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138] 하지만 아바스 대제가 사망하면서 이러한 발전은 쇠퇴하기 시작했다.[138]

아바스는 1598년 수도를 카즈빈에서 더 중앙에 위치한 도시인 이스파한으로 옮겼다. 새로운 사원, 목욕탕, 대학, 대상 숙소 등을 웅장하게 건설하면서 이스파한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저 세이보리는 "8세기 알 만수르 칼리파 알 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한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이처럼 포괄적인 도시 계획의 사례는 없었으며, 도시 중심부의 규모와 배치는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라고 썼다.[79] 이스파한은 마스제드-에 샤와 마스제드-에 셰이크 로트폴라 사원, 그리고 알리 카푸, 체헬 소툰 궁전, 나그셰 자한 광장을 포함한 다른 기념물들을 통해 사파비 왕조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란 혁명 이전에 이스파한에 전시되었던 샤 아바스 동상


이란 마잔다란주 베흐샤르에 있는 아바스 대왕 동상


아바스는 이스파한을 사파비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면서, 아르메니아 고향에서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시킨 아르메니아인들을 활용했다. 그들이 정착하자 그는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고 실크 무역을 계속하도록 장려했다. 실크는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 이용 가능한 최고의 경화로 여겨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미 이란의 경제를 강화할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80]

아바스 시대의 회화 작업실(그의 후원 아래 설립된 이스파한 학파)은 레자 아바시와 무하마드 카심과 같은 저명한 화가들에 의해 현대 이란 역사상 최고의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 사파비 왕조의 금욕적인 기원과 신자들에게 허용된 쾌락을 제한하는 종교적 계율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시대의 예술은 엄격함의 완화를 나타냈다. 무하마드 카심의 초상화는 술 소비에 대한 이슬람의 금지, 그리고 남성 간의 친밀함에 대한 금지가 "준수보다는 위반으로 더 존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81] 아바스는 중국식 도자기의 현지 생산을 향상시키기 위해 300명의 중국 도공을 이란으로 데려왔다.[82]

아바스 치하에서 카펫 직조는 부유한 유럽인들이 페르시아 카펫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 산업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했다. 실크 생산은 왕실의 독점 사업이 되었고, 필사본, 제본, 도자기 또한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38]

5. 1. 종교 정책

아바스 1세는 대부분의 사파비 왕조 군주처럼 시아파 이슬람 신자였으며, 이맘 후세인을 특별히 숭배했다.[83] 1601년에는 이스파한에서 이맘 레자의 성지가 있는 마슈하드까지 도보 순례를 하고, 우즈베크족에게 약탈당했던 그곳을 복원하기도 했다.[84] 수니파 이슬람은 이란의 주요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종교였기 때문에, 아바스는 서부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수니파를 가혹하게 대하기도 했다.[85]

뉴 줄파에 있는 켈리사-에-방크(아르메니아 방크 대성당)


아바스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관대했다. 이탈리아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샤의 기독교 역사와 신학 지식에 놀라기도 했으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은 샤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86]

1604년부터 아바스는 오스만 군대로부터 북서부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사파비 왕조의 핵심 지방이었던 기독교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초토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에는 최대 3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을 고향에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 포함되었다.[87][88]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부유한 아르메니아 상업 도시인 주가 (또는 졸파) 출신이었다.[88] 많은 사람들이 아바스가 수도 이스파한 근처에 있는 주가("구 졸파") 출신의 아르메니아인을 위해 지은 도시인 뉴 줄파로 이주되었다.[87][88] 여행 중에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망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샤가 그들에게 새로운 대성당을 지어준 뉴 줄파에서 상당한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 아바스는 뉴 줄파로 이주한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장려하여 이란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고 도시가 자체 시장(칼란타르)을 선출하도록 허용했다.[89] 다른 아르메니아인들은 길란과 마잔다란 지방으로 이주되었는데, 이들은 뉴 줄파로 이주한 사람들보다 운이 좋지 않았다. 아바스는 파라아바드에 두 번째 수도를 세우고 싶었지만, 기후가 건강에 좋지 않고 말라리아가 발생하여 많은 정착민들이 사망했고, 다른 사람들은 점차 도시를 버렸다.[90][91][92]

장 샤르댕이 그린 베흐샤르의 사피아바드 궁전. 마잔다란에서 아바스 대제의 주요 거처였다.


아바스는 반란의 위협이 더 컸던 조지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덜 관대했다. 아바스는 귀족들에게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자주 요구했고, 거부한 케테반을 고문하여 죽였다. 조지아의 반항에 대한 아바스의 분노는 동부 조지아의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거나 절멸시키고 투르크멘족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낳았으며, 이는 "집단 학살"로 묘사되기도 했다.[63]

5. 2. 예술 진흥

1598년 아바스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겼다.[79] 새로운 사원, 목욕탕, 대학, 대상 숙소 등을 웅장하게 건설하면서 이스파한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저 세이보리는 "8세기 알 만수르 칼리파 알 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한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이처럼 포괄적인 도시 계획의 사례는 없었으며, 도시 중심부의 규모와 배치는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라고 썼다.[79] 이스파한은 마스제드-에 샤와 마스제드-에 셰이크 로트폴라 사원, 알리 카푸, 체헬 소툰 궁전, 나그셰 자한 광장을 포함한 여러 기념물들을 통해 사파비 왕조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바스는 이스파한을 사파비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면서, 아르메니아 고향에서 이스파한으로 강제 이주시킨 아르메니아인들을 활용했다. 그들이 정착하자 그는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고 실크 무역을 계속하도록 장려했다. 실크는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 이용 가능한 최고의 경화로 여겨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미 이란의 경제를 강화할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80]

아바스 시대의 회화 작업실(그의 후원 아래 설립된 이스파한 학파)은 레자 아바시와 무하마드 카심과 같은 저명한 화가들에 의해 현대 이란 역사상 최고의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 사파비 왕조의 금욕적인 기원과 신자들에게 허용된 쾌락을 제한하는 종교적 계율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시대의 예술은 엄격함이 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무하마드 카심의 초상화는 술 소비에 대한 이슬람의 금지, 그리고 남성 간의 친밀함에 대한 금지가 "준수보다는 위반으로 더 존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81] 아바스는 중국식 도자기의 현지 생산을 향상시키기 위해 300명의 중국 도공을 이란으로 데려왔다.[82]

아바스 치하에서 카펫 직조는 부유한 유럽인들이 페르시아 카펫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 산업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실크 생산은 왕실의 독점 사업이 되었고, 필사본, 제본, 도자기 또한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38]

1598년 아바스는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했다. 신도시와 구 시가지 중간에 왕의 광장을 중심으로 مسجد شاه (اصفهان)|왕의 모스크fa(현재 이맘 모스크) 등의 모스크가 늘어선 공공 공간이 건설되었다.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궁정 사람들 외에도 아르메니아 상인과 인도 상인 등 원격지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정착하여 이스파한의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다.

아바스 1세의 치세 아래 이스파한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크게 번영하여 "세계의 절반"(에스파한 네스페 자한)이라고 칭송받았다.

6. 유럽과의 관계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1세기 전 우준 하산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던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파비 왕조는 이전까지 유럽과 외교적 접촉이 없었다. 아바스 1세는 할아버지 타흐마스프 1세와 달리 유럽과의 관계를 중시했다.[93]

1599년, 아바스 1세는 첫 유럽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95] 이들은 카스피 해를 건너 모스크바를 거쳐 노르웨이, 독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접견), 로마 (교황 클레멘스 8세 알현)를 방문하고, 1602년 스페인 펠리페 3세 궁정에 도착했다.[96] 비록 이들은 귀국하지 못했지만, 유럽인들은 이란과 문화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십이야''에 '소피'가 언급된 것이 그 예시이다.[97][98] 이후 페르시아와 유럽 간 외교 사절단의 왕래가 증가했다.[99]

베네치아의 도게 궁전에 있는 카를로와 가브리엘 칼리아리가 그린 캔버스로, 1603년 페르시아 대사를 맞이하는 도제 마리노 그리마니의 모습.


압바스 1세가 카이사르로 묘사되어 명성의 나팔 소리를 받으며, 1609–1615년 페르시아 대사와 함께, 프란스 2세 프랑켄의 ''Allégorie de l'Occasion'', 1628.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주요 적대국인 스페인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그는 지원을 대가로 무역권과 기독교 전파 기회를 제안했지만, 호르무즈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고, 아바스 1세는 이를 거부했다.[99]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00]

잉글랜드 왕국과의 관계는 긍정적이었다. 1598년 셜리 형제가 도착하여 이란 군대 재편성을 도왔고, 이는 오스만-사파비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로버트 셜리는 1609년부터 1615년까지 유럽 외교 사절단을 이끌었다. 1622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아바스 1세의 호르무즈 탈환을 지원했다.[102]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고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 특히 잉글랜드는 1616년부터 1617년까지 여러 차례 특사를 파견했다. 이러한 서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7. 가족사와 죽음

아바스 1세는 다섯 아들을 두었으나, 그 중 셋만이 어린 시절을 넘겨 생존했다. 왕위 계승은 안정적으로 보였으나, 1614년 아바스 1세는 왕세자 모하메드 바키르 미르자가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죽였다.[104][105] 1621년에는 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후, 후계자 모하메드 호다반다를 맹인으로 만들어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려 했다.[106] 이후 셋째 아들 이맘 쿨리 미르자마저 맹인으로 만들고 감금했다.[108]

결국 아바스 1세는 모하메드 바키르 미르자의 아들인 삼 미르자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삼 미르자는 1629년 샤 사피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했다.[109] 아바스 1세는 1629년 파라하바드에서 사망하여 카샨에 안장되었다.[109]

아바스 1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
체르케스 출신 첩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의 어머니)[118]
카르틀리 왕국의 바그라트 7세와 카헤티의 안나 여왕의 딸 파크르 자한 베굼 (주바이다 베굼의 어머니)[118][119]
타흐마스프 1세 샤의 아들 무스타파 미르자의 딸 (1587년 결혼)[120][121]
솔탄 호세인 미르자 사파비의 아들 솔탄 호세인 미르자의 딸이자 함자 미르자의 미망인 올간 파샤 하눔 (1587년 결혼)[120][122]
칸 아흐마드 칸과 마리암 베굼의 딸 야칸 베굼 (1602년 9월 1일 결혼)[119][123][124]
카헤티의 다비드 1세 왕과 순교자 케테반 여왕의 딸 헬레나 공주[125][126]
카르틀리의 조지 10세 왕과 마리암 리파르티아니 여왕의 딸 파티마 술탄 베굼 (티나틴) (1604년 결혼 - 이혼)[125][127]
체르케스 출신 이스마일 칸의 여동생 (아바스 1세의 총애하는 아내)[128][129]
시아파 신학자 셰이크 로트폴라 마이시의 딸[130][131]
파라모르즈 아밀라코리의 딸이자 압드-올-가파르 아밀라코리의 여동생 타마르 아밀라코리[132]



자녀출생 및 사망기타
아들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133]1587년 9월 15일 - 1615년 1월 25일1587년-1588년 마슈하드 총독, 1591년-1592년 하마단 총독. 1601년 이스마일 2세의 딸 파크르 자한 베굼과 결혼, 조지아 출신 딜라람 하눔과 결혼. 아들 둘을 둠.
술탄 아불-나세르 삼 미르자딜라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남
술탄 술레이만 미르자1632년 8월 사망파크르 자한과의 사이에서 태어남
술탄 하산 미르자[133]1588년 9월 - 1591년 8월 18일
솔탄 모하마드 미르자[133]1591년 3월 18일 - 1632년 8월1621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실명. 딸 하나를 둠 (가우하르 샤드 베굼, 미르자 카지에게 시집감)[134]
술탄 이스마일 미르자[133]1601년 9월 6일 - 1613년 8월 16일
이맘 쿨리 미르자[118][133]1602년 11월 12일 - 1632년 8월1627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실명. 아들 하나를 둠 (나자프 쿨리 미르자, 출생 - 1632년 8월 사망)
샤자다 베굼미르자 모흐신 라자비에게 시집가 아들 둘을 둠[134]
주바이다 베굼1632년 2월 20일 사망이사 칸 샤이카반에게 시집가 딸 하나를 둠 (자한 바누 베굼,[118] 1624년 카르틀리의 시몬 2세에게 시집감)[135]
이즈-이-샤리프 베굼 공주미르자 무하마드 샤피의 아들 세이드 압둘라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를 둠 (세이드 무하마드 다우드, 술레이만 1세의 딸 샤르 바누 베굼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둠. 그 중 하나가 술레이만 2세)
아가 베굼술탄 알-울라마 할리페 술탄에게 시집가[134] 아들 넷과 딸 넷을 둠
하바 베굼1617년 잔잔 사망미르자 리자 샤리스타니 (사드르), 미르자 라피 알-딘 무하마드 (사드르)와 결혼,[134] 아들 셋을 둠
샤르 바누 베굼이스파한의 다루가 미르 압둘라짐에게 시집감[134]
말리크 니사 베굼이맘 레자의 성지 무타왈리 미르 잘랄 샤리스타니에게 시집감[134]



아바스 1세는 사피 왕조의 황금 시대를 건설한 명군으로 칭송받았지만, 그의 죽음은 왕조 몰락의 시작이었다. 그의 후계자 사피 1세는 무능하여 대내외적 혼란을 야기했고,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1638년 이라크를 상실했다.

8. 평가와 유산

아바스 1세는 이란 역사와 사파비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137][138][110][111][63][112][113][114][115][116][117] 로저 세이버리는 "샤 아바스 1세는 '대제'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으며 그의 주요 특징은 신중함이었다. 그는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엄청난 인내심을 보였다."라고 평가했다.[110] 마이클 액소시는 아바스를 "재능 있는 행정가이자 군사 지도자였으며, 잔혹한 독재자였다. 그의 통치는 사파비 시대의 뛰어난 창조적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의 내전과 고난(많은 친척들이 살해당함)은 그의 인성의 중심에 의심과 잔혹함이라는 어두운 면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111]

아바스 1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선왕들이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고, 군사력을 최적화하고, 국가 통제를 중앙 집권화하며, 이란의 국내 및 국제 상업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련의 선진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냉혹함과 정의를 결합하여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에 가혹하게 대처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바스 1세는 오스만 투르크와 그 동맹자인 타타르인의 연합군과 싸워 바그다드를 공격하고, 영국과 함께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빼앗았다. 또한 외국인을 우대하여 유럽 여러 나라와 친선을 꾀하고, 나라 안 정치 개혁과 상업 장려에 힘써 이슬람 교국의 부흥에 전력하였다. 수도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각지에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여 이란의 경제 발전에 힘썼다.

아바스 1세는 평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으며,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소통했다.[114] 그는 이스파한의 바자르와 다른 공공 장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114] 키는 작았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신체적으로 강했고,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지 않고도 오랜 기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115][116]

아바스 1세는 다민족 키질바쉬 조직의 투르크멘족이 사용하는 투르크 방언에 능통했고, 페르시아어 역시 능숙하게 구사했다.[113] 또한, 조지아어를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113]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웅변가였으며 그의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1629년, 아바스 1세는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파비 왕조의 황금 시대를 건설한 명군으로 칭송받았으며,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바스 1세의 군사적 성공은 서구 국가와의 동맹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파비 왕조 중흥의 종말을 의미했다. 후궁에서 자란 사피 1세는 무능했고, 대내외적인 혼란이 있었다. 대왕의 사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1638년이라크는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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