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민타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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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민타스 1세는 아르게아스 왕조의 일원이었으며, 마케도니아의 여섯 번째 왕으로, 알케타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트라키아를 정복한 시기에 통치했으며, 페르시아 사절단과의 일화로 유명하다. 아테네의 히피아스와 동맹을 맺는 등 다른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마케도니아 통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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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1세는 기원전 498년부터 454년까지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왕으로, 페르시아 전쟁 시기에 페르시아와 그리스 양쪽에 관여하며 이중적인 외교를 펼쳤고, 고대 올림픽에 참가하여 문화 활동에도 기여했다. - 아르게아스 왕조 - 필리포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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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로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 페르디카스 3세의 형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족으로, 왕이 되기 전 군사적, 외교적 활동으로 입지를 다졌으며,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독재적인 통치로 정치적 갈등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아민타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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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마케도니아의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512년경 – 기원전 498/497년 |
이전 | 알케타스 1세 |
이후 | 알렉산드로스 1세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자녀 | 알렉산드로스 1세 기개아 |
왕조 | 아르게아다이 |
아버지 | 알케타스 1세 |
어머니 | 알려지지 않음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2. 배경
아민타스는 아르게아스 왕조의 일원으로, 알케타스 왕의 아들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민타스는 마케도니아의 여섯 번째 왕이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자와 알렉산드로스 1세와 기가이아를 자녀로 두었다.[2]
2. 1. 아르게아스 왕조
아민타스는 아르게아스 왕조의 일원으로, 알케타스 왕의 아들이었다.[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민타스는 마케도니아의 여섯 번째 왕이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알렉산드로스 1세와 기가이아를 자녀로 두었다.[2]3. 통치
기원전 513년,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스키타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다뉴브강에 국경을 확보했다. 다리우스는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로 돌아와 사촌 메가바주스에게 나머지 트라키아 정복을 명령했다. 기원전 512년 또는 511년, 메가바주스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스트루마강 유역으로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족을 정복했다. 아민타스 1세는 이러한 권력 공백을 틈타 악시오스강을 건너 암팍시티스 주변의 이전 영토를 점령했을 수도 있다.[2]
아민타스 1세는 다른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마케도니아 통치자였다. 그는 아테네의 히피아스와 동맹을 맺었다.[1] 아민타스 1세는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스인들 사이의 불화를 이용할 목적으로 테르마이 만에 있는 안테무스 영토를 그에게 제공했으나, 히피아스는 이 제안과 이올코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이는 아민타스 1세가 그 당시 안테무스를 통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순히 히피아스에게 공동 점령 계획을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
페르시아 사절단과의 일화와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속국화 논란에 대해서는 관련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3. 1. 페르시아 제국과의 관계
기원전 513년,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스키타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다뉴브강에 국경을 확보했다. 다리우스는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로 돌아와 사촌 메가바주스에게 나머지 트라키아 정복을 명령했다. 기원전 512년 또는 511년, 메가바주스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스트루마강 유역으로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족을 정복했다. 아민타스는 이러한 권력 공백을 틈타 악시오스강을 건너 암팍시티스 주변의 이전 영토를 점령했을 수도 있다.[2]페르시아 사절단과의 일화와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속국화 논란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3. 1. 1. 페르시아 사절단과의 일화
기원전 510년경, 페르시아 메가바주스는 페르시아의 관행에 따라 아민타스 1세에게 "땅과 물"을 요구하는 사절 7명을 보냈다. 이는 아이개의 궁전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1] 이 요구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아민타스는 메가바주스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절들을 연회에 초대했다.[2]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사절들은 저녁 식사 후 여성들을 요구했고, 아민타스는 마케도니아 관습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이에 동의했다. "첩과 정실 부인"으로 확인된 여성들은 처음에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지만, 페르시아 사절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 옆으로 옮겨졌다. 술에 취한 페르시아 사절들은 여성들을 희롱하기 시작했지만, 아민타스는 페르시아의 힘을 두려워하여 침묵했다.[3]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사절들의 행동에 격분하여 아버지 아민타스에게 자리를 떠나 상황을 처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민타스는 아들에게 신중할 것을 조언했지만 결국 자리를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여성들을 돌려보내고 페르시아 사절들에게는 여성들이 몸을 씻고 오는 중이라고 안심시켰다. 그 사이 알렉산드로스는 여성으로 변장하고 단검으로 무장한 "수염 없는 남자들"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연회에 돌아와 페르시아 사절 7명을 모두 살해했다. 이후 페르시아에서 사라진 사절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누이 기가이아를 페르시아 장군 부바레스와 결혼시키고 그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어 사건을 무마했다.[4]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교활한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헤로도토스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단순히 마케도니아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했을 수도 있다.[2] 또한, 약하고 어리석은 왕이라 할지라도 아민타스가 그토록 민감한 외교 문제를 어린 아들에게 맡겼을 것 같지는 않다.[1] 기가이아와 부바레스의 결혼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만, 아민타스가 직접 주선했는지, 아니면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 사후에 처리했는지는 불분명하다.[5]
3. 1. 2.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속국화 논란
기원전 513년,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스키타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다뉴브강에 국경을 확보했다. 다리우스는 이후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로 돌아와 사촌 메가바주스에게 나머지 트라키아를 정복하라고 명령했다. 메가바주스는 기원전 512년 또는 511년에 서쪽으로 진격하여 스트루마강 유역으로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로 추방했던 파이오니아인을 포함하여 여러 부족을 정복했다.[1] 아민타스는 이러한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악시오스강을 건너 암팍시티스 주변의 그들의 이전 영토를 점령했을 수 있다.[2]페르시아 관행에 따라, 메가바주스는 기원전 510년경에 아민타스에게 "땅과 물"을 요구하기 위해 일곱 명의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는 아이개에 있는 궁전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1] 이 요청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아민타스는 메가바주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절들을 연회에 초대했던 것으로 보인다.[3]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저녁 식사 후에 여성들을 요구했고, 아민타스는 마케도니아 관습에도 불구하고 이에 동의했다. "첩과 정실 부인"으로 확인된 여성들은 처음에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따라 사절들 옆으로 옮겨졌다. 술에 취한 그들은 여성들을 희롱하기 시작했지만, 아민타스는 페르시아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4]
알렉산더는 그들의 행동에 격분하여 아버지에게 자리를 떠나 상황을 처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민타스는 신중함을 조언했지만 결국 떠났고, 알렉산더는 여성들을 돌려보내 손님들에게 그들이 단지 몸을 씻는 중이라고 안심시켰다. 그 자리에 여성으로 변장하고 단검으로 무장한 "수염 없는 남자들"이 파티에 돌아와 일곱 명의 사절을 모두 살해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사라진 대사관을 찾기 시작했지만, 알렉산더는 누이 기가이아를 장군 부바레스와 결혼시키고 그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어 이를 덮었다.[5]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회의적이다. 알렉산더의 교활한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헤로도토스가 날조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마케도니아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했을 수도 있다.[3] 또한,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다고 해도 아민타스는 그러한 민감한 외교 상황을 어린 아들에게 맡겼을 것 같지 않다.[1] 기가이아와 부바레스의 결혼은 역사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민타스가 직접 주선했거나 알렉산더가 아버지의 사후에 처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6]
역사가 유진 보르자는 페르시아 대사들의 살해를 거부함으로써, 아민타스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는 더 이상 속국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1] 이 주장에 따라, 마르도니우스는 메가바주스가 아니라 실제로 기원전 492년에 마케도니아인을 정복했을 것이다.[3] 반면, 니콜라스 해먼드는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기원전 479년에 패배할 때까지 스쿠드라 속주의 일부로서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남아 있었다고 주장했다.[7]
3. 2. 아테네와의 관계
아민타스 1세는 다른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마케도니아 통치자였다. 특히 그는 아테네의 히피아스와 동맹을 맺었다.[1] 아민타스 1세는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스인들 사이의 불화를 이용할 목적으로 테르마이 만에 있는 안테무스 영토를 그에게 제공했다.[1] 그러나 히피아스는 이 제안과 이올코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는데, 이는 아민타스 1세가 그 당시 안테무스를 통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순히 히피아스에게 공동 점령 계획을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4. 가계도
아민타스는 알케타스 왕의 아들이었으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여섯 번째 왕이었다.[6]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알렉산드로스 1세와 기가이아 두 자녀를 두었다.[7]
아민타스 1세의 가족 및 후손 | ||
---|---|---|
-- (1) 아민타스 1세 ( ~ 497 BC) | rowspan="16" | | |
-- (2) 알렉산더 1세 (497 ~ 454 BC) | ||
-- (3) 페르디카스 2세 (454 ~ 413/2 BC) | ||
-- (4) 아르켈라오스 1세 (413/2 ~ 400/399 BC) | ||
-- (5) 오레스테스 (400/399 ~ 398/7 BC) | ||
아르가이오스 2세 (388/7 ~ 387/6 BC) | ||
파우사니아스 | ||
이름 없는 딸 엘리메아의 데르다스와 혼인 | ||
이름 없는 딸 아민타스 2세와 혼인 | ||
-- (6) 에어로푸스 2세 (398/7 ~ 394/3 BC) | ||
-- (8) 파우사니아스 (394/3 ~ 393/2 BC) | ||
이름 없는 아들 | ||
메넬라우스 | ||
-- (7) 아민타스 2세 (394/3 BC) | ||
-- (11) 프톨레마이오스 (368 ~ 365 BC) | ||
아민타스 | ||
아르히다에우스 | ||
-- (9) 아민타스 3세 (393/2 ~ 370 BC) | ||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후손. | ||
필립 | ||
아민타스 | ||
아게루스 | ||
알케타스 | ||
알렉산더 | ||
아젤라우스 | ||
아레피로스 | ||
스트라토니케 세우테스 1세와 혼인 | ||
기가이아 부바레스와 혼인 | ||
아민타스 |
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Wiley-Blackwell
[2]
논문
Macedonian 'Royal Style' 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1974
[3]
서적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Wiley-Blackwell
[4]
간행물
Archaic and Early Classical Macedonia
Brill
2011
[5]
서적
Macedonian Institutions Under the Kings: A historical and epigraphic study
[6]
간행물
399–369 BC
Brill
2011
[7]
논문
Arepyros or A(u)re(lius) Pyros?
2012
[8]
문서
ヘロドトス, VII. 139
[9]
문서
ibid, V. 17-20
[10]
문서
ibid, V.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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