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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이아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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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기원전 479년에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를 다시 침공했으나, 아테네의 요청으로 스파르타 군이 참전하여 그리스 연합군과 플라타이아이에서 격돌했다.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페르시아군은 궤멸되었다. 이 승리로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이오니아 지역의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의 복수를 완수하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종식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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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이아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플라타이아이 전투 장면. 19세기 삽화.
플라타이아이 전투 장면 (19세기 삽화)
전투플라타이아이 전투
전쟁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날짜기원전 479년 8월 27일 또는 28일
장소플라타이아이, 그리스
결과그리스의 승리. 페르시아는 아티카와 보이오티아의 통제권을 상실함.
관련 지역아티카
보이오티아
교전 세력
교전국 1
스파르타
아테네
코린토스
메가라
교전국 2
그리스 속국:
보이오티아
테살리아
마케돈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파우사니아스
아모파레투스
아리스토데무스
칼리크라테스
에우리아낙스
아림네스토스
아리스티데스
올림피오도로스
지휘관 2마르도니오스
헤게시스트라투스
마시스티우스
아르타바조스
병력 규모
교전국 1대략 75,000–85,000명 (현대적 합의)
교전국 2대략 100,000명 (현대적 합의)
사상자 및 피해
교전국 1수천 명 (현대적 합의)
교전국 2그리스군 손실의 5~10배 (현대적 합의)

2. 배경

아케메네스 제국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즉위 후 헬레스폰트 해협에 두 개의 부교를 건설하는 등 그리스 침공 준비를 신속하게 진행했다. 이에 맞서 기원전 481년경 코린토스에서 도시 국가 회의가 열렸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맹이 결성되었다.[1][2]

기원전 480년 8월,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다가오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동맹군이 테르모필레 협곡을 방어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그리스군은 3일간 방어선을 지켰으나, 우회로를 이용한 페르시아군에게 측면을 공격당해 패배했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페르시아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보이오티아의 도시 플라타이아이와 테스피아이를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비어있는 아테네까지 점령했다. 그리스 동맹군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방어 준비를 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 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해전에서의 큰 손실과 패배에 실망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장군 마르도니오스(다리우스 1세의 사위)에게 페르시아 육군 약 30만 명의 지휘권을 맡기고 소수의 군대만 이끌고 사르디스로 퇴각했다. 마르도니오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그해 겨울을 테살리아에서 보낸 뒤, 군량 수확을 마친 이듬해 기원전 479년에 다시 그리스 남부를 침공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다시 살라미스로 피난했고, 페르시아군은 아티카로 진군하여 아테네를 재점령하고 파괴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 여러 도시에 구원을 요청하며 페르시아와의 육상 결전을 호소했다. 마르도니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통해 피난 중인 아테네인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며, 만약 지원이 제때 오지 않으면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압박했다.

검은색과 흰색 스케치로, 야영지를 묘사. 중앙에 왕이 있고, 기병 사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모든 남자는 깃털 장식이 달린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당시 스파르타의 실권자였던 왕족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로 원군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다. 페르시아 전쟁을 틈타 스파르타 내 헬로트(노예 계층)들의 반란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주력군이 원정을 떠난 사이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인들은 당시 히아킨토스 축제를 기념하고 있었고, 아테네인들이 항복할 경우 모든 그리스에 닥칠 위험을 설득받기까지 열흘 동안 결정을 미루었다고 한다. 역사가 조지 코크웰은 스파르타인들이 종교적 의무보다는 헬로트의 잠재적 반란에 대한 우려 때문에 군대 파병을 미루었다고 주장한다. 파우사니아스는 신탁을 구했고, "레오니다스의 원수를 갚아라"는 신탁을 받자 원군 파병을 결심했다. 아테네 사절단이 스파르타의 에포르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하러 갔을 때, 그들은 이미 5,000명의 스파르티아테스가 유로타스 강을 따라 진격하여 오레스테시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은 코린토스 부근에서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다른 동맹 도시 국가 군대와 합류한 뒤, 엘레우시스에서 아테네군과 합류하여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처음에는 아티카 지방의 트리야 평원에서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파괴한 후 테베가 있는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북상하여 페르시아군의 기병을 경계하며 키타이론 산 기슭에 포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검은색과 흰색 스케치. 북쪽에서 남쪽으로 강둑, 도시, 산이 보인다.
아케메네스 측(북쪽)에서 본 플라타이아이의 전장.

3. 전초전

그리스 연합군이 키타이론 산 기슭에 포진하여 움직이지 않자, 페르시아의 총지휘관 마르도니오스는 기병을 활용하기 좋은 평원으로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기병대를 보내 도발했다. 마르도니오스의 명령을 받은 마시스티오스(grc)가 이끄는 페르시아 기병 선발대는 그리스군 진영으로 돌격하여 피해를 주었다. 특히 이 공격에 직접 노출된 메가라 군은 큰 피해를 입고 다른 부대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아테나이의 정예 부대가 궁병과 함께 즉시 지원에 나서 페르시아 기병대 지휘관 마시스티오스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지휘관의 시신을 되찾으려 여러 차례 돌격했으나, 증원된 그리스 연합군의 방어에 막혀 결국 실패하고 마르도니오스 본진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그들은 플라타이아이 근처 평원으로 내려와 새로운 진영을 구축했다.

이후 양측은 플라타이아이 근처에서 10일 동안 서로 결정적인 공격 없이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대치 11일째 되는 날, 마르도니오스는 다시 한번 기병대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이번 공격 목표는 그리스 연합군의 유일한 수원지였던 가르가피아 샘(Gargaphian Spring)이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샘을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파괴하여 그리스군의 식수 공급을 차단했으며, 동시에 보급로까지 위협했다. 식수와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자 그리스 연합군은 현재 위치를 고수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밤중에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스파르타 군은 "밤중에 철수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과 다름없어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즉각적인 후퇴를 거부했다.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 군대가 계획대로 후퇴를 시작하는 동안에도 스파르타 군은 진영에 남아 있다가, 결국 해가 뜬 후에야 마지못해 철수를 시작했다. 좌익에 포진했던 아테나이 군과 메가라 군은 우익의 스파르타 군이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플라타이아이 근처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중앙의 다른 폴리스 군대는 이미 후퇴를 완료했으므로, 전장에는 우익의 스파르타 군과 테게아 군, 좌익의 아테나이 군과 메가라 군만 남게 되었다.

스파르타 군의 뒤늦은 철수를 목격한 마르도니오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는 즉시 페르시아 전군에 추격 명령을 내렸고, 페르시아 군대는 후퇴하는 그리스 군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4. 전투 과정

페르시아 전군은 스파르타 군(오른쪽), 그리스 용병군은 아테네 군(왼쪽)에게 돌격했다.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인도인, 박트리아인 등)의 주력 부대가 스파르타 군을 급습했다. 하지만 마르도니오스의 추격 명령은 갑작스럽게 내려졌기 때문에 페르시아 군의 전열은 흐트러졌고 공격은 산발적이었다. 파우사니아스는 그리스 용병군을 제외한 페르시아 전군이 스파르타 군에게 화살을 집중하는 것을 보고 즉시 좌익의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전투의 길흉을 점쳤다. 첫 점괘가 좋지 않자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 군에게 응전을 자제시키고 다시 점을 쳤다. 그동안 스파르타 군은 방어에만 집중했으며, 적의 전열이 흐트러진 덕분에 사상자는 소수에 그쳤다.

한편, 아테네 군은 스파르타의 지원 요청을 받고 페르시아 군에 포위된 스파르타 군 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 우익에 배치된 그리스 용병군이 아테네 군에게 돌격해오면서 교전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아테네 군은 스파르타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두 번째 점괘에서 길한 결과를 얻자 즉시 스파르타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스파르타 군은 대열을 정비하고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전까지 저항하지 않던 스파르타 군이 갑자기 대열을 갖추고 포효하자 페르시아 군은 혼란에 빠졌다. 스파르타 군은 맹렬히 공격을 시작했고, 장비와 훈련 수준에서 뒤처지는 페르시아 군은 스파르타 군에게 압도당했다. 그럼에도 수적으로 우세했던 페르시아 군은 스파르타 군의 긴 창을 붙잡아 꺾으려 시도하며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스파르타 군은 창이 부러지면 단검을 뽑아 맞섰다.

전투는 치열하게 오랫동안 이어졌으나, 스파르타 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을 밀어냈다. 마르도니오스는 1,000명의 친위대와 함께 전장을 지휘하던 중, 스파르타 경장보병이 던진 돌에 맞아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페르시아 군은 급격히 무너져 결국 패주했다.

후퇴했던 다른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아테네 군은 여전히 그리스 용병 부대와 교전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약 30만 명으로 알려진 페르시아 대군을 훨씬 적은 수의 스파르타 군이 주력으로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를 죽임으로써, 델포이 신탁에서 예언된 레오니다스의 복수가 이루어졌다.

패주한 페르시아 군은 후방에 구축해 둔 야영지로 도망쳐 농성전을 벌였다. 야영지에는 성벽이 설치되어 있었고,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은 스파르타 군은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리스 용병군을 물리친 아테네 군이 합류하여 성벽을 넘었고, 이를 계기로 스파르타 군도 야영지로 밀려 들어가 함락에 성공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 패잔병들은 테베로 도망쳤다.

헤로도토스는 전투 중 몇몇 스파르타 인물들의 주목할 만한 행동을 기록했다.

  • '''아모파레투스''': 스파르타 부대 중대(''로코스'') 지휘관이었던 그는 전투 전 야간 철수 명령을 비겁하다며 거부했다. 새벽녘 나머지 스파르타 군이 후퇴를 시작했을 때 그의 부대는 뒤에 남겨졌으나, 결국 후퇴하는 본대에 합류했다. 스파르타의 전통에서는 아모파레투스가 플라타이아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고 기록하며, 그가 불복종한 것이 아니라 후방 방어를 자원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아리스토데무스''': 테르모필레 전투의 유일한 스파르타 생존자였던 그는 '겁쟁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그는 홀로 페르시아 전선에 돌격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가 용맹하게 싸워 명예를 회복했다고 인정했지만, 대열을 벗어나 단독으로 싸웠다는 이유로 특별한 영예를 수여하지는 않았다.
  • '''칼리크라테스''': "전 그리스 군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알려졌던 그는 전투에서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나, 전투가 시작되기 전 방패 뒤에 앉아 있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여 기회를 얻지 못했다.

5. 양군의 전력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동원된 양군의 전력 규모와 구성에 대해서는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현대 역사가들의 다양한 분석 및 추정이 존재한다. 특히 대규모 병력이 장기간 대치하면서 보급 문제가 전투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병력 수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당시의 동원 능력과 보급 한계 등을 고려하여 실제 병력 규모를 추정한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스 코네크니는 페르시아 보병 총 병력을 약 44,000명에서 66,000명, 기병은 약 5,000명에서 7,000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는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수치보다 훨씬 적은 규모이다.

양측 모두에게 보급은 심각한 문제였다. 코네크니는 그리스 연합군이 매일 약 300000L의 물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산비탈에 배치된 그리스군이 담수를 확보하고 이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기병대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니콜라스 세쿤다는 그리스 진영의 총인원 110,000명을 기준으로 일일 물 요구량을 250000L로 추정하면서도, 이는 동물의 필요량은 제외한 수치라고 덧붙였다. 식량 역시 중요한 문제였는데, 세쿤다는 페르시아군에 의해 차단된 그리스 보급 부대가 하루 식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58,000개의 보리 ''코이니크'' 또는 47,000개의 밀 ''코이니크''를 운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병사 1인당 하루 최소 1 ''코이니크''(약 800g)의 식량이 필요하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코네크니는 그리스군 보급 부대가 편도 75km 거리를 이동해야 했을 것이며, 원활한 보급을 위해 최소 3개의 보급 부대와 1,500명 이상의 보조 병력이 항상 보급선 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또한 스파르타가 대규모 헬롯을 동원하여 물류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며, 전투에 직접 참여한 10,000명 외에 25,000명의 헬롯이 보급선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이 공동 재정을 운영했는지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을 근거로 긍정하는 세쿤다와 이를 부정하는 피터 브런트의 주장이 엇갈린다.

페르시아군 역시 보급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폴 A. 레이는 페르시아 보급선이 약 160.93km 이상 뻗어 있었으며, 육로로는 마케도니아에서, 해로로는 헬레스폰트에서 보급을 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포키스인들이 페르시아에 합류하지 않고 파르나소스 산에서 보급 부대를 습격하는 등 보급선 유지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는 페르시아군 병력을 보병 70,000명, 기병 10,000명으로 가정할 경우, 매일 약 18.597만kg의 식량(곡물 및 사료 포함)과 의 물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는 이 정도 규모의 보급품을 매일 운반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수의 말(약 35,000마리)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는 페르시아가 동원하기 어려운 규모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페르시아 진영에서 가까운(약 약 4.83km) 테베에 대규모 보급 기지가 있었다면 보급 문제가 완화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처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양군의 전력은 단순한 병력 수를 넘어, 이들을 유지하기 위한 복잡한 보급 능력까지 포함하여 평가해야 한다. 각 군의 상세한 병력 구성과 지휘 체계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5. 1. 그리스 연합군

수염을 기르고 로브와 헬멧을 쓴 남자의 왼쪽 옆모습을 그린 흑백 스케치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는 연합 그리스군을 지휘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지휘는 스파르타의 장군 파우사니아스가 맡았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사촌 플레이스타르쿠스의 섭정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었으며, 부지휘관으로는 에우리아낙스를 임명했다.

스파르타는 스파르테(시민 병사), 페리오이코이, 헬롯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으며, 이는 코린토스 지협 너머로 파견된 스파르타 군대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을 수 있다. 아테네 군대는 아리스티데스의 지휘 아래 각 필레 (부족)별 스트라테고스 (사령관) 체계를 갖추고 참전했다. 그 외에도 코린토스, 메가라, 시키온, 테게아 등 다수의 폴리스가 연합군에 합류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총 병력을 약 110,000명으로 기록했으나,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수치가 실제 전투 병력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호플리테스 외에 기록된 경무장 보병의 수가 실제 전투 참여 인원인지, 아니면 보조 인력(스케우오포로스)까지 포함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정확한 중장보병 및 경장보병의 규모는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한편,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주요 일원이었던 아르고스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만티네이아엘리스 역시 불참했다. 일각에서는 이들 도시가 페르시아 측의 회유 때문에 참전을 거부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 1. 1. 중장보병

wikitext

폴리스중장보병 수
스파르타10,000명
아테네8,000명
코린토스5,000명
메가라3,000명
시키온3,000명
테게아1,500명
트로이젠1,000명
플리우스1,000명
에피다우로스800명
레우카스・아나크토리온800명
플라타이아이600명
에레트리아・스튀라600명
오르코메노스600명
암브라키아500명
칼키스400명
미케네・티린스400명
포테이다이아300명
헤르미오네300명
레프레온200명
팔레200명
합계38,700명


5. 1. 2. 경장보병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35,000명의 헬롯을 파견했는데, 이는 스파르테 병사 1명당 7명에 해당한다. 역사가 니콜라스 세쿤다는 헤로도토스가 모든 호플리테스에게 경무장 부대원(프실로이)이 동반되었다고 가정하여 그리스 연합군 전체 병력을 과장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세쿤다는 이 경무장 부대원들이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은 스케우오포로스(짐꾼)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참전한 경장보병의 수는 다음과 같다.

스파르타군:35,000명
그리스 연합군:34,500명
테스피아이군:1,800명
합계71,300명



총 71,300명의 경장보병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 2. 페르시아 군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참전한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민족병력 수
페르시아인130,000명
메디아97,000명
그리스 용병50,000명
박트리아37,000명
사카22,000명
인도인14,000명
합계350,000명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숫자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역사가 존 프란시스 레이젠비는 페르시아 진영의 규모를 고대 로마 군대 진영과 비교하여 기병 10,000명을 포함해 약 70,000명으로 추산했다. 역사가 피터 코놀리는 같은 규모의 진영에서 최대 120,00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스 델브뤼크는 보급 능력 등을 고려하여 페르시아 군대의 총 규모를 비전투 인원을 포함하여 75,000명으로 추정했으며,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실제 참전한 병력은 동맹 그리스 군을 포함하여 약 40,000명으로 보았다. 코네크니는 페르시아 보병을 약 55,000명에서 70,000명, 야전 부대원을 포함한 총 인원을 120,000명에서 150,000명 사이로 추정했다.

다른 추정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국가/민족병력
페르시아인40,000
박트리아인, 인도인, 사카20,000
그리스 동맹군: 보이오티아인(테베, 로크리스, 말리스인, 테살리아인, 포키스인(1,000명), 마케도니아인)20,000
프리기아인, 트라키아인, 미시아인, 파이오니아인, 에티오피아인, 이집트인소규모 병력
기병: 페르시아인, 박트리아인, 인도인, 사카5,000
총계100,000



페르시아 군대는 마르도니우스 장군이 지휘했으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주요 병력은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사카인, 박트리아인, 인도인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나크시로스탐 무덤 부조에도 이들 민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라리사의 토락스와 그의 형제 유리필루스, 트라시데우스와 같은 테살리아의 알레우아다이 가문 인사들도 마르도니우스와 함께 참전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상세한 배치 상황을 전했다. 페르시아군은 좌익에 배치되어 11,500명의 라케다이몬인(스파르타군)과 테게아 중장보병과 마주했다. 코네크니는 이 좌익의 페르시아군 규모를 약 20,000명에서 30,000명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군의 우익에는 메디아인들이 배치되어 코린토스, 포티다이아, 오르코메노스, 시키온의 6,200명 병력과 대치했다. 코네크니는 이 메디아 병력을 약 12,000명에서 18,000명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군 중앙에는 메디아인 옆으로 박트리아인들이 배치되어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레프레움, 티린스, 미케네, 플리우스의 3,400명 병력과 마주했다. 코네크니는 박트리아 병력을 약 6,000명에서 9,000명으로 추정한다. 박트리아인 다음에는 인도인과 사카인이 배치되어 헤르미오네, 에레트리아, 스티라, 칼키스, 아낙토리온, 레우카스, 팔레아, 아이기나의 3,300명 병력과 대치했다. 코네크니는 인도인과 사카이 병력을 합쳐 약 6,000명에서 9,000명으로 추정한다. 메디아, 박트리아, 인도, 사카이 병력은 페르시아군 중앙을 형성했으며, 약 24,000명에서 36,000명 규모였다.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그리스 군대(보이오티아인, 로크리스인, 말리스인, 테살리아인, 포키스인)는 11,600명의 아테네인, 플라타이아이인, 메가라인과 마주하여 배치되었다. 코네크니는 이들 그리스 동맹군 병력을 약 11,000명에서 13,000명으로 추정한다. 이를 종합하면, 코네크니의 추정에 따른 페르시아 보병 총 병력은 약 44,000명에서 66,000명, 기병은 약 5,000명에서 7,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스파르타아테네 연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제국 군대는 20만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스파르타군의 전사자는 91명, 아테네군은 5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측 전사자가 1,000명 정도 나왔다고 기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합군의 대승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스파르타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왕 레오니다스의 복수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전투 후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에 협력했던 테베를 공략했고, 이로써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패배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본토 침략이 최종적으로 실패했음을 의미했으며, 이오니아 반란 실패 이후 페르시아에 종속되었던 이오니아 등 여러 그리스 도시들의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후 아테네인들이 건설한 제우스의 스토아.


전사한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는 두 개의 다른 무덤에, 헬로트는 세 번째 무덤에 묻혔다. 첫 번째 무덤에는 사제(llang) 또는 "20대 청년"(llang)으로 불리는 이들이 묻혔으며, 포세이도니우스, 필로키온, 아모파레투스, 칼리크라테스가 포함되었다. 스파르타인들은 포세이도니우스를 가장 용감한 전사로 꼽았다. 아테네의 소파네스 역시 용맹하게 싸웠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연합 그리스인들이 세운 다른 무덤 4개가 더 있었는데, 아테네인과 테게아인이 각각 하나씩, 메가라인과 플레아시아인이 공동으로 두 개를 사용했다.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 출신 전사들은 공동 묘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이 세운 일부 무덤은 실제 시신 없이 세워진 빈 무덤이었다고 언급했다. 플라타이아이의 이 무덤들에서는 매년 희생 제물이 바쳐졌다.

전투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는 레오니다스의 시신 훼손에 대한 복수로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의 시신을 훼손하자는 아에기나의 람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페르시아 진영에서 붙잡힌 코스 출신의 여성을 해방시켰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파우사니아스는 전투 후 플라타이아이의 아고라에서 제우스 엘레테리오스(해방자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 대리석 제단이 세워졌고, 이후에도 플라타이아이에서는 제우스에게 제물이 계속 바쳐졌다. 여신 호모노이아(화합)도 제단에 함께 모셔졌다. 아테네인들 역시 페르시아와의 전투 승리를 도운 제우스 엘레테리오스를 기리기 위해 도시의 아고라에 제우스의 스토아를 건설했으며, 이곳에는 플라타이아이에서 전사한 아테네인들의 방패가 보관되었다.

연합군은 열흘간의 휴식 후, 페르시아를 도왔던 테베를 포위하고 도시의 친페르시아 정치인들의 책임을 물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티기누스는 탈출했고 그의 아들은 파우사니아스에 의해 사면받았으나, 남은 친페르시아 지도자들은 뇌물로 처벌을 피할 것을 우려하여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스파르타는 이후 연합 작전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는데, 역사가 마르셀로 루피는 스파르타가 해군 경험 부족, 군인들의 부패 가능성 우려,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지배력 강화 의도 등의 이유로 불참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후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연합군은 아테네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만티네이아엘리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늦게 도착했는데, 전투 후 두 도시 국가는 지연에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엘리스의 점술가 헤게시스트라투스는 마르도니우스와 함께 플라타이아에 있었으나, 나중에 자킨토스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아르카디아의 카리이 시는 페르시아 침공 동안 친페르시아적 태도를 보였고, 플라타이아이 전투 후 연합 그리스군에게 점령되어 남성들은 처형되고 여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아르타바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 잔당은 소아시아로 후퇴하려 했다. 그들은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를 거쳐 헬레스폰트로 향했으나, 트라키아인들의 공격과 피로, 굶주림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미칼레 전투에서의 승리 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항해하여 페르시아군이 설치한 부교를 파괴하려 했으나 이미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귀환했지만,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헤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 아테네군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세스토스를 포위했고, 오랜 공방 끝에 함락시켰다. 세스토스에서는 친페르시아 장군 아르타예테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그의 아들은 아테네 장군 크산티푸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에서의 연이은 승리는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침공을 종결시켰으며, 향후 페르시아의 침공 위협을 크게 약화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훗날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침공하면서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승리가 자신의 정복 경로를 열었다고 인식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에게 해에서 아테네의 패권을 확립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쇠퇴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6. 1. 한국에 미친 영향

7. 유산 및 기념

페르시아 기병대 사령관 마시스티우스의 흉갑 갑옷은 아테네아크로폴리스 단지에 있는 에레크테이온의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에 전시되었으며, 2세기에도 같은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아크로폴리스에서 마르도니우스의 것으로 알려진 칼, 아키나케스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그의 시대에 마르도니우스의 무덤이 일반에 공개되었다고 언급했다. 테게아인들이 노획한 청동 말구유는 테게아의 아테나 알레아 신전에 기증되었다. 페르시아인으로부터 약탈한 전리품은 팔려서 델포이에 있는 아테네의 보물창고와 같은 여러 건물을 건설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플라타이아이에서 얻은 페르시아 전리품의 원본, 잘못 알려진 것, 또는 복제품들이 아크로폴리스 단지, 특히 파르테논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가 아이린 드 용은 페르시아 전쟁의 전리품이 아테네의 페르시아 문화 동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파우사니아스가 그리스 정규군 대신 헬로트를 전리품 수집에 보낸 이유가 전리품을 공정하게 분배하려 했거나, 혹은 대부분을 자신이 차지하려 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헬로트들은 사치품과 쓰러진 페르시아 병사들의 갑옷, 장비를 수집하면서 전리품을 훔치기도 했다. 드 용은 이 전리품이 그리스인들에게 익숙했던 것보다 훨씬 큰 부를 안겨준 뜻밖의 횡재였다고 평가한다. 전리품에는 금, 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텐트, 침대, 용기, 가마솥, 무기, 갑옷 등이 포함되었다. 페르시아 전리품으로 만들어진 금과 청동 유물 세 점이 신들에게 바쳐졌다. 제물 삼각대는 델포이의 아폴론에게, 조각상은 각각 올림피아제우스와 코린트 지협의 포세이돈에게 헌정되었다.

드 용은 그리스 병사들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노획한 "여자, 말, 은화, 낙타, 멍에 맨 가축"을 서로 나누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플라타이아인들이 나중에 그 지역에서 보물 상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큰 관심을 보였던 화려한 페르시아 의복이 전리품을 줍기 위해 파견된 그리스인들에게 수집되지 않은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고 드 용은 지적한다. 그녀는 파우사니아스가 전투 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요리사에게 각각 식사를 준비하도록 요청한 일화를 언급한다. 두 식사의 차이와 마르도니우스의 텐트 안의 사치스러운 페르시아 가구 및 장식을 본 파우사니아스는 다른 그리스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이러한 사치품을 가리키며, 이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페르시아인들이 검소하게 사는 그리스를 침략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드 용은 이 경험이 파우사니아스를 사치스러운 페르시아 생활 방식에 끌리게 만들었고, 특히 그가 플라타이아이에서 더 많은 전리품을 요구하고 받았기 때문에 그의 메디즘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델포이의 아테네의 보물창고. 이 건물의 건설 자금 일부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충당되었다.


모든 페르시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이 스파르타 국가가 아닌 파우사니아스 개인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불균형한 분배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우려를 낳았을 것이며, 특히 파우사니아스가 신전에 전리품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의 승리에서 얻은 이익이 그들의 사회 구조 자체를 위협했을 수 있다고 관찰했으며, 페르시아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에 대한 호모이오이의 우려를 언급했다. 역사가 엘렌 밀렌더는 전리품과 영광을 얻으려는 욕망이 스파르타 지도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스파르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헬로트들은 금으로 된 물건을 실수로 청동 가격에 아이기나인들에게 팔았고, 이로 인해 아이기나인들은 큰 부를 얻었다고 한다. 밀렌더는 이 일화와 파우사니아스가 헬로트들에게 죽은 페르시아인에게서 전리품을 빼앗도록 고집한 것이, 스파르타가 헬로트들을 모욕하고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본보기로 삼으려 했던 사례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레이 나일런드는 헤로도토스의 이 일화가 아이기나가 이미 그 전 세기에 부유한 상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 있으며, 이는 헤로도토스가 아이기나인들을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이야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캐롤라인 보트는 그리스 병사와 장군들이 총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신들"에게 정당한 몫으로 바치도록 상기되었고, 나머지는 연합한 그리스 국가들에게 분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주로 페르시아 금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 금은 녹여서 델포이 삼각대, 즉 나중에 뱀 기둥이 되는 기념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전리품을 많이 남겼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아마도 크세르크세스의 왕실 텐트가 광범위한 물품과 함께 마르도니우스의 숙소에 보관되어 있다가 약탈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또한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에서의 승리가 그리스의 페르시아 문화 통합을 알리고 페르시아 물품에 부여되는 중요성을 높였다고 주장한다.

=== 뱀 기둥 ===

서로 꼬인 뱀 모양의 청동 기둥인 뱀 기둥은 페르시아 진영에서 약탈한 페르시아 병사들의 갑옷을 녹여 만들어 델포이에 세워졌다. 이 기둥은 전투에 참여한 31개의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기둥의 몸통 부분에 각 도시 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둥의 대부분은 오늘날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 남아 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 식민지였던 비잔티움에 자신의 도시를 건설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2]

=== 축제와 기념 ===

시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전투에 대한 찬가와 비가를 썼다. 역사학자 마르첼로 루피는 이 시들이 스파르타인들, 아마도 파우사니아스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시들이 스파르타와 파우사니아스를 모두 찬양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선전에서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승리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한 것으로 여겨졌다. 전투에서 전사한 그리스인들을 기리기 위해 제우스 엘레우테리오스(해방자 제우스)를 기리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엘레우테리아라고 불리는 이 축제에서는 참가자들이 방패를 들고 완전 무장한 채 3km를 달리는 경주가 열렸다.

역사학자 크리스텔 뮐러는 플라타이아이 전투로 인해 플라타이아이 도시 자체가 기억의 장소 (lieu de mémoire|리외 드 메모아르fra)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일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미래에 그 장소를 방문할 사람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 뮐러는 이 도시 국가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이러한 위령비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닐란드는 이것이 실제로 헤로도토스의 견해라고 지적한다. 반면 레이젠비는 이러한 국가들이 실제로 전투에서 사상자를 냈지만,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거나, 전사자들을 공동 묘지에 매장한 후 나중에 별도의 위령비를 세웠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마르도니우스를 죽인 에이엠네스토스는 플라타이아이의 아테나 아레이아 신전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80탈렌트 상당의 기념물로 기려졌다.

=== 역사 기록과 해석 ===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코린토스인들은 파우사니아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모니데스는 그들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했다.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시라쿠사의 사령관 헤르모크라테스가 페르시아의 실수와 보급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었으며, 페르시아 군대가 연합 그리스 군대보다 반드시 더 크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투키디데스의 또 다른 기록에서는 코린토스인들이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실수 덕분에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키디데스 자신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궁정에서 그리스인 의사로 일했던 크테시아스는 주로 페르시아 측 자료를 바탕으로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의 기록을 주로 에포로스의 저작에 기반하여 작성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기록을 위해 람프사쿠스의 이도메네우스와 시모니데스를 인용했다. 닐런드는 올림피오도로스가 메가라인을 구원하는 병력에 대한 기록의 출처가 올림피오도로스의 아들인 투리이의 람폰의 친척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닐런드는 또한 아모파레투스가 후퇴를 거부한 일화의 출처가 아테네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아모파레투스가 돌을 던져 투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스파르타의 관습이 아니라 아테네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닐런드는 헤로도토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 기록을 위해 자문했던 그리스인들은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반면, 그가 자문했던 친페르시아 성향의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전투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친페르시아 그리스인들이 헤로도토스의 플라타이아이 기록의 주요 정보원이었으며, 헤로도토스가 그들을 신뢰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8. 평가 및 분석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대한 평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과 현대 학자들의 분석을 통해 전투의 양상과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사료와 해석'''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그의 기록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코린토스인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달리, 시인 시모니데스는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페르시아의 실수와 보급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연합군보다 반드시 더 크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또한 코린토스인들이 그리스의 승리가 페르시아의 실수 덕분이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남겼는데, 이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투키디데스 자신의 비판적 시각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궁정 의사였던 크테시아스는 페르시아 측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을 남겼으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주로 에포로스의 저작에 의존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람프사쿠스의 이도메네우스와 시모니데스의 기록을 인용했다. 역사가 닐런드(Ray Nyland)는 헤로도토스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의 증언에 의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오히려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은 친페르시아 그리스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의 증언이 헤로도토스 기록의 주요 출처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헤로도토스가 이들을 신뢰하지 않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 학자들의 분석'''

현대 역사학자들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승리 요인과 전개 과정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제시한다.


  • '''기술 및 장비:''' 역사가 로엘 코닌엔다이크(Roel Konijnendijk)는 그리스의 기술적 우위가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페르시아의 철제 흉갑이 그리스의 청동 흉갑보다 우수했을 수 있으며, 양측 모두 갑옷을 착용한 병사는 소수(약 10% 미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히려 페르시아 병사들이 그리스인들보다 "근접 전투를 위해 일률적으로 훈련되고 장비를 갖춘" 상태였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페르시아 불멸자들이 방패벽이 무너진 후에도 싸움을 계속했지만, 사령관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전투를 중단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스파르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병사들은 경험이 부족한 아마추어였다고 평가한다.


녹슨 듯한 청동 상체 갑옷의 컬러 사진으로, 흰색 배경에 겹쳐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청동 흉갑 갑옷으로, 기원전 620년에서 580년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플라타이아이의 중장 보병이 착용했을 것과 유사하다. 마드리드 국립 고고학 박물관.

  • '''전략 및 전술:''' 코닌엔다이크는 페르시아 기병대가 그리스 보병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전투 초반 주도권을 잡았다고 본다. 페르시아 기병은 그리스 창의 사거리 밖에서 화살과 투창 공격을 가했고, 아소포스 강변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의 식수 공급을 차단하는 구역 거부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그리스 군대가 중장 보병만으로 이루어졌다면 패배했을 것이며, 군대의 3분의 2를 차지했을 경보병들이 페르시아의 원거리 공격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우사니아스 역시 궁수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코닌엔다이크는 페르시아의 전략이 전쟁을 장기화하여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군의 후퇴를 유도하는 것이었고, 그리스의 전략은 페르시아군을 정면대결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최종적으로 페르시아가 패배한 이유는 기병대를 완전히 활용하지 못했고 마르도니우스의 죽음으로 사기가 꺾였기 때문이며, 그리스의 승리는 기술적 우위보다는 강한 사기와 끈기 덕분이라고 결론짓는다.


역사가 조지 코크웰(George Cawkwell)은 전투 초반 그리스군의 소극적인 태도가 파우사니아스에게 유리하지 않았으며, 최종 전투 직전까지 그리스 장군들이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도니우스가 성공적인 기병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면 공세를 결정한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물자 부족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페르시아군의 식량 비축량이 고갈될 위기에 처하자, 마르도니우스는 공세를 선택했고, 아르타바조스는 테베로의 후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코크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중장 보병이 페르시아 경보병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고 평가한다.

고대 킬릭스 (잔)에 묘사된 그리스 중장 보병과 페르시아 전사의 전투. 기원전 5세기


역사가 존 프랜시스 레이젠비(John Francis Lazenby)는 플라타이아이 전투 전의 장기적인 교착 상태가 마라톤 전투와 유사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 중장 보병은 페르시아 기병에게 포위될 위험을 피하려 했고, 경무장한 페르시아 보병은 견고한 그리스 진지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레이젠비는 마르도니우스의 행동이 공격적이기보다는 그리스 동맹의 분열을 기다리며 후퇴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역사가 폴 A. 레이(Paul A. Rahe)는 마르도니우스가 아소포스 강을 건너 기병대가 활동하기 어려운 지형에 보병을 배치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파우사니아스가 구릉지대로 후퇴한 것은 페르시아군을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짜 후퇴였을 수 있다고 본다.

고고학자 안드레아스 코네츠니(Andreas Konecny)는 그리스군이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팔랑크스 전술의 한계와 보급 문제 때문에 결국 정면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정면대결 없이는 그리스 동맹이 와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 사령관들이 보급선이나 후퇴 경로 확보에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코네츠니는 마르도니우스가 그리스군의 후퇴 소식을 듣고 서둘러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때 페르시아군은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반면 그리스군은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주목한다. 마르도니우스가 체계적인 공격을 했거나 아르타바조스가 더 일찍 지원했다면 페르시아가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 '''병력 구성 및 팔랑크스:''' 헬로트의 역할과 그리스 팔랑크스의 형태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코네츠니는 모든 중장보병이 8열 종대로 배치되었다면 전선 길이가 5km에 달했을 것이며, 35,000명의 헬로트가 모두 후방에 배치되었다면 팔랑크스 길이가 9km에 달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투에 투입된 헬로트는 10,00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보급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본다. 반면, 역사가 피터 헌트(Peter Hunt)는 모든 헬로트가 스파르타 대형에 포함되었으며,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 중앙이 얇아서 붕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스파르타인들이 페르시아군에 맞설 긴 전열을 형성하기 위해 헬로트를 경보병으로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검은색과 흰색의 전투 대형 스케치. 무거운 방패와 창을 든 병사가 앞에 있고, 8명의 궁수가 중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뒤에는 끈, 창, 가방을 든 감독관이 있다
전형적인 페르시아군 대형, 전방에 ''sparabara''(중장보병), 중간에 8명의 궁수, 뒤에 감독관이 있는 10열 종대


코닌엔다이크와 폴 바르두니아스(Paul Bardunias)는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전형적인 중장보병 팔랑크스 전투가 아니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대열의 깊이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 군대가 고전기 팔랑크스처럼 밀집 대형으로 싸우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들은 헬로트가 보조 병력이 아니라 다른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배치되었으며, 스파르타 대형은 8열 종대가 아닌, 일부는 더 깊은 4열 종대 형태의 "대략적인 대형"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방패벽을 형성하되, 개별 병사가 활동할 공간을 두어 유연하게 싸웠으며, 이것이 고정된 방패벽을 사용한 페르시아군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페르시아의 ''sparabara''(방패병)가 패배하자 경보병들이 중장보병과 싸워야 했고, 기병대는 지형 문제로 효과적으로 투입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고대 그리스 전투 방식이 유동적인 형태에서 고전적인 중장보병 팔랑크스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전투의 영향'''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본토 침략 야욕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시아 세력은 소멸했다. 또한 페르시아에 종속되었던 이오니아 도시들의 독립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크웰은 이 전투 이후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 용병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으며, 보병 앞에 기병대를 배치하는 전술 변화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리스 중장보병에 대응하기 위해 카르다케스라는 새로운 보병 부대를 창설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코크웰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새로운 사트라피로 편입할 기회를 놓친 것은 플라타이아이 전투보다는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상자'''

그리스군의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헤로도토스는 652명(스파르타 91명, 테게아 16명, 아테네 52명 등)으로 기록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1,360명, 디오도로스는 10,000명 이상으로 기록했다. 코네츠니는 플루타르코스의 수치가 그리스군 전체 사상률의 약 4%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스파르타 페리오이코이의 사상자를 포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테네 사상자 수(52명)는 특정 부족(아이안티스 필레)의 추모비만을 보고 전체 사상자로 오인했을 수 있다는 주장(클레이데모스)도 있다. 역사가 플라워(Michael Flower)와 마린콜라(John Marincola)는 헤로도토스가 그리스군의 사상자를 전투 마지막 날에만 기록했을 수 있다고 보며, 피터 헌트는 헤로도토스가 페리오이코이의 사상자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군의 화살 세례에서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페르시아군의 사상자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르타바조스가 이끌고 탈출한 4만 명을 제외한 거의 전 병력이었다고 하나 정확한 수는 알기 어렵다.

참조

[1] 웹사이트 Stoa of Zeus (Eleutherios): a Pleiades place resource https://pleiades.sto[...] 2024-03-27
[2] 간행물 17.05.02, Stephenson, The Serpent Column https://scholarwork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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