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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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페르시아 왕(재위: 기원전 522년 ~ 기원전 486년)으로, 베히스툰 비문, 헤로도토스의 기록 등을 통해 그의 통치 시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제국을 20개의 사트라피로 나누고 사트라프를 임명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으며, "왕의 길"을 건설하고 다릭 금화를 발행하는 등 경제 정책을 펼쳤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신봉자로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수사, 페르세폴리스 등지에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 원정을 단행하고 그리스 침공을 시도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는 이집트 반란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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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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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다리우스 1세 |
로마자 표기 | Dārayavauš |
통치 정보 | |
칭호 | 아케메네스 제국의 샤한샤 |
재위 기간 | 기원전 522년 9월 29일 ~ 기원전 486년 10월 |
선임자 | 바르디야 |
후임자 | 크세르크세스 1세 |
즉위 장소 | 파사르가다에 |
가족 관계 | |
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
아버지 | 히스타스페스 |
어머니 | 로도구네 또는 이르다바마 |
배우자 | 아토사 아르튀스토네 파르뮈스 프라타구네 파이디메 고브뤼아스의 딸 |
자녀 | 아르토바자네스 크세르크세스 1세 아리아비그네스 아르사메네스 마시스테스 아케메네스 아르사메스 고브뤼아스 아리오마르두스 아브로코메스 히페란테스 아르타조스트레 |
생애 | |
출생 | 기원전 550년경 |
사망 | 기원전 486년 10월 |
매장지 | 나크셰 로스탐 |
기타 | |
종교 | 인도-이란인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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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본 사료
다리우스 1세의 통치 시기에 대한 주요 역사적 사료는 다음과 같다.
- '''베히스툰 비문''': 다리우스 1세가 직접 제작한 기념비적인 비문으로, 그의 업적과 왕위 계승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책으로, 다리우스 1세의 통치와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추가적인 텍스트와 기념물, 루마니아 게를라에서 발견된 다리우스의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 로마 시대의 그리스어 텍스트로 보존된 다리우스가 가다테스에게 보낸 편지 등도 중요한 사료로 활용된다.[4][5]
아파다나 궁전의 재단 석판에는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제국 영역을 광범위하게 묘사한 내용이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4][5]
다리우스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한 광대한 영역 때문에, 그의 이름은 여러 언어로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언어 | 표기 |
---|---|
고대 페르시아어 | 다라야와우(Dārayavau, Dārayava(h)uš) |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 문자 | 𐎭𐎠𐎼𐎹𐎺𐎢𐏁|다라야바우슈peo ([30]) |
그리스어 | 다레이오스(Dareîos, Δαρεῖος|다레이오스grc)[31] |
라틴어 | 다리우스(Dārīus|다리우스la) 또는 다레우스(Dārēus|다레우스la)[31] |
엘람어 | Da-ri-(y)a-ma-u-iš|다리야마우이슈elx, Da-ri-ya-(h)u-(ú-)iš|다리야우이슈elx[32] |
아카드어 | Da-(a-)ri-ia-(a-)muš|다(아)리아(아)무슈akk, Da-(a-)ri-muš|다(아)리무슈akk[32] |
아람어 | dryhwš|드리흐와슈arc、drwš|드르와슈arc、drywš|드리와슈arc[32] |
이집트어 | tr(w)š|트르(우)슈egy, trjwš|트르주와슈egy, intr(w)š|인트르(우)슈egy, intrjwš|인트르주와슈egy[32] |
리키아어 | Ñtarijeus|느타리제우스xlc[32] |
2. 1. 베히스툰 비문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즉위 기간 동안 베히스툰 산(비시툰 산)에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바빌로니아어 등 세 가지 언어로 기념 부조를 새겼다.[41] 이 비문은 다리우스의 조상과 계보를 포함한 간략한 자서전으로 시작하며, 키루스 대왕의 죽음 이후 발생한 사건의 순서를 기록하였다. 다리우스는 자신이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으로 정당한 왕임을 여러 번 언급한다.[41] 아파다나 궁전의 재단 석판에서 다리우스는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 문자로 그의 제국의 범위를 광범위한 지리적 용어로 묘사했다.[4][5]2. 2. 헤로도토스의 역사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 ''역사''에서 페르시아 전쟁과 페르시아의 여러 황제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4] 그는 다리우스 1세의 즉위 과정, 통치 방식, 그리스 원정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다리우스 1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41]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으며, 3권의 절반과 4, 5, 6권에 걸쳐 다루고 있다. 이 기록은 가짜 찬탈자 가우마타 제거부터 시작하여 다리우스의 통치 말까지 이어진다.[4]2. 3. 구약성서
구약성서에는 두 명의 다리우스가 등장한다.에즈라에는 다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느헤미야 12:22에도 다리우스 1세가 언급된다.[4] 신전은 다리우스 6년인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신전이 파괴된 지 정확히 70년 후의 일이다. 이로써 예레미야(예레미야 29:10-14)의 70년 예언이 실현되었다.
다니엘서에는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62세에 통치를 시작하여 제국을 120명의 태수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4]
3. 생애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50년에 히스타스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8][39] 히스타스페스는 페르시아인들의 고향인 파르사 지방의 유력자였다. 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히스타스페스는 기원전 522년경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다.[3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서 창병으로 활동했다.[46]
다리우스 1세의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베히스툰 비문과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헤로도토스와 다리우스의 비시툰 비문의 공통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전임 국왕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기록마다 이름이 다름)를 몰래 살해했는데, 가우마타/스메르디스(죽은 사람과 동명이인)라는 사람이 암살당한 동생을 사칭하며 캄비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캄비세스는 사망하거나 패배하여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아케메네스 제국은 가우마타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캄비세스의 측근이었던 다리우스가 역습을 시도해 가우마타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후손이 없던 캄비세스를 뒤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우스는 대관식과 죽음 사이 어느 시점에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아카드어로 쓰인 3개 국어의 기념비적인 부조를 베히스툰 산에 남겼다. 이 비문은 그의 조상과 계보를 포함한 간략한 자서전으로 시작한다.[4][5]
다리우스 1세는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총독) 히스타스페스(우슈타스파)와 로도그네(와르다가우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8][39]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1세 자신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아케메네스 가문(하카마니쉬 가문)의 분파라고 한다.[35]
다리우스 1세는 비문에서 새로운 왕호를 사용했다. 그는 건설한 광대한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왕권관이 필요했고, 과거 아시리아의 칭호 등을 참고하여 다수의 칭호가 사용되었다.[33] 그는 키루스 2세가 사용하던 칭호를 일부 답습했지만, 더 나아가 아시리아 왕의 칭호인 "여러 왕의 왕(šar šarrāni)"에서 유래한 "여러 왕의 왕 (Xšâyathiya Xšâyathiyânâm)"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33] 이 칭호는 그가 또한 사용하고 있는 "이 땅의 왕(Xšâyathiya ahyâyâ bumiyâ)", "여러 나라의 왕(Xšâyathiya dahyunâm)"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이 아닌 다양한 이민족을 지배하는 세계 제국의 왕임을 강하게 의식한 칭호였다.[33][35] 또한, 아후라 마즈다 신의 은총(Vašnâ Ahuramazdâ)에 의해 왕이 되었다는 일종의 왕권신수 입장을 취했다.[33]
가짜 스메르디스(가우마타)를 제거한 후, 기원전 522년에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왕국 전역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란에 대처해야 했다. 이 일련의 반란에 대해서는 베히스툰 비문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3. 1. 탄생과 유년기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50년에 히스타스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8][39] 히스타스페스는 페르시아인들의 고향인 파르사 지방의 유력자였다. 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히스타스페스는 기원전 522년경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다.[3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서 창병으로 활동했다.[46]3. 2. 집권 과정
다리우스 1세의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베히스툰 비문과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헤로도토스와 다리우스의 비시툰 비문의 공통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전임 국왕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기록마다 이름이 다름)를 몰래 살해했는데, 가우마타/스메르디스(죽은 사람과 동명이인)라는 사람이 암살당한 동생을 사칭하며 캄비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캄비세스는 사망하거나 패배하여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아케메네스 제국은 가우마타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캄비세스의 측근이었던 다리우스가 역습을 시도해 가우마타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후손이 없던 캄비세스를 뒤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우스는 대관식과 죽음 사이 어느 시점에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아카드어로 쓰인 3개 국어의 기념비적인 부조를 베히스툰 산에 남겼다. 이 비문은 그의 조상과 계보를 포함한 간략한 자서전으로 시작한다.[4][5]
다리우스 1세는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총독) 히스타스페스(우슈타스파)와 로도그네(와르다가우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8][39]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1세 자신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아케메네스 가문(하카마니쉬 가문)의 분파라고 한다.[35]
다리우스 1세는 비문에서 새로운 왕호를 사용했다. 그는 건설한 광대한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왕권관이 필요했고, 과거 아시리아의 칭호 등을 참고하여 다수의 칭호가 사용되었다.[33] 그는 키루스 2세가 사용하던 칭호를 일부 답습했지만, 더 나아가 아시리아 왕의 칭호인 "여러 왕의 왕(šar šarrāni)"에서 유래한 "여러 왕의 왕 (Xšâyathiya Xšâyathiyânâm)"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33] 이 칭호는 그가 또한 사용하고 있는 "이 땅의 왕(Xšâyathiya ahyâyâ bumiyâ)", "여러 나라의 왕(Xšâyathiya dahyunâm)"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이 아닌 다양한 이민족을 지배하는 세계 제국의 왕임을 강하게 의식한 칭호였다.[33][35] 또한, 아후라 마즈다 신의 은총(Vašnâ Ahuramazdâ)에 의해 왕이 되었다는 일종의 왕권신수 입장을 취했다.[33]
가짜 스메르디스(가우마타)를 제거한 후, 기원전 522년에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왕국 전역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란에 대처해야 했다. 이 일련의 반란에 대해서는 베히스툰 비문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3. 2. 1. 베히스툰 비문
베히스툰 산(비시툰 산)에 새겨진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바빌로니아어 세 가지 언어로 된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이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마즈다의 후광을 받은 정당한 황제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33]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야를 비밀리에 살해했으나, 이 사실은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가우마타라는 인물이 나타나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거짓말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기원전 522년 3월 11일, 페르시아인들은 캄비세스 2세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7월 1일에는 가우마타를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아케메네스 가문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우마타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캄비세스 2세의 창병으로 봉사했던 다리우스는 오타네스, 인트라프레네스, 고브리아스, 히다르네스, 메가비수스, 아스파티네스와 함께 시카야우바티의 요새에서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황제로 선포되었다.
3. 2. 2. 그리스 역사가들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그리스 역사가들은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서 동생 스메르디스를 살해한 후, 파티제이테스가 자신의 동생 스메르디스(죽은 스메르디스와 동명이인)를 캄비세스의 동생으로 속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 2세는 반란 진압 중 사망하고, 오타네스는 스메르디스가 가짜임을 알아챈 후 다리우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페르시아 귀족들과 함께 스메르디스를 제거하고 다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42][46][47]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역사''의 저자인 헤로도토스는 많은 페르시아 왕들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기록을 제공했다. 그는 다리우스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으며, 3권의 절반과 4, 5, 6권을 포함했다. 이 기록은 가짜 찬탈자 가우마타의 제거로 시작하여 다리우스의 통치 말까지 이어진다.[4]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의 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가우마타가 암살된 지 며칠 후, 다리우스와 다른 여섯 명의 귀족들은 제국의 운명에 대해 논의했다. 민주 공화국(''이소노미아'')은 오타네스가, 과두정은 메가비주스가 지지했으며, 다리우스는 군주제를 지지했다. 다리우스는 공화국이 부패와 내부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며, 군주제는 다른 정부에서 불가능한 단호함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여 다른 귀족들을 설득했다.
누가 군주가 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여섯 명은 시험을 하기로 결정했고, 오타네스는 왕이 되는 데 관심이 없어 기권했다. 그들은 해가 뜰 때 말에 올라 궁궐 밖에서 모이기로 했고,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먼저 우는 말의 주인이 왕이 되기로 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다리우스의 말이 좋아하는 암컷 말의 성기를 자신의 손으로 문지른 노예 오에바레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섯 명이 모였을 때, 오에바레스는 다리우스 말의 콧구멍 옆에 손을 대었고, 말은 냄새에 흥분하여 울었다. 번개와 천둥이 뒤따랐고, 다른 사람들은 다리우스 앞에서 내려 무릎을 꿇으며 그의 신의 섭리를 인정했다.[47]
3. 2. 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다리우스 1세가 실제로는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우마타의 반란 이야기를 창작하고, 자신을 아케메네스 가문의 후손으로 묘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0][51]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베히스툰 비문의 기록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큰 줄기는 일치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50][51]
4. 정복 활동
다리우스 1세는 히스타스페스(우슈타스파)와 로도그네(와르다가우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아케메네스 왕조(하카마니쉬 가문)의 분파 출신이다.[38][39][35]
다리우스는 바르디야 사후 제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는데,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이끈 바빌로니아 반란을 조피루스의 계략으로 진압했다.[4]
스키타이족 원정에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흑해로 진출, 도나우 강을 넘어 스키타이족과 교전했으나 그들의 후퇴 전술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볼가강까지 진군했다가 트라키아로 회군했다.[76][77][78][68][79]
그는 트라키아를 침공하고 에게 해 북부 도시들을 정복했으며, 마케도니아를 종속국으로 만들었다.[14] 이오니아 반란 진압 후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50]
4. 1. 바빌로니아 반란 진압
바르디야가 살해된 후, 아케메네스 제국 전역, 특히 동부 지역에서 광범위한 반란이 일어났다. 다리우스는 제국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이끈 바빌론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오타네스가 다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리우스를 돕고자 군대의 상당 부분을 바빌론에서 철수했을 때 발생했다. 다리우스는 바빌론인들이 자신을 이용하고 속였다고 느꼈고, 이에 분노하여 대규모 군대를 모아 바빌론으로 진격했다.[4]바빌론은 굳게 닫힌 문과 방어 시설을 설치하여 다리우스에게 대항했다. 다리우스는 반란군으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받았는데, 그중 한 바빌론 사람이 "당나귀가 망아지를 낳으면 우리 도시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1년 반 동안 다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도시를 탈환할 수 없었고,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했을 때 사용했던 방법을 따라 하는 등 많은 속임수와 전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고위 장교 조피루스가 소유한 당나귀가 망아지를 낳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다리우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이후 조피루스가 탈영한 척하며 바빌론 진영에 들어가 바빌론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은 성공하여 다리우스의 군대는 결국 도시를 포위하고 반란군을 제압했다.[4]
4. 2. 스키타이 원정
스키타이족은 북부 이란 유목 부족으로, 동부 이란어(스키타이어)를 사용했으며, 메디아를 침략하여 키루스를 전투에서 죽이고, 다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흑해 연안과 중앙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방해할 위협을 가했다.[75] 그들은 도나우강, 돈강 및 흑해 사이에 살았다.다리우스는 배 다리를 사용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흑해를 건넜다. 다리우스는 동유럽의 넓은 지역을 정복했고, 심지어 도나우 강을 건너 스키타이족과 전쟁을 벌였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513년에 유럽 스키타이를 침략했는데,[13] 스키타이족은 기만 전술을 사용하고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우물을 막고, 호송대를 가로채고, 목초지를 파괴하고, 다리우스 군대에 대한 지속적인 소규모 교전을 벌여 다리우스의 군대를 피했다. 스키타이족과 싸우려던 다리우스의 군대는 스키타이 땅 깊숙이 추격했지만, 정복할 도시도 없고 약탈할 보급품도 없었다. 다리우스는 좌절하여 스키타이 지배자 이단튀르소스에게 싸우거나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지배자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파괴할 때까지 다리우스와 싸우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잃을 도시나 경작지가 없으므로 전략을 계속할 것이다.
스키타이족의 회피 전술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의 원정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바와 같이, 스키타이족이 사용한 전술은 그들의 가장 좋은 땅을 잃고 충성스러운 동맹국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것은 다리우스에게 주도권을 주었다. 그는 동유럽의 스키타이족이 경작한 땅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함대를 통해 보급을 받고 땅에서 어느 정도 생활했다. 유럽 스키타이 땅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스키타이족의 동맹국 중 하나인 부디니의 큰 요새 도시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다리우스는 결국 오아루스 강둑에서 멈추라고 명령했고, 그곳에 "서로 약 12.87km 정도 떨어진 8개의 거대한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국경 방어였다. 그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는 그 요새의 잔해가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서 있었다고 말한다. 스키타이족을 한 달 동안 추격한 후, 다리우스의 군대는 피로, 궁핍, 질병으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 더 많은 병력을 잃을 것을 우려한 다리우스는 볼가강둑에서 행진을 멈추고 트라키아로 향했다. 그는 스키타이족이 페르시아 군을 존중하도록 강요할 만큼 충분한 스키타이 영토를 정복했다.[76][77][78][68][79]
4. 3.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페르시아 전쟁)
다리우스 1세의 유럽 원정은 그의 통치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트라키아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다리우스는 또한 북부 에게해의 많은 도시들, 파이오니아를 정복했고, 마케도니아는 토지와 물을 요구한 후 자발적으로 항복하여 종속국이 되었다.[14] 그는 그 후 메가바조스에게 트라키아를 정복하도록 하고, 사르디스로 돌아와 겨울을 보냈다. 소아시아와 일부 그리스 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510년까지 페르시아의 지배에 복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 페르시아적인 그리스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아테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스-페르시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다리우스는 그를 섬기기를 원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신의 궁정과 재산을 열었다. 이 그리스인들은 다리우스를 위해 군인, 장인, 정치가, 선원으로 봉사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국의 강대함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우려가 커지고, 이오니아와 리디아에서 그리스인들의 끊임없는 간섭이 페르시아와 주요 그리스 도시 국가들 간에 다가올 갈등의 발판이 되었다.
아리스토라고라스가 이오니아 반란을 조직했을 때,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는 이오니아로 배와 군대를 파견하고 사르디스를 불태우는 방식으로 그를 지원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페르시아의 군사 및 해군 작전은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와 그리스 섬을 재점령하고,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르도니우스 휘하에서 기원전 492년에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는 것으로 끝났다.[15]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6세기 말부터 페르시아의 종속국이었지만 자치권을 유지했다. 마르도니우스의 기원전 492년 원정은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 왕국의 완전한 종속 지역으로 만들었다.[14] 이 군사적 행동은 이오니아의 반란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본토)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반 페르시아 세력이 아테네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었고, 친 페르시아 귀족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추방되었다.
다리우스는 그의 사위를 앞세워 군대를 헬레스폰트를 건너 보냄으로써 대응했다. 그러나 격렬한 폭풍과 트라키아인들의 방해로 인해 군대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복수를 모색하며, 다리우스는 그의 제독 다티스와 그의 조카 아르타페르네스 휘하에 2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성공을 거두어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마라톤까지 진격했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9,000명의 아테네 군대와 600명의 플라타이아이인, 그리고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10,000명의 경무장 병사들의 지원을 받은 강력한 아테네 군대에 패배했다. 마라톤에서의 패배는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의 종말을 알렸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장군 대신 자신이 지휘할 두 번째 군대를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했고, 그 임무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게 남겨졌다.[50]
5. 통치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2세, 캄비세스 2세에 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의 세 번째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아케메네스 가문의 9대 왕이라고 주장했다[35]。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과 관련된 주장은 선전이며, 실제로는 그가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유력하다[50]。 그리스사 및 마케도니아사 연구가 모리야 쿠미토시는 다리우스 1세가 실제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했다고 주장한다[110]。
베히스툰 비문에 언급된 다리우스 1세의 조상들 중 왕이었던 인물은 없으며, 키루스 2세 자신의 계보에는 아케메네스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110]。 키루스 2세는 자신을 "안샨의 왕 캄비세스의 아들, 안샨의 왕 키루스의 손자, 테이스페스의 후손"이라고만 칭했다[110]。 다리우스 1세는 왕위에 오른 후 키루스 2세의 이름으로 "아케메네스 가문의 키루스"라는 문구를 새긴 비문을 만들고, 키루스 2세와 캄비세스 2세, 스메르디스의 아내와 딸 모두와 결혼하여 왕가의 혈통을 독점하려 했다[110]。 이러한 사실들은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제국의 재창조자임을 보여준다[110]。
5. 1. 행정 개혁
다리우스 1세는 즉위 초, 키루스와 캄비세스 2세에게서 물려받은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4][5]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20개의 사트라피(주)로 나누고, 각 주에 사트라프(총독)를 임명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각 사트라피는 정해진 공물을 바쳐야 했다.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이오니아부터 시작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트라피 목록이 기록되어 있지만, 페르시아의 본토인 파르사는 제외되었다. 공물은 은과 금으로 바쳐졌는데, 은은 바빌로니아 화폐로, 금은 에우보이아 화폐로 측정되었다. 총 공물은 은화 15,000 이하였다.[4][5]
대부분의 사트라프는 페르시아 왕족이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다리우스 1세가 직접 임명했다. 각 주는 다시 하위 지방 단위로 나뉘었고, 각 지방에는 왕실이나 사트라프가 임명한 통치자가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사트라프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의 눈', '왕의 귀'라고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시했다.[4][5]
페르세폴리스, 수사, 바빌론은 제국 행정의 중심지였고, 박트리아, 엑바타나, 사르디스, 멤피스에는 행정 지부가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아람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제국 전역에 확산시켰다. 또한, 파르사와 페르시아인만을 위한 '아리얀'이라는 언어 체계를 만들도록 학자들을 모았는데, 이는 공식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다.[4][5]
5. 2. 경제 정책
다리우스 1세는 경제 발전을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기원전 500년경, 그는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통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약 8그램 정도의 은화와 5.40그램 정도의 금화를 만들었는데, 금화는 그의 이름을 따서 '다라야카(dārayaka)'라고 불렀다.[4][5]
다리우스 1세는 다릭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만들어 제국 전역의 무역과 상업을 통일했다. 다릭은 제국 밖에서도 널리 사용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금화는 왕만이 만들 수 있었고, 중요한 장군이나 지방 관리들은 은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은화를 사용하여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다릭 덕분에 국제 무역이 활발해져서 직물, 양탄자, 도구, 금속 제품 등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널리 퍼져나갔다. 다리우스 1세는 무역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왕의 길'을 건설하고, 우편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의 상업 해운을 지원했다.[19]
다릭은 세금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토지, 가축, 시장에 대한 세금을 걷기 쉬워졌고, 토지를 측량하고 등록하여 세금을 매겼다. 늘어난 세금 수입은 기존 시설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건조한 지역의 관개 사업에도 투자되었다. 또한 국영 은행과 민간 은행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중 무라슈 앤 선스라는 은행 회사가 유명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대출과 신용을 제공했다.[19]
다리우스 1세는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 지하 수로,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19] 헤로도토스와 앨버트 T. 올름스테드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에 카나트 관개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제국 전역의 도로와 역참 네트워크를 개선하고 확장하여, 왕, 지방 관리, 고위 관리들이 여행 허가 시스템을 통해 여행자들이 매일 물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19]
5. 3. 종교 정책
다리우스는 조로아스터교 신봉자였으며, 신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에게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도록 사명을 주었다고 믿었다. 베히스툰 비문(=비시툰 비문)에는 아후라 마즈다에게 황제로 간택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4] 다리우스는 이원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왕국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은 아샤의 적인 드루그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샤가 있음으로 자신이 정의롭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4]다리우스의 업적을 기리는 많은 상형 문자 조각들에서 그는 자신을 전 세계를 통치할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는 독실한 신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이 정복한 영토에서 다리우스는 키루스 대왕이 보여주었으며 나중에 등극할 황제들이 보여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을 똑같이 따라하였다. 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이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르고 평화적인 태도만 보인다면 "이방의" 종교로서 그들을 지지하였고, 때로는 그들의 목적에 따라 자신의 재산을 하사하기도 하였다.[4] 그는 원래 키루스 대왕이 하기로 했었던 유태교의 사원의 복구 사업에 금전적으로 지원하였고,[4] 가다타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 문화에 호의적이었으며, 엘람 사제들을 지원하였다.[4] 또한 그는 왕위와 관련된 이집트 종교 의식을 따랐으며 이집트 신인 아문을 기리는 사원을 짓기도 하였다.[4]
5. 4. 건설 사업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원정 중에 수사, 페르세폴리스, 이집트 등 제국 각지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4][5] 특히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로서, 다리우스 1세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는 건축물들로 채워졌다.다리우스 1세는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다리우스 운하를 건설했는데, 이는 현재의 자가지그에서 동쪽 나일 삼각주를 거쳐 와디 투밀라트, 팀사 호수, 대비터 호수를 지나 수에즈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기원전 497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하여 성대한 행사와 축하 속에서 운하 개통식을 거행했다. 또한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도 건설했다. 이집트 방문 중에는 다리우스 대제의 수에즈 비문을 세우고 반역 혐의로 아리안데스를 처형하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는 수사, 바빌론, 이집트, 페르세폴리스 등지에서 대규모 공사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기념비에는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이집트 상형문자 등 다양한 언어를 새겨 넣었으며,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와 장인을 고용하여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는 특별히 고용된 추방자들로, 제국의 경제를 향상시키고 문화 간 관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다리우스 1세가 사망한 후에도 건설 사업은 계속되었으며,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러한 사업을 완수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6. 죽음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이 패배한 것을 알게 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정벌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다티스 대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려 하였다.[21] 다리우스는 3년 동안 군함과 군대를 준비했지만,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결국 그리스 침략을 위한 추가적인 군대 파견은 무산되었다.[21]
기원전 486년 10월, 다리우스 1세는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미라 처리되어 나크셰 로스탐의 암벽 무덤에 안장되었다.[21] 그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은 그를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나라의 왕, 광활하고 넓은 이 위대한 땅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인, 페르시아인의 아들, 아리아인, 아리아 혈통을 가진 자"라고 소개한다.[21] 왕위는 다리우스와 아토사의 장남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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