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누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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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누마 번은 1693년 나이토 마사카쓰가 오사카 조반에 취임하며 셋쓰국과 가와치국 내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이묘가 되면서 세워졌다. 1694년 마사카쓰가 사망하고 장남 나이토 마사토모가 뒤를 이었으나, 1703년 시나노국 이와무라다 번으로 옮겨가면서 폐지되었다. 일부 문헌에서는 다카모리 번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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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누마번 | |
---|---|
개요 | |
이름 | 아카누마 번 (赤沼藩) |
유형 | 번 |
존속 기간 | 1622년 ~ 1682년 |
위치 | 무쓰국 시라카와군 아카누마 (현재의 후쿠시마현 시라카와시 아카누마) |
역사 | |
성립 | 호리 나오요리가 우오누마군에서 이봉되어 성립 (1만 석) |
번청 이전 | 호리 지카요시 시대에 고이즈미번으로 번청 이전 |
폐번 | 호리 지카히로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폐번 |
역대 번주 | |
호리 가문 | 호리 나오요리 (堀直寄): 1622년 ~ 1639년 호리 지카요시 (堀親良): 1639년 ~ 1667년 호리 지카히로 (堀親泰): 1667년 ~ 1682년 |
2. 역사
나이토 마사카쓰가 겐로쿠 6년(1693년)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이묘가 되면서 아카누마 번이 성립되었다. 이듬해 마사카쓰가 사망하고 장남 나이토 마사토모가 뒤를 이었으나, 겐로쿠 16년(1703년) 시나노국 이와무라다번으로 옮겨가면서 아카누마 번은 폐지되었다.
2. 1. 번의 성립
무사시 국 히키 군 및 히타치국, 시모사국, 고즈케국, 가즈사국 등지에 5천 석의 영지를 가졌던 나이토 마사카쓰는 겐로쿠 6년(1693년) 11월 28일에 오사카 조반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새롭게 셋쓰국과 가와치국 내 7개 군에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6천 석의 다이묘가 되면서 아카누마 번이 성립되었다. 번의 거소는 무사시 국 히키 군 아카누마 마을에 두었다고 하나,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는 "무사시국 히키군 아카마츠 마을에 거소를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마사카쓰는 이듬해인 겐로쿠 7년(1694년) 8월 7일, 오사카 조반으로 재직 중 오사카성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6일, 장남 나이토 마사토모가 가독을 상속받는 것이 인정되었다. 이때 오사카 주변의 영지는 몰수되는 등 영지 재편이 이루어져, 마사토모는 히타치국 시다·마카베·나카군, 시모사국 가토리군, 가즈사국 나가라군, 무사시국 오사토·이루마·히키군, 고즈케국 야마다군의 5개국 9개 군에 걸쳐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에는 령지주인장이 교부되었다. 마사토모는 겐로쿠 10년(1697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이후 마사토모는 겐로쿠 16년(1703년)에 시나노국 사쿠 군의 이와무라다번으로 이봉(移封)되었고, 이에 따라 아카누마 번은 폐지되었다. 나이토 가문은 이후 이와무라다 번주로서 존속하였다.
2. 2. 번주 교체와 영지 재편
초대 번주 나이토 마사카쓰는 겐로쿠 7년(1694년) 8월 7일, 오사카 조반으로 재직 중 오사카성에서 56세로 사망하였다.같은 해 10월 6일, 장남 나이토 마사토모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때 오사카 주변 영지가 몰수되는 등 영지 재편이 이루어져, 히타치국의 시다군·마카베군·나카군, 시모사국의 가토리군, 가즈사국의 나가라군, 무사시국의 오사토군·이루마군·히키군, 고즈케국의 야마다군 등 5개국 9개 군에 걸쳐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에 령지주인장이 교부되었다. 마사토모는 겐로쿠 10년(1697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에 들어갔다.
겐로쿠 16년(1703년), 마사토모는 시나노국 사쿠 군의 이와무라다번으로 이봉(移封)되었고, 이에 따라 아카누마 번은 폐지되었다. 이후 나이토 가문은 이와무라다 번주로서 존속하였다.
2. 3. 히타치 다카모리 이전설 (다카모리 번)
『간세이 중수 제 가보』에 따르면, 나이토 가는 "아카마쓰 촌"을 거점으로 삼다가 겐로쿠 16년(1703년)에 시나노국 이와무라타로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2대 번주 나이토 마사토모 시대에 히타치국 다카모리에 진야(陣屋, 영주가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관청)를 짓고 이전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부 서적에서는 이를 '다카모리번'(高森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카모리 촌에는 원래 게이안 시대에 쓰치우라번(구키 타네쓰나 관할)의 비지령(飛地領, 본 영지와 떨어진 영지)을 관리하던 진야가 있었는데, 나이토 가문이 이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구키 가문은 간분 9년(1669년)에 쓰치우라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야마토 촌사』(1974년)와 『번사 사전』(1976년) 등에서는 나이토 마사토모가 히타치국 나카군 다카모리 촌에 진야를 건설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번과 성하 마을의 사전』 역시 "다카모리번" 항목에서, 마사토모가 가독을 계승한 후 영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다카모리 진야를 짓고 다카모리번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같은 책의 "아카누마번" 항목에서는 영지 재편 사실만 언급할 뿐 다카모리로의 이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이와무라타로 영지를 옮기면서 아카누마번이 폐지되었다고 서술하여 내용상 차이를 보인다.
한편,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에서는 겐로쿠 8년(1695년)에 "아카마쓰번"이 히타치국 다카모리로 이전하면서 폐번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 이 사전의 "다카모리번" 항목은 에치젠 다카모리번에 대한 설명이며, 히타치 다카모리번에 대한 별도 항목은 없다.) 그러나 같은 사전의 '다카모리 촌' 항목을 보면, 쓰치우라번 영지가 된 이후 "막부와 하타모토 오기 씨의 상급지(相給地, 여러 영주가 나누어 다스리는 땅)"가 되었다고만 적혀 있다. 또한 "막부령이 된 후 겐로쿠 16년까지 진야가 설치되었다", "진야가 폐지된 후에는 대관 지행소(代官支配所)가 되었다"는 기술은 있지만, 나이토 가문의 지배나 진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 사전에 따르면, 나이토 가문의 영지였던 아카누마 촌은 겐로쿠 15년(1702년)에 막부령이 되었다.
이처럼 아카누마번이 히타치 다카모리로 이전하여 '다카모리번'이 되었다는 설은 여러 자료에서 언급되지만, 공식 기록이나 다른 사료들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2. 4. 시나노 이와무라다 번으로의 이봉
나이토 마사토모는 겐로쿠 16년(1703년) 8월 14일, 시나노국 사쿠 군의 이와무라다 번으로 옮겨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아카누마 번은 폐지되었고, 영지는 사쿠 군 내로 정리되었다. 나이토 가문이 다스리던 다카모리 진야는 이때 폐지되었으며, 현재 진야 터나 진야 해자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이후 나이토 가문은 이와무라다 번주로서 존속하였다.3. 역대 번주
후다이 다이묘인 나이토 가문이 번주를 맡았다. 석고는 1만 5천 석이었다.
3. 1. 나이토 가문
内藤正勝일본어1만 석 가증 입봉
(1693년 ~ 1694년)
다다마사의 넷째 아들 나이토 마사쓰구의 사위.
内藤正友일본어
(아버지 사망으로 인해)
(1694년 ~ 1703년)
시나노 국 이와무라다 번 1만 6천 석으로 이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