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코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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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코네번은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이이 나오마사가 1600년에 사와야마 번을 개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이 나오마사의 사후 장남 이이 나오쓰기가 히코네 성을 완성하고 입성하여 히코네 번이 되었다. 이후 이이 씨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신으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며 푸다이 다이묘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누렸다. 막말에는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로 재임하며 안세이 대옥을 주도했으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암살당했다.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 편에 서서 막부에 대항, 메이지 유신 이후 히코네 현이 되었고, 이이 가문은 백작 작위를 받았다. 히코네번의 가신단은 가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번주 일문과 번사들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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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코네시 - 시가 현립 대학
시가 현립 대학은 1995년 개교한 시가현 소재 공립 대학으로 환경과학부, 공학부, 인간문화학부, 인간간호학부로 구성되어 지역사회 연계 강화 및 국제 교류 확대를 추구하며 비와호 호반 근처 캠퍼스가 공공 건축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 이이 가몬노카미가 - 이이 나오스케
이이 나오스케는 1815년에 태어나 1850년 히코네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다이로로서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막부 정치를 주도했으나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비판받았고,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서 암살당했다. - 이이 가몬노카미가 - 이이 나오아키
이이 나오아키는 히코네 번의 15대 번주로, 다이로에 임명되었으나 이에나리파 숙청 사건으로 사임 후 개명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서양식 군대 연성에 힘썼으며, 가악 연주와 악기 수집에도 조예가 깊었다. - 무사시국의 번 - 돗토리번
돗토리 번은 1600년 이케다 가문이 호키국을 영지로 하사받아 시작되어, 영지 교환 후 이케다 가문이 에도 시대 말까지 다스렸으며, 메이지 정부군에 가담 후 폐번치현으로 돗토리현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이케다 가문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 무사시국의 번 - 다카사키번
에도 시대 고즈케국 다카사키 지역을 다스린 다카사키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이 나오마사에게 성을 건설하게 하면서 시작되어 여러 가문이 통치했으며, 막부 말기 덴구토 당의 난 진압, 보신 전쟁 때 신정부군에 합류 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2. 역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이자 뛰어난 장군이었던 이이 나오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옛 영지였던 비와호 연안의 사와야마 성으로 옮겨져 18만 석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 영지는 원래 사와야마 번(佐和山藩)이라고 불렸다.[1] 나오마사는 적의 옛 영지였던 사와야마를 싫어하여 새로운 히코네 성 건설을 계획했지만, 완공 전에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이이 나오카쓰가 1606년에 공사를 완료하여 히코네 번이 시작되었다.
이이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히코네 성에서 통치하며 막부의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이이 나오타카 시대에는 이이 가문 가신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이이 가문 가신이 된 옛 하타모토 사이의 내분이 해결되었고, 1615년, 1617년, 1633년 세 차례에 걸쳐 영지 규모가 5만 석씩 증가하여 총 30만 석에 달했다. 또한, 오미 국의 5만 석에 달하는 텐료 영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 실질적인 영지 규모는 35만 석에 이르렀다.
히코네 번 이이 가문은 막부 각료를 지냈고, 사카이 가가라가미 가문, 혼다 가문 등 푸다이 유력 다이묘가 전봉을 반복하는 가운데, 단 한 번의 전봉도 없이 석고도 푸다이 다이묘 중 최고였다. 에도 성 내의 시코세키는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과 함께 쇼군의 집무 공간인 "오쿠"에 가장 가까웠고, 신하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리인 "타메마"였다.[5] 또한, 나오오키, 나오유키, 나오아키라, 나오스케는 타이로 직에 4대 5회(나오오키가 2회 취임) 취임했다.
막말 시대, 타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 계승 과정에서 사실상 국가 통치자였다.[1] 해리슨 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의 쇄국 정책을 끝내려 했으나, 존왕양이 사상을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의 분노를 사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에서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1862년 히코네 번 영지는 10만 석 감소했다. 1864년 금문의 변에서 이이 나오노리가 활약하여 3만 석을 회복했고, 초슈 정벌, 덴추구미 사건, 미토 반란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히토츠바시파가 주도하는 막부에 불만을 느끼고, 막부 군사 제도와 장비가 사쓰마-조슈 동맹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코네 번은 보신 전쟁에서 가장 먼저 막부에 대항해 황실을 지지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히코네 번 군대는 오사카 성에 주둔했으나 막부군에 합류하지 않고 귀환했다. 이후 오가키 번 등 막부 측과 전투를 벌였고, 콘도 이사미 체포와 신센구미 진압에 참여했다. 메이지 정부는 판적폐지 직전 히코네 번에 2만 석을 추가로 주었다. 히코네 번은 히코네 현, 나가하마 현, 이누카미 현을 거쳐 시가 현이 되었다. 이이 나오노리는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1. 번의 성립과 초기 역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이자 뛰어난 장군이었던 이이 나오마사는 12만 석의 다카사키 번 다이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의 영지는 18만 석으로 증가했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옛 영지였던 비와호 연안의 사와야마 성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영지는 원래 사와야마 번(佐和山藩)이라고 불렸다.[1] 이이 나오마사는 적의 옛 영지였던 사와야마를 싫어하여 새로운 히코네 성 건설을 계획했지만, 완공 전에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이이 나오카쓰가 1606년에 공사를 완료했다.겐나 원년(1615년), 나오쓰기는 병약하여 오사카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나오카쓰로 이름을 고쳐 우에노 안주 번에 3만 석을 분지받아 이봉되었다. 대신 참전하여 활약한 그의 동생 이이 나오타카가 번주가 되었다.
이이 씨는 원래 토토미 국의 몰락한 국인 가문으로,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아 신참임에도 도쿠가와 씨의 중신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멸망한 다케다 씨의 옛 신하들을 받아들이거나, "(御)붙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깃본에서 나오마사의 기키를 거쳐 이이 가문의 가신으로 편입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등, 이에야스의 의향을 반영하여 가신단을 충실화했다.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나오쓰기(나오카쓰)와 붙인 사람들의 대립, 붙인 사람들 상호 간의 대립 등으로 번정이 혼란스러워졌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오쓰기를 당주로서의 기량이 없다고 판단하여 병약을 명목으로 번주 교체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오타카 아래에서 번정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이이 가문에 남은 붙인 사람들은 히코네 번의 중신층을 형성하게 되었다.[4]
나오타카는 막부 중추로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겐나 원년·겐나 3년(1617년)·간에이 10년(1633년)의 3회에 걸쳐 각각 5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따라서 30만 석의 대영주가 되었다. 또한 막부령의 성부미(城付米) 예취로서 5만 표(지행고 환산 5만 석)를 부여받아 35만 석의 격식을 얻게 되었다.
2. 2. 이이 나오타카 시대
겐나 원년, 나오쓰기는 병약하여 오사카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나오카쓰로 이름을 고쳐 우에노 안주 번에 3만 석을 분지받아 이봉되었다. 대신 참전하여 활약한 그의 동생 나오타카가 번주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오쓰기의 2대 번주로서의 이력은 삭제되고, 나오타카를 2대로 하였다(후술).[4]이이 씨는 원래 토토미의 몰락한 국인 가문으로,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아 신참이면서도 도쿠가와 씨의 중신 중 한 명으로 올랐다. 그 과정에서 멸망한 다케다 씨의 옛 신하들을 받아들이거나, "(御)붙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깃발 아래에서 나오마사의 가신을 거쳐 이이 가문의 가신으로 편입된 가신들을 받아들이는 등, 이에야스의 의향을 반영하는 형태로 가신단을 충실화했다. 반면, 초기 번의 인사는 이에야스의 허가를 필요로 했고, 붙인 사람 중에는 같은 도쿠가와 가신인데도 나오마사의 배종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나오쓰기(나오카쓰)와 붙인 사람들의 대립, 붙인 사람들 상호 간의 대립 등으로 번정이 혼란스러워졌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오쓰기를 당주로서의 기량이 없다고 판단하여 병약을 명목으로 번주의 교체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오타카 아래에서 번정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이이 가중에 남은 붙인 사람들은 히코네 번의 중신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신 중, 기마타·안하라·미우라 세 가문은 유년기의 나오마사를 보호했던 니이노 친규의 사위이다.
나오타카는 막부 각료로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겐나 원년·겐나 3년·간에이 10년의 3회에 걸쳐 각각 5만 석의 가증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30만 석의 대봉을 얻은 대다이묘가 되었다. 또한 막부령의 성부미(城付米) 예취로서 5만 표(지행고 환산 5만 석)를 부여받아 35만 석의 격식을 얻게 되었다.
2. 3. 막말 시대
막말 시대 타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 계승 과정에서 사실상 국가 통치자였다.[1] 그는 정적을 제거하고 해리슨 조약을 체결하여 쇄국 정책을 끝내려 했으나, 존왕양이 사상을 가진 사무라이들의 분노를 사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에서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1862년 히코네 번 영지는 10만 석 감소했다. 1864년 금문의 변에서 마지막 다이묘 이이 나오노리가 활약하여 3만 석을 회복했고, 초슈 정벌, 덴추구미 사건, 미토 반란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나오노리는 히토츠바시파가 주도하는 막부에 불만을 느끼고, 막부 군사 제도와 장비가 사쓰마-조슈 동맹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히코네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푸다이 다이묘 중 첫 번째였지만, 보신 전쟁에서 가장 먼저 막부에 대항해 황실을 지지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히코네 번 군대는 오사카 성에 주둔했으나 막부군에 합류하지 않고 귀환했다. 이후 히코네 번은 오가키 번 등 막부 측과 전투를 벌였고, 콘도 이사미 체포와 신센구미 진압에 참여했다.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 직전 히코네 번에 2만 석을 추가로 주었다.
2. 4. 메이지 유신과 히코네 번
1615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나오쓰기는 우에노 안주 번에 3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참전하여 활약한 그의 동생 나오타카가 번주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오쓰기의 2대 번주로서의 이력은 삭제되고, 나오타카를 2대로 하였다.막말 시대, 막부 내에서 타이로 지위에 오른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도쿠가와 이에모치 사이의 쇼군 계승 기간 동안 사실상 국가를 통치했다.[1] 그는 정적을 제거하고 해리슨 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의 쇄국 정책을 끝내려 했기에, 존왕양이 사상을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의 분노를 사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에서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1862년 히코네 번의 영지는 10만 석 감소했다. 1864년 금문의 변에서 마지막 다이묘인 이이 나오노리가 활약하여 3만 석을 회복했고, 초슈 정벌, 덴추구미 사건 진압, 미토 반란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나오노리는 이이 나오스케에게 적대적이었던 히토츠바시파가 지배하는 막부의 태도에 불만을 느꼈고, 막부의 군사 제도와 장비가 사쓰마-조슈 동맹에 비해 구식임을 깨달았다.
히코네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푸다이 다이묘 중 첫 번째였지만, 보신 전쟁에서 가장 먼저 편을 바꿔 막부에 대항, 황실을 지지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히코네 번 군대는 오사카 성에 주둔했지만 막부군에 합류하지 않고 귀환했다. 이후 히코네 번은 막부 측 오가키 번 등과 전투를 벌였고, 콘도 이사미 체포와 신센구미 진압 등에 참여했다. 메이지 정부는 판적폐지 직전 히코네 번에 2만 석을 추가로 주었다. 히코네 번은 히코네 현이 되었고, 나가하마 현과 이누카미 현을 거쳐 시가 현으로 이관되었다. 이이 나오노리는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역대 번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막말의 번주 나오스케이다. 1850년, 형 나오아키라가 사망하여 번주가 된 그는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쇼군 계승 문제에서 난키파에 속하여 이치노하시 요시노부 등 이치노하시파와 대립,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14대 쇼군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858년 대로에 취임하여 칙허 없이 일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고, 이를 문제삼아 질문하러 온 구 이치노하시파 요인을 은거시키고 언론인에게 사형을 내리는 등 안세이 대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1860년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미토 번 낭사 등에게 암살당했다. 같은 해 번주가 된 차남 나오노리는 1862년 나오스케의 죄를 물어 10만 석을 감봉당하고 예취지 5만 석도 몰수당했다.
1864년 금문의 변에서 공을 세워 구 영지 중 3만 석을 회복하고, 텐추구미의 변, 텐구토의 난, 장주 정벌에도 참전하여 막부의 군사 활동에 협력했다. 그러나 장주와의 싸움에서 구식 군제와 장비 탓에 대패했다. 당시 막부 내에서 구 이치노하시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히코네 번에 대한 보답 없는 대우를 그들의 보복으로 여긴 것이 다이세이 호칸 이후 사쓰마·쵸슈 신정부 지지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1867년 다이세이 호칸 이후, 푸다이 필두임에도 신정부 쪽으로 번론을 전향했다. 이듬해 1868년 토바·후시미 전투에서 가로 오카모토 한스케는 구 막부군과 함께 오사카 성에 주둔했으나, 번병 주력은 동사 근처 오쓰에서 사쓰마·쵸슈의 후방 지원을 맡았고, 오가키 번 출병에는 선봉이 되었다.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에 가담, 오야마나 호노미야 등 각지를 전전하고 콘도 이사미 체포에도 관여했다. 전공으로 쇼텐로쿠 2만 석을 조정으로부터 받았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코네 현이 되었다. 이후 나가하마 현·이누카미 현을 거쳐 시가 현에 편입되었다.
1884년 이이 가는 백작이 되어 화족에 들어갔다.
3. 역대 번주
4. 지번
1714년부터 1734년까지 존속한 히코네번의 지번이다. 이이 나오오키의 14남인 이이 나오사다가 1만 석을 분여받아 입번하였다. 1732년, 이이 나오사다는 소자반에 취임하였다. 이이 나오사다가 형이자 9대 번주인 이이 나오스에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폐번되었다. 이이 나오사다는 이후 히코네번의 10대, 12대(재임) 번주가 되었다.[2][3]
5. 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은 이이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그 과정에서 멸망한 다케다 씨의 옛 신하들을 받아들이거나, "(御)붙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깃발 아래에서 나오마사의 기키를 거쳐 이이 가문의 가신으로 편입된 가신들을 받아들이는 등, 이에야스의 의향을 반영하여 가신단을 충실히 하였다.[4]
초기 번의 인사는 이에야스의 허가를 필요로 했고, 붙인 사람 중에는 같은 도쿠가와 가신인데도 나오마사의 배종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나오쓰기(나오카쓰)와 붙인 사람들의 대립, 붙인 사람들 상호 간의 대립 등으로 번정이 혼란스러워졌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오쓰기를 당주로서의 기량이 없다고 판단하여 병약을 명목으로 번주의 교체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오타카 아래에서 번정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이이 가중에 남은 붙인 사람들은 히코네 번의 중신층을 형성하게 되었다.[4] 중신 중, 기마타·안하라·미우라의 세 집안은 유년기의 나오마사를 보호했던 니이노 친규의 사위이다.
히코네 번의 가신은 크게 '번주 일문'과 '번사'로 나뉜다.
번주 일문 (藩主一門)
번사 (藩士)
5. 1. 가로 (家老)
다음은 히코네번의 가로(家老) 목록이다.- '''아마하라 스케에몬가'''(차석 가로, 5000석): 이이 나오마사의 은인인 니이노 친요리(新野親矩)의 딸이 시집온 집안
- '''나가노 주로자에몬가'''(4000석)
- '''사이고 토우자에몬가'''(3500석)
- '''나카노 스케타유가'''(3500석, 번주 일문): 이이 나오우지(井伊直氏)의 동생 나카노 나오후사(中野直房)를 시조로 하는 집안
- '''오노다 코이치로가'''(3000석)
- '''미우라 요에몬가'''(국가로, 2500석): 이이 나오마사의 은인인 니이노 친요리(新野親矩)의 딸이 시집온 집안
- '''마쓰시타 겐타로가'''(200석, 번주 일문): 마쓰시타 노쓰나(松下之綱)의 처의 형제이자 이이 나오마사의 계부 마쓰시타 키요카게(松下清景)를 시조로 하는 집안
- '''우쓰기 지부에몬가'''(2500석)
- '''오카모토 햄스케가'''(1950석)
- '''요코지 슈리가'''(2600석)
- '''카나나 튜쿠고가'''(2300석, 이이가 서류, 번주 일문): 이이 요시나오(井伊良直)의 동생 카나나 마사나오(貫名政直)를 시조로 하는 집안. 막말에 명적을 재흥한다.
- '''니이노 사마스케가'''(2000석, 번주 일문): 이이 나오마사의 은인인 니이노 친요리(新野親矩)의 명적을 재흥한다.
- '''가와데 슈스이가'''(4000석, 번주 인척): 초대 요시노리(良則)의 정실에 번주 이이 나오마사의 누이 슌코인을 맞이했다.
- '''와키 고에몬가'''(2000석)
5. 2. 번주 일문 (藩主一門)
히코네번의 번주 가문은 크게 '번주 일문'과 '번사' 두 부류로 나뉜다. 번주 일문은 번주와 혈연 관계가 있는 가문을, 번사는 그 외 가신들을 의미한다.번주 일문 (500석 이상)
번사 (500석 이상)
번사 (500석 이하)500석 이하의 번사 가문은 매우 많으며, 소마 히코우에몬가(200석), 소마 우헤이지가(130석)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가문들이 있었다. 이들은 450석에서 90석까지 다양한 봉록을 받았다.
5. 3. 번사 (藩士)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은 이이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그 과정에서 멸망한 다케다 씨의 옛 신하들을 받아들이거나, "(御)붙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깃발 아래에서 나오마사의 기키를 거쳐 이이 가문의 가신으로 편입된 가신들을 받아들이는 등, 이에야스의 의향을 반영하여 가신단을 충실히 하였다.[4]초기 번의 인사는 이에야스의 허가를 필요로 했고, 붙인 사람 중에는 같은 도쿠가와 가신인데도 나오마사의 배종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나오쓰기(나오카쓰)와 붙인 사람들의 대립, 붙인 사람들 상호 간의 대립 등으로 번정이 혼란스러워졌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오쓰기를 당주로서의 기량이 없다고 판단하여 병약을 명목으로 번주의 교체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오타카 아래에서 번정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이이 가중에 남은 붙인 사람들은 히코네 번의 중신층을 형성하게 되었다.[4]
가로(家老)는 다음과 같다.
번사(500석 이상)는 다음과 같다.
번사(500석 이하)는 다음과 같다.
6. 막말의 영지
히코네번은 에도 시대에 여러 구니(国)에 걸쳐 영지를 보유했다. 이 영지들은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적인 토지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한 고쿠다카(石高)로 계산되었다.[2][3]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지시마국(千島国) 에토로후군(択捉郡) 및 히다카국(日高国) 사루군(沙流郡)의 일부도 관할했다. 또한, 가모군(蒲生郡) 7개 마을, 간자키군(神崎郡) 1개 마을, 아이치군(愛知郡) 21개 마을, 사카타군(坂田郡) 5개 마을, 아사이군(浅井郡) 24개 마을, 이카군(伊香郡) 13개 마을의 막부령을 관리했으며, 다른 번이나 현에 편입된 마을을 제외하고는 본번에 편입되었다.
참조
[1]
서적
Ii Naomasa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4]
서적
井伊直政家臣団の形成と徳川家中での地位および近世初期における譜代大名〈家中〉の成立
吉川弘文館
[5]
서적
江戸城-本丸御殿と江戸幕府
[6]
웹사이트
井伊家系図
http://hikone-castle[...]
彦根城博物館
2016-11-10
[7]
문서
北条氏照家臣・狩野一庵の子主膳(氏照の落胤とも)の子
[8]
문서
藩主・井伊直中の子
[9]
문서
母方従弟井伊直陽の養子として与板藩主となる。守吉の家を継いだ守喜の子とする系譜もある。
[10]
문서
次席とも、序列は庵原家に次ぐ。
[11]
문서
長野業正の庶子もしくは養子業親の子
[12]
문서
徳川家康臣・西郷元正の子、西郷局の従兄弟
[13]
문서
直房の曾孫
[14]
문서
彦根藩士・宇津木氏からの養子
[15]
문서
彦根藩家老/中野助太夫家・中野直之の次男、直政の筆頭家老・松下清景の養嗣子
[16]
문서
彦根藩家老/宇津木治部右衛門家・宇津木久純の四男
[17]
문서
藩主・直中の子中顕の子
[18]
문서
藩主・直中の十男
[19]
문서
彦根藩家老/新野左馬助家・新野親良の三男
[20]
문서
井伊中顕の子
[21]
문서
木俣清佐衛門家・守閑の次男
[22]
문서
下総相馬氏・相馬胤方の子
[23]
문서
相馬彦右衛門家・相馬胤用の後裔/中村庄左衛門の嫡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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