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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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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병직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 경제사, 특히 일제강점기 연구에 집중했으며, 식민지 시기 경제와 생활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고 민족해방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선회했다.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위안부 문제 및 독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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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안병직
한자 이름安秉直
로마자 표기An Byeong-jik
출생일1936년 6월 28일
출생지경상남도 함안군
국적대한민국
학력
출신 학교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석사
경력
직업경제학자
소속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 교수, 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장,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기타
주요 관심 분야역사
경제

2. 학문적 생애 및 사상

안병직은 1936년 함안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를 거쳐 2001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4] 전공분야는 한국경제사로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기 경제와 생활의 변화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 기존 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많은 갑론을박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이후 독립된 한국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요소들이 일제 시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그의 논문 내용은 이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해 안병직 교수는 통계와 역사적 자료를 기초로 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기존 국사학계의 저항과 침략의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그 시대의 변화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근대적인 제도와 요소들이 해방 이후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 시기 형성된 것들이 있다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식민지라는 아픔 때문에 우리 역사가 창조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8] 다만 학계에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제자이기도 한 허수열 교수 등이 이에 대해 통계와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허구가 많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본인 주장에 의하면, 1960년에 터진 4.19 혁명 이후 마르크스 경제학에 심취해 마오쩌둥의 이론을 참고하여 한국사회 성격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인식하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를 저술해 민족해방(NL) 운동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9] 1980년대 전반까지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박현채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의 입장에서 한국 경제를 비판했다. 그리고 이땐 한국경제를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80년대 이후 한국경제성장을 보면서 기존 이념과 이론을 대신할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19]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도쿄대학교 경제학부 객원교수를 지냈다. 1987년, 이대근과 함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허나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그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일본기업인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본 학자와 공동연구를 수행한 사실 등을 언급하며, 결국 일본 우익들의 논리를 한국인 학자라는 그럴듯한 포지션 아래 충실히 대변해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오히려 좌파쪽의 학자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대표적인 좌파학자 한홍구와 정대협 전 간부 정진성 교수등이 도요다 재단의 연구지원비로 연구를 수행했고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특보 문정인 교수는 심지어 전범 사사카와 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19]

하여튼 이 과정에서 영국 등 선진자본주의의 발전양식과 서구의 종속이론을 한국에 기계적으로 적용해 온 문제점을 인식하고,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가들은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흡수하여 발전한다는 캐치업(catch-up) 이론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한국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종속성을 띄면서도 독자적 발전과정을 걷는다는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1990년대, 서울대학교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초대 및 2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의 제자인 이영훈 등이 진행한 일명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집필에 참여하였다. 2002년, 후쿠이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를 지냈다. 2006년, 뉴라이트 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7년 ~ 2008년 5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2. 1. 초기: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 및 민족해방(NL) 운동 참여

2. 2. 중기: '중진자본주의론'으로의 전환

2. 3. 후기: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

안병직이영훈 등과 함께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의 한국 경제사를 연구하며,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 연구로 알려져 있다.[7] 나카무라 테츠, 호리 카즈오 등 일본 경제학자들과 "한국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조선 경제사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7] 이 연구 결과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 주도하에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고, 조선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적응하여 자본가·노동자 계층에서 일정한 성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종종 일제의 지배를 긍정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 친일파로 비판받는다.

이 공동 연구가 토요타 재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연구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도 있었다.[8][9]

과거 정대협과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으나, 이후 한국 신문 인터뷰에서 "문제는 강제 동원이다.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3년 활동하다 그만둔 이유는, 그들(정대협)의 목적이 위안부의 본질을 파악하여 오늘날의 비참한 위안부 현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여 한국 내에서 파장을 일으켰다.[10]

2012년 5월, 안병직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발견했다. 이는 1943~44년 버마와 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창고에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이며, 안병직은 그 연구를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로 2013년 8월 한국에서 출판했다.[13][14] 이 책에서 안병직은 "문제는 전차금을 상환한 경우에도 폐업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군 위안부들의 처했던 위와 같은 상황을 '성노예 상태'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결론지었다.[15]

일제강점기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안병직은 식민지 시대라고 해도 문화 개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전근대적인 상황으로 방치하면 통치 비용이 막대해지므로 금융, 재정, 토지 소유 제도, 사유 재산 제도, 호적 제도, 학교 시설, 사법 제도 등을 모두 바꾸었다고 주장한다.[12]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의 건국이라는 의견에 대해, 안병직은 국가의 구성 요소는 주권·영토·국민이며, 상하이 임시정부는 소수의 독립운동 단체일 뿐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한국의 건국은 1948년이라고 주장한다.[11]

2. 3. 1.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및 반박

안병직은 이영훈 등과 함께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의 한국 경제사를 연구하며,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 연구로 알려져 있다.[7] 나카무라 테츠, 호리 카즈오 등 일본 경제학자들과 "한국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조선 경제사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7] 이 연구 결과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 주도하에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고, 조선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적응하여 자본가·노동자 계층에서 일정한 성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종종 일제의 지배를 긍정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 친일파로 비판받는다.

이 공동 연구가 토요타 재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연구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도 있었다.[8][9]

과거 정대협과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으나, 이후 한국 신문 인터뷰에서 "문제는 강제 동원이다.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3년 활동하다 그만둔 이유는, 그들(정대협)의 목적이 위안부의 본질을 파악하여 오늘날의 비참한 위안부 현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여 한국 내에서 파장을 일으켰다.[10]

2012년 5월, 안병직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발견했다. 이는 1943~44년 버마와 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창고에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이며, 안병직은 그 연구를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로 2013년 8월 한국에서 출판했다.[13][14] 이 책에서 안병직은 "문제는 전차금을 상환한 경우에도 폐업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군 위안부들의 처했던 위와 같은 상황을 '성노예 상태'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결론지었다.[15]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강제성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일제강점기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안병직은 식민지 시대라고 해도 문화 개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전근대적인 상황으로 방치하면 통치 비용이 막대해지므로 금융, 재정, 토지 소유 제도, 사유 재산 제도, 호적 제도, 학교 시설, 사법 제도 등을 모두 바꾸었다고 주장한다.[12]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형적인 논리로, 식민 지배의 불가피성과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의 건국이라는 의견에 대해, 안병직은 국가의 구성 요소는 주권·영토·국민이며, 상하이 임시정부는 소수의 독립운동 단체일 뿐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한국의 건국은 1948년이라고 주장한다.[11]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와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의 핵심 주장 중 하나이다.

3. 주요 활동 및 경력

안병직은 1936년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났다.[4]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1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4]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도쿄대학 경제학부 객원교수를 지냈고, 1987년에는 이대근과 함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전반까지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박현채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의 입장에서 한국 경제를 비판했다. 1990년대에는 서울대학교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에는 후쿠이 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를 지냈다. 2006년 뉴라이트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계간 시대정신 발행인 및 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2014년 10월에는 자유와창의교육원 석좌교수가 되었다.

4. 논란이 된 발언

1992년 월간 사회평론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해야〉라는 제목의 글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는 서로 다른 제도로 정신대에 징발되어 노동력만을 제공한 사람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해야한다"고 주장했다.[20][21]

2006년 12월 6일 MBC <뉴스현장> '뉴스초점' 코너에 출연해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동원했겠느냐." 등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22]

과거 정대협과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고, 이 조사에서 강제 동원으로 인정된 위안부는 김학순과 문옥주이다. 이 조사에 대해 이후 한국 신문 인터뷰에서 "문제는 강제 동원이다.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3년 활동하다 그만둔 이유는, 그들(정대협)의 목적이 위안부의 본질을 파악하여 오늘날의 비참한 위안부 현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여 한국 내에서 파장을 일으켰다.[10]

2012년 5월 안병직이 발견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는 1943~44년 버마와 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창고에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이며, 안병직은 그 연구를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로 2013년 8월 한국에서 출판했다.[13][14] 이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p181에서 안병직은 "문제는 전차금을 상환한 경우에도 폐업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군 위안부들의 처했던 위와 같은 상황을 '성노예 상태'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결론짓고 있다.[15]

2008년에는 독도에 대해 "사실 일본도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럼 현재 상황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일본보다 법률적, 사료적 증거가 많다고 꼭 주장할 수가 없다." 라고 발언하였다.[23]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 "나라의 구성 요소인 주권, 영토 등이 없었다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그저 독립단체였을 뿐이고 진짜 건국은 1948년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의 건국이라는 의견에 대해 국가의 구성 요소는 주권·영토·국민이며, 상하이 임시정부는 소수의 독립운동 단체일 뿐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한국의 건국은 1948년이라고 주장한다.[11]

4. 1.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

1992년 월간 사회평론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해야〉라는 제목의 글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는 서로 다른 제도로 정신대에 징발되어 노동력만을 제공한 사람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해야한다"고 주장했다.[20][21]

2006년 12월 6일 MBC <뉴스현장> '뉴스초점' 코너에 출연해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동원했겠느냐." 등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22]

과거 정대협과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고, 이 조사에서 강제 동원으로 인정된 위안부는 김학순과 문옥주이다. 이 조사에 대해 이후 한국 신문 인터뷰에서 "문제는 강제 동원이다.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3년 활동하다 그만둔 이유는, 그들(정대협)의 목적이 위안부의 본질을 파악하여 오늘날의 비참한 위안부 현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여 한국 내에서 파장을 일으켰다.[10]

2012년 5월 안병직이 발견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는 1943~44년 버마와 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창고에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이며, 안병직은 그 연구를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로 2013년 8월 한국에서 출판했다.[13][14] 이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p181에서 안병직은 "문제는 전차금을 상환한 경우에도 폐업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군 위안부들의 처했던 위와 같은 상황을 '성노예 상태'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결론짓고 있다.[15]

4.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도 관련 발언

안병직은 1992년 월간 사회평론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해야> 라는 제목의 글에서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는 서로 다른 제도로 정신대에 징발되어 노동력만을 제공한 사람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해야한다"고 주장했다.[20][21]

2006년 12월 6일 MBC <뉴스현장> '뉴스초점' 코너에 출연, 황헌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시대 공공연한 토지수탈은 없었다.",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동원했겠느냐.", "지배는 지배고 연구는 연구다. 강제지배를 하니까 연구가 안된다 그러면 말이 안되니까….", "오늘날 우리가 행복할 조건을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해주면 거부할 이유는 없다." 등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있었다.[22]

2008년에는 독도에 대해 "사실 일본도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럼 현재 상황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일본보다 법률적, 사료적 증거가 많다고 꼭 주장할 수가 없다." 라고 발언하였다.[23]

또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 "나라의 구성 요소인 주권, 영토 등이 없었다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그저 독립단체였을 뿐이고 진짜 건국은 1948년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5. 저서

안병직은 번역서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일본군 위안소 간리닌노 닛키/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한국어, 2013)가 있다. 이 책은 이숲 출판사와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출판되었다. 그 외 저서로는 《근대 조선 공업화의 연구》(1993), 《조선 토지조사 사업의 연구》(1997),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대만》(2004) 등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Scholar discloses diary by manager of WWII Japanese military brothels http://www.koreahera[...] The Korea Herald 2013-08-07
[2] 웹사이트 History http://www.naksung.r[...]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 웹사이트 South Korea's 'New Right' https://www.wsj.com/[...] The Wall Street Journal 2006-06-07
[4] 웹사이트 An Byeong-jik https://web.archive.[...] Kyobo Book 2015-01-03
[5] 뉴스 ニューライトの名付け親、「時代精神」安理事長(5/5)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6-22
[6] 웹사이트 新東亜 40年‘知的遍歴’の終着駅、自立的資本主義~安秉直ソウル大名誉教授(経済学) https://web.archive.[...]
[7] 서적 朝鮮近代の歴史像、朝鮮近代の経済構造、近代朝鮮水利組合の研究、近代朝鮮工業化の研究 日本評論社 1988-1993
[8] 기타
[9] 뉴스 安秉直・李栄薫、日本から金をもらって「植民地研究」 http://www.ohmynews.[...] OhmyNews 2006-12-11
[10] 웹사이트 教科書フォーラムの安秉直、「慰安婦は自発的」妄言で波紋 http://www.dailyseop[...] デイリー・サプライズ 2006-12-06
[11] 뉴스 ニューライトの名付け親、「時代精神」安理事長(2/5)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6-22
[12] 뉴스 ニューライトの名付け親、「時代精神」安理事長(4/5)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6-22
[13] 웹사이트 日本軍慰安所管理人の日記 http://www.naksung.r[...] 落星台経済研究所
[14] 뉴스 慰安所:朝鮮人男性従業員の日記発見 ビルマなどでつづる 毎日新聞 2013-08-07
[15] 웹사이트 日本軍慰安所管理人の日記 http://www.naksung.r[...] 落星台経済研究所
[16] 뉴스 ニューライトの名付け親、「時代精神」安理事長(1/5)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6-22
[17] 뉴스 ニューライトの名付け親、「時代精神」安理事長(3/5)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6-22
[18] 웹인용 [아침 햇발]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 쿠데타 / 고명섭 http://www.hani.co.k[...] 2016-09-22
[19] 웹사이트 http://m.hani.co.kr/[...]
[20] 뉴스 살인 기록 지웠다고 범법자가 선량한 시민 되나 https://news.naver.c[...]
[21] 웹인용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해야 http://mel21.tistory[...] 1992
[22] 웹인용 안병직 "위안부 강제동원 없어" 또 망언 http://www.mediatoda[...] 미디어오늘 2016-09-21
[23] 웹인용 "독도 논란, 우리가 일본보다 꼭 법률적 사료적 증거 많다고 할 수 없어" https://news.v.daum.[...]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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