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키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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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탈키다스는 코린토스 전쟁 시기에 활동한 스파르타의 장군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와 혼인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393년 또는 392년 리디아의 사트라프 티리바조스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소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안탈키다스의 평화를 체결했다. 이 조약은 스파르타의 그리스에 대한 헤게모니를 재확인했지만,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카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버려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안탈키다스는 보이오티아 전쟁에서 테베가 스파르타의 지배를 무너뜨린 후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기원전 367년 페르시아에 대한 마지막 임무 실패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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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키다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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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세기 |
사망 | 기원전 367년경 |
활동 시기 |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4세기 |
국적 | 스파르타 |
경력 | |
직업 | 군인, 외교관, 정치가 |
역할 | 스파르타 해군 제독 |
복무 | 펠로폰네소스 전쟁, 코린토스 전쟁 |
지위 | 제독 |
소속 | 스파르타 해군 |
주요 활동 | |
안탈키다스 화약 | 기원전 387년 |
2. 생애
안탈키다스는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와 혼인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1]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기아 헬레스폰티아의 태수 파르나바조스 2세는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를 보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에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테베는 기원전 395년 할리아르투스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도시들도 이에 참여하면서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393년 또는 392년에 안탈키다스는 평화를 위해 리디아의 사트라프인 티리바조스에게 파견되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의도를 알고 코논 휘하의 사절단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인정했고, 티리바조스는 아테네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안탈키다스가 티리바조스를 설득하여 스파르타 해군 재건 자금을 제공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티리바조스를 스트루타스로 교체했다.
기원전 388년, 티리바조스는 리디아에서 권력을 회복했다. 안탈키다스는 협상을 재개했고, 그해에 두 사람은 수사로 가서 아테네에 대항하는 페르시아 동맹에 대한 왕의 지원을 얻었다. 이는 허가되었고 안탈키다스는 스파르타 함대의 제독이 되었다. 기원전 387년 겨울, 안탈키다스의 평화가 체결되었다.
안탈키다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총애를 계속 받았으나, 보이오티아 전쟁 중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테베가 스파르타를 격파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3] 기원전 367년, 안탈키다스는 페르시아로 마지막 사절 임무를 떠났으나 실패하고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3]
2. 1. 코린토스 전쟁 이전
안탈키다스는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와 혼인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1] 안탈키다스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였다.[5]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 사트라프들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시작했다. 프리기아 헬레스폰티아의 사트라프였던 파르나바조스 2세는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를 보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에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테베는 기원전 395년 할리아르투스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다른 도시들도 이에 동참하면서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테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파르나바조스는 몰락한 장군 코논이 아케메네스 페니키아 및 에베르-나리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지휘하여 크니도스 전투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하도록 허가했다. 코논은 이후 아테네로 돌아가 함대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었고, 도시의 롱 월스(긴 성벽) 재건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2. 2. 코린토스 전쟁 시기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는 코린토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5]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된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태수들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프리기아 헬레스폰티아의 태수 파르나바조스 2세는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를 보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에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테베는 기원전 395년에 군사를 일으켰고, 다른 나라들도 이에 합류하면서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페르시아는 고대 아테네와 우호적인 조약을 맺었고, 파르나바조스는 코논에게 함대를 지휘하게 하여 크니도스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했다.
2. 2. 1. 페르시아와의 협상
안탈키다스는 기원전 393년 또는 392년에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리디아의 사트라프(태수)인 티리바조스에게 파견되었다.[1]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의도를 알고 코논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이에 티리바조스는 아테네 사절단을 투옥했다.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안탈키다스가 티리바조스를 설득하여 스파르타 해군 재건 자금을 지원하게 한 것을 알고, 티리바조스를 스트루타스로 교체하였다. 스트루타스는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지원받은 함대로 그해 말 코린토스 만을 장악했다.[2]기원전 388년, 티리바조스가 리디아에서 권력을 회복했다. 안탈키다스는 다시 협상을 시작했고, 그해 수사로 가서 페르시아 왕에게 아테네에 대항하는 동맹을 요청하여 지원을 얻었다. 안탈키다스는 스파르타 함대의 제독이 되어 헬레스폰트 주변에서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결국 아테네는 아르고스, 스파르타, 페르시아와 함께 사르디스에서 티리바조스와 협상에 동의했다. 기원전 387년 겨울, 안탈키다스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클라조메나이와 키프로스 섬을 포함한 소아시아 전체는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둔다.
# 레므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는 독립하며, 이 섬들은 아테네에 반환한다.
이 조약은 이듬해 각 도시 정부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조약으로 스파르타는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카리아의 그리스인들을 포기하면서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했으며, 이는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불렸다.[3]
2. 2. 2. 안탈키다스 평화 (기원전 387년)
코린토스 전쟁 종식 후,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소아시아 사트라프들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프리기아 헬레스폰티아의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 2세는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를 통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했다. 테베는 기원전 395년 할리아르투스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도시들도 참여하면서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테네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파르나바조스는 코논에게 함대를 지휘하여 크니도스 전투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하게 했다. 코논은 아테네로 돌아가 함대 일부를 가져가고 도시의 롱 월스 재건 자금을 지원받았다.기원전 393년 또는 392년, 안탈키다스는 평화를 위해 리디아의 사트라프 티리바조스에게 파견되었다.[1] 아테네는 코논을 사절단으로 보냈고,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 지배권을 인정하여 티리바조스는 아테네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1]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티리바조스가 스파르타 해군 재건 자금을 제공한 것을 알고 스트루타스로 교체했다.[1] 그러나 스파르타 함대는 그해 말 코린토스 만 통제권을 되찾았다.[2]
기원전 388년, 티리바조스가 리디아에서 권력을 회복하자, 안탈키다스는 협상을 재개했고, 두 사람은 수사로 가서 아테네에 대항하는 페르시아 동맹에 대한 왕의 지원을 받았다.[1] 안탈키다스는 스파르타 함대 제독이 되어 헬레스폰트 주변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고, 아테네인들은 사르디스에서 협상에 동의했다. 기원전 387년 겨울, 안탈키다스의 평화가 체결되었으며,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클라조메나이와 키프로스 섬을 포함한 모든 소아시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 레므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는 독립해야 했으며, 이 섬들은 아테네에 반환되었다.[3]
이 조건은 다음 해에 도시 정부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조약은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카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버리고 스파르타의 그리스 헤게모니를 재확인한 것으로,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불렸다.[3]
2. 3. 코린토스 전쟁 이후
안탈키다스는 코린토스 전쟁이 시작될 때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다.[1] 기원전 405년 아이소스포타미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가 파괴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소아시아 사트라프를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프리기아 헬레스폰티아의 사트라프인 파르나바조스 2세는 로도스의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를 보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했다. 테베는 기원전 395년 할리아르투스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도시들도 이에 참여하면서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파르나바조스는 몰락한 장군 코논이 아케메네스 페니키아 및 에베르-나리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지휘하여 크니도스 전투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하도록 허가했다. 코논은 이후 아테네로 돌아가 함대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었고, 도시의 롱 월스 재건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기원전 393년 또는 기원전 392년, 안탈키다스는 평화를 위해 리디아의 사트라프인 티리바조스에게 파견되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의도를 알고 코논 휘하의 사절단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인정했고, 티리바조스는 아테네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안탈키다스가 티리바조스를 설득하여 스파르타 해군 재건 자금을 제공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티리바조스를 스트루타스로 교체했다. 스트루타스는 스파르타와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자금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 함대는 그해 말까지 코린토스 만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2]
기원전 388년, 티리바조스는 리디아에서 권력을 회복했다. 안탈키다스는 협상을 재개했고, 그해에 두 사람은 수사로 가서 아테네에 대항하는 페르시아 동맹에 대한 왕의 지원을 얻었다. 이는 허가되었고 안탈키다스는 스파르타 함대의 제독이 되었다. 그는 헬레스폰트 주변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고, 아테네인들은 아르고스, 스파르타, 페르시아인들과 티리바조스의 거처인 사르디스에서 협상하기로 동의했다. 기원전 387년 겨울, 안탈키다스의 평화가 체결되었으며,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클라조메나이와 키프로스 섬을 포함한 모든 소아시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는 레므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를 제외하고 독립해야 했으며, 이 섬들은 아테네인에게 반환되었다.
이 조건은 다음 해에 도시 정부에 의해 비준되었다.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카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버림으로써 스파르타의 그리스에 대한 헤게모니를 재확인한 것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불렸다.[3]
2. 3. 1. 몰락
안탈키다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총애를 계속 받았으나, 보이오티아 전쟁 중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테베가 스파르타를 격파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3]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패배한 후 안탈키다스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우리가 그들에게 준 모든 훈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잘하게 되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4]기원전 367년, 안탈키다스는 페르시아로 마지막 사절 임무를 떠났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임무가 실패하자 안탈키다스가 굶어 죽었다고 주장했다.[3]
참조
[1]
서적
Oxford Classical Dictionary
https://doi.org/10.1[...]
[2]
서적
Hellenica
[3]
서적
The Life of Greece
1939
[4]
서적
Lycurgus of Sparta
[5]
간행물
안탈키다스
Charles Scribner's Sons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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