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란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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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살란드라는 이탈리아의 정치인으로, 1853년 트로이아에서 태어나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루이지 펠루, 시드니 손니노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으며, 1914년 총리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살란드라는 '신성한 이기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연합국과의 런던 조약을 통해 참전을 이끌었지만,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1916년 사임했다. 이후 무솔리니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1931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경제, 법,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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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살란드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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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와 정치 경력
포자현 트로이아에서 태어나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행정법 교수를 지냈다.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루이지 펠루 정부(1899년–1900년)와 시드니 손니노 정부(1906년, 1909년–1910년)에서 각각 농업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2. 1. 출생과 교육
포자현 트로이아 (풀리아주)에서 태어났다. 1875년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졸업한 후,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행정법 교수가 되었다.[1]2. 2. 정치 입문 및 장관 재임
포자현 트로이아에서 태어난 그는 1875년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강사를 거쳐 행정법 교수가 되었다.그는 루이지 펠루가 이끌던 보수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1899년–1900년)을 지냈으며, 이후 시드니 손니노 정부 아래에서 재무부 장관(1906년)과 이탈리아 재무부 장관(1909년–1910년)을 역임했다.[1]
3. 이탈리아 총리 재임
1914년 3월, 보수주의 성향의 살란드라는 조반니 조리티 정부가 물러나면서 조리티의 선택으로 총리직에 올랐다. 당시 살란드라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내각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2]
제1차 세계 대전이 1914년 8월 발발하자, 살란드라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중립을 선언하며 삼국 동맹의 방어적 성격을 강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략 행위를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무장관 시드니 손니노 등과 함께 어느 편에 참전하는 것이 이탈리아, 특히 미회수지 확보에 유리할지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었다.[3]
결국 살란드라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군사적 어려움이 커지면서 살란드라 정부는 1916년 6월에 물러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살란드라는 더욱 우경화되어 1922년 무솔리니의 정권 장악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1931년 12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결정
1914년 3월, 보수주의자인 살란드라는 조반니 조리티 정부가 몰락하자 조리티의 지명을 받아 총리가 되었다. 당시 조리티는 여전히 이탈리아 의회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살란드라 정부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2] 살란드라는 곧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이탈리아의 참전 문제를 두고 조리티와 의견 대립을 겪게 되었다.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살란드라는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삼국 동맹은 방어적 성격의 동맹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침략을 시작했으므로 이탈리아는 참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란드라와 외무장관 안토니노 파테르노 카스텔로(1914년 11월 시드니 손니노로 교체) 등 내각 인사들은 전쟁 참여의 대가로 어느 쪽이 이탈리아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지, 특히 미회수지(''Italia irredenta'')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3] 살란드라는 이탈리아의 참전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신성한 이기심"(sacro egoismoi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전쟁이 1915년 늦여름까지는 끝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어서 참전 결정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4]
이후 이탈리아 외무장관 소니노,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프랑스 외무장관 쥘 캉봉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16일, 오스트리아와의 동시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가 연합국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을 의향이 있다는 제안과 함께 극비리에 런던으로 특사가 파견되었다. [...] 최종 선택은 3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러시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루어졌다. 살란드라는 연합국의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익 분배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을 염려하여 런던의 특사에게 몇 가지 요구를 포기하고 신속하게 합의를 보도록 지시했다. [...] 런던 조약은 4월 26일에 체결되어 이탈리아가 한 달 이내에 싸우도록 구속했다. [...] 살란드라는 5월 4일에야 삼국 동맹에 가입한 국가들에게 비공개 서한으로 이를 비난했다."[5]
비밀 조약인 런던 조약 또는 런던 협약(Patto di Londrait)은 삼국 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탈퇴하고 삼국 협상에 가입하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이 끝나면 영토를 할양받는 대가로 한 달 이내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했다.[3]
지올리티는 중립을 지지했지만, 살란드라와 소니노는 삼국 협상 측의 개입을 지지했고, 의회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참전을 확보했다. 1915년 5월 3일,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을 철회했다. 며칠 후 지올리티와 의회의 중립주의 다수는 전쟁 선포에 반대했고, 한편 민족주의 군중은 전쟁 참전을 위해 공공 장소에서 시위를 벌였다. 1915년 5월 13일, 살란드라는 사임을 제안했지만, 지올리티는 민족주의적 혼란이 공개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총리직을 승계하는 것을 거부했고 살란드라의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를 했다. 살란드라는 연합국 측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면 전쟁이 조기에 해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교착 상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이는 특히 살란드라가 중립주의자를 주요 직위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살란드라 내각을 약화시켰다. 1916년 5월부터 7월까지 이탈리아의 이손초에서의 5차례 실패한 공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렌티노 공세는 군사적 위기를 초래하여 1916년 6월 10일 살란드라 정부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중립주의 의원들과 살란드라가 전쟁 노력에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믿는 이들의 결합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전쟁에서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7]
3. 2. 전쟁 장기화와 실각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살란드라는 이탈리아가 군대를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삼국 동맹은 방어적 입장을 취했을 뿐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침략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란드라와 외무장관 안토니노 파테르노 카스텔로(1914년 11월 시드니 손니노에게 자리를 넘겨줌) 등 각료들은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이탈리아에 가장 큰 보상을 제공하고 이탈리아의 미회수지 주장을 충족시킬 측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3]살란드라는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전할 측면을 정의하기 위해 "신성한 이기심"(''sacro egoismo'')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전쟁이 1915년 늦여름까지 끝나리라고 예상하며 전쟁 참전 결정에 압박을 느꼈다.[4]
소니노, 영국의 외무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프랑스 외무 장관 쥘 캉봉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16일, 오스트리아와의 동시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가 연합국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을 의향이 있다는 제안과 함께 극비리에 런던으로 특사가 파견되었다. 최종 선택은 3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러시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루어졌다. 살란드라는 연합국의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익 분배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을 염려하여 런던의 특사에게 일부 요구를 포기하고 신속하게 합의를 보도록 지시했다. 4월 26일, 비밀 조약인 런던 조약 또는 런던 협정(Patto di Londra|파토 디 론드라it)이 삼국 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탈퇴하고 삼국 협상에 가입하기로 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영토를 할양받는 대가로 한 달 이내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했다.[3][5] 살란드라는 5월 4일에야 삼국 동맹 국가들에게 비공개 서한으로 이를 통보했다.[5]
조리티는 중립을 지지했지만, 살란드라와 소니노는 연합국 측의 개입을 지지했고, 의회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참전을 확보했다. 1915년 5월 3일,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을 철회했다. 며칠 후 조리티와 의회의 중립주의 다수는 전쟁 선포에 반대했고, 한편 민족주의 군중은 전쟁 참전을 위해 공공 장소에서 시위를 벌였다. 1915년 5월 13일, 살란드라는 사임을 제안했지만, 조리티는 민족주의적 혼란이 공개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총리직 승계를 거부했고 살란드라의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를 했다. 살란드라는 연합국 측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면 전쟁이 조기에 해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교착 상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이는 특히 살란드라가 중립주의자를 주요 직위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살란드라 내각을 약화시켰다.[7] 1916년 5월부터 7월까지 이탈리아의 5차례 실패한 이손초 공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렌티노 공세는 군사적 위기를 초래하여 1916년 6월 10일 살란드라 정부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중립주의 의원들과 살란드라가 전쟁 노력에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믿는 이들의 결합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전쟁에서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7]
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살란드라는 더욱 우경화되었고, 1922년 무솔리니의 정권 획득을 지지했다. 이후 살란드라는 1931년 12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5. 사망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살란드라는 더욱 우경화되었고, 1922년 무솔리니의 정권 획득을 지지했다. 이후 살란드라는 1931년 12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6. 평가
안토니오 살란드라의 정권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띤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삼국 동맹이 방어적 성격의 동맹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침략자라는 이유를 들어 이탈리아의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입장을 바꿔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19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살란드라는 더욱 우경화되었으며,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지지했다.
7. 저서
그는 경제학, 금융, 역사, 법, 정치에 관한 상당수의 저서를 저술했다. (뉴 인터내셔널 백과사전)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행정 정의에 관한 논문 (1904)
- 국가 정치와 자유주의 정당 (1912)
- 행정법 강의 (2권, 1912)
- 정치 및 입법: 지우스티노 포르투나토가 수집한 에세이 (1915)
- 독일의 악의에 반대하는 담론 (1915)
- 이탈리아와 대전: 중립에서 개입까지 (런던: 에드워드 아놀드, 1932)
참조
[1]
웹사이트
Salandra, Antonio
http://www.treccani.[...]
[2]
서적
Modern Italy: 1871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3]
서적
Woodrow Wilson and World Settlement, Volume I
https://archive.org/[...]
Doubleday, Page and Company
[4]
서적
Modern Italy: 1871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5]
서적
Modern Italy: A Political History
[6]
서적
Modern Italy: 1871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7]
논문
The Role of the Italian Parliament during the First World War
[8]
서적
Slava i čast: Odlikovanja među Srbima, Srbi među odlikovanjima
Službeni Glasnik
[9]
웹사이트
Salandra, Antonio
http://www.treccani.[...]
[10]
서적
Modern Italy: 1871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11]
서적
Modern Italy: 1871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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