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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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한 평화 조약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 5개 주요 강대국이 회의를 주도했으며, 27개국의 대표단이 다양한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했다. 주요 결과로는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국제 연맹 창설, 식민지 위임 통치 등이 있었으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의 불완전한 적용과 강대국들의 이기주의로 인해 한계를 보였다. 한국은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무관심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이는 3.1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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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조약은 1920년 제1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체결되어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 군사력 제한, 경제적 이권 부여를 규정했으나, 터키 독립 전쟁으로 무효화되고 로잔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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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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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19년 1월 18일 ~ 1920년 1월 21일 |
장소 | 파리 및 그 주변 지역 |
주요 참가국 |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
목적 | 제1차 세계 대전 후 평화 조약 체결 |
결과 |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국제 연맹 창설 |
배경 | |
이전 회의 |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
목표 | 지속 가능한 평화 구축 및 전후 질서 재편 |
주요 참가국 및 대표 | |
미국 | 우드로 윌슨 |
영국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프랑스 | 조르주 클레망소 |
이탈리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
일본 | 사이온지 긴모치 |
주요 의제 | |
영토 문제 | 국경 획정, 식민지 처리 |
배상금 문제 | 패전국 배상금 규모 결정 |
군비 축소 | 독일 군비 제한 |
국제 기구 설립 | 국제 연맹 창설 |
주요 조약 | |
베르사유 조약 | 독일과의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오스트리아와의 조약 |
뇌이 조약 | 불가리아와의 조약 |
트리아농 조약 | 헝가리와의 조약 |
세브르 조약 | 오스만 제국과의 조약 (후에 로잔 조약으로 대체) |
베르사유 소조약 | 일부 국가의 권리 보호를 위한 조약 |
논란 및 비판 | |
불공정한 조약 조건 | 독일에게 과도한 배상금 부과 |
민족 자결주의 문제 | 일부 민족에게만 적용 |
전후 질서 불안정 |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 |
영향 | |
국제 연맹 창설 | 국제 협력 시도 |
전후 질서 재편 | 유럽 지도 변화 |
민족주의 심화 | 새로운 국가 등장 |
기타 | |
관련 인물 | 우드로 윌슨 조르주 클레망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관련 장소 | 베르사유 궁전 케 오르세 (프랑스 외무부) |
2. 회의의 배경 및 구성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다.[1][150] 이 날은 1871년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즉위한 날이자,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수립된 날로, 독일에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151][152]
27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 포로, 해저 케이블, 국제 항공, 전쟁 책임 등 다양한 의제를 다루기 위해 52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주요 5개국으로 회의를 통제했으며, 이 중 일본은 소극적인 역할에 그쳐 실질적으로는 '빅 4'라 불리는 4개국 지도자들이 회의를 주도했다.[153] 이들의 결정은 다른 참석자들에게 승인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 독립을 청원했으나,[160]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무관심 속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61][164] 베트남의 호찌민도 베트남인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으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6][157][158]
2. 1. 회의 설치의 전제
우드로 윌슨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참전하기 전부터 "승리 없는 강화"(Peace without victory영어)를 주장했고, 참전 후에는 "화해의 평화"를 외쳤다. 윌슨은 징벌적 배상과 비밀 외교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의 "구 외교"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초래했다고 생각하여 이를 타파하고자 했다. 이는 이상주의적인 윌슨의 "신 외교"라고 불린다.비밀 외교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여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총리는 전쟁 수행을 위해 "회의에 의한 외교"(diplomacy by conference영어)를 주장했다. 그는 "나는 외교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를 대표할 권한이 없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대중적인 정치가였던 로이드 조지는 전면전 상황에서 국민 여론의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영국 대형 신문을 지배했던 노스클리프 자작은 강화 회의 대표로 선출되지 못해 로이드 조지와 갈등이 생겼고, 정부 방침 이상의 가혹한 조건을 요구하는 기사를 연일 게재했다. 이 때문에 강화 회의 직전 1918년 영국 총선에서는 강화 조건 자체가 선거의 쟁점이 되었고, 독일에 대한 배상 요구 여론이 높아졌다.
1918년 1월 8일, 윌슨은 의회에서 "비밀 외교 철폐", "민족 자결" 등을 포함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2월 11일에는 "4원칙", 9월 25일에는 5원칙을 제시하며 이를 보강했다. 11월 5일, 미국 정부는 14개조와 그 이후의 평화 연설, 그리고 두 가지 유보 사항을 더한 평화 권고를 독일에 전달했다(랜싱 통첩). 바덴 대공은 이를 받아들여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윌슨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았고, 14개조가 강화 원칙이 아니라고 독일에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 혁명이 진행되면서 독일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될 것을 우려한 영국은 조속한 강화를 위해 윌슨의 방침에 동의했다.
윌슨은 이러한 신 외교 이념으로 연합국 국민뿐만 아니라 독일 등 중앙 동맹국 국민에게서도 높은 기대를 받았으며, 그 자신도 이러한 이념을 믿었다. 한편, 연합국이 전시 중부터 주장했던 "독일 군국주의 파괴"는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의 반대로 거의 포기되었고, 독일의 정치 제도에 대한 간섭은 없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부담을 짊어진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은 독일인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협상이나 이념이 아닌 실력으로만 독일인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77]
이처럼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진 여러 수뇌들이 파리에 모여, 독일군의 무장 해제 및 러시아 내전 등 세계 정세를 고려하며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
2. 2. 회의 구성 및 주요 참가국
회의는 1919년 1월 18일에 열렸다.[149][150] 이 날짜는 1871년 1월 18일에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임을 선포한 날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151] 또한 이 날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수립된 날이기도 했다.[152] 27개국 사절단은 전쟁 포로, 해저 케이블, 국제 항공법, 전쟁 책임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52개의 위원회에 배정되었다.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주요 5개국으로 회의를 통제했으며, 이 중 일본은 전직 총리만 파견하여 작은 역할만 수행했다. 실질적으로는 '빅 4' 지도자들이 회의를 주도했다.[153] 빅 4의 결정은 공식 회담 참석자들에게 승인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규식은 3·1 운동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며 한국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160] 1919년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한국독립과 평화' 등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와 언론인에게 배포하며 한국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161][164]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무관심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베트남의 호찌민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를 제출하여 베트남인의 권리 보장을 요구했으나,[156][157] 한국 대표단처럼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에서 쫓겨났다.[158][157]
3. 회의의 주요 의제 및 논쟁
몬테네그로 왕국은 연합국 중 하나였으나, 세르비아에 병합되어 사실상 소멸되었다. 몬테네그로 왕국 망명 정부 수상 안토 그보즈데노비치 장군은 1919년 3월 6일 10인 위원회에 참석, 세르비아에 항의하며 니콜라 1세 국왕의 서한을 낭독했다.[78]
코스타리카는 1918년 5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1917년 8월 성립된 페데리코 치노코 그라나도스 정권을 영국[79] 및 미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
안도라는 참전했음에도 강화 회의에 불리지 않았다는 뉴욕 타임스 기사[80]가 있었으나, 2014년 조사 결과 안도라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는 공적 기록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81]
3. 1. 베르사유 조약과 전후 처리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전쟁 책임을 묻고, 영토 할양, 군비 제한, 배상금 부과 등의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11] 이 조약은 15개의 조항과 440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 다른 패전국들에게도 각각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 등이 체결되었다.[8] 패전국들의 식민지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으로 재편되었으며, 이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관리되었다.[14]조약 | 체결일 | 대상 국가 | 비고 |
---|---|---|---|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6월 28일 | 독일 | |
생제르맹 조약 | 1919년 9월 10일 | 오스트리아 | |
뇌이 조약 | 1919년 11월 27일 | 불가리아 | |
트리아농 조약 | 1920년 6월 4일 | 헝가리 | |
세브르 조약 | 1920년 8월 10일 | 오스만 제국 | 로잔 조약으로 대체 |
영국 역사가 A.J.P. 테일러에 따르면,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인들에게 "사악하고 불공정"하며 "지시, 노예 조약"처럼 보였다.[11] 이는 독일 내에서 굴욕감과 분노를 일으켜 나치당의 선거 성공과 제2차 세계 대전의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11]
3. 2. 민족 자결주의와 영토 문제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파리 강화 회의의 주요 의제 중 하나였으나, 실제 적용 과정에서는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 유럽 각국의 영토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특히 다음과 같은 분쟁들은 해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피우메(현 리예카) 요구: 이탈리아는 런던 조약에 따라 피우메를 요구했으나, 윌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가브리엘레 다눈치오의 피우메 점령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유 도시 피우메를 거쳐 이탈리아에 병합되었다.
-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체신 지역 분쟁: 양국은 체신 지역(현재의 체신과 체스키체신)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 충돌까지 벌였다. 결국 1920년 7월의 합의에 의해 체신은 분할되었다.
한편, 중국의 산둥반도 문제는 일본의 권익 주장과 중국의 반환 요구가 충돌하면서 5·4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화민국 대표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아래의 7개 조항을 제시했다.[52]
요구 조항 |
---|
1. 중국에 설치된 세력 범위 포기 |
2. 중국 주둔 각국 군대 철수 |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 전보 사업 폐지 |
4. 영사 재판권 철회 |
5. 조차지 반환 |
6. 조세 반환 |
7. 관세 자주권 승인 |
이에 더하여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 요구와, 패전국 독일이 산둥성에서 차지하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52]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중화민국의 요구를 지지했지만, 일본은 21개조 요구와 돤치루이 정권과의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일본과의 비밀 협정을 통해 독일의 권익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52] 윌슨은 이에 반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주장에 굴복했고, 이는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
이 결정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에 알려졌고, 5월 1~3일 베이징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면서 5·4 운동이 시작되었다.[52]
3. 3. 국제 연맹 창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신외교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국제 연맹 창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국제 연맹 창설은 영국도 전쟁 목적 중 하나로 삼았지만,[99] 윈스턴 처칠처럼 그 구상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정치인도 많았다. 영국은 연맹을 열강 간의 지속적인 협력을 보장하는 틀로 생각했고, 프랑스는 독일의 가입을 최대한 늦추는 등, 현상 유지를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100]윌슨은 연맹 협의를 10인 위원회에서 진행하려 했으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나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분과회이며 소국도 참여하는 연맹 위원회에서 협의할 것을 요구했다. 윌슨은 소국의 협의 참여에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로이드 조지 등의 안이 통과되었다. 윌슨이 직접 연맹 위원회 미국 대표가 되면서 실질적인 강화 협의는 10인 위원회에서 진행하려던 로이드 조지 등의 계획은 무산되었다.[101]
1919년 1월 25일, 국제 연맹의 원칙이 강화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2월 3일에는 국제 연맹 위원회의 제1회 회합이 열렸으며, 2월 8일까지 연속으로 진행되었다. 위원장에는 윌슨이 직접 취임했다.[101]
제1회 위원회에서는 연맹 규약 초안으로 영국의 변호사 세실 허스트(Cecil Hurst)와 미국의 변호사 데이비드 헌터 밀러(David Hunter Miller)가 집필한 "허스트-밀러 초안"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초안은 전날 완성되어 프랑스어판도 미완성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 위원회에서 조항별로 협의하게 되었다. 2월 14일 총회에서 위원회에서 제정된 국제 연맹 규약 초안이 승인되었다.[101] 4월 28일 총회에서는 일본의 인종 차별 철폐 제안에 관한 설명과 윌슨에 의한 제5조 수정 제안이 이루어졌고, 규약안은 제5조 수정을 거친 후 승인되어 채택되었다.[101]
당시 스페인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윌슨과 에드워드 하우스를 포함한 미국 대표단 일부가 사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국경을 초월한 공중 보건에 대한 움직임을 요구했고, 국제 연맹 규약 제23조와 제25조에는 국제 보건 조항이 포함되었다.[101]
3. 4. 일본의 인종 차별 철폐 제안
일본은 전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 후작을 수장으로 하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다. 일본은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포함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36]
1919년 2월 13일, 일본 대표단은 국제 연맹 규약 제21조에 대한 수정안으로 "인종 평등 조항"을 제안했다.[37] 그 내용은 "국제 연맹의 기본 원칙은 국가의 평등이므로, 고위 계약 당사국은 연맹 회원국 시민인 모든 외국인에게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가능한 한 빨리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제공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37]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과 영국 대표단 모두에게 문제가 되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연합 같은 영국 자치령은 자국 내 이민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강력하게 반대했고, 영국에 반대 압력을 가했다.[38][39] 결국 영국 대표단은 자치령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제안에 대한 투표를 기권했다.[38][39]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 조항에 대해 무관심했지만, 미국 내 여론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회의 의장으로서 일본의 제안이 통과되려면 만장일치의 투표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투표 결과, 17명의 대표 중 11명만이 제안에 찬성했다.[38][39]
이 제안의 부결은 일본이 서방 세계와의 협력에서 벗어나 보다 민족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40] 일본 내에서는 국제 사회에 대한 불신감이 커졌고, 이는 이후 일본의 행보에 큰 영향을 주었다.
4. 회의의 결과 및 영향
파리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 18일에 시작되었다.[149][150] 이 날짜는 1871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선포된 날이자,[151]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수립된 날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152]
27개국 사절단이 52번의 위원회에 배정되어 전쟁 포로, 해저 케이블, 국제 항공법, 전쟁 책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했다. 주요 권고 사항은 베르사유 조약을 포함하여 패전국과의 조약에 반영되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주요 5개국으로서 회의를 통제했으며, 이 중 일본은 소극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빅 4 지도자들이 회의를 주도했다.[153] 빅 4는 145번의 비공식 회의를 통해 주요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다른 참석자들에게 승인받았다. 회의는 1920년 1월 21일 국제 연맹 총회 첫 개회로 마무리되었다.[154][155]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주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명 | 체결일 | 대상 국가 |
---|---|---|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6월 28일 | 바이마르 공화국 |
생제르맹 조약 | 1919년 9월 10일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
뇌이 조약 | 1919년 11월 27일 | 불가리아 왕국 |
트리아농 조약 | 1920년 6월 4일 | 헝가리 왕국 |
세브르 조약 | 1920년 8월 10일 | 오스만 제국 (이후 터키와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체결) |
주요 결정 사항으로는 국제 연맹 설립, 패전국과의 5개 평화 조약,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해외 영토를 "위임 통치"로 수여, 독일에게 부과된 배상금, 새로운 국가 경계 설정 등이 있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의 231조는 전쟁 책임을 "독일과 동맹국의 침략"으로 규정하여[11] 독일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높은 배상금의 근거가 되었다.
회의 결정은 빅 4에 의해 일방적으로 시행되었고, 파리는 사실상 세계 정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유럽의 정치 지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군대를 약화시키고 전쟁 책임과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하여, 훗날 독일의 굴욕과 분노를 야기했고, 이는 나치당의 성공과 제2차 세계 대전의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국제 연맹은 미국에서 논란이 되었고, 미국 상원은 평화 조약을 비준하지 않아 미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대신 하딩 행정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고, 백러시아 대표는 있었지만 공산주의 러시아 대표는 없었다.
영국 대표단은 대영 제국의 통일성, 영토, 이익 유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 독일 식민지 포기, 프랑스 안보 보장, 독일 공해 함대 위협 제거, 영토 분쟁 해결, 국제 연맹 지원[20] 등을 목표로 했다. 일본이 제안한 인종 평등 제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반대로 인해 영국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결국 영국은 대영 제국 통일성 유지를 위해 이 제안을 희생했다.[21]
호주 대표단은 빌리 휴즈 총리의 주도로 배상금, 독일령 뉴기니 합병, 인종 평등 제안 거부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휴즈는 일본의 세력 확장에 우려를 표했다.[28]
4. 1. 베르사유 체제와 유럽의 새로운 질서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 베르사유 조약을 중심으로 하는 베르사유 체제가 성립되어 유럽에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패전국, 특히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치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11]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231조에 따라 전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고,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다.[11] 이는 독일 국민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민족주의와 복수심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치당의 부상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1]
또한, 민족 자결 원칙이 불완전하게 적용되면서 유럽 각지에서 소수 민족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되어 유럽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4. 2. 국제 협력의 시도와 한계
국제 연맹 창설은 국제 협력을 통한 평화 유지라는 이상을 제시했지만, 미국의 불참과 강대국들의 이기주의로 인해 그 기능은 제한적이었다.[50] 미국 상원은 국제 연맹 헌장의 일부 조항이 미국 헌법과 충돌한다고 판단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고, 국제 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대신 하딩 행정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각각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45][46][47]군축 문제는 워싱턴 회의 등에서 논의되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군비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제기된 군축 문제는 워싱턴 회의 등에서 협의되었지만, 연합국 간의 균형있는 군축은 달성되지 못했다. 독일의 무장 해제로 인해 큰 세력 공백이 발생하여, 질서 유지를 위한 연합국의 부담이 증가했다.[140] 또한 군축 문제 협의는 일본과 다른 나라 간의 갈등을 야기했다.
4. 3.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변화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를 통해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에서는 산둥반도 문제 해결 실패로 인해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이는 5·4 운동으로 이어져 민족주의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한국에서는 독립을 위한 노력이 좌절되면서 3·1 운동이라는 대규모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일본 대표단은 전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 후작을 수장으로 하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으나, 유럽 문제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빅 5" 중 하나의 역할을 포기했다.[36] 대신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포함시키는 것과 구 독일 식민지에 대한 영토 요구, 두 가지 요구 사항에 집중했다.[36] 그 대상은 산둥반도(칭다오 포함)와 적도 북쪽의 태평양 섬들인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였다.[36]
일본은 인종 평등 제안을 강화 회의에서 제안했지만, 영국 자치령 국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연합은 자국 내 이민 문제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영국은 제국 내 압력에 굴복하여 제안에 대한 투표를 기권했다.[38][39] 미국 내에서도 격렬한 반대가 있었고, 회의 의장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일본의 제안이 통과되려면 만장일치 투표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결국 17명의 대표 중 11명만이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제안은 부결되었다.[38][39] 이 제안의 부결은 일본이 서방 세계와의 협력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40]
일본의 산둥에 대한 요구는 중국 애국 학생 단체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1914년 일본은 독일에 할양된 영토를 점령하고 적도 북쪽의 독일령 태평양 섬들을 점령했다. 1917년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이들 영토의 합병을 보장하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41] 베르사유 조약 제156조는 중국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중국 자오저우 만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 양도했다. 중국 대표단은 조약 서명 전에 유보 조항 삽입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중국을 제외한 모든 대표단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항에 대한 중국의 분노는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적도 북쪽의 태평양 섬들은 일본이 관리하는 C급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41]
중국 대표단은 루정샹이 이끌었으며, 고유명과 차오루린이 동행했다. 고유명은 독일이 산둥에 양도한 권리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치외법권, 공사관 경비대, 외국 조차지 등 제국주의적 제도의 종식을 요구했다. 미국의 지원과 표면적인 민족 자결주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서방 열강은 그의 주장을 거부하고 대신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5월 4일 중국에서 광범위한 학생 시위가 촉발되었고, 이는 5·4 운동으로 이어져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따라서 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단은 조인식에서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유일한 대표단이었다.[52]
5.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약소국의 목소리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대한인국민회는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중국과 하와이에서 온 한국인 대표단이 파리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표 김규식도 포함되어 있었다.[62] 이들은 일본을 국제 회의에서 곤경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던 중국의 도움을 받았다. 쑨원을 포함한 당시 중국의 여러 지도자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일본과의 갈등 때문에 중국은 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다.[63]
당시 한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중국 외에는 어느 나라도 한국의 독립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64] 결국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회의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고, 외국 지원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65]
이러한 경험은 한국인들에게 국제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인식시키고, 자주적인 독립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은 이러한 인식의 결과였다.
파리 강화 회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의 어려움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1. 파리 강화 회의와 한국의 독립 운동

1918년 8월,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159] 이들은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영입하고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신한청년당 대표이자 한국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160] 파견 경비는 장덕수를 국내에 극비리에 파견하여 조달하였고,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배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신한청년당의 김규식 파리 강화 회의 파견은 이후 3.1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소식은 밀사들을 통해 국내의 국민들과 독립운동가, 재일본 유학생들에게 전달되었고, 한국민족은 파리에서 김규식의 주장과 선언이 한국민족 전체의 의사를 세계에 알리는 목적을 포함하여 3.1운동에 봉기하였다. 신한청년당의 김규식 파견은 3.1 운동에 결정적인 계기와 구심점을 제공한 것이었다.[161]
김규식은 1919년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韓國民代表館)을 설치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161]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김규식이 정당 대표 자격임을 문제삼아 ‘정부대표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김규식과 한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 이에 김규식은 상해로 전보를 보내 자신에게 정부대표로서 자격을 부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 정위원으로, 이관용을 부위원으로 임명하였다.[162]
김규식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 이관용, 김복, 황기환, 조용은[163], 여운홍 등의 도움을 받으며 1919년 5월 10일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161] 또한 대표단은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하여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161][164]
대한인국민회가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려다 실패한 후, 중국과 하와이에서 온 한국인 대표단이 파리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표인 김규식도 포함되었다.[62] 이들은 국제 회의에서 일본을 곤경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던 중국의 도움을 받았다. 쑨원을 포함한 당시 중국의 여러 지도자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투쟁에 갇혀 있던 중국은 한국을 위해 다른 일을 거의 할 수 없었다.[63] 당시 한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외에는 어느 나라도 한국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64] 결국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회의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외국 지원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65]
5. 2. 베르사유 체제와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베르사유 조약 체제는 동아시아의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세력 확장은 미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는 워싱턴 회의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산둥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려 하였으나, 중국은 이에 반발하여 5·4 운동이 일어났다.[41]
중화민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탈취한 산둥의 권익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21개조 요구와 돤치루이 정권과의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 측 주장이 승인되었고,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 강화 회담의 결정이 1919년 4월 30일 베이징에 전해지자, 5·4 운동이 발발하였다.
중국 대표단은 치외법권, 공사관 경비대, 외국 조차지 등 제국주의적 제도의 종식을 요구했으나 서방 열강은 이를 거부하고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5·4 운동이 일어났고, 중국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52]
일본은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38][39] 이는 일본이 서방 세계와의 협력에서 벗어나 군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40]
5. 3. 교훈과 과제
파리 강화 회의는 국제 관계에서 힘의 논리와 이상주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43]당시 회의에는 호찌민과 같은 피지배 민족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강대국들에 의해 묵살되었다.[156][157][158] 이는 국제 사회가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며, 약소국의 목소리는 외면당하기 쉽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은 파리 강화 회의의 경험을 통해 국제 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고, 자주적인 독립 역량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은 이러한 인식의 결과였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은 파리 강화 회의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제 협력과 외교적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중국과의 역사 갈등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민족의 자존심과 국익을 지키면서도, 상호 존중과 협력의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파리 강화 회의는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약소국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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