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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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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앨버트 테일러는 1875년 미국에서 태어나 금광 기술자로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에서 근무했다. 그는 3·1 운동 당시 독립 선언서를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강제 추방된 후,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하여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는 한국 생활을 회고한 책을 썼으며,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시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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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기본 정보
나우루 국기
국기
나우루의 국장
나우루의 국장
국가나우루의 노래
수도사실상 수도는 없으나, 정부 소재지는 야렌
공용어나우루어
영어
면적21 km² (231위)
인구10,876명 (2019년, 222위)
인구 밀도517.9명/km²
통화오스트레일리아 달러 (AUD)
시간대UTC+12
차량 통행 방향왼쪽
정치
정치 체제의회 공화국
대통령데이비드 아데앙
의회 의장마커스 스티븐
역사
독립1968년 1월 31일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경제
명목 GDP (2018년)1억 1700만 달러
1인당 명목 GDP (2018년)10,807 달러
기타
국가 코드NRU
ISO 3166-1NR
인터넷 최상위 도메인.nr
국제 전화 코드+674

2. 생애

1917년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와 결혼하였고, 1919년 경성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그 해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가 입수[5]하였고, 그의 동생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국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가족은 가택 연금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6]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남겨둔 재산을 찾고자 했다.[6]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한국행

18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년 3월 17일 ~ 1908년 12월 10일[1])의 아들로 태어났다. 앨버트 테일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의 직원으로 일하였다.[3]

2. 2. 한국에서의 활동

1896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의 직원으로 일하였다.[3] 1908년 아버지 조지가 사망한 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금광 사업과 무역상을 하였으며,[4]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1917년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와 결혼하였고, 1919년 경성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그 해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가 입수[5]하였고, 그것을 앨버트 테일러의 동생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6]

2. 3. 3·1 운동과 독립운동 지원

1919년 앨버트 테일러는 3·1 운동 당시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였다.[5] 그의 동생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 선언서를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앨버트 테일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2. 4. 강제 추방과 사망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국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가족은 가택 연금되었다.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6]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남겨둔 재산을 찾고자 했다.[6]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는 메리 린리 테일러이며, 아들은 브루스 테일러(1919년 2월 28일 ~ 2015년 4월 19일[7])이다. 메리 린리 테일러는 1982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쳤다.[8] 2006년 2월 서울특별시대한민국을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예 시민증을 부여하였다.[9]

3. 1. 메리 린리 테일러

메리 린리 테일러는 1942년 태평양 전쟁으로 한국에서 강제 추방된 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남편과 함께 노년을 보내며 회고록을 썼다. 훗날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1919년 2월 28일 ~ 2015년 4월 19일[7])는 이것을 'Chain of Amber(호박 목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책에 따르면, 메리는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 광산업자, 사업가들과 교류했으며, 광산촌을 방문하고 시베리아를 기차로 여행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또한 3·1 운동과 광무제의 장례식 등 한국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순간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1982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쳤다.[8]

3. 2. 브루스 테일러

1919년 2월 28일에 태어나 2015년 4월 19일에 사망한[7] 브루스 테일러는 아버지 앨버트 테일러와 어머니 메리 린리 테일러가 한국에서 강제 추방된 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살았다. 어머니 메리 린리 테일러는 회고록을 썼고, 브루스 테일러는 이를 'Chain of Amber(호박 목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메리가 한국에서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광산촌 방문, 시베리아 기차 여행 등 다양한 경험과 3·1 운동, 광무제 장례식 등 한국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있다.[8]

2006년 2월 서울특별시대한민국을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였다.[9]

참조

[1] 문서 서울외국인묘지공원 소재 테일러 부자(父子)의 묘비 명문
[2] 웹사이트 서울역사박물관 소개 자료 http://www.museum.se[...]
[3] 뉴스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http://weekly.donga.[...] 주간동아 2011-10-10
[4] 웹사이트 무역(貿易)의 선구자 테일러(Taylor) 가문 http://tv.juan.or.kr[...] 2005-09-13
[5] 출처 2015-03-15
[6] 뉴스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의 자취가 머문 곳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11-22
[7] 뉴스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3대 역사’ 막 내려… 딜쿠샤 지은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 타계 http://news.kmib.co.[...] 국민일보 2015-04-27
[8] 웹인용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추천도서 '호박 목걸이' https://web.archive.[...] 2015-02-16
[9] 웹사이트 4대째 한국사랑 美 테일러 가족의 ‘뜻깊은 3·1절’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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