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야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야담은 조선 후기 시정 문화의 단편 서사물로, 봉건 해체기의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 장르이다. 필사본으로 유통되었으며, 한글 번역본도 존재한다. 주요 야담집으로는 어우야담, 청구야담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야담 운동이 전개되어, 김진구와 윤백남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오락으로 발전했다. 야담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대중화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야담은 만담과 경계를 넘나들며 잡지 형태로도 출판되었으며, 현대에는 역사 대중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문학 - 폐허 (잡지)
    《폐허》는 1920년에 창간되어 3·1 운동 이후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 자유주의와 낭만주의 경향의 작품을 게재했으나 비판과 검열로 인해 폐간되었지만 한국 문학사에 영향을 미쳤다.
  • 일제강점기의 문학 - 백조 (잡지)
    백조는 1922년에 창간된 문예 잡지로서, 낭만주의 성향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동인으로 참여하여 한국 초기 순수문학 잡지이자 1920년대 한국 문학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대표했다.
  • 한국의 연극 - 검무
    검무는 칼을 들고 추는 한국 전통 무용으로, 부족 사회의 전쟁 및 수렵 무용에서 기원하여 신라 시대 황창랑 고사 설화와 함께 궁중 무용으로 발전, 조선 시대 기생들에 의해 재창조되었으며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 한국의 연극 - 신파극
    신파극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정치적 주장을 위해 시작되어 상업 연극으로 발전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 유입되어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발전했으나, 현대 영화의 등장과 함께 쇠퇴했다.
야담
야담
한국고전종합DB 야담 목록
한국고전종합DB 야담 목록
기본 정보
유형설화
분야구비 문학, 설화, 야사
시대조선 시대
정의민간에서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
상세 내용야담은 민간에서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야담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
야담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왕, 귀족, 양반, 평민,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야담은 전쟁, 사랑, 배신, 복수, 기적, 괴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야담은 구전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필사나 목판본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야담은 소설, 희곡,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물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야담집으로는 어우야담, 계서야담, 청구야담, 동야휘집 등이 있다.
참고 문헌

2. 조선 후기 야담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는 야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3] 초기에는 서울의 서리, 중인층, 몰락 양반들이 야담을 주로 만들고 즐겼지만, 1990년대 말 이후 연구에 따르면 노론계 양반과 문인, 일부 남인계 문인들이 주로 창작하고 즐겼다는 것이 밝혀졌다. 야담은 조선시대 동안 필사본으로만 유통되었고, 많은 야담집이 여러 개의 다른 판본으로 존재한다. 어우야담, 천예록, 학산한언, 청구야담 등은 한글로 번역되어 읽혀졌다.

2. 1. 야담의 개념과 특징

야담은 조선 후기 시정 문화의 출현을 배경으로, 이 주변에서 떠돌던 다채로운 삶의 모습들을 한문으로 기록한 단편 서사물이며, 봉건 해체기 당대의 현실을 생동감 있고 폭넓게 포착해 낸 문학 장르로 평가받는다.[2] 조선 후기의 격변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는 야담의 형성과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3]

야담집 저작과 향유는 초기 연구에서 서울에 거주하며 새로운 경제와 문화 주도층으로 성장하는 서리 및 중인층, 혹은 사회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몰락 양반을 주목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말 이후 텍스트 고증 및 사회적 맥락에 기반한 연구에서는 야담이 대개 노론계 양반과 문인, 일부 남인계 문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창작, 향유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동안 야담은 필사본 형태로만 유통되었으며, 그중 다수 야담집은 여러 이본을 가진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야담 연구가 필사본 문화 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다수의 야담집은 한글(언문)로 번역되어 읽혔는데, 한글본이 있는 야담집으로는 어우야담, 천예록, 학산한언, 청구야담 등이 있다.

  • 어우야담: 16세기 초 유몽인이 지은 이야기 모음집으로 야담집의 효시로 여겨진다.
  • 청구야담(靑邱野談): 한문으로 쓰여진 야담집으로 계서야담(溪西野談), 동야휘집(東野彙集)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야담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기리총화: 조선 후기 이현기의 잡록
  • 천예록(天倪錄), 학산한언(鶴山閑言): 17세기 초 임방과 신돈복이 지었으며, 초현실적인 상황에 기반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량 수록하고 있다.

2. 2. 야담집의 저작과 향유층

초기 연구에서는 서리, 중인, 몰락 양반 등이 야담의 주요 저작 및 향유층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연구에서는 노론계 양반과 문인, 일부 남인계 문인 등이 활발히 창작하고 향유했음이 밝혀졌다.[2]

2. 3. 야담집의 유통과 번역

조선시대 내내 야담은 필사본 형태로만 유통되었으며, 이 중 다수는 여러 이본(異本)을 가진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야담 연구는 필사본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2]

다수의 야담집은 한글(언문)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한글본이 있는 야담집으로는 어우야담, 천예록, 학산한언, 청구야담 등이 있다.[2]

2. 4. 주요 야담집


  • 어우야담: 16세기 초 유몽인이 지은 이야기 모음집으로 야담집의 효시로 여겨진다.[2]
  • 청구야담(靑邱野談): 한문으로 쓰여진 야담집으로 계서야담, 동야휘집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야담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기리총화: 조선 후기 이현기의 잡록이다.
  • 17세기 초 임방의 천예록, 17세기 초 신돈복의 학산한언: 초현실적인 상황에 기반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량 수록했다.

3. 일제강점기 야담 운동

이 시기의 야담은 이전 시대의 야담과 저작 및 향유 방식, 사회적 배경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당시 야담이라 불렸던 행위와 전통을 시대적 필요에 맞춰 재해석하고 재창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의 야담은 1928년 김진구가 '야담운동'이라 이름 붙였고, 1930년대 윤백남에 의해 상업주의적으로 통속화되었다. 이 시기의 야담에 대해서는 '민중의 오락', '잘 팔리는 문화상품', '저열하고 통속적인 대중문화' 등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2]

1927년 김진구는 조선야담사를 발기하고 역사 야담회를 개최하는 등 야담 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2월 6일 신춘야담대회라는 제목으로 역사 강연회를 열어 크게 성공을 거두고 전국 순회강연을 했다.

3. 1. 야담 운동의 배경

1910년대 들어 신식 활자와 근대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많은 문학작품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1912년~1926년 사이에 활자본 야담집이 본격적으로 출간되었다. 1913년 개유문관에서 최동주의 오백년기담(五百年奇譚)이 출판되었는데, 시대적 순서에 따라 총 180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4]

1920년대 '조선학 열풍' 속에서, 조선인으로서 조선어와 조선사를 알아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기획 아래 많은 역사 저작들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역사는 지식인의 전유물이었지만, 1920년대 많은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면서 역사물을 위한 공식적인 담론의 장이 부활했고, 이를 배경으로 ‘전기(傳記), 사담(史談), 전설, 비사(秘史), 기인기담(奇人奇談), 애화(哀話), 애사(哀史), 사화(史話), 야담’ 등의 다양한 역사물들이 등장하면서 국민적 열풍이 만들어졌고 역사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한문으로 된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역사물은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독자층만을 대상으로 했고, 한글로 쓰였다고 해도 절대 문맹률 수치가 높았던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인쇄매체를 통한 역사의 대중화는 어려웠다.[2]

3. 2. 김진구와 야담 운동의 전개

김진구는 김옥균 연구에 조예가 깊었으며, 갑신정변 이면사를 다룬 저작을 <<별건곤>> 등에 발표하고, 동경에서 고균연구를 내기도 했다.[2] 그러나 글을 통한 역사의 대중 보급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역사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한 전략을 찾던 중 '강화(講話)', 즉 말로 설명하는(口演) 방법을 찾아냈다. 이로써 글이 아닌 말을 통해 역사를 민중에게 교화하는 야담 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진구는 1927년 조선야담사를 발기하고, 역사 야담회를 개최하는 등 야담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야담이란 중국의 설서(設書)와 일본의 강담(講談) 중에서도 신강담을 참고하여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그 위에 조선 정신을 담아 조선의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2]

3. 3. 윤백남과 야담의 대중화

1928년 12월 9일 야담사 창립 1주년 기념 야담대회에 윤백남이 등장하면서, 김진구가 추구했던 민중 교화 목적의 야담과 달리 흥미 위주의 야담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당시 야담대회 입장료는 30전에서 15전 사이였다.[2]

1926년 11월 30일 설립된 경성방송국은 초기에는 조선어와 일본어 방송을 함께 내보냈으나, 1932년 조선어 방송이 독립하면서 라디오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다. 윤백남은 초대 조선어 방송과장으로 초빙되어 야담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렸다. 이로써 야담대회는 극장에서 라디오 스튜디오로 확대되었고, 야담은 일시적인 오락거리를 넘어 대중문화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2]

3. 4. 일제의 탄압

야담의 대중성과 통속성으로 인해 식민 정부는 야담 관련 정보나 야담가들의 모임을 탄압하기도 했다.

3. 5. 주요 야담가

신정언, 유추강, 현철 등은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야담가이다.[2]

4. 만담과의 관계

김진구는 야담대회를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의 라쿠고(만담의 기원)나 박춘재의 재담과 다른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2] 그러나 1935년에는 만담과의 경계가 거의 허물어졌고, 야담은 '주로 야사를 중심으로 한 고담(古談)'에서, 만담은 '주로 현대를 중심으로 한 실담(實談)'에서 그 내용을 취재하는 점에서 구분되었다. 이야기의 소재가 과거냐 현재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었다.[2]

5. 야담 잡지의 출현

1934년 10월 월간야담이 창간되었고, 1935년 8월 야담이 창간되는 등 잡지를 통해 야담은 대중에게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2]

6. 현대적 의의 및 평가

야담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서사 양식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 특히 일제강점기 야담은 억압받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2]

1910년대 근대 인쇄술 도입과 함께 활자본 야담집이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1913년 최동주의 '오백년기담'은 180편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4] 1920년대에는 '조선학 열풍'과 함께 역사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김진구는 야담을 통해 민중 교화 운동을 전개했다.[2] 그는 1927년 조선야담사를 발기하고, 중국의 '설서', 일본의 '강담'을 참고하여 조선 정신을 담은 야담을 만들고자 했다.[2]

1928년 김진구의 야담운동은 윤백남에 의해 상업화되었으며,[2]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야담의 대중화가 가속화되었다.[2] 야담은 민중의 오락, 문화상품, 저열한 대중문화 등 다양한 평가를 받지만,[2] 일제강점기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참조

[1] 저널 2012-07-05
[2] 저널 2012-07-04
[3] 저널 2012-07-04
[4] 저널 2012-07-04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