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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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업 전투는 204년에 조조가 원소 세력의 근거지였던 업성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원소 사후 원씨 형제들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 조조는 원담과의 동맹을 통해 업성을 포위했다. 원상의 구원 시도가 실패하고, 업성이 함락되면서 심배는 처형되었고, 원씨 세력은 붕괴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조는 화북 지역 통일의 기반을 다졌으며, 업성은 조조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가 조조에게 패배하고 2년 뒤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원담, 원희, 원상과 사촌 고간은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장악하며 세력을 유지했다.[1] 그러나 원씨 형제들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장남 원담은 막내 동생 원상의 후계자 지명에 불만을 품었고, 둘째 아들 원희는 형제들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다.[1]
2. 배경
202년 겨울, 조조는 역양 전투에서 원담의 역양을 공격했고,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1] 두 형제는 6개월 동안 조조에게 맞섰으나 결국 업현으로 후퇴했다가 반격하여 조조를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했다.[1]
203년 중반, 조조가 물러나자 형제들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원담은 조조군 추격을 위해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구했지만, 원상은 이를 거절했다.[1] 이에 분노한 원담은 원상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남피현으로 쫓겨갔다. 남피에서 다시 평원현으로 도망친 원담은 곽도의 제안으로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곽도는 조조가 업현을 공격하면 원상이 돌아올 것이고, 원담은 그 틈에 북쪽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조조는 순욱의 조언에 따라 원담과의 동맹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순욱은 원씨 형제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북쪽을 안정시킬 기회라고 판단했다.[3] 신비는 조조에게 원담의 군사력이 약해졌음을 강조하며, 지금이 원상을 제거할 적기라고 설득했다.[4]
결국 조조는 신비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담과 동맹을 맺고, 203년 말 다시 황하를 건너 역양으로 진군했다. 아들 조정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켜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5] 원상은 평원 포위를 풀고 업현으로 돌아갔고, 원담은 위기에서 벗어났다.[5]
2. 1. 원소 사후 분열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가 조조에게 패배하고 2년 뒤 사망하면서, 원소 세력은 급격히 분열되기 시작했다.[1] 원소의 세 아들 원담, 원희, 원상과 사촌 고간은 각각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장악했으나, 형제들 간의 내분으로 인해 결속력이 약화되었다.[1] 특히, 장남 원담과 막내 원상의 후계 다툼은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1] 원상은 지지자 심배와 방기에 의해 선제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
202년 겨울, 조조는 역양 전투에서 원담의 역양을 공격했고,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1] 두 형제는 6개월 동안 버텼지만 결국 업현으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반격에 성공하여 조조가 잠시 물러나게 만들었다.[1]
조조가 203년 중반에 물러나자마자 형제들의 갈등은 악화되었다.[1] 원담은 조조의 군대를 추격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청했지만, 원상은 형이 더 큰 군대를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아 거절했다.[1] 이러한 불신 행위는 원담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었고, 그는 동생에게 반란을 일으켜 분노에 차 업현을 공격했다.[1] 원상은 다시 업현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원담을 300km 떨어진 남피현까지 쫓아냈다.[1] 원담은 남쪽으로 도망쳐 평원현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포위되었다.[1]
원담의 참모 곽도는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1] 곽도는 조조의 군대가 업현을 공격할 것이고, 원상은 자신의 수도를 구하기 위해 돌아갈 것이며, 원담은 업현 북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조조가 성공한다면 원상의 권력은 제거될 것이고, 멀리 뻗어나간 조조는 곧 물러나 원담이 북쪽을 장악하고 조조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원담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신비를 사신으로 보내 조조와 동맹을 맺도록 했다.[1]
조조의 참모 순욱은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향하기 전에 북쪽을 안정시키는 것을 옹호했고, 유표는 위협이 될 정도로 야심적이지 않으며, 형제들이 재결합하기 전에 원씨 가문의 불화를 이용할 때라고 판단했다.[3] 조조는 동맹에 대한 원담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음을 관찰한 신비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조조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고, 신비는 조조의 군대에 합류했다. 203년 말, 조조는 다시 황하를 건너 역양으로 군대를 이끌었고, 아들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5] 원상은 실제로 평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업현을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원담의 입지가 안전해지자, 조조는 잠시 물러났다.[5]
2. 2. 조조의 북진과 원담의 동맹 요청
원소가 200년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하고 2년 뒤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원담, 원희, 원상과 사촌 고간은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장악하며 세력을 유지했다.[1] 그러나 원씨 형제들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장남 원담은 막내 동생 원상의 후계자 지명에 불만을 품었고, 둘째 아들 원희는 형제들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다.[1]
202년 겨울, 조조는 역양 전투에서 원담의 역양을 공격했고, 원상은 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1] 두 형제는 6개월 동안 조조에게 맞섰으나 결국 업현으로 후퇴했다가 반격하여 조조를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했다.[1]
2003년 중반, 조조가 물러나자 형제들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원담은 조조군 추격을 위해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구했지만, 원상은 이를 거절했다.[1] 이에 분노한 원담은 원상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남피현으로 쫓겨갔다. 남피에서 다시 평원현으로 도망친 원담은 곽도의 제안으로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곽도는 조조가 업현을 공격하면 원상이 돌아올 것이고, 원담은 그 틈에 북쪽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조조는 순욱의 조언에 따라 원담과의 동맹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순욱은 원씨 형제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북쪽을 안정시킬 기회라고 판단했다.[3] 신비는 조조에게 원담의 군사력이 약해졌음을 강조하며, 지금이 원상을 제거할 적기라고 설득했다.[4]
결국 조조는 신비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담과 동맹을 맺고, 203년 말 다시 황하를 건너 역양으로 진군했다. 아들 조정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켜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5] 원상은 평원 포위를 풀고 업현으로 돌아갔고, 원담은 위기에서 벗어났다.[5]
3. 전투의 전개
3. 1. 업성 포위
204년 봄, 조조는 다시 황하를 건너 북진하여 업성을 포위했다.[6] 그는 황하 북쪽에서의 작전에 따른 물류 문제를 고려하여 보급품 수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러 수리 시설 공사를 시작했다. 원상은 심배에게 업성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원담을 공격하러 갔다. 원상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제기한 수유(蘇由) 휘하의 도시 수비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게 업성을 항복시키려 했으나, 이 계획은 발각되어 심배에 의해 제압되었고 수유는 조조에게 달아났다.[6]
조조는 업성을 포위하기 위해 흙 언덕을 쌓고 땅굴을 팠다. 이를 마친 조조는 장수 조홍에게 포위를 맡기고, 4월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병주에서 오는 보급로를 지키던 원상 휘하의 현령 윤개(尹楷)를 공격했다. 조조의 군대는 태행산 기슭의 윤개의 요새인 모성(毛城)을 함락시킨 후, 예 북쪽의 한단에서 저곡(沮鵠)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원상의 현령들로부터 더 많은 탈주가 발생했고, 지역 흑산적 두목 장연은 조조에게 지원을 제공했다.[6] 이때 업성은 남쪽, 서쪽, 북쪽으로 차단되었고, 원상은 동쪽에서 원담과 대치하고 있었다.
조조의 군대는 5월에 업성의 포위선으로 돌아왔다.[7] 심배는 포위 기간 동안 격렬하게 도시를 방어했다. 그는 조조의 땅굴에 대응하기 위해 예성 내에 참호를 팠고, 그의 부대 내의 불화를 처리했다. 그의 장교 중 한 명인 풍례(馮禮)는 적을 들여보내기 위해 사릿문을 열었다. 심배는 이를 알고 바위를 입구에 떨어뜨려 문을 막고, 들어온 약 300명의 병사를 죽였다.
포위 언덕과 땅굴이 건설된 지 불과 몇 주 후에 조조는 전술을 변경하고 그것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길이 40 리의 얕은 해자가 도시를 둘러싸도록 파였다. 처음에는 해자가 얕아 건널 수 있었으므로 심배는 그것을 보고 비웃으며 무시했다. 그러자 조조는 하룻밤 사이에 참호를 더 깊게 파서 폭 20 피트, 깊이 20 피트로 만들고, 서쪽의 인근 장강에서 물을 끌어와 남쪽의 연피택(晏陂澤)과 동쪽과 북쪽의 환하를 포함시켰다.[7] 도시는 고립되었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아로 죽었다고 한다.[8]
3. 2. 원상의 구원 시도와 패배
원상은 업성을 구원하기 위해 공격을 중단하고 돌아왔으나, 조조의 계략에 빠져 대패했다.[9][10][11][12] 원상은 주부(主簿) 이부를 보내 구원군 도착을 알리려 했으나 실패했다.[9] 이부는 심배에게 늙고 약한 자들을 내보내도록 하여 포위망을 탈출, 원상에게 업성의 상황을 전달했다.[10]
조조는 원상이 북서쪽 언덕으로 이동한다면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 예측했고, 원상은 실제로 북쪽에서 비스듬히 접근했다.[11] 조조는 원상이 한단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 기주를 얻을 것이라 확신했다.[12]
원상은 예에서 17리 떨어진 양평정(陽平亭)으로 향했고, 부수(滏水) 강둑에서 횃불을 켜 성 안의 방어군과 신호를 주고받았다.[12] 심배는 원상과 합류하려 북쪽으로 출격했으나, 조조는 두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12] 조조는 원상을 거장(曲漳)과 란구(濫口)에서 연이어 격파했고, 원상은 진림과 음귀를 보내 항복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12] 결국 원상은 중산군으로 도주했고, 마연과 장의는 항복했다.[12]
3. 3. 업성 함락과 심배의 최후
조조는 원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전리품을 업의 수비군에게 보여주어 사기를 크게 꺾었지만, 심배는 완강하게 저항했다.[13] 심배는 원상의 둘째 형제 원희가 유주에서 곧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군대를 결집했고, 따라서 원상의 패배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조조가 포위 공격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 말을 타고 나가자, 심배는 궁병들에게 그를 향해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며칠 후, 율리우스력 9월 13일에 심배의 조카 심영이 도시를 배신하고 밤에 동문을 열어 적을 들였다.[13] 조조의 군대가 도시를 돌파하자, 심배는 반역자이자 원씨 가문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던 신비의 형제 신평의 가족들을 처형한 후, 직접 성문 방어에 참여했다. 심배와 남은 수비병들은 도시 안으로 밀려났고, 한동안 거리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와 《헌제춘추》(獻帝春秋)는 심배가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자 우물에 숨었다고 주장하지만, 배송지는 이 기록을 거부한다.[14] 어떠한 상황이었든, 심배는 생포되었고, 반 년 이상 끌어온 포위 공격은 마침내 끝났다. 조조는 그 후 주민들을 학살했다. 원씨 가문의 여성들을 장악하여, 종종 강간했다. 그의 아들 조비는 원희의 아내인 견씨와 결혼했다.[15]
4. 전투의 결과
심배는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참수되었다. 심배는 죽기 전 자신의 주군인 원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16]
조조는 원소의 묘를 찾아 친구이자 적이었던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또한 조비가 원희의 아내 견씨를 차지하는 부적절함에도, 원소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위로와 연금을 제공했다. 조조는 원소의 이전 관료들을 등용하고, 정복한 영토에 1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등 국가 재건에 힘썼다. 이러한 조치로 민심을 얻어 반란을 막을 수 있었다. 병주 자사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기주 자사 직을 사양하고 연주 자사로 남았다.[16]
예성 함락으로 기주에서 원씨 가문의 권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원담은 원상을 격파하고 유주로 몰아냈지만, 조조는 원담을 비난하며 약혼을 취소했다. 205년 조조는 남피 전투에서 원담을 죽였다.[17] 원상과 원희는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과 함께 패배했다.[17]
예성은 조조에게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주요 거주지가 되었다. 예성과 주변 위군은 조조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동작대와 현무지(玄武池) 등 여러 사업이 진행되었다. 213년 조조는 위공으로 봉해졌고, 이는 220년 조위 건국으로 이어졌다. ''수경주''에 따르면, 예성은 위나라 시대에 북경으로 여겨졌다.[18]
4. 1. 조조의 화북 통일 기반 마련
조조는 원소의 묘를 찾아 친구이자 적이었던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16] 조조는 원희의 아내 견씨를 조비가 자신의 아내로 삼는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원소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위로와 연금을 제공했다. 또한 원소의 이전 관료들을 많이 고용하고, 새롭게 정복한 모든 영토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했으며,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정책을 쏟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조조에게 광범위한 인기를 얻게 해주었고, 예성에 정착하기 위해 파견된 병주 병력과 함께, 이전 통치자들을 지지하는 반란의 발발을 막았다.[16]업 전투의 승리로 기주에서 원씨 가문의 권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원담은 중산에서 원상을 격파하고 유주로 몰아냈으나, 조조는 원담의 행동을 비난하며 약혼을 취소했다. 205년, 조조는 남피 전투에서 원담을 죽였다.[17] 원상과 원희는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과 함께 패배했다.[17]
예성은 조조에게 유용한 거점이 되었고, 그는 도시를 점령한 직후 주요 거주지로 삼았다. 수년에 걸쳐 예성과 주변의 위군은 조조의 권력 중심이 되었고, 그는 도시 안팎에서 동작대와 해군 훈련을 위한 현무지(玄武池)를 포함한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 213년 조조는 예성의 군 이름을 따서 위공으로 봉해졌고, 그 이름은 220년 조위 건국으로 이어졌다.[18] ''수경주''에 따르면, 예성은 위나라 시대에 북경으로 여겨졌다.[18]
4. 2. 정치적 영향
조조는 원소의 묘를 찾아 친구이자 적이었던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조비가 원희의 아내 견씨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예성에 있는 원소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위로와 연금을 제공했다.[16] 정치적으로 조조는 원소의 이전 관료들을 많이 등용하고, 새롭게 정복한 모든 영토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했으며, 조조와 원씨 형제 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정책을 쏟아 민심을 수습하고 반란을 막았다.[16]예성은 조조에게 유용한 인수임이 증명되었고, 그는 도시를 점령한 직후 주요 거주지로 삼았다. 수년에 걸쳐 그 도시와 주변의 위군은 조조의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그는 도시 안팎에서 동작대 건설, 해군 훈련을 위한 현무지(玄武池) 건설 등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 213년 조조는 예성의 군 이름을 따서 위공으로 봉해졌고, 그 이름은 220년 한나라를 계승한 조위 국가에서 절정에 달하는 조씨 가문의 운세 상승 동안 지속되었다.[18] ''수경주''에 따르면, 예성은 위나라 시대에 북경으로 여겨졌다.[18]
5. 역사적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5. 3. 한국사와의 연관성
6. 주석
7. 외부 링크
참조
[1]
서적
Records of Heroes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Biography of Xin Pi, Volume 25
[2]
서적
de Crespigny (2010)
[3]
서적
de Crespigny (1996)
[4]
서적
de Crespigny (1996)
[5]
서적
de Crespigny (1996)
[6]
서적
de Crespigny (1996)
[7]
서적
de Crespigny (2010)
[8]
서적
de Crespigny (1996) and de Crespigny (2010)
[9]
서적
de Crespigny (1996)
[10]
서적
Brief Account of the Wei Dynasty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Biography of Jia Kui, Volume 15
[11]
서적
de Crespigny (2010)
[12]
서적
Biography of Cao Man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Chronicles of the Martial Emperor, Volume 1
[13]
서적
de Crespigny (1996)
[14]
서적
Biography of Yuan Shao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Volume 6
[15]
서적
Houhanshu
[16]
서적
de Crespigny (2010)
[17]
서적
de Crespigny (2010)
[18]
서적
de Crespign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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