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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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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마동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낭중기장, 사마, 기사마를 역임하며 유방을 섬겼다. 그는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여 오강에서 항우와 대면하였고, 항우 사후에는 그의 시신 일부를 얻어 공을 세워 중수후에 봉해졌다. 이후 문제 9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장이라 하였으며, 아들 여가가 뒤를 이었다.

2. 생애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여마동은 호치(好畤)[1]에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사마(司馬)로서 초나라 장수 용저를 쳤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 여마동은 중수(中水侯)에 봉해졌으며, 봉읍은 1,500호였다.[2]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莊)이라 하였고, 아들 여가(呂假) 혹은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2. 1. 해하 전투와 항우의 죽음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여마동은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 참전하여 초패왕 항우를 오강까지 추격했다. 항우는 여마동을 알아보고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여마동은 왕예에게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라고 말했다. 항우는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만 호로 산다고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라며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항우의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고, 왕예가 머리를 차지한 후, 여마동은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시체의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 시체를 맞추어보니 항우의 것이 맞았고, 이들은 함께 제후가 되었다.[2]

2. 2. 중수후 책봉과 사망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서 진나라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하여 오강에 이른 한나라 군대 속에 있었다. 항우와 대면하여, 항우가 물었다.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 이에 고개를 돌리고 왕예에게 지시하여 말했다.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 항우가 말했다.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로 산다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 그리고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이미 머리를 취한 왕예 외에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2]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중수(中水侯) 1500호에 봉해졌다.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죽어 시호를 (莊)이라 하고, 아들 이후(夷侯) 여가(呂假) 혹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3. 출전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호치[1]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사마(司馬)로서 초나라 장수 용저를 쳤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서 진나라 서초패왕을 추격하여 오강에 이른 한나라 군대 속에 있었다. 항우와 대면하여, 항우가 물었다.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 이에 고개를 돌리고 왕예에게 지시하여 말했다.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 항우가 말했다.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만 호로 산다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 그리고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이미 머리를 취한 왕예 외에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중수(中水侯) 1500호에 봉해졌다.[2]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죽어 시호를 (莊)이라 하고, 아들 이후(夷侯) 여가(呂假) 혹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참조

[1] 역사 옛 진나라 [[내사지]]의 속현. 이해 8월 고제가 옹나라 왕 장한과 이곳에서 싸워서 장한을 패주시켰다.
[2] 역사 《사기정의》에서는 진서지도기(晉書地道記)를 따라 [[하간군]]의 속현이라 했고, 《사기색은》에서는 《한서》 지리지를 따라 [[탁군]]의 속현이라 했다. 《서한정구지리》에서는 두 기록을 바탕으로 원래 [[조 (전한)|조나라]] 하간군의 속현이었으나 한나라에서 조나라와 [[연 (전한)|연나라]] 사이의 국경을 조정하면서 연나라로 넘어갔고 나중에 연나라에서 탁군이 떨어져나올 때 같이 떨어져나온 것으로 보았다.
[3] 역사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4] 역사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5] 역사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6] 역사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7] 역사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8] 역사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9] 역사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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