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예 (전한)
1. 개요
왕예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고제 2년 혹은 3년에 하비에서 낭중기로 고제를 섬기며 한신에게 속했다. 해하 전투에서 관영 휘하로 항우를 추격하여, 오강에서 항우가 자결하자 그의 머리를 베어 공을 세웠다. 이후 양희, 여마동,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신을 나누어 가지고 제후가 되었으며, 고제 7년에 두연후에 봉해졌다. 여후 5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장(莊)이며, 아들 왕복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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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3년 사망 -
한니발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15년간 지배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고 망명 생활을 하다 자살했다. -
기원전 183년 사망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
전한의 귀족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귀족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왕예는 고제 2년 혹은 3년, 하비에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라 한신에게 속했다. 고제 5년,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뒤쫓아 오강에서 그와 싸웠고, 항우가 자결하자 그의 머리를 취했다. 양희, 여마동,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를 나눠가져 공을 세웠다. 고제 7년 정월 기유일에 두연후(杜衍侯) 1700호에 봉해졌다. 여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했고, 아들 왕복(王福)이 뒤를 이었다.
2.1. 초기 생애와 한나라 가담
고제 2년(기원전 205년) 혹 고제 3년(기원전 204년),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한신에게 속했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관영에게 속해,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를 뒤쫓는 군대에 있었다. 오강에서 항우와 만나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하자 항우의 머리를 취했다.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양희, 여마동, 낭중 여승, 양무가 나머지 시체를 나눠가졌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두연후(杜衍侯) 1700호에 봉해졌다.
2.2. 해하 전투와 항우 살해
기원전 202년,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관영에게 속해,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를 뒤쫓는 군대에 있었다. 오강에서 항우와 만나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하자 항우의 머리를 취했다.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양희, 여마동, 낭중 여승, 양무가 나머지 시체를 나눠가졌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2.3. 두연후 책봉과 사망
고제 2년(기원전 205년) 혹은 3년(기원전 204년),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한신에게 속했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관영에게 속해,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를 뒤쫓는 군대에 있었다. 오강에서 항우와 만나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하자 항우의 머리를 취했다.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양희·여마동·낭중 여승·양무가 나머지 시체를 나눠가졌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두연후(杜衍侯) 1700호에 봉해졌다.
재위 18년 만인 여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했고, 아들 공후 왕복(王福)이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