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 (적천장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양희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유방을 따라 낭중기(郞中騎)로 활동하며 한신 휘하에 속했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다 항우 사후 시신 일부를 얻은 공으로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으며, 작위 박탈과 복권을 거쳐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손으로는 승상 양창과 양진이 있다.

양희 (적천장후)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169년 사망 - 주발 (전한)
    주발은 유방을 따라 초한 전쟁에 참전하고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여씨 일족을 몰아내고 문제의 즉위에 기여하여 우승상과 승상을 역임했으나 모반 혐의로 투옥되기도 한 인물이다.
  • 기원전 169년 사망 - 유읍
    문제의 총애를 받은 전한의 황족 유읍은 뛰어난 재능으로 가의를 태부로 임명할 만큼 촉망받았으나 낙마 사고로 요절하여 가의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공신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공신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2. 생애

양희(楊喜)는 전한 초기의 군인으로,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고 그 시신을 얻은 공으로 제후에 봉해진 인물이다.

기원전 205년부터 한 고제를 섬겼으며, 초기에는 한신 휘하에서 활동했다. 해하 전투에서 관영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항우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항우의 위세에 눌려 잠시 후퇴하기도 했으나, 결국 항우가 자결한 후 그의 시신 일부를 얻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기원전 200년에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져 1,9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이듬해 복권되었다.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사망하여 장(莊)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양은이 작위를 이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의 양진이 양희의 8세손이라고 한다.

2.1. 초기 생애와 한신 휘하 활동

기원전 205년, 두현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이후 한신에게 속했다.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를 공격한 관영에게 속해, 기장(騎將)으로서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했다. 그러나 항우가 꾸짖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서 몇 리를 도망쳤다. 다시 한나라 군대가 오강에서 항우와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했다. 그러자 왕예항우의 머리를 취하고,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여마동·낭중 여승·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적천(赤泉侯) 1,900호에 봉해졌다.

2.2. 해하 전투와 항우 추격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양희는 낭중기장으로서 관영의 휘하에서 항우를 추격했다. 추격 중, 눈을 부릅뜬 항우의 꾸짖음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수 리나 후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추격하여 오강에서 자결한 항우의 시신 일부를 얻었다.

이 공으로 기원전 200년 양희는 1900호를 영지로 하는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다. 같은 방식으로 항우의 시신 일부를 얻은 왕예는 두연후(杜衍侯)에,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에, 여승은 열양후(涅陽侯)에, 양무는 오방후(吳防侯)에 각각 봉해졌다.

2.3. 적천후 책봉과 박탈, 복권

고제 7년 정월 기유일에 양희는 적천(赤泉侯) 1,900호에 봉해졌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빼앗겼으나, 이듬해에 다시 봉해졌다.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莊)이라 하였고, 아들 양은이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2.4. 사망과 시호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莊)이라 했고, 아들 양은이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3. 가계

아들은 양식(楊敷)이고, 손자는 양무해(楊毋害)이다. 양무해는 과실로 인해 작위를 잃었다. 양무해의 손자인 양맹상(楊孟嘗)은 선제의 흥멸계절(興滅繼絶) 은전에 힘입어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다. 증손은 안평후(安平侯) 양창(사마천의 딸의 남편, 소제 때의 승상)이며, 그의 현손은 양진이다.

4. 출전

楊喜중국어사마천의 《사기》 권7 항우본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와 반고의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 권31 진승항적전 중 항적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