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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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스쿠스는 오늘날 불가리아 북서부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로, 오이스쿠스강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다뉴브강 방어선의 중요한 군사 기지이자 군단 요새로 발전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다리가 위치해 있었다. 훈족과 아바르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이후 불가리아 시대에 마을이 존재했다. 현재는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 중이며,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극의 오이스쿠스섬은 이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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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쿠스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콜로니아 울피아 오이스켄시움 |
다른 이름 | 오에스쿠스 |
위치 | 불가리아 플레벤 주 굴얀치 시 기겐 |
좌표 | 북위 43° 42' 동경 24° 29' |
건설 정보 | |
건설 시기 | 102년 |
건설 주체 | 트라야누스 황제 |
폐쇄 시기 | 586년 |
군사 정보 | |
주둔 부대 | 제5군단 "마케도니카"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트라야누스 황제까지) |
행정 구역 정보 | |
속주 |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
변경 | 다뉴브 강 |
고고학 정보 | |
발견 연도 | 알 수 없음 |
현재 상태 | 알 수 없음 |
발굴 | 알 수 없음 |
고고학자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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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원
오이스쿠스라는 이름은 도시 근처를 흐르는 오이스쿠스강, 즉 오늘날의 이스커르강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당시 사용된 현지 트라키아어 방언으로 '물'을 의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이스쿠스는 고대 트리발리족의 도시로 언급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기에는 다뉴브 리메스의 중요한 군사 기지이자 콜로니아로서 발전하였다.[3] 이 시기 도시는 로마 제국의 주요 도로망과 연결되었고, 군단 V 마케도니카 등이 주둔하며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다.[6]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곳에 콜로니아 지위를 부여했으며,[7] 이후 로마 시민의 모든 권리를 받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포르투나 여신과 카피톨린 삼위신을 모시는 신전이 건립되었고, 보석, 금속 제품, 도자기 등을 생산하는 경제 활동도 활발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콘스탄티누스의 다리를 건설하여 도시의 중요성을 더했으나, 이 다리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5세기 훈족의 침입과 6세기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이후 중세 시대에는 불가리아인들의 정착지가 들어섰다.
3. 역사
3. 1. 고대 로마 시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서기 90~168년경)는 울피아 오이스쿠스를 오늘날 불가리아 북서쪽에 거주했던 고대 부족인 트리발리족의 도시로 묘사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오이스쿠스는 다뉴브강 국경 방어선인 다뉴브 리메스의 일부로서 중요한 군사 기지이자 군단 요새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주변 정착지들과 함께 도시로 발전했으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과는 세 개의 주요 도로로 연결되었다.
# 비아 에그나티아를 다뉴브강과 연결: 헤라클레아 린케스티스에서 세라미아이, 스토비, 아스티보스, 트라누파라, 파우탈리아, 아엘레아, 세르디카를 거쳐 오이스쿠스로 이어지는 도로.
# 필리포폴리스에서 오이스쿠스 연결: 필리포폴리스 – 비아마타(보니야고보-"고르니 스테니치") – 섭 라디체(흐리스토 다노보) – 몬테므노(베클레메토-"카르코비자 북") – 아드 라디체스(벨리 오섬/카멘 모스트) – 소스트라(로메크) – 멜타(로베치) – 도리오네스 – 스토르고사(플레벤) – 아드 푸테아(리벤)를 거쳐 오이스쿠스로 이어지는 도로.
# 다뉴브강을 따라: 싱기두눔(베오그라드) – 비미나키움(코스톨라크) – 라티아리아 – '''오이스쿠스''' – 노바에(스텍렌 by 스비스토프) – 두로스토룸(실리스트라) – 다뉴브강 하구를 잇는 경로.
로마의 군단 V 마케도니카(제5 마케도니아 군단)는 서기 10년부터 101년까지 이곳에 있는 영구 기지를 간헐적으로 유지했다. 62년, 이 군단은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네로 황제의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이동했고, 이후 전쟁 마무리를 위해 동방으로 보내졌다. 또한 66-67년의 유대-로마 전쟁에도 참여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잠시 머문 후, 이 군단은 71년에 오이스쿠스로 복귀했다. 군단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코호르스 IV 갈로룸 에퀴타타가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뉴브 방어선이 강화되면서, 군단 IV 스키티카 역시 101년까지 이곳에 주둔했다.[2]
서기 106년에서 112년 사이, 트라야누스 황제는 오이스쿠스에 '콜로니아' 지위를 부여하고, 도시 이름을 Colonia Ulpia Oescensium|콜로니아 울피아 오이스켄시움la으로 바꾸었다.[3] '울피아'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가문 이름인 '울피우스'에서 따온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군단 VI 마케도니카와 군단 I 이탈리카의 퇴역병들이 이곳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시는 기존의 군단 요새 위에 건설되었다.
서기 167년, 오이스쿠스는 로마 시민의 모든 권리를 부여받는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
190–191년에는 도시의 수호신으로 지정된 여신 포르투나에게 바치는 신전이 세워졌다. 또한 로마의 주신들인 카피톨린 삼위신(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을 모시는 신전도 존재했다.
도시의 경제는 보석류, 청동 조각상, 청동 브로치 등 금속 제품, 그릇, 유리, 도자기(테라 시길라타, 적색 슬립 도자기 등), 금속 및 뼈 제품 제작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 규모가 큰 조각 공방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271년 이후, 군단 V 마케도니카가 다시 돌아와 '오이스쿠스 II'라는 이름의 두 번째 요새를 건설했다. 약 20km 떨어진 샘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가 건설되었고, 외부 침입과 다뉴브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성벽도 세워졌다.
328년 7월 5일,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다뉴브강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석조 다리인 콘스탄티누스의 다리를 개통하고 봉헌했다. 이 다리는 오이스쿠스와 강 건너 북쪽의 수치다바를 연결했으며, 길이는 2.5km(강 위 구간 1.3km), 너비는 5.7m에 달해 고대 시대에 가장 큰 강 다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다리는 약 27년 정도만 사용되다가 355년경 이민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411년, 훈족이 오이스쿠스를 파괴했으며, 444년에는 '후니온'(Hunion)이라는 이름으로 훈족 정착지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다뉴브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오이스쿠스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도시를 요새로 복구하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585년 말에서 586년 초에 있었던 아바르족의 침입으로 결국 중단되었다.
3. 2. 중세
오이스쿠스가 있던 자리에는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불가리아인들의 마을이 존재했다.
4. 고고학
오이스쿠스는 하(下) 다뉴브강 유역에서 가장 크고 지속적으로 연구된 고대 도시 중 하나이다.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1904년 바츨라프 도브루스키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불규칙한 오각형 모양이었으며, 초기 면적은 18ha였다. 271년 이후에는 동쪽으로 10ha가 확장되었다. 군단 요새 방어벽의 유적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동북동쪽 지역(Pyasutsite와 Prez Livada)에서는 퇴역 군인들의 금석문 기념물이 포함된 묘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오이스쿠스의 유적지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도시의 부유함을 보여준다. 유적지에서는 주요 문, 행정 건물, 시민 바실리카, 세 개의 공중 목욕탕(테르메), 우물, 완벽하게 보존된 도로, 이교 사원, 묘지, 방어벽, 작업장, 포룸 등이 확인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다리의 유적도 존재하지만, 이는 다뉴브강 북쪽 둑에서만 볼 수 있다.
1948년에는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아인"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다. 이 모자이크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은 현재 플레벤 지역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시의 수호신 포르투나 여신상과 같은 다른 유물들은 소피아의 불가리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쪽으로 확장된 제2 오이스쿠스 요새(오이스쿠스 II) 지역에 대한 고고학 조사에서는 원수정 시대의 주택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유적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2020년에는 14가지 종류의 희귀한 다색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아울라 레기아(대강당)가 발견되었다.[8] 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의 시기와 특징으로 볼 때, 328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누스 다리 개통식 참석차 방문했을 때를 대비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5. 유산
- 오이스쿠스섬은 남극에 위치한 섬으로, 오이스쿠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서적
De aedificiis
[2]
웹사이트
Oescus – from castra to colonia
https://www.research[...]
[3]
간행물
CIL III 753
[4]
웹사이트
Fine Marbles in 14 Different Colors from Constantine the Great's Danube Bridge Opening in 328 AD Found in Roman City Ulpia Oescus in North Bulgaria
https://web.archive.[...]
2021-04-03
[5]
서적
De aedificiis
[6]
웹사이트
Oescus - from castra to colonia
https://www.research[...]
[7]
간행물
CIL III 753
[8]
뉴스
서기 328년에 개통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다뉴브강 다리의 14가지의 색이 다른 진귀한 대리석들이 불가리아 북부에 있는 로마의 도시 울피아 오이스쿠스에서 발견되었다
http://archaeologyin[...]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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