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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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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안씨는 흑수말갈 출신 함보가 완안 부족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성씨로, 금나라를 건국한 주요 씨족이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발해인들이 고려에 거주했기에 한국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완안씨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 북부를 정복하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멸망 후 완안씨는 멸족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외지로 이주했고, 현재 중국에는 완안씨 성을 유지하는 후손이 거의 없다. 2020년 중국 통계에 따르면 약 6천 명의 완안씨가 존재하며, 일본인 화가 왕소의 아버지 완안애란이 금나라 세종의 후손이다.

2. 시조 및 기원

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며, 그의 후손인 아골타가 1115년에 반기를 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금경조 이전의 여진족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구전에 따르면 금경조는 완안 씨족의 창시자 함보(函普)의 6대손으로, 함보(函普)는 약 900년경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보(函普)는 원래 발해흑수말갈 부족 출신이었다. 『금사』에 따르면, 그가 완안 부족에 온 것은 살인 사건에 대한 보상의 형태였다. 그는 고려발해에 각각 남은 두 형제가 있었다. 함보(函普)는 완안족에 정착했을 때 이미 60세였고 "현명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폭력 없이 두 가문 간의 분쟁을 해결했고, 그 보상으로 역시 60세의 미혼 여성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여진 문화에서 존경받던 검은 소를 선물로 받았으며, 한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를 통해 함보(函普)는 완안 부족의 족장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완안 씨족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함보(函普)가 고려에서 왔기 때문에 일부 한국 학자들은 함보(函普)가 고려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김에 따르면, 당시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단순히 한국인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일부 서구 학자들은 함보(函普)의 기원을 전설적인 것으로 여긴다. 허버트 프랑케는 『금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10세기에 완안 씨족이 고려발해에서 온 이주민들을 흡수했다는 역사적 근거를 가진 "선조 전설"로 묘사했다. 프레드릭 W. 모트는 그것을 부족의 기억을 담고 있을 수 있는 "부족 전설"로 보았다. 고려발해에 남은 두 형제는 그 두 민족과의 조상적 유대감을 나타내는 반면, 함보(函普)의 결혼은 부족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2. 1. 함보(函普)의 등장

의 시조 함보(函普)는 흑수말갈 출신으로, 10세기발해에서 완안부로 이주해 왔다.[2] 당시 완안부는 고려와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함보는 뛰어난 지혜로 분쟁을 해결하고 완안부의 족장이 되었다.[3]

함보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려 출신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당시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다.[2]

함보는 60세의 나이에 완안부에 정착했으며, 역시 60세인 여성과 결혼하여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3] 이 결혼은 검은 소를 선물로 받는 등 여진족 사회에서 존경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함보의 후손들은 완안 씨족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3]

2. 2. 완안부의 성장

함보의 후손들은 완안부를 여진족의 유력 부족으로 성장시켰다. 1021년부터 1074년까지 활동한 금경조(1021년 ~ 1074년) 시대에 여진족은 하나의 국가와 같은 연합체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3. 금나라 건국과 발전

1115년, 완안 아구다(完顏阿骨打)가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는 1123년 사망하기 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2년 후, 그의 동생 완안 오기마이(完顏吳乞買)가 송나라를 침략하여 금송 전쟁에서 중국 북부를 정복하였다. 그 후 여진족은 화이화되었는데, 이는 여진족 역사 기록에서 성씨 "완안(Wanyan)"이 "왕(Wang)"으로 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2]

금나라 제3대 황제 희종(완안합라)은 폭정을 펼쳐 사촌 동생인 해릉왕(海陵王)(완안덕고내)에게 살해되었고, 거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해릉왕 또한 정쟁으로 인해 신하에게 살해되면서 완안씨는 혼란기를 맞았다. 이후 세종(완안오록)이 즉위하여, 그간의 폭정을 바로잡고 재정 개혁과 인사 쇄신 등 선정에 힘써 금나라는 다시 안정기를 맞았다.

3. 1. 아골타(阿骨打)의 건국

완안 아골타는 함포(函普)의 6대손으로, 1115년에 요(遼)의 압력에 반기를 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2]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1123년 사망하기 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3]

3. 2. 금나라의 전성기

금 태종(완안성)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장악했다(정강의 변). 금 희종(완안단) 시대에는 중앙 집권화와 한화(漢化) 정책이 추진되었다. 금 세종(완안옹)은 내정을 정비하고, 문화를 발전시켜 금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4. 금나라의 쇠퇴와 멸망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몽골은 승리 후 완안(完顔) 성을 가진 사람들을 금나라 왕족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하고 즉결 처형했다. 생존을 위해 완안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王)으로 성을 바꾸거나, 잡히는 것을 피해 외딴 지역으로 이주하여 만주식으로 왕기연(Wanggiyan)을 사용했다. 현재 중국에는 완안 성을 유지한 후손이 거의 없다.

4. 1. 내분과 혼란

금나라 제3대 황제 희종(완안합라)은 폭정을 펼치다가 반란 세력과 손을 잡은 사촌 동생 해릉왕(海陵王)(완안덕고내)에게 살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거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2] 그러나 해릉왕 또한 정쟁으로 신하에게 살해되면서 완안씨는 혼란기를 맞았다.

이후 해릉왕의 사촌 동생이 세종(완안오록)으로 즉위하여 폭정을 바로잡고 재정 개혁과 인사 쇄신 등 선정에 힘써 금나라는 다시 안정기를 찾았다.

하지만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위소왕(衛紹王)(완안과승)이 즉위할 무렵, 몽골 제국의 팽창으로 금나라는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위소왕은 몽골 제국의 복속 권고를 거절하고 몽골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데에만 집착하여 오히려 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결국 황위를 박탈당했다.

4. 2. 몽골의 침입과 멸망

몽골 제국의 팽창으로 금나라는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위소왕 (완안과승)은 몽골 제국의 복속 권고를 거절하고 몽골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데에만 집착하여 오히려 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결국 황위를 박탈당했다.

위소왕의 조카인 선종 (완안오두보)이 즉위하였으나, 수도 중도(현재의 베이징)가 포위되었고, 종실(宗室)인 재상 완안 복흥의 건의로 하둔 공주를 칭기즈칸의 후궁으로 보내 일시적인 화목은 이루어졌지만, 이후에도 몽골 제국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서하(西夏)와의 동맹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서하가 멸망하고 선종은 실의 속에 죽었다.

그의 아들 애종 (완안녕갑속) 때, 한때 일족인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尚)을 대장으로 하는 저항군이 몽골군을 물리쳤으나, 이 전투에서 칭기즈칸이 병사하자 그의 막내아들 툴루이(トルイ)의 원수를 갚으려 혈안이 된 그의 형 오고타이 칸의 공세 앞에 패하고 만다. 애종은 일족인 말제 (완안호둔)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말제 또한 몽골군에 포획당하고, 완안씨는 멸족하였다.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몽골은 승리 후 완안(完顔) 성을 가진 사람들을 금나라 왕족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하고 즉결 처형했다. 생존을 위해 완안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王)으로 성을 바꾸거나, 잡히는 것을 피해 외딴 지역으로 이주하여 만주식으로 왕기연(Wanggiyan)을 사용했다.

5. 현대의 완안씨

현대에 완안씨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통계에 따르면 완안씨는 11번째로 많은 복성(複姓)이며, 약 6천 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 유전자 검사 업체 23mofang에 따르면, 완안씨 후손들은 하남성 녹읍현 완안씨의 해프로그룹 O1b2a1a1-MF303032를 가진다고 한다.

5. 1. 멸족 위기와 생존

몽골은 승리 후 완안(完顔) 성을 가진 사람들을 금나라 왕족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하고 즉결 처형했다.[2] 살아남은 완안씨들은 성을 왕(王)씨로 바꾸거나, 잡히는 것을 피해 외딴 지역으로 이주하여 만주식으로 왕기연(Wanggiyan)을 사용했다. 현재 중국에는 완안 성을 유지한 후손이 거의 없다.

청(清)의 관료인 숭실(崇實)은 만주팔기에 속했으며, 멸망한 완안씨 일족의 후손이다.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통계에 따르면 완안씨는 11번째로 많은 복성(複姓)이며, 약 6천 명이 있다.[3] 일본에 귀화한 중국인 화가 왕소(1950년생, 일본명: 장백 소)의 아버지 완안애란(부인은 선통제(宣統帝)의 여동생인 운여)은 금나라 세종의 27대손이다.

5. 2. 완안씨 관련 인물


  • '''함포(函普)''': 완안씨의 시조이다.
  • '''완안 아골타''': 함포의 후손으로, 1115년에 동생 오길매(呉乞買) 등과 함께 요(遼)에 반기를 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 '''완안 합라''': 금나라 제3대 황제였으나, 폭정을 펼치다 사촌 동생인 해릉왕(海陵王)(완안덕고내)에게 살해되었다.
  • '''해릉왕(海陵王)(완안덕고내)''': 희종의 사촌 동생으로, 반란 세력과 손을 잡고 희종을 살해했으나, 정쟁으로 인해 신하에게 살해되었다.
  • '''완안 오록''': 해릉왕의 사촌 동생으로 즉위하여 폭정을 바로잡고 재정 개혁과 인사 쇄신 등 선정에 힘써 금나라를 안정시켰다.
  • '''위소왕(衛紹王)(완안과승)''': 세종의 일곱째 아들로, 즉위할 무렵 몽골 제국의 팽창으로 금나라가 멸망 위기에 직면했다. 몽골 제국의 복속 권고를 거절하고 몽골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에만 집착하다 황위를 박탈당했다.
  • '''완안 오두보''': 위소왕의 조카로 즉위하였으나, 수도 중도(현재의 베이징)가 포위되었다. 종실(宗室)인 재상 완안 복흥의 건의로 하둔 공주를 칭기즈칸의 후궁으로 보내 일시적인 화목을 이루었지만, 이후에도 몽골 제국의 공세가 계속되었다. 서하(西夏)와의 동맹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서하가 멸망하고 선종은 실의 속에 죽었다.
  • '''완안 녕갑속''': 선종의 아들로,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尚)을 대장으로 하는 저항군이 몽골군을 물리치기도 했으나, 오고타이 칸의 공세 앞에 패하고 만다. 애종은 일족인 완안 호둔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 '''완안 호둔''': 애종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몽골군에 포획당하고 완안씨는 멸족하였다.
  •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尚)''': 애종 때 몽골군을 물리친 저항군 대장이다.
  • '''숭실(崇實)''': 청(清)의 관료로 만주팔기에 속했으며, 멸망한 완안씨 일족의 후손이다.
  • '''완안애란''': 금나라 세종의 27대손이며, 부인은 선통제(宣統帝)의 여동생인 운여이다. 일본에 귀화한 중국인 화가 왕소의 아버지이다.[3]

참조

[1] 서적 China Under Jurchen Rule: Essays on Chin Intellectual and Cultural History SUNY Press 1995
[2] 웹사이트 《二〇二〇年全国姓名报告》发布_部门政务_中国政府网 http://www.gov.cn/xi[...] 2023-01-19
[3] 웹사이트 王昭プロフィール http://gallerywangzh[...]
[4] 문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
[5] 서적 女眞源流史 江西敎育出版社 2004
[6]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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