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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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보는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 여러 역사서에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60세에 고려에서 완안부로 이주했으며, 완안부에서 부족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함보는 만주족 여성과 혼인하여 완안부 사람이 되었으며, 여진 추장들에게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함보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려인, 신라인, 또는 장백산삼십부여진 출신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하며, 특히 한국 학계에서는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함보의 후손들이 세운 금나라는 고려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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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보 | |
---|---|
인물 정보 | |
이름 | 함보 |
한자 표기 | 函普 |
다른 한자 표기 | 完顏函普 |
설명 | 금나라 시조 |
존칭 | 시조 |
추존 황제 | 의헌경원황제 |
언어 | 만주어 |
한국어 표기 | 시조 |
역할 | 여진족 추장 |
2. 이름
함보는 여러 역사서에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금사》에는 '함보(函普)'로, 《신록기》에는 '긍포(掯浦)'로, 《흠정만주원류고》와 《어제개역금사》에는 '합부(哈富)'로 나타난다. 《삼조북맹회편》에는 '감포(堪布)'로, 《송막기문》, 《금지》, 《대금국지》에는 '감복(龕福)'으로, 《건염이래야조잡기》에는 '지포(指浦)' 등으로 기록되었다.[70] 숭덕제 시기 만주문자로 번역된 《금사》에는 '샨푸'로 기록되었다.
함보는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 60세에 고려에서 완안부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72]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에 심취하여 고려에 남았고, 함보와 그의 동생 보활리는 완안부에 들어가 각각 복간수와 야라로 활동했다.
이케우치 히로시를 비롯한 일본 학계에서는 함보가 생여진 사회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75][76][77][7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며, 일본 특유의 역사 왜곡 방식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함보는 명의황후 결도고단씨와 혼인하여 장남 완안 오로, 차남 완안 알로, 장녀 완안 주사판을 두었다.[14] 완안 오로는 훗날 금나라 추존 황제 덕황제가 되었다. 함보의 형은 아고내, 동생은 완안 보활리이다.[14]
함보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고 논의되고 있다.
《금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함보는 고려인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또는 '''금준(今俊)'''이라고 하며, 《고려사》에서는 '''김극수(金克守)'''라고도 한다.
중국 자료에서는 함보를 여러 가지 음역으로 표기했다. 1131년부터 10년 이상 금 영토에 억류되었던 송나라 사신의 회고록인 《송막기문》에서는 '간푸(龕福)'로 불렀다. 《삼조북맹회편》에 인용된 《신록기》에서는 '켄푸(掯浦)'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만주원류고》에서는 '하푸(哈富)'라고 부른다.
《금사》 권1 세기에는 "금의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에서 왔으며, 나이는 이미 60여 세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5]
3. 생애
《금사》에 따르면, 함보는 완안부에서 부족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했다.법률 내용 살인 사건의 경우 주모자 1명만 처벌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하여 싸움을 그치고 이득을 얻도록 한다. 살인자는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 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어 양측이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도록 한다.
완안부 사람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했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함보에게 청우 1마리를 주고 귀한 만주족 여성을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함보는 이 여성과 혼인하여 장남 오로(烏魯), 차남 알로(斡魯), 장녀 주사판(注思板)을 낳았고,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이후 여진 추장 무리가 결맹하여 함보를 수령으로 추대했다. 《송막기문》에 따르면, 함보가 일을 잘 처리하여 여진족들이 그에게 수령직을 양보하고 복종했다고 한다.[74]
함보의 이러한 업적은 완안부 사람들에게 '신명(神明)'으로 추앙받는 계기가 되었다.
4. 출자지에 대한 논의
반면,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진위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함보를 고려인 또는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79][80][81] 이주전[82]과 김호동은 함보의 출자로 언급되는 '고려'가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83]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함보를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김정배는 신라 말에도 성이 없는 호족들이 존재했으며, 함보 역시 비주류 신라, 고려 호족 출신으로 후대에 성씨를 내세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84]
차드 D. 가르시아는 함보가 고려 출신이 아니며, 장백산삼십부여진 출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85]
5. 가계
6. 현대 한국의 관점
6. 1. 역사적 의의
함보 이야기는 고려와 여진족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역사에서 북방 민족과의 교류와 갈등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26][27]
초기 여진족은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함보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1340년대에 편찬된 《금사》에 따르면 함보는 원래 발해 출신이었다. 그는 예순 살에 고려에서 와서 여진족 완안 씨족에 정착했다. 다른 자료에서는 함보가 신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신라는 한반도를 지배했지만 935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같은 이야기에서는 함보가 고려를 떠났을 때 그의 두 형제는 한 명은 고려에, 다른 한 명은 발해 지역에 남았다고 전한다. 여진족은 함보를 완안오고내(1021–1074)의 6대조로 여겼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함보가 10세기 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때 여진족은 여전히 독립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거나, 918년 고려 건국과 935년 신라 멸망 사이의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완안 씨족은 중국과 거란족 문서에서 "야인", "생", 또는 "미개" ()이라고 불리는 여진 부족 집단에 속했다. 이 "야인 여진족"은 남쪽의 백두산(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동북 지방의 국경)과 북쪽의 쑹화강 사이에 살았으며, 부상하는 요나라(907–1125)의 영토 밖에 있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두 씨족 간의 끝없는 피의 복수의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 함보는 양쪽 모두가 새로운 규칙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즉, 살인자의 가족은 그 후 피해자의 친척에게 말, 소, 돈으로 보상해야 했다. 역사가 헤르베르트 프랑케는 여진족의 이러한 측면을 관습법을 고대 게르만족의 베르겔트 관행과 비교했다. 이러한 분쟁을 종식시킨 보상으로 함보는 예순 살의 여성과 결혼했고, 그녀는 그에게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다. 《신록기》라는 분실된 책에는 함보의 아내가 4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보와 그의 후손들은 그 후 완안 씨족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완안씨는 1000년 이후 여진족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푸의 6대손 완안오고내(1021–1074)는 분산된 여진 부족들을 연합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오고내의 손자 아구다(1068–1123)는 요나라의 지배자였던 거란족을 격파하고 1115년에 금나라를 건국했다. 1127년까지 금나라는 송나라로부터 중국 북부 전체를 정복했다.
1136년 또는 1137년, 금 희종(재위 1135–1150)이 즉위한 직후, 한푸는 시호 "경원황제"(景元皇帝)와 묘호 "시조"(始祖)를 받았다. "시조"는 "첫 번째 조상"을 의미한다. 1144년 또는 1145년에 한푸의 묘는 "광릉"(光陵)으로 명명되었다.[11] 1145년 12월 또는 1146년 1월에 그의 시호는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12]6. 2. 논란과 쟁점
함보의 출신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다. 여러 학자와 역사 기록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함보가 고려 출신 여진족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57]
서양 학자들은 함보를 전설적인 고사로 간주한다.[66]
왕구위는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원나라의 관수 『금사』는 "금나라 사람은 본래 말갈족에서 나왔으며 고려에 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보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중국 학자는 함보가 완안부에 오기 전부터의 본성이 "완안"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짓고 있다.[57] 신라나 고려국에는 "완안" 성이 존재하지 않고, 여진에만 존재한다.[68]
사료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 이후, 6대 손인 오골내의 탄생까지 정확한 시간 기록은 없다.
『송막기문』 등에는 함보가 "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함보를 "신라인"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저자 | 저서 | 기술 내용 |
---|---|---|
홍호 | 『송막기문』 | 여진 추장(함보를 가리킴)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칭했다. 완안은 한나라 말로 왕과 같다. 여진은 그가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여 후에 수령으로 그에게 양보했다. 형제 3명 중 한 명은 숙여진 추장으로, 만호라고 칭했다. 다른 한 명은 타국으로 갔다. 완안은 나이가 60여 세였고, 여진은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역시 60여 세였으며,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호래이다. 이로부터 3대째 전해져 양가 태사에게 이르러 아들이 없자, 그의 조카인 아골타의 동생을 문렬이라고 시호를 받아 아들로 삼았다. 그 후 양가가 아들 찰랍을 낳자 문렬로 하여금 종가로 돌아가게 했다. |
서몽신 | 『삼조북맹회편』 | (여진) 추장은 본래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칭했다. 완안은 한나라 말로 왕과 같다. 여진은 그가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기에 수령으로 삼았으며, 완안의 형제 3명 중 한 명은 숙여진 추장으로, 만호라고 칭했고, 다른 한 명은 타국으로 갔다. 완안은 나이가 60여 세였고, 여진은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역시 60여 세였으며,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호래이다. 이로부터 3대째 전해져 양가 태사에서 아골타에 이르렀다. |
이심전 | 『건염이래조야잡기』 | 완안의 시조 지포(함보)는 신라인으로, 신라에서 여진으로 도망쳐 여진 여러 추장들이 그를 수령으로 추대했다. 7대가 지나 비로소 커졌는데, 소위 아골타이다. |
이심전 | 『건염이래계년요록』 | 즉 아고달(아골타), 그의 선조는 신라인이다. |
진균 | 『구조편년비요』 | 여진은, 그 처음 부족이 본래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칭했다. 완안은 한나라 말로 왕과 같다. 여진은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오고내이다. 이로부터 3대째 전해져 영격 태사에서 아고달(아골타)에 이르렀다. |
불명 | 『속편양조강목비요』 | 완안의 시조 포(함보)는 신라인으로, 신라에서 여진으로 도망쳐 여진 여러 추장들이 그를 수령으로 추대했는데, 7대가 지나 비로소 커졌는데, 소위 아골타이다. |
우문무소 | 『대금국지』 | 혹은 또 말하기를, 그 처음 추장은 본래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칭했다. 완안은 한나라 말로 왕과 같다. 여진은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호래이다. 이로부터 3대째 전해져 양할 태사에서 아골타에 이르렀다. |
마단림 | 『문헌통고』 | 또 말하기를, 그 추장은 본래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칭했으며, 한나라 말로 왕과 같다. 여진은 그의 능숙함을 믿고 수령으로 추대했다. 그 추장은 감복(함보) 이하로 자세히 기록할 만하다. |
조영춘(길림대학교)의 고증에 따르면, 이러한 사료의 함보에 대한 기사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정보원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료의 저자들에게 공통되는 점은, 모두 북송 또는 남송과 원나라 초의 사람들이며, 여진이 대두하던 시대에 비교적 가깝다는 것이다.[57]
그러나, 홍호가 여진 안에서 생활한 것은 함보가 죽은 지 100년 이상 지난 후였고, 함보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구전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송막기문』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68]
이 외에도 『송막기문』에는 많은 오류가 지적되고 있으며, 『송막기문』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료가 아니기에, 함보에 대한 기사 내용에도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송막기문』은 함보가 신라인임을 설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함보가 여진임을 나타내고 있다.[68]
위의 사료는, 『송막기문』의 기록에 근거하여, 함보를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송막기문』의 기록을 의심하는 의견이 있다. 『문헌통고』는 "또 말한다", 『대금국지』는 "혹은 또 말한다"와 같이 불확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68]
청나라 시대에 편찬된 『만주원류고』는, 『문헌통고』와 『대금국지』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으나, 고증이 졸속이라는 지적이 있다.[69]
명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함보가 고려평주 승려 금준(김준), 혹은 고려평주승려 김행의 아들이라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애매하게 "혹왈(혹은 말하기를)"로 언급하고 있다.[68]
『송막기문』은 홍호가 여진에게 들은 구전에 근거하지만, 구전은 다양한 조건의 제약 때문에 편차가 생긴다. 따라서 함보의 출자를 밝히기 위해서는 실제 여진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여진 자신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쪽이 구전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저자 | 저서 | 기재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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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극토 | 『금사』세기·시조 함보기 | 금의 시조 휘 함보는 처음 고려에서 왔는데, 나이가 이미 예순이 넘었다. 형 아고니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며 따르려 하지 않고 말하기를: "후세 자손은 반드시 능히 서로 모이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갈 수 없다." 하고 홀로 아우 보활리와 함께 있었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의 가장자리에 살고 보활리는 야난에 살았다. 그 후 호십문이 갈소관으로 태조에게 귀순하자 스스로 그 조상 형제 셋이 서로 헤어져 갔는데, 대개 아고니의 후손이라고 칭했다. ...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산 뒤 그 부락 사람이 타족 사람을 살해하여 이로 인해 두 부족이 악화되어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완안부 사람들은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약 능히 부락 사람들을 위해 이 원한을 풀어 두 부족이 서로 죽이지 않도록 한다면, 부락에 현명한 여자가 있는데, 나이가 예순인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함께 부락에 살게 하리라." 하자 시조가 말하기를: "알겠다." 하고 이에 스스로 가서 설득하기를: "한 사람을 죽여도 싸움이 풀리지 않고 손실이 더욱 많다. 어찌 먼저 난을 일으킨 자 한 사람을 죽이고 부락 내에서 물건으로 갚아준다면 싸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득을 얻을 수 없겠는가." 하자 원수 측이 따랐다. 이에 약속하기를: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자는 그 집안의 인구 하나, 말 열 쌍, 암소 열 마리, 황금 여섯 냥을 살상 당한 집에 주면 곧 두 사람이 풀리고 사사로운 싸움은 할 수 없다." 하였다. 말하기를: "약속대로 지키겠습니다." 여진의 풍속에 사람을 죽이면 말과 소 서른 마리로 보상하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약속대로 보상하니 부중들이 믿고 따랐으며, 푸른 소 한 마리를 사례로 바치고 예순 살의 부인을 들이도록 허락하였다. 시조는 이에 푸른 소를 예물로 삼아 그녀를 맞이하고 재산을 얻었다. 후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오로, 다음은 왈로이고, 딸 하나는 주사판이라고 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
탁극토 | 『금사』완안호십문전 |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고 갈소관 사람들을 불러모으니 무리가 고영창의 군대가 강함을 두려워하고 또한 그에게 귀순하려 하였다. 호십문은 따르려 하지 않고 그 종족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기를: "내 먼 조상 형제 셋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대성 황제의 조상이 여진에 들어갔고, 내 조상은 고려에 남아 고려로부터 요로 귀순했다. 나는 황제와 함께 세 조상의 후손이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즉위하였고, 요의 패망에는 징조가 있으니, 내가 어찌 능히 영창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
두 개의 사료는 각각 함보가 "동출고려" 혹은 "종고려래", 즉 "고려에서 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고려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68]
정우 4년(1216년) 2월, 금의 중신 장행신은 왕회의 "본조소고신, 황제지후(금나라는 황제의 자손인 고신에서 태어났다)"에 관한 논쟁과 관련하여 "『시조실록』에 따르면, 다만 고려에서 왔다고 할 뿐, 고신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라고 발언했다. 이 "『시조실록』에 따르면, 다만 고려에서 왔다고 할 뿐, 고신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라고 주장한 것은, 여진이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도, 고구려의 자손이라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68]
원나라가 『금사』를 편찬할 때 참조한 완안욱이 편찬한 『조종실록』은 함보가 고려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금사』 고려전은 "당초, 속말, 흑수 두 부가 있었는데 모두 고려에 신속되었다(당초, 속말과 흑수 두 종족이 있었는데, 함께 고구려에 신속되었다)"라고 기록하고, 『금사』 고려전 "찬"에는 "금인은 본래 여기에서 나왔고 고려에 부속된 자들(금인은 본래 고려에 부속된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맹고토력은 이 사료에 등장하는 "금인"은 금나라의 여진의 조상인 함보를 가리킨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금사』는 여진의 선조인 함보는 "원래 고려에 부속된 자"라고 주장하고 있다.[68]
함보에 대해, 『송막기문』, 『문헌통고』는 "신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금사』는 "동출고려" 혹은 "종고려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금사』의 "동출고려" 혹은 "종고려래"라는 기사와 『송막기문』, 『문헌통고』의 "신라인"이라는 기사를 통합적으로 해석하자면, 함보와 그 선조는 신라 입국 후 고려 왕조로 옮겨갔다. 맹고토력의 고증에 따르면, 함보가 한반도를 떠나는 시기는 921년 전후, 양무성의 고증에 따르면 함보가 한반도를 떠나는 시기는 "926년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2~3년 이내"라고 하며, 한반도를 떠나기 이전의 함보는 고려 왕조에서 살았다. 따라서 "신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송막기문』, 『문헌통고』보다 "동출고려" 혹은 "종고려래"라고 기록하고 있는 『금사』 쪽이 정확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68]
송 또는 남송 말과 원나라 초의 사료 『삼조북맹회편』, 『건염이래조야잡기』, 『건염이래계년요록』, 『구조편년비요』, 『속편양조강목비요』, 『대금국지』, 『문헌통고』는 『송막기문』의 기사 내용을 인용하여 함보를 "신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의 사료에는 『송막기문』의 기사를 채택하지 않은 것이 있다.[68]
묘요가 저술한 『신록기』는 『송막기문』과 달리 "여진 시조 포(함보), 신라에서 나와, 아촉호(안출호)로 달아나 의지할 곳이 없어서 마침내 완안에 의탁하여 성을 삼았는데, 예순이 되어도 장가들지 못했다. 이웃 부락 비찰이 추장으로, 성은 결도고단, 소명 성화가 있었는데, 여자 아이가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아직 결혼하지 않아 소와 말 재산과 농작에 필요한 도구를 포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여진 여러 추장들이 맹세하고 수장으로 추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록기』는 함보는 "신라에서 왔다"라고 되어 있으며, "고려에서 왔다"라고 하는 『금사』와는 다르지만, 그 외 함보에 관한 내용은 『신록기』와 『금사』는 일치하며, 그 관점에서도 『금사』의 정확성이 엿보인다.[68]
6. 3. 금나라와의 관계
함보의 후손들이 세운 금나라는 고려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금나라의 성장은 고려에 외교적, 군사적 압박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고려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22]1115년, 함보의 8대손 아구다는 요나라를 격파하고 금나라를 건국했다.[16] 금나라는 1127년까지 송나라로부터 중국 북부 전체를 정복했다.[11]
대한민국의 미디어 '파이낸스 투데이'는 "청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하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진족은 『금사』에 기록된 대로 고려에서 이주한 김함보의 후손 아구다가 개국한 금나라의 계승국이다."라고 보도했다.[21]
한국방송공사(KBS)는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몰아낸 아구다, 그의 조상은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는 전설이나 외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 사람이 쓴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와 있다."라고 보도했다.[22]
6. 4. 문화적 영향
함보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국의 설화, 문학,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는 함보라는 인물이 한국인의 역사 인식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참조
[1]
AV media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http://www.kbs.co.kr[...]
Korean Broadcasting System
2009-01-01
[2]
웹사이트
함보(函普) – Hanpu
https://web.archive.[...]
2021-12-06
[3]
문서
松漠紀聞 (1156) – Hong Hu (洪皓) of the Song Dynasty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English Translation: ''"The Jurchen chieftain (Hanpu) is a Sillan by the surname of Wanyan."''
[4]
문서
고려사 (Records of Goryeo, 1451) Book 14, 10th Year of the Reign of Yejong (1115)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 烏雅束卒, 弟阿骨打立.” English Translation: "''From what people say, the Monk Keumjun from Pyeongju (Today's Pyeongsan, North Korea) fled to Jurchen lands beyond and settled in a village called Ajigo, only to become the founder of Jin. Meanwhile, others say that the son of the Pyeongju monk Kim Haeng, Kim Geuksu, travelled into Jurchen territory and married a local woman. They gave birth to Goeultesa who gave birth to Hwallatesa. Then Hwallatesa gave birth to his elder son Heklibal and youngest Yeonga. Yeonga was said to be fierce and courageous. After the death of Yeonga, Heklibal's first son Wuyashu assumed leadership. He was succeeded by Aguda following his death''."
[5]
문서
History of Jin (1344) Book 1, Chapter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English Translation: "''The founder of Jin (Hanpu) comes from Goryeo''"
[6]
문서
"History of Goryeo (1451), ''Records of August of Year 1119'' ''- From Yejong of Goryeo to Aguda'' ···'''''况彼源發乎吾土'''''··· English Translation: ···''Even the origins of your likes stems from my realms''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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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금나라 시조의 출자지(出自地)에 관한 재론(再論)
https://cms.dankook.[...]
20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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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ei Toktobuha 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 "''Origins of the Manchurian People''" (欽定滿洲源流考, 1778) Book 7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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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yeosa|History of Goryeo]]'', fascicle 13, under the 6th month of Yejong's 4th year of reign (i.e., 1108). Cited in {{harvnb|Wang|2010|p=251}}, not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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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semen from the Edge of Empire: The Rise of the Jurchen Coal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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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Jin]]'', chapter 1 (Beijing, Zhonghua shuju, 1974), p. 3.
[12]
문서
"''[[History of Jin]]'', chapter 32 (Beijing: Zhonghua shuju, 1974), p. 779, specifies the date as the [[intercalary month|intercalary]] 11th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Huangtong {{lang|zh-Hant|皇統}} era; that month spanned from 16 December 1145 to 13 January 1146."
[13]
문서
"''[[History of Jin]]'', chapter 32, p. 774, where the date is given as the 8th month of the 14th year of Tianhui {{lang|zh-Hant|天會}}, an [[Chinese era name|era name]] that [[Emperor Xizong of Jin|Emperor Xizong]] (r. 1135–1150) continued to use from [[Emperor Taizong of Jin|Emperor Taizong]] (r. 1123–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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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Jin]]'', chapter 1 (Beijing: Zhonghua shuju, 1974),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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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宗 (金)|熙宗]]による追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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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105代天皇尊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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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モンゴルの共通のルーツは「ジュシン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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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稿】「水」で見る北京・東京・ソウル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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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稿】「水」で見る北京・東京・ソウル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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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清、韓国史に編入を」…東北工程対応策提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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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왜 장군보다 의사를 선호할까?
http://www.fntoday.c[...]
ファイナンス・トゥデ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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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http://www.kbs.co.kr[...]
200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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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卷頭 특별 인터뷰 韓國史新論의 著者 李基白 선생이 말하는 韓國史의 大勢와 正統
http://monthly.chosu[...]
200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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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여진족 역사, 한국사에 넣어야"
https://www.yna.co.k[...]
201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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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高句麗史는 고구려 사람의 눈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http://monthly.chosu[...]
200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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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2세기 중국 북부 장악한 금나라 시조는 신라계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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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여진족의 金나라 시조는 신라계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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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lang|zh-Hant|高麗遣上部大相可婁等進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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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lang|zh-Hant|武藝忝當列國濫惣諸蕃,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31]
인용
"{{lang|zh-Hant|庚午。帝臨軒。高麗使楊承慶等貢方物。奏曰。高麗國王大欽茂言。}}"
[32]
인용
"{{lang|zh-Hant|黑水靺鞨居粛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於高麗。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敗于安市。}}"
[33]
인용
"{{lang|zh-Hant|吾遠祖兄弟三人,同出高麗。今大聖皇帝之祖入女直,吾祖留高麗,自高麗歸於遼。吾與皇帝皆三祖之後。}}"
[34]
인용
"{{lang|zh-Hant|有合住者,亦稱始祖兄苗裔,但不知與胡十門相去幾從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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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nb|三上|1941|p=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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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が中国に突きつける「歴史論争」 高句麗の遺跡を「中国が歪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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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50年度 特別研究生 研究発表要旨 : 金朝初期の仏教 管見 - 建国以前より太宗朝ま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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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炎以來朝野雜記》, 乙集・卷19 「邊防2・女眞南徙」: “完顔之始祖指浦者, 新羅人, 自新羅奔女眞, 女眞諸酋推爲首領. 七傳至旻而始大, 所謂阿骨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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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문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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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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