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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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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음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시중중랑장, 시중태복, 어사대부를 역임했다. 사촌 형제인 왕봉이 대사마로 있을 때 왕장의 배척 시도를 알려 왕봉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왕봉 사후 대사마 거기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안양후에 봉해졌다. 왕씨 일족의 사치와 횡포 속에서도 간언을 하며 충절을 지켰으며, 영시 2년(기원전 15년)에 사망하여 경(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왕순이 작위를 이었고, 대사마는 왕상의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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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음
기본 정보
이름왕음
출생생년 미상
사망918년 음력 5월 15일
신분왕족
본관미상
가족 관계배우자: 미상
자녀: 왕예
생애
주요 활동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헌
최후반역 혐의로 처형
기타
관련 사건이흔암 모반 사건

2. 생애

시중중랑장(侍中中郞將)과 시중태복(侍中太僕)을 역임하였다. 사촌형제인 대사마 왕봉을 도와 그의 권력 유지에 기여했으며, 양삭 2년(기원전 23년)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왕봉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대사마거기장군으로 승진하고 안양(安陽侯)에 봉해졌다. 왕씨 일족의 행태와 달리 충절을 지키려 노력했으며, 영시 2년(기원전 15년)에 사망하였다.[1] 시호(敬)이고, 아들 왕순이 작위를 이었다. 후임 대사마는 왕봉의 동생 왕상이었다.

2. 1. 관직

시중중랑장(侍中中郞將)과 시중태복(侍中太僕)을 지냈다.

경조윤 왕장이 성제에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사마 왕봉(왕음의 사촌형제)을 멀리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음은 왕봉에게 이를 밀고했고, 왕봉은 왕장의 계획을 미리 막아내어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양삭 2년(기원전 23년)에는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왕봉이 세상을 떠나면서 성제에게 왕음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왕음은 대사마거기장군의 자리에 올랐고, 안양(安陽侯)로 봉해졌다. 당시 왕씨 일족은 사치스럽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경향이 있었으나, 왕음만은 간언을 하는 등 충성스러운 신하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영시 2년(기원전 15년)에 사망하였다.[1] 시호(敬)이며, 아들인 왕순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왕음의 뒤를 이은 대사마는 왕봉의 동생인 왕상이었다.

2. 2. 대사마 취임과 죽음

경조윤 왕장성제에게 대사마 왕봉(왕음의 사촌형제)을 배척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왕음은 이 사실을 왕봉에게 알려 왕봉이 왕장의 계획을 저지하고 권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양삭 2년(기원전 23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왕봉이 죽으면서 성제에게 왕음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왕음은 대사마거기장군에 임명되고 안양(安陽侯)에 봉해졌다. 당시 왕씨 일족들이 사치와 횡포를 일삼는 와중에도, 왕음만은 간언을 하는 등 충절을 지키려 노력했다.

영시 2년(기원전 15년)에 세상을 떠났다.[1] 시호(敬)이며, 아들 왕순이 작위를 이었다. 왕음의 후임 대사마로는 왕봉의 동생인 왕상이 임명되었다.

3. 출전


  • 반고, 《한서
  • * 권18 외척은택후표
  • * 권19하 백관공경표 下
  • * 권98 원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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