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프 덴 아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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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프 덴 아윌은 네덜란드의 정치인으로, 1965년 경제부 장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노동당 대표,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73년 석유 파동 시 연료 배급제와 일요일 운전을 금지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사회 개혁을 추진하여 실질 소득 증가, 복지 혜택 확대 등의 정책을 펼쳤다. 1987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내용 없음)
요프 덴 아윌은 노르트홀란트주 힐베르쉼 출신으로, 1966년 9월 13일부터 1986년 7월 21일까지 노동당 대표를 역임했다. 1965년 4월 14일부터 1966년 11월 22일까지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 1973년 5월 11일부터 1977년 12월 19일까지 네덜란드의 총리를 지냈다. 1981년 9월 11일부터 1982년 5월 29일까지는 부총리 겸 사회부 장관 및 수리남·네덜란드령 안틸레스부 장관을 역임하였다.[10]
2. 초기 생애 및 교육
2. 1. 초기 생애
요하네스 마르턴 덴 아윌은 1919년 8월 9일 노르트홀란트주 힐베르쉼에서 태어났다. 칼뱅주의 개혁 전통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덴 아윌은 가게 주인이자 바구니 제작자였다. 덴 아윌이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힐베르쉼에 있는 기독교 고등학교인 코메니우스 칼리지에 다녔으며, 그 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를 떠났다. 1942년에 doctorandus 학위를 취득했고, 1945년까지 경제부 산하의 화학 제품 가격 국가국 공무원이었다. 그 기간 동안 비밀 신문 ''헤트 파롤''을 발행하는 지하 신문 그룹의 일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덴 아윌은 ''헤트 파롤'', ''프레이 네덜란드'' 및 기타 과거 저항 언론에서 일했다. 1949년 1월부터 1963년까지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의 싱크탱크인 비아르디 벡만 스티칭의 대표였다. 1953년,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덴 아윌은 몇 달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경험을 이해하게 되었다.[9]
3. 정치 경력
총리 퇴임 후에도 1986년까지 노동당 당수와 하원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981년 부총리 겸 사회고용부 장관으로 잠시 정부에 복귀했으나, 드리스 판 아흐트 총리와의 갈등으로 내각이 붕괴되면서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1982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승리했지만, 연정 구성에 실패하면서 덴 아윌은 계속 야당 대표로 남게 되었다.[10]
3. 1. 초기 정치 활동
노르트홀란트주 힐베르쉼 출신으로 1953년 암스테르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56년에는 네덜란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63년 의원직을 사임하고 암스테르담의 경제 담당 시정 관리자가 되었다. 1965년에는 칼스 내각의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림부르흐의 경제성이 없는 석탄 광산을 폐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지역 실업률이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10]
1966년 9월 13일부터 1986년 7월 21일까지 노동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1967년 총선 이후에는 의회에서 노동당 원내대표를 맡았다. 덴 아윌은 5차례(1956년 11월 6일~1963년 6월 5일, 1967년 2월 23일~1973년 5월 11일, 1977년 6월 8일~1977년 9월 8일, 1978년 1월 16일~1981년 9월 11일, 1982년 9월 16일~1987년 12월 24일) 네덜란드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3차례(1967년 2월 15일~1973년 5월 11일, 1978년 1월 16일~1981년 9월 10일, 1982년 9월 7일~1986년 7월 21일) 노동당의 네덜란드 하원 원내대표를 지냈다.
3. 2. 암스테르담 시의회 및 하원 의원
1953년 암스테르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6년에는 하원 의원이 되었다. 1963년 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암스테르담의 경제 담당 시정 관리자가 되었다.[10]
3. 3. 경제부 장관
1965년 4월 14일부터 1966년 11월 22일까지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10] 담당 장관으로서, 그는 경제성이 없는 림부르흐의 석탄 광산을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지역의 높은 실업률을 야기했다.
3. 4. 노동당 대표 및 원내대표
요프 덴 아윌은 1966년 9월 13일부터 1986년 7월 21일까지 노동당 대표를 역임했다.[10] 1967년 2월 15일부터 1973년 5월 11일, 1978년 1월 16일부터 1981년 9월 10일, 1982년 9월 7일부터 1986년 7월 2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노동당의 하원 원내대표를 지냈다.[10]
1967년 총선 이후, 덴 아윌은 의회에서 노동당 대표가 되었다.[10] 덴 아윌의 노동당은 1972년 선거에서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 66 및 급진적 기독교 정당인 급진정치당과 연합하여 승리했지만,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10]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야당 대표를 지낸 후, 1981년 정부에 복귀했다.[10] 1982년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은 승리했지만, 기독교 민주 연합과 새로운 연정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덴 아윌은 다시 의회로 돌아가 1986년까지 야당에서 노동당을 이끌었다.[10] 주요 야당 대표로서, 덴 아윌은 정부의 NATO 순항 미사일 네덜란드 배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졌다.[10]
3. 5. 네덜란드 총리 (1973-1977)
Joop den Uylnl은 1973년 5월 11일부터 1977년 12월 19일까지 네덜란드의 총리를 지냈다. 노동당 소속의 덴 아윌은 1972년 선거에서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 66 및 급진적 기독교 정당인 급진정치당과 연합하여 승리했지만,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오랜 협상 끝에 덴 아윌은 기독교 민주당 계열의 가톨릭 인민당, 반혁명당과 함께 덴 아윌 내각을 구성했다.
덴 아윌 내각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중 하나는 욤 키푸르 전쟁에서 네덜란드가 이스라엘을 지원한 데 따른 1973년 석유 보이콧이었다. 덴 아윌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상황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연료 배급제와 일요일 운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네덜란드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정부의 정부 예산 적자는 10배로 증가했고, 인플레이션은 10%에 육박했으며, 실업률은 두 배로 증가했고, 경상수지는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덴 아윌 정부는 복지 급여 확대, 혜택과 최저 임금의 물가 연동, 임대료 환급 제도(1975년)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시행했다.
1977년, 덴 아윌 내각은 덴 아윌과 가톨릭 인민당 소속 법무부 장관 드리스 판 아흐트 사이의 갈등으로 붕괴되었다. 노동당은 "총리에게 투표하십시오"라는 선거 구호 아래 치러진 다음 선거에서 33% 이상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른 연정 파트너였던 급진정치당이 거의 모든 의석을 잃으면서 덴 아윌은 의회에서 지지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3. 5. 1. 사회 개혁
덴 아윌은 노동당 소속으로,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덴 아윌 내각을 이끌면서 다양한 사회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10]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석유 파동에 대응하여, 덴 아윌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고 연료 배급제와 일요일 운전 금지 조치를 시행했다.[10]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덴 아윌 정부는 사회 복지 확충에 힘썼다. 실질 소득 증가,[10] 복지 급여 확대, 최저 임금 인상 및 물가 연동,[11] 임대료 환급 제도 도입(1975년)[12] 등 저소득층과 취약 계층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저소득층 자녀가 많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추가 지원을 제공하고, 학교와 지역 사회 및 문화 기관 간의 협력을 장려했다.[13] 또한, 교육 과정 편성에서 학교장의 자율성을 확대하고,[14] 실업자를 위한 추가 혜택을 제공하는 등 교육 및 고용 안정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14]
1976년에는 임신 및 출산 후 12주 동안 고용 보호를 도입하고,[15] 완전 의무 교육 연수를 늘리고,[16] 사기업에서 동일 임금에 관한 법을 도입하는 등[17] 여성과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도 힘썼다.
이 외에도, 덴 아윌 정부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사회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3. 5. 2. 노동 및 고용 정책
Joop den Uylnl 정부는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실질 소득 증가와 함께 다양한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시행했다.[10] 1978년 예산 각서에 따르면, "모달 노동자"의 실질 가처분 소득은 10.3%, 최저 임금 수령자는 17.8%, 은퇴자는 27.3% 증가했다.[10]
정부는 복지 급여를 크게 늘리고, 혜택과 최저 임금을 계약 부문 임금 변동에 물가 연동시켰다.[11] 또한, 1975년 임대료 환급 제도를 도입했다.[12] 소득이 낮은 가정의 자녀 비율이 높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는 추가 지원이 제공되었고, 학교와 사회 및 문화 기관 간의 협력이 촉진되었다.[13]
1974년 10월 초등 교육법은 학교장의 교과 과정 편성 자유를 확대했고, 1974년 6월 법은 낮은 임금의 직업을 받아들인 실업자에게 추가 혜택을 제공했다.[14] 1976년 6월 법은 혜택(WWV 제도)을 처음 받은 지 2년 후 60세가 된 직원이 65세까지 혜택을 계속 받을 수 있도록 했다.[14] 1976년 8월에는 임신 기간 및 출산 후 12주 동안 고용 보호가 도입되었다.[15] 완전 의무 교육 연수가 증가했고,[16] 사기업의 동일 임금에 관한 법이 도입되었다.[17] 가족을 위한 재가 간호 서비스와 같은 사회 서비스에도 투자가 이루어졌다.[18]
1975년에는 임대료 재조정 보조금이 채택되었고,[19] 노인 건강 보험료에 대한 추가 할인과[20] 노인을 위한 재배치 및 개조 비용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적용되었다.[21] 불완전한 가족 및 사회 지원 기준이 순최저임금보다 더 구조적으로 증가했다.[22] 주거용 주택에 대한 국가 법률이 도입되었다.[23]
1976년에는 지자체와 기관이 개인으로부터 주택을 구매할 때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규정이 마련되었고,[24] 장애인을 위한 주거 개조 보조금 제도가 시행되었다.[25] 젊은 독신자를 위한 별도의 보조금 제도가 도입되었고,[26] 장애를 가진 가족의 가장 및 17세 이상의 장애를 가진 독신자에게 노령 연금과 동일한 현금 혜택을 제공하는 법이 제정되었다.[27] 이 법은 특별 교통, 재교육 및 추가 지출 상환도 제공했다.[28]
1973년 9월에는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고용을 위한 규정이 도입되었고,[29] 1974년 1월에는 젊은이를 위한 법정 최저 임금이 도입되었으며, 3월에는 물리 치료 비용을 포함하도록 보험 제도가 확대되었다.[30] 1974년 7월 19일 법령에 따라 실업 상태의 공무원과 그 유족은 특정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31] 1974년 7월 3일 국가 표준화 법령은 생계비 지원 규칙을 제공했다.[32] 1974년에는 국가 지원 법령이 시행되어 다양한 유형의 가구에 사회적 최소 기준이 적용되었다.[33] ABW(공공 지원법)에 따른 순 혜택은 23세 이상 기혼 근로자의 순최저임금의 100%로 고정되었고, 사회 보험 제도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에 대한 최소 혜택은 1975년에 최저 임금과 동일하게 조정되었다.[34] 국가 표준 법령(BLN)은 혜택 수준을 법정 최저 임금 수준으로 인상하고 지자체의 정책적 자유를 제한했다.[36] 1974년에는 AOW가 최저 임금과 연동되어 복지 고정되었고,[37] 편부모는 혜택 외 소득의 약 3분의 1을 최저 임금의 25%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38] 휴가 수당이 국가 표준화의 일부가 되었다.[39] 사회 지원 혜택, AOW, 미망인 혜택 및 질병 혜택 법, WAO, WW, WWV의 기본 혜택은 모두 순최저임금의 100%를 차지했다.[40] 1974년 7월 국가 표준 법령 변경을 통해 사회 보장법에 고통 조항이 추가되어 사회 사업 검토 없이 혜택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41] 자영업자를 위한 전국 그룹 규정을 통해 소액의 돈이 노령 연금으로 풀렸다.[42]
1975년 9월에는 젊은이의 직업 훈련을 장려하기 위한 규정이 도입되었고, 개별 임대료 보조금 기회가 증가했으며, 6월의 법은 공장 검사 및 항만, 위험한 기계 검사와 관련하여 기존 법을 수정하고 사회부 장관에게 입법 권한을 부여했다.[43] 조기 퇴직 조치도 시행되었는데,[44] Joop den Uylnl 정부가 이를 처음으로 시행했다.[45]
1976년 집단 해고 (통지) 법은 고용주에게 노동 조합과의 협의 의무를 부과했고,[46] 그해 협의 노동 이사회는 독일 노동 이사회를 모델로 한 강력한 이사회로 대체되었다.[47] 모든 여성에 대해 임신 또는 결혼으로 인한 해고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고,[48] 형사 상해 보상 기금이 설립되었다.[49] 도시 재개발에 추가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세입자가 개조된 주택에 대한 더 높은 임대료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제도가 개선되었다. 도로 안전 분야에서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고, 법률 지원 사무소 실험에 보조금이 지급되었다.[50]
1976년 2월 핵 시설 사고에 관한 규정은 사고 발생 시 및 비상 계획 준비에 대한 조정을 제공했다.[51] 1976년 12월 법은 국민 보험료 면제 또는 감액된 보험료 지급 자격 조건을 완화하고, 고아 연금 자격을 확대했다. 1977년 4월 석면 법령은 크로시돌라이트 사용을 금지하고, 9월에는 농업용 트랙터 운전 조건에 관한 규정이 발행되었다. 1977년 5월에는 장애인 배치에 대한 보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52]
3. 5. 3. 사회 복지 확대
덴 아윌 내각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회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1973년부터 1977년 사이 실질 소득이 증가했으며,[10] 복지 급여, 최저 임금, 계약 부문 임금 변동에 대한 물가 연동이 이루어졌다.[11] 1975년에는 임대료 환급 제도가 도입되었다.[12]
저소득층 자녀가 많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추가 지원이 제공되었고, 학교와 사회 및 문화 기관 간의 협력이 강화되었다. 1970년대 초 위트레흐트, 로테르담,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지역 보상 교육 및 가족 참여 프로젝트는 교육부의 보조금을 받았다.[13] 1974년 초등 교육법은 학교장의 교과 과정 편성 자유를 확대했고, 같은 해 6월 법은 낮은 임금의 직업을 가진 실업자에게 추가 혜택을 제공했다.[14] 1976년 6월 법은 혜택(WWV 제도)을 처음 받은 지 2년 후 60세가 된 직원이 65세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14] 같은 해 8월에는 임신 기간 및 출산 후 12주 동안 고용 보호가 도입되었다.[15]
1975년에는 "더 나은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지만, 갑작스러운 임대료 인상과 이사 비용의 부담에 압도된 가구"를 위한 임대료 재조정 보조금이 채택되었다.[19] 같은 해 1월 1일부터, "AOW 연금에 전적으로 또는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노인"에게 노인 건강 보험료에 대한 추가 할인이 제공되었다.[20] 또한, 같은 해 7월 1일부터 소급 적용되어, "더 저렴한 집에서 더 비싼 집으로 이사하려는 노인을 위한 재배치 및 개조 비용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적용되었다.[21] 1975년에는 불완전한 가족에 대한 사회 지원 기준이 구조적으로 증가했고, 주거용 주택에 대한 국가 법률이 도입되었다.[23]
1976년 말에는 "지자체와 승인된 기관이 주요 개선 후 상당 기간 동안 그러한 주택의 주민에게 합리적인 수준의 생활 향유를 제공할 목적"으로 개인으로부터 주택을 구매할 때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24] 같은 해부터 "장애인을 위한 주거 개조를 위한 보조금을 제공하는 계획"이 시행되었고,[25] 젊은 독신자를 위한 별도의 보조금 제도도 도입되었다.[26] 1976년 법은 장애를 가진 가족의 가장 및 17세 이상의 장애를 가진 독신자에게 노령 연금과 동일한 현금 혜택을 제공했고, 주부에게 재활 혜택을 제공했다.[27]
1973년 9월에는 "취업하기 어렵고 오랫동안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고용을 위한 규정이 도입되었다.[29] 1974년 1월에는 젊은이를 위한 법정 최저 임금이 도입되었고, 3월에는 임금 및 급여 근로자를 위한 보험 제도가 물리 치료 비용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30] 같은 해 7월에는 실업 상태의 공무원과 그 유족에게 특정 혜택을 제공하는 법령이, 국가 표준화 법령은 일반적으로 필요한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한 규칙을 제공했다.[32] 1974년에는 국가 지원 법령이 시행되어 다양한 유형의 가구에 사회적 최소 기준이 적용되었다.[33]
1975년 9월에는 젊은이의 직업 훈련을 장려하기 위한 규정이 도입되었고, 개별 임대료 보조금을 받을 기회가 증가했다. 같은 해 6월의 법은 "공장 검사 및 항만 및 위험한 기계 검사의 조직 및 지역과 관련하여 변경 사항을 도입"하고, "규산증 법"의 범위를 확대했다.[43] 조기 퇴직 조치도 시행되었다.[44]
1976년의 집단 해고 (통지) 법은 고용주에게 노동 조합과의 협의 의무를 부과했고,[46] 그해 협의 노동 이사회는 독일 노동 이사회를 모델로 한 강력한 이사회로 대체되었다.[47] 또한 1976년에는 모든 여성에 대해 임신 또는 결혼으로 인한 해고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고,[48] 형사 상해 보상 기금이 설립되었다.[49]
1976년 2월의 핵 시설 사고에 관한 규정은 "사고 발생 시 및 비상 계획 준비"에 대해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한 부처 간 조정을 제공했다.[51] 1976년 12월의 법은 국민 보험료 면제 또는 감액된 보험료 지급 자격에 대한 조건을 완화하고, 고아 연금 자격을 확대했다. 1977년 4월의 석면 법령은 크로시돌라이트 사용을 금지했고, 9월에는 "16세 이상의 젊은이가 예외적으로 농업용 트랙터를 운전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규정이 발행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장애인 배치에 대한 보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52]
3. 6. 총리 퇴임 이후
덴 아윌은 총리 퇴임 후 1986년까지 노동당 당수와 하원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981년에는 부총리 겸 사회고용부 장관으로 잠시 정부에 복귀했으나, 드리스 판 아흐트 총리와의 갈등으로 내각이 붕괴되면서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10] 1982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승리했지만, 연정 구성에 실패하면서 덴 아윌은 계속 야당 대표로 남게 되었다.
3. 6. 1. 외교 및 안보 정책
요프 덴 아윌은 대서양주의자였으며, NATO 회원국으로서 네덜란드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10]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당시 네덜란드가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파동을 일으켜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10] 덴 아윌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상황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연료 배급제와 일요일 운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10]
1980년대 덴 아윌은 정부의 NATO 순항 미사일 네덜란드 배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졌다.[10] 이는 서독의 순항 미사일 및 퍼싱 II 미사일 배치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키는 결정이었다.[10]
4. 사망
1987년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하였다.[1] 1987년 10월 24일, VU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의료 센터는 덴 아윌이 말기 질환을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1] 그는 정확히 두 달 뒤인 198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68세의 나이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1]
5. 가족
덴 아윌은 1944년 8월 30일에 리스베트 덴 아윌(결혼 전 성은 판 베셈, 1924년 6월 18일 ~ 1990년 9월 30일)과 결혼했다.[53][54][55] 슬하에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장녀 사스카 노르만-덴 아윌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차남 잔데르 덴 아윌은 네덜란드 노동조합 중 하나인 ABVAKABO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2011년부터 노동당 소속 북홀란드 주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6. 훈장 및 명예 학위
요프 덴 아윌은 네덜란드 사자 훈장 기사(1966년 12월 5일), 오라녜가(家) 훈장 창의력 및 독창성 명예 훈장(1974년 9월 19일), 수리남 팜 훈장 대훈위(1977년 9월 4일), 오라녜나사우 훈장 대훈위(1982년 9월 9일)를 받았다. 1985년 1월 8일에는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경제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