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혁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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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혁명당은 1879년 프랑스 혁명 정신에 반대하며 창당된 네덜란드의 개신교 정당이다. "하나님, 네덜란드, 오렌지 왕가"를 핵심 가치로, 공교육의 개신교적 성격을 강조하고 사회 개혁에 반대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네덜란드 총리를 배출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사회 정의를 중시하며 좌익 성향을 띠기도 했으며, 1974년 기독교민주당 아펠(CDA) 연합을 결성하며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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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혁명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반혁명당 | 
| 원어 이름 | Anti-Revolutionaire Partij | 
| 약칭 | ARP | 
| 상징색 | 파랑, 보라 | 
| 창립일 | 1879년 4월 3일 | 
| 해산일 | 1980년 9월 27일 | 
| 해산 사유 | 기독교민주당 아펠에 통합 | 
| 본부 | 큐이퍼르하위스, 닥터 큐이퍼르스트라트 3, 헤이그 | 
| 이념 및 정치 성향 | |
| 이념 |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보수주의, 내셔널리즘 | 
| 정치 성향 | 중도우파 | 
| 종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 화란 개혁교회 | 
| 조직 | |
| 창립자 | 아브라함 큐이퍼르 | 
| 청년 조직 | 반혁명 청년 연구 클럽 | 
| 싱크 탱크 | 닥터 A. 큐이퍼르 재단 | 
| 국제 관계 | |
| 유럽 정당 | 유럽 기독교민주연합 | 
| 유럽 의회 | 기독교 민주주의 그룹 | 
2. 역사
그룬 반 프린스테레르에 의해 1879년 4월 3일 창당된 반혁명당(反革命黨, Anti-Revolutionairenl)은 신의 권위를 부정한 프랑스 혁명 정신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3]
반혁명 의회 의원 모임은 1840년대부터 존재했으며,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 정통주의 경향을 대표했다.[13] 기욤 흐론 판 프린스테러의 지도 아래, 반혁명당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 자유주의 기독교 경향과 네덜란드 정치 내 자유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핵심 가치는 "신, 네덜란드, 오렌지 왕가"였다.[13]
반혁명당은 공교육이 개신교-기독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교육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구의 재설립에 반대하는 Aprilbeweging영어과 연계되었고, 사회 및 정치 시스템 개혁에 반대했다. 그러나 하원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는 복잡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13]
1860년대 흐론 판 프린스테러는 보수 동맹들로부터 고립되면서, 신정 정치 대신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영역 주권)을 옹호하며 자신의 개신교-기독교적 이상을 재정립했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 내 개신교 사회를 지향하며, 정통 개신교인들이 자신들만의 교회, 학교, 신문, 정당, 스포츠 클럽을 갖는 주상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13]
1864년 흐론 판 프린스테러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이퍼는 흐론 판 프린스테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개신교 정통 사회라는 이상을 네덜란드 사회 내에서 실천하고자 했다.[13]
아브라함 카이퍼는 1879년 4월 3일 신학자 그룬 반 프린스테레르의 뒤를 이어 반혁명당(ARP)을 창당했다. '반혁명(Anti-Revolutionairenl)'이라는 당명은 신의 권위를 부정한 프랑스 혁명 정신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3] 반혁명당은 네덜란드 최초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정당이었다.[13]
1878년 종교 학교에 대한 동등한 지원을 요구하는 청원은 이 정치 운동의 창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3] 1877년 카이퍼는 이미 "우리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반혁명당의 정치적 이상을 제시했다. 반혁명당을 중심으로 개신교 사회가 성장하면서, 많은 개신교 학교, 자유 대학교(1880년 설립), 신문(''데 스탄다르트'')이 창간되었다. 1886년, 카이퍼는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개혁 교회 (''Nederlands-Hervormde Kerk'')에서 분리되어 1892년 네덜란드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Nederland'')를 창설했다.
반혁명당은 공립 학교와 종교 학교 간의 동등한 지원을 실질적인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또한 종교 정당과 비종교 정당 간의 대립을 통해 자유주의자와 가톨릭교도 간의 협력을 깨고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전략을 펼쳤다.
1879년 네덜란드 하원의 100석 중 13석을 반혁명당(ARP)이 차지했으나, 모두가 당원은 아니었다.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의석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석에 달했고, 1884년 선거에서는 21석을 확보했다. 1886년에는 네덜란드 상원에 첫 의석을 확보했다.
1888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31.4%의 득표율로 27석을 차지하여, 아에네아스 매케이 2세가 이끄는 종교적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은 반혁명당원과 가톨릭 장관, 그리고 두 명의 보수적인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어 내각의 제안은 자주 좌절되었고, 결국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1891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득표율이 2% 감소하고 6석을 잃었으며, 종교 정당들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자유 연합의 히스베르트 판 티엔호벤이 이끄는 자유주의 내각이 구성되었고, 호주 가정 프랜차이즈의 급격한 변화를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보편적인 남성 참정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안이었으며, 반혁명당은 이에 대해 분열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다수는 찬성했으나, 알렉산더 데 사보르닌 로먼은 왕의 신성한 권리 대신 인민 주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1894년 당은 자유 반혁명당과 기독교 역사 연합(1904년 결성)으로 분열되었다.
1894년 네덜란드 총선거와 1897년 네덜란드 총선거를 거치며 반혁명당은 의석수가 감소했지만, 1901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27.4%의 득표율로 23석을 차지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었다. 그의 임기 동안 1903년 철도 파업이 발생했고, 카이퍼는 가혹한 반파업 법안을 통과시키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자신이 설립한 자유 대학교 졸업생에게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고등 교육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상원을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1905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의석수가 감소하고 카이퍼는 의석을 잃었지만, 테오 헤엠스케르크가 당을 이끌며 소수 종교 내각을 구성했다. 1909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한 후 헤엠스케르크 내각은 계속되었다. 1912년 카이퍼는 건강 문제로 정계를 떠났고, 1913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크게 패배했다.
피테르 코르트 판 데르 린덴이 이끄는 자유주의 소수 내각은 종교 학교 재정 지원 문제와 보편적 참정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17년의 평화를 통해 종교 학교에 대한 동등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졌지만, 반혁명당은 여성 참정권과 비례 대표제를 수용해야 했다.
1917년의 평정 이후, 보편적 선거권의 도입으로 반혁명당(ARP)은 득표율의 20%를 넘긴 적이 없었다. 1918년 선거에서 당은 두 석을 추가로 얻었고, 세 개의 종교 정당은 50석을 획득하여 가톨릭교도 샤를 루이스 데 베렌브로크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ARP는 세 명의 장관을 배출했고, 전 총리 테오 헴스케르크가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게릿 케르스텐이 이끄는 일군의 우려하는 반혁명주의자들은 개혁정당을 창당했는데, 이들은 보편적 선거권과 가톨릭교도와의 협력을 반대했다. 전간기에 ARP의 선거구는 변화했는데, ARP에 투표하는 하층 프로테스탄트와 CHU에 투표하는 중산층 프로테스탄트 간의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개혁 교회(CHU)와 네덜란드 개혁 교회(ARP) 사이의 종교적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
1922년 선거에서 전 국방부 장관 헨드리쿠스 콜레인이 ARP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당의 핵심 문제로 군사와 재정적 보수주의를 강조했다. 
1930년대에, 국제 정치적 위협과 대공황이 커지면서, ARP는 콜레인의 지도 아래 인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33년에 ARP는 두 석을 얻었고, 콜레인은 로마 가톨릭 주 정당(RKSP), CHU, ARP, 자유주의 주 정당(LSP) 및 자유사상 민주 연맹(VDB)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내각을 구성했다. 얀 스하우턴이 당의 의회 정당을 이끌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콜레인은 CHU, ARP, RKSP가 내각의 핵심을 형성하면서도 구성이 변경되는 여러 의회 및 의회 밖 내각을 이끌었다. 콜레인은 평가절하를 거부했지만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1937년 ARP는 세 석을 얻어 역사적인 17석을 달성했다. 콜레인은 계속해서 통치했다. 1939년, 그의 다섯 번째 내각이 무너졌고 콜레인은 디르크 얀 데 헤르에게 계승되었다. 피터 헤르브란디는 그의 의회 정당의 지지 없이 내각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ARP의 구성원들은 망명 정부 (그 중 많은 정부가 피터 스호르즈 헤르브란디가 이끌었다)와 저항 운동에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혁명당(ARP)은 네덜란드 정치에 복귀했다. 요 메이넨은 의회 정당의 지지 없이도 전쟁부 장관을 지냈다.
1946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얀 스하우턴이 당을 이끌었으나, 당은 4석을 잃었다. 반혁명당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탈식민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네덜란드 식민 제국 유지를 주장했지만, 노동당(PvdA)과 가톨릭은 미국의 압력 아래 탈식민화를 선호하여 반혁명당은 6년 동안 비교적 고립되었다. 1944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부의 신학적 갈등으로 개혁교회와 개혁교회(해방)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고, 1948년 해방교회 회원들은 개혁 정치 연맹을 결성했다.
1952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반혁명당은 드리스가 이끄는 내각에 복귀했고, 옐레 자일스트라는 경제부 장관이 되었다. 1956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옐레 자일스트라가 정치 지도자가 되었고, 반혁명당은 10%의 득표율을 유지하며 15석을 얻었다. 1959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반혁명당은 얀 데 카이가 이끄는 내각에 참여했으나, 보수 자유주의 자유와 민주주의 국민당과의 연합으로 의석은 감소했다.
1963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바렌트 비세허우벌이 농업부 장관이 되었으나, 1965년 내각은 붕괴되었다. 1967년 네덜란드 총선 선거 운동에서 반혁명당, 기독교역사연합(CHU), 가톨릭 인민당(KVP)은 함께 통치할 것을 선언했으나, 젊은 세대는 노동당(PvdA)과의 연정을 원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1971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반혁명당은 기독교 좌파 급진 정치당(PPR)과의 경쟁에 직면하며 의석을 잃었고, 바렌트 비세허우벌이 이끄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빌럼 안테스가 당 의회 당 대표가 되면서 반혁명당은 새로운 좌익 "급진 복음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thumb,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마지막 당 대표.]]
1972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요프 덴 아윌이 이끄는 진보적 내각에 빌헬름 데 가이 포르트만을 포함한 여러 저명한 반혁명가들이 합류했다. 한편, 가톨릭 인민당(KVP), 반혁명당(ARP), 기독교역사연합(CHU) 간의 합병 과정이 시작되어 1974년 기독교민주당 아펠(CDA)이라는 연합을 결성했다. 빌럼 안트예스는 당을 산상수훈 방향으로 이끌며 기독교 민주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7년 선거에서 이들은 CDA로 함께 캠페인을 벌였고, 일부 반혁명당원들은 복음주의 인민당을 창당하여 CDA를 떠났다.
반혁명당 출신의 CDA 당원이 총리가 된 것은 2002년 얀 페테르 발케넨더가 처음이었다.[6]
2. 1. 1879년 이전
그룬 반 프린스테레르에 의해 1879년 4월 3일 창당된 반혁명당(反革命黨, Anti-Revolutionairenl)은 신의 권위를 부정한 프랑스 혁명 정신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3]반혁명 의회 의원 모임은 1840년대부터 존재했으며,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 정통주의 경향을 대표했다.[13] 기욤 흐론 판 프린스테러의 지도 아래, 반혁명당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 자유주의 기독교 경향과 네덜란드 정치 내 자유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핵심 가치는 "신, 네덜란드, 오렌지 왕가"였다.[13]
반혁명당은 공교육이 개신교-기독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교육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구의 재설립에 반대하는 Aprilbeweging영어과 연계되었고, 사회 및 정치 시스템 개혁에 반대했다. 그러나 하원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는 복잡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13]
1860년대 흐론 판 프린스테러는 보수 동맹들로부터 고립되면서, 신정 정치 대신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영역 주권)을 옹호하며 자신의 개신교-기독교적 이상을 재정립했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 내 개신교 사회를 지향하며, 정통 개신교인들이 자신들만의 교회, 학교, 신문, 정당, 스포츠 클럽을 갖는 주상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13]
1864년 흐론 판 프린스테러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이퍼는 흐론 판 프린스테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개신교 정통 사회라는 이상을 네덜란드 사회 내에서 실천하고자 했다.[13]
2. 2. 창당 (1879년)
아브라함 카이퍼는 1879년 4월 3일 신학자 그룬 반 프린스테레르의 뒤를 이어 반혁명당(ARP)을 창당했다. '반혁명(Anti-Revolutionairenl)'이라는 당명은 신의 권위를 부정한 프랑스 혁명 정신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3] 반혁명당은 네덜란드 최초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정당이었다.[13]1878년 종교 학교에 대한 동등한 지원을 요구하는 청원은 이 정치 운동의 창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3] 1877년 카이퍼는 이미 "우리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반혁명당의 정치적 이상을 제시했다. 반혁명당을 중심으로 개신교 사회가 성장하면서, 많은 개신교 학교, 자유 대학교(1880년 설립), 신문(''데 스탄다르트'')이 창간되었다. 1886년, 카이퍼는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개혁 교회 (''Nederlands-Hervormde Kerk'')에서 분리되어 1892년 네덜란드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Nederland'')를 창설했다.
반혁명당은 공립 학교와 종교 학교 간의 동등한 지원을 실질적인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또한 종교 정당과 비종교 정당 간의 대립을 통해 자유주의자와 가톨릭교도 간의 협력을 깨고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전략을 펼쳤다.
2. 3. 1879년 ~ 1917년
1879년 네덜란드 하원의 100석 중 13석을 반혁명당(ARP)이 차지했으나, 모두가 당원은 아니었다.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의석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석에 달했고, 1884년 선거에서는 21석을 확보했다. 1886년에는 네덜란드 상원에 첫 의석을 확보했다.1888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31.4%의 득표율로 27석을 차지하여, 아에네아스 매케이 2세가 이끄는 종교적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은 반혁명당원과 가톨릭 장관, 그리고 두 명의 보수적인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어 내각의 제안은 자주 좌절되었고, 결국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1891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득표율이 2% 감소하고 6석을 잃었으며, 종교 정당들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자유 연합의 히스베르트 판 티엔호벤이 이끄는 자유주의 내각이 구성되었고, 호주 가정 프랜차이즈의 급격한 변화를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보편적인 남성 참정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안이었으며, 반혁명당은 이에 대해 분열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다수는 찬성했으나, 알렉산더 데 사보르닌 로먼은 왕의 신성한 권리 대신 인민 주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1894년 당은 자유 반혁명당과 기독교 역사 연합(1904년 결성)으로 분열되었다.
1894년 네덜란드 총선거와 1897년 네덜란드 총선거를 거치며 반혁명당은 의석수가 감소했지만, 1901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27.4%의 득표율로 23석을 차지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었다. 그의 임기 동안 1903년 철도 파업이 발생했고, 카이퍼는 가혹한 반파업 법안을 통과시키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자신이 설립한 자유 대학교 졸업생에게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고등 교육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상원을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1905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의석수가 감소하고 카이퍼는 의석을 잃었지만, 테오 헤엠스케르크가 당을 이끌며 소수 종교 내각을 구성했다. 1909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한 후 헤엠스케르크 내각은 계속되었다. 1912년 카이퍼는 건강 문제로 정계를 떠났고, 1913년 네덜란드 총선거에서 반혁명당은 크게 패배했다.
피테르 코르트 판 데르 린덴이 이끄는 자유주의 소수 내각은 종교 학교 재정 지원 문제와 보편적 참정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17년의 평화를 통해 종교 학교에 대한 동등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졌지만, 반혁명당은 여성 참정권과 비례 대표제를 수용해야 했다.
2. 4. 1917년 ~ 1945년
1917년의 평정 이후, 보편적 선거권의 도입으로 반혁명당(ARP)은 득표율의 20%를 넘긴 적이 없었다. 1918년 선거에서 당은 두 석을 추가로 얻었고, 세 개의 종교 정당은 50석을 획득하여 가톨릭교도 샤를 루이스 데 베렌브로크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ARP는 세 명의 장관을 배출했고, 전 총리 테오 헴스케르크가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게릿 케르스텐이 이끄는 일군의 우려하는 반혁명주의자들은 개혁정당을 창당했는데, 이들은 보편적 선거권과 가톨릭교도와의 협력을 반대했다. 전간기에 ARP의 선거구는 변화했는데, ARP에 투표하는 하층 프로테스탄트와 CHU에 투표하는 중산층 프로테스탄트 간의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개혁 교회(CHU)와 네덜란드 개혁 교회(ARP) 사이의 종교적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1922년 선거에서 전 국방부 장관 헨드리쿠스 콜레인이 ARP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당의 핵심 문제로 군사와 재정적 보수주의를 강조했다. 그와 함께 ARP는 하원에서 16석, 상원에서 15석을 얻었다. 그는 샤를 루이스 데 베렌브로크의 두 번째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1925년 선거에서 당은 세 석을 잃었지만, ARP는 얀 도너가 법무부 장관으로 정부에 계속 참여했다. 1929년 선거에서 ARP는 또 한 석을 잃었으나, 종교 정당은 계속해서 통치했다.
1930년대에, 국제 정치적 위협과 대공황이 커지면서, ARP는 콜레인의 지도 아래 인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33년에 ARP는 두 석을 얻었고, 콜레인은 로마 가톨릭 주 정당(RKSP), CHU, ARP, 자유주의 주 정당(LSP) 및 자유사상 민주 연맹(VDB)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내각을 구성했다. 얀 스하우턴이 당의 의회 정당을 이끌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콜레인은 CHU, ARP, RKSP가 내각의 핵심을 형성하면서도 구성이 변경되는 여러 의회 및 의회 밖 내각을 이끌었다. 콜레인은 평가절하를 거부했지만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1937년 ARP는 세 석을 얻어 역사적인 17석을 달성했다. 콜레인은 계속해서 통치했다. 1939년, 그의 다섯 번째 내각이 무너졌고 콜레인은 디르크 얀 데 헤르에게 계승되었다. 피터 헤르브란디는 그의 의회 정당의 지지 없이 내각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ARP의 구성원들은 망명 정부 (그 중 많은 정부가 피터 스호르즈 헤르브란디가 이끌었다)와 저항 운동에서 역할을 했다. 저항 신문 ''트라우''는 ARP 회원들에 의해 창간되었다. 많은 미래의 ARP 국회의원들이 네덜란드 저항 운동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2. 5. 1945년 ~ 1980년 (해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혁명당(ARP)은 네덜란드 정치에 복귀했다. 요 메이넨은 의회 정당의 지지 없이도 전쟁부 장관을 지냈다.
1946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얀 스하우턴이 당을 이끌었으나, 당은 4석을 잃었다. 반혁명당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탈식민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네덜란드 식민 제국 유지를 주장했지만, 노동당(PvdA)과 가톨릭은 미국의 압력 아래 탈식민화를 선호하여 반혁명당은 6년 동안 비교적 고립되었다. 1944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부의 신학적 갈등으로 개혁교회와 개혁교회(해방)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고, 1948년 해방교회 회원들은 개혁 정치 연맹을 결성했다.
1952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반혁명당은 드리스가 이끄는 내각에 복귀했고, 옐레 자일스트라는 경제부 장관이 되었다. 1956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옐레 자일스트라가 정치 지도자가 되었고, 반혁명당은 10%의 득표율을 유지하며 15석을 얻었다. 1959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반혁명당은 얀 데 카이가 이끄는 내각에 참여했으나, 보수 자유주의 자유와 민주주의 국민당과의 연합으로 의석은 감소했다.
1963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바렌트 비세허우벌이 농업부 장관이 되었으나, 1965년 내각은 붕괴되었다. 1967년 네덜란드 총선 선거 운동에서 반혁명당, 기독교역사연합(CHU), 가톨릭 인민당(KVP)은 함께 통치할 것을 선언했으나, 젊은 세대는 노동당(PvdA)과의 연정을 원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1971년 네덜란드 총선에서 반혁명당은 기독교 좌파 급진 정치당(PPR)과의 경쟁에 직면하며 의석을 잃었고, 바렌트 비세허우벌이 이끄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빌럼 안테스가 당 의회 당 대표가 되면서 반혁명당은 새로운 좌익 "급진 복음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thumb,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마지막 당 대표.]]
1972년 네덜란드 총선 이후, 요프 덴 아윌이 이끄는 진보적 내각에 빌헬름 데 가이 포르트만을 포함한 여러 저명한 반혁명가들이 합류했다. 한편, 가톨릭 인민당(KVP), 반혁명당(ARP), 기독교역사연합(CHU) 간의 합병 과정이 시작되어 1974년 기독교민주당 아펠(CDA)이라는 연합을 결성했다. 빌럼 안트예스는 당을 산상수훈 방향으로 이끌며 기독교 민주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7년 선거에서 이들은 CDA로 함께 캠페인을 벌였고, 일부 반혁명당원들은 복음주의 인민당을 창당하여 CDA를 떠났다.
반혁명당 출신의 CDA 당원이 총리가 된 것은 2002년 얀 페테르 발케넨더가 처음이었다.[6]
3. 이념과 정책
반혁명당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강력히 반대하는 정통 개신교 정당으로 시작했다. 혁명에 대항하여 그들은 성서를 내세웠는데, 자유 대신 신의 섭리를, 사회적 평등 대신 계층제를, 그리고 박애 대신 주상주의를 옹호했다. 그들의 이상은 삼분구호인 "하나님, 네덜란드, 그리고 오라녜 공"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역사 대부분 동안 이 보수적인 개신교 이미지를 유지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 정당은 더 좌파적인 "급진적 복음주의" 이미지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반혁명당은 성경에 근거하여 정치를 펼치고, 국민 주권 개념에 반대하는 개신교 정당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사회 내에서 자체적인 학교, 신문, 병원 등을 갖춘 독립적인 개신교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며, 동등한 정부 재정 지원을 추구했다. 사회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믿음으로, 사회 경제 정책에서 국가의 큰 역할에 반대했다.
국가는 네덜란드 국민의 가치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남녀공학, 의무 예방 접종, 이혼, 포르노, 안락사, 낙태 등에 반대하는 사회적 보수주의 입장을 취했으며, 사형 제도를 옹호했다. 또한, 네덜란드의 중립국 지위 유지를 위해 강력한 국방력을 지지하는 등 다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네덜란드 국민의 지속적인 부와 영향력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탈식민지화에 반대했으며, 현지인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계몽하고자 했다.
반혁명당은 오라녜가를 네덜란드 국민과 역사적, 종교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여겨 군주제를 선호하였다.[8] 양원제 유지를 지지하고 대중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등 네덜란드 정치 시스템의 변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8] 보편적 선거권에 대한 입장은 전술적인 것으로, 더 많은 의석 확보를 위한 전략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세대주가 가족을 위해 투표하는 세대주 선거권을 원했다.[8]
반혁명당은 재정적 보수주의를 띠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훌륭한 아버지와 같아야 하며, 세금을 통해 얻는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8]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반혁명당은 여러 문제에 대해 더욱 좌익 성향을 띠게 되었다. 사회 정의는 당의 중요한 이상이 되었는데, 국내적으로는 더욱 강력한 복지 국가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는 개발 원조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9]
3. 1. 기본 가치
반혁명당은 자유주의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보수'라는 명칭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지지를 잃은 군주제와 식민주의를 지지하는 의원 그룹에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반혁명'과 '기독교 역사'라는 용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반혁명당과 기독교 역사 연합의 분열로 각자의 독립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반혁명당은 성경에 근거하여 정치를 펼치고, 국민 주권 개념에 반대하는 개신교 정당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사회 내에서 자체적인 학교, 신문, 병원 등을 갖춘 독립적인 개신교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며, 동등한 정부 재정 지원을 추구했다. 사회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믿음으로, 사회 경제 정책에서 국가의 큰 역할에 반대했다.
국가는 네덜란드 국민의 가치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남녀공학, 의무 예방 접종, 이혼, 포르노, 안락사, 낙태 등에 반대하는 사회적 보수주의 입장을 취했으며, 사형 제도를 옹호했다. 또한, 네덜란드의 중립국 지위 유지를 위해 강력한 국방력을 지지하는 등 다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네덜란드 국민의 지속적인 부와 영향력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탈식민지화에 반대했으며, 현지인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계몽하고자 했다.
3. 2. 종교와 사회
반혁명당은 성경에 기반한 정치를 추구하며, 영역 주권 개념을 중시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사회 내에 독립적인 개신교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자체적인 학교, 신문, 병원 등을 운영했다. 이들은 동등한 정부 재정 지원을 요구했다.사회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사회 경제 정책에서 국가의 역할 확대를 반대했다. 한편, 네덜란드 국민의 가치 수호에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사회적 보수주의 입장에서 남녀공학, 의무 예방 접종, 이혼, 포르노, 안락사, 낙태에 반대하고 사형 제도를 옹호했다.
3. 3. 정치와 경제
반혁명당은 오라녜가를 네덜란드 국민과 역사적, 종교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여겨 군주제를 선호하였다.[8] 양원제 유지를 지지하고 대중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등 네덜란드 정치 시스템의 변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8] 보편적 선거권에 대한 입장은 전술적인 것으로, 더 많은 의석 확보를 위한 전략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세대주가 가족을 위해 투표하는 세대주 선거권을 원했다.[8]반혁명당은 재정적 보수주의를 띠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훌륭한 아버지와 같아야 하며, 세금을 통해 얻는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8]
3. 4. 외교와 안보
반혁명당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네덜란드의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국방력을 지지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네덜란드 국민의 지속적인 부와 영향력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현지인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계몽하고자 하여 탈식민지화에 반대했다.3. 5. 1960년대 이후의 변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반혁명당은 여러 문제에 대해 더욱 좌익 성향을 띠게 되었다. 사회 정의는 당의 중요한 이상이 되었는데, 국내적으로는 더욱 강력한 복지 국가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는 개발 원조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9]4. 조직
 아브라함 카이퍼 
 (1837–1920)
1920년 3월 31일

(1869–1944)
1944년 9월 18일
재임 중 사망
1925
1929
1933
1937
(1944년 9월 18일 – 1945년 5월 5일)

(1883–1963)
1956년 4월 23일
1948
1952

옐레 자일스트라
(1918–2001)
1956년 10월 3일

슈워르트 브라윈스 슬로트
(1906–1972)
1958년 12월 29일
옐레 자일스트라
(1918–2001)
1959년 5월 26일
슈워르트 브라윈스 슬로트
(1906–1972)
1963년 7월 1일
(1920–2001)
1973년 3월 7일
1967
1971
1972

(1923–2015)
1977년 5월 25일
(1977년 5월 25일 – 1980년 9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