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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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하네스 뵐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독일군 전차 에이스이다. 그는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으며, 여러 차례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에는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종전 후 서독으로 이주하여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8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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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뵐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요하네스 뵐터 |
원어 이름 | Johannes Bölter |
출생일 | 1915년 2월 19일 |
사망일 | 1987년 9월 16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뮐하임안데어루르 |
사망지 | 서독 뮐하임안데어루르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국방군 육군 |
복무 기간 | 1933–45 |
최종 계급 | 대위 |
2. 생애
요하네스 뵐터는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빌헬미네(Wilhelmine, 출생명 Falk)였다. 1921년 부활절부터 1929년 부활절까지 뮐하임의 초등학교(Volksschule)를 다녔다.
뮐렌지펜(Mühlensieppen) 회사에서 배관공 및 도제 지붕공으로 일하며 직업 학교에 다녔고, 1931년 3월 31일 '기술 증명서'(Gesellenbrief)를 받았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자원 봉사 훈련을 받았고, 1933년 4월 1일 에르하르트(Ehrhardt) 여단의 청소년 경비병 부대에 입대했다. 뵐터는 나치 돌격대(SA) 회원이기도 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Reichswehr)에 자원하여 12년 동안 복무했다.
1934년 8월 1일부터 1935년 10월 8일까지 라이프치히의 제4자동차부서(Kraftfahrabteilung 4)에 있었고, 이후 제10기병연대 휘하 부대로 배치되었다. 1934년 10월 1일 상병으로 진급했고, 1935년 9월 9일부터 19일까지 사관 후보 과정을 이수했다. 1935년 10월 9일, 신설된 기갑부대와 함께 제2기갑사단 제1기갑연대 제8기갑중대에 배치되었고, 1935년 12월 18일 하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4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홀슈타인의 플루토스(Plutos)에서 사격술 학교 과정을 통해 각종 무기 및 사격 하사관 훈련을 받았다. 이후 에르푸르트에 있는 회사로 돌아왔다.
1938년 4월 1일 상사로 진급했고, 같은 해 9월 2일 리스베트(Lisbeth, 본명 Zautner)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1939년 1월 4일부터 3월 11일까지 홀슈타인의 플루토스에 있는 기갑학교에서 다시 사격술 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 1941년 9월 8일 레닌그라드 정찰 중 부상, 1944년 8월 19일 티거 I 전차 피격으로 인한 부상 등,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뵐터는 미하엘 비트만,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 최고의 전차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입대
요하네스 뵐터는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빌헬미네(Wilhelmine, 출생명 Falk)였다. 1921년 부활절부터 1929년 부활절까지 뮐하임의 초등학교(Volksschule)를 다녔다.뮐렌지펜(Mühlensieppen) 회사에서 배관공 및 도제 지붕공으로 일하며 직업 학교에 다녔고, 1931년 3월 31일 '기술 증명서'(Gesellenbrief)를 받았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자원 봉사 훈련을 받았고, 1933년 4월 1일 에르하르트(Ehrhardt) 여단의 청소년 경비병 부대에 입대했다. 뵐터는 나치 돌격대(SA) 회원이기도 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Reichswehr)에 자원하여 12년 동안 복무했다.
1934년 8월 1일부터 1935년 10월 8일까지 라이프치히의 제4자동차부서(Kraftfahrabteilung 4)에 있었고, 이후 제10기병연대 휘하 부대로 배치되었다. 1934년 10월 1일 상병으로 진급했고, 1935년 9월 9일부터 19일까지 사관 후보 과정을 이수했다. 1935년 10월 9일, 신설된 기갑부대와 함께 제2기갑사단 제1기갑연대 제8기갑중대에 배치되었고, 1935년 12월 18일 하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4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홀슈타인의 플루토스(Plutos)에서 사격술 학교 과정을 통해 각종 무기 및 사격 하사관 훈련을 받았다. 이후 에르푸르트에 있는 회사로 돌아왔다.
1938년 4월 1일 상사로 진급했고, 같은 해 9월 2일 리스베트(Lisbeth, 본명 Zautner)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1939년 1월 4일부터 3월 11일까지 홀슈타인의 플루토스에 있는 기갑학교에서 다시 사격술 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 1941년 9월 8일 레닌그라드 정찰 중 부상, 1944년 8월 19일 티거 I 전차 피격으로 인한 부상 등,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뵐터는 미하엘 비트만,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 최고의 전차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2. 군 경력
요하네스 뵐터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5] 이 기록은 독일 국방군 내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며, 그 전공으로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5]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5]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5]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5]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5] 1944년 부상 이후로는 종전까지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5]
뵐터는 미하엘 비트만,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전차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뵐터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이병(Soldat)'': 1933년[5] 4월[6] 1일
- ''상병(Gefreiter)'': 1934년 10월 1일[5]
- ''하사관후보생(Unterführer)'': 1935년 12월 18일[5]
- ''하사(Unteroffizier)'': 1936 4월 1일
- ''상사(Feldwebel):'' 1938년 4월 1일[5]
- ''원사(Oberfeldwebel):'' 1940년 10월 1일[5]
- ''장교후보자(Offiziers-Anwärter)'': 1943년 3월 1일
- ''소위(Leutnant''): 1943년 7월 31일[5] (또는 1943년 5월 1일)
- ''중위(Oberleutnant):'' 1944년 9월 20일[5] (또는 1944년 7월 1일)
- ''대위(Hauptmann) :'' 1945년 1월 1일[5]
2. 3.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전역이 시작될 때 그는 제2기갑사단 제1기갑연대 제8기갑중대 소대장(Zugführer)으로 배치되었다. 1941년 10월 14일, 뵐터는 야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야전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제1기갑연대의 임시 예비 중대(Genesendenkompanie)에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1942년 4월 18일 그는 제1기갑연대 소속 예비 중대(Verfügungskompanie)에 배치되었고 에르푸르트의 생도 훈련 과정에서 소대장으로 참여했다. 뵐터는 6호 전차 티거 중전차대대를 설치하기 위해 자원 봉사자가 필요했을 때 자원했다. 1942년 12월 3일 그는 제502중전차대대로 옮겨졌다. 이전의 성공으로 인해 그는 이 중전차부대에서 1중대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뵐터가 복무한 제502중전차대대는 1942년 5월 25일 창설, 최초로 티거를 지급받은 부대로 이후 중전차대대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만들어낸 부대이며,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이 부대는 다른 독일 전차 에이스들인 오토 카리우스, 알베르트 케르셔가 복무했던 부대로도 유명하다. 이 부대는 북부집단군에 배속되어 주로 발트해와 북해 해안선을 따라 싸웠으며 일부 중대는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싸웠고 동부전선이 붕괴하는 상황에서도 북부전선을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나르바 등에 돌출된 북부집단군을 끈질기게 두들겼지만 이들 티거 슈퍼 에이스들과 제502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모조리 격퇴했다.
1943년 초, 제502중전차대대는 라도가 호수와 레닌그라드 남쪽에 위치했다. 뵐터의 1중대는 24구경장 7,5 cm KwK 37 단포신 속사포를 장착한 3호 전차 N형과 56구경장 8,8 cm KwK 36 전차포를 탑재한 막강한 티거 중전차로 무장했으며 일명 '소방대'(Feuerwehr)의 역할로서 독일 북부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뵐터가 큰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한다.
1943년에 뵐터는 2주 동안 에르푸르트에 있는 가족에게 휴가를 갈 수 있었다. 동시에 제502중전차대대는 1943년 4월 초 프랑스 브르타뉴의 여러 부대에서 온 신병들로 개편되었다. 1943년 6월 25일 그는 행진 명령을 받고 동부전선으로 돌아갔고 다시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갔다. 1943년 7월, 며칠 간의 기차 여행 끝에 제502중전차대대가 Woiskowy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Salei로 진격했다. 1943년 7월 22일, 소련군의 공세는 엄청난 포격과 공습으로 시작되었고, 뵐터는 격전을 치렀다. 1943년 9월 해당 전투는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무려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록은 독일 국방군 내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전공으로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 또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로는 종전까지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뵐터는 같은 전차병 에이스로 유명한 미하엘 비트만과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전차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3. 1. 폴란드 침공 및 프랑스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무려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록은 독일 국방군 내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전공으로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 또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로는 종전까지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뵐터는 같은 전차병 에이스로 유명한 미하엘 비트만과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전차병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3. 2. 동부전선
폴란드 전역이 시작될 때 그는 제2기갑사단 제1기갑연대 제8기갑중대 소대장(Zugführer)으로 배치되었다. 1941년 10월 14일, 뵐터는 야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야전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제1기갑연대의 임시 예비 중대(Genesendenkompanie)에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1942년 4월 18일 그는 제1기갑연대 소속 예비 중대(Verfügungskompanie)에 배치되었고 에르푸르트의 생도 훈련 과정에서 소대장으로 참여했다. 뵐터는 6호 전차 티거 중전차대대를 설치하기 위해 자원 봉사자가 필요했을 때 자원했다. 1942년 12월 3일 그는 제502중전차대대로 옮겨졌다. 이전의 성공으로 인해 그는 이 중전차부대에서 1중대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뵐터가 복무한 제502중전차대대는 1942년 5월 25일 창설, 최초로 티거를 지급받은 부대로 이후 중전차대대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만들어낸 부대이며,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이 부대는 다른 독일 전차 에이스들인 오토 카리우스, 알베르트 케르셔가 복무했던 부대로도 유명하다. 이 부대는 북부집단군에 배속되어 주로 발트해와 북해 해안선을 따라 싸웠으며 일부 중대는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싸웠고 동부전선이 붕괴하는 상황에서도 북부전선을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나르바 등에 돌출된 북부집단군을 끈질기게 두들겼지만 이들 티거 슈퍼 에이스들과 제502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모조리 격퇴했다.
1943년 초, 제502중전차대대는 라도가 호수와 레닌그라드 남쪽에 위치했다. 뵐터의 1중대는 24구경장 7,5 cm KwK 37 단포신 속사포를 장착한 3호 전차 N형과 56구경장 8,8 cm KwK 36 전차포를 탑재한 막강한 티거 중전차로 무장했으며 일명 '소방대'(Feuerwehr)의 역할로서 독일 북부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뵐터가 큰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한다.
1943년에 뵐터는 2주 동안 에르푸르트에 있는 가족에게 휴가를 갈 수 있었다. 동시에 제502중전차대대는 1943년 4월 초 프랑스 브르타뉴의 여러 부대에서 온 신병들로 개편되었다. 1943년 6월 25일 그는 행진 명령을 받고 동부전선으로 돌아갔고 다시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갔다. 1943년 7월, 며칠 간의 기차 여행 끝에 제502중전차대대가 Woiskowy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Salei로 진격했다. 1943년 7월 22일, 소련군의 공세는 엄청난 포격과 공습으로 시작되었고, 뵐터는 격전을 치렀다. 1943년 9월 해당 전투는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무려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록은 독일 국방군 내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전공으로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 또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2. 3. 3. 잦은 부상과 훈련소 교관 복무
요하네스 뵐터는 1944년까지 소련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르다 부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까지 독일 본토의 훈련소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티거 전차장으로 복무한 2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139~144대의 전차를 격파했는데, 이는 독일 전차 에이스들 중에서도 매우 빠른 속도이다.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1944년 부상 이후로는 종전까지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2. 3. 4. 제502중전차대대의 종말
요하네스 뵐터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육군 제502중전차대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139대(자료에 따라 14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독일 국방군 내에서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며, 그 공로로 나뭇잎 장식이 붙은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뵐터는 1940년 6월 19일 프랑스 침공 당시 부상을 입었고, 1941년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정찰 중 부상을 당했으며, 1944년 8월 19일에는 탑승하고 있던 티거 I 전차가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등,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 5회 이상의 부상으로 전상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부상 이후에는 종전까지 전차 하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뵐터는 미하엘 비트만, 에른스트 바르크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전차병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4. 종전 이후
1945년 5월 말, 뵐터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베른하르트(Bernhardt) 회사에서 창고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부터 1949년 1월 말까지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하르트만(Hartmann) 화학 공장의 대외 무역 대표로 일했다. 전쟁에서 얻은 높은 영예 때문에 뵐터는 당시 소련 점령 지역에서 지속적인 보복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1950년 6월에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자가 조립 오토바이를 타고 서독으로 피신했다.가족은 뵐터의 고향인 뮐하임안데어루르에 정착했다. 비셰(Wiesche) 광산에서 잠시 광부로 일한 후, 1950년 8월 말에 재료 테스터로 티센(Thyssen)의 자회사인 라인 강철 튜브 공장(Rheinische Röhrenwerke) 회사에 합류했다. 뵐터는 나중에 이 회사의 기술 직원이 되었으며 정년까지 회사에 충성했다.
뵐터는 정년퇴직 후 1987년 9월 16일 고향인 뮐하임 안 데어 루르에서 타계했다.
3. 서훈 내역
요하네스 뵐터는 그의 군 복무 기간 동안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7] 1937년 4월 1일에는 육군 및 해군 복무 약장(4년)을 받았고, 1938년 10월 1일에는 보병돌격휘장을 받았다.
1939년 9월 30일에는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형을,[7][10] 1940년 7월 15일에는 1급 철십자 훈장 1939년형을 수여받았다.[7][1] 1940년 6월 26일에는 은색 기갑전 배지를,[7] 1941/42 동부전선 종군기장(메달)도 받았다.[7]
전상장은 1940년 7월 2일 검은색,[7] 1943년 2월 8일 은색,[7] 1944년 8월 3일 금색을 각각 수여받았다.[7] 1943년 3월 29일에는 1./Schwere Panzer-Abteilung 502에서 원사(Oberfeldwebel)로서 금색 독일 십자장을 받았다.[2]
1944년에는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두 번 수여받았다. 4월 16일에는 소위(Leutnant)로서, 9월 10일에는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nr.581)을 받았다.[7][8]
그는 또한 2단 기갑전 배지('25회', 1944년 4월 25일)와[7] 3단 기갑전 배지('50회', 1944년 9월 1일)를 수여받았다.[7]
4. 격파 전차 수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Die Ritterkreuzträger 1939 - 1945: Träger des Eichenlaubs zum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http://www.ritterkre[...]
2018-03-05
[6]
서적
[7]
웹사이트
Traces of War: Bölter, Johannes
https://www.tracesof[...]
2021-03-31
[8]
서적
[9]
서적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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