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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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독일의 철학자로, 가난한 삼베 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칸트를 찾아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그의 추천으로 익명으로 출판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예나 대학교 교수를 거쳐 베를린 대학교 초대 철학 교수를 역임하며,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1808) 강연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했다. 피히테는 지식학을 통해 자아와 비자아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윤리학, 법철학, 국가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상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한국에서도 번역, 연구되었으나, 반유대주의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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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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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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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출생일 | 1762년 5월 19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라메나우 |
사망일 | 1814년 1월 29일 |
사망지 |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
국적 | 독일 |
교육 | |
교육 기관 | 슐포르타 예나 대학교 (1780, 학위 없음) 라이프치히 대학교 (1781–1784, 학위 없음) |
경력 | |
소속 기관 | 예나 대학교 에를랑겐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
사상 | |
학파 | 독일 관념론 |
주요 관심사 | 윤리학 형이상학 정신 철학 자아 철학 정치 철학 |
주요 아이디어 | 절대 의식 정립-반정립-종합 비-자아 (Das Nicht-Ich) 노력 (Das Streben) 지식학 (Wissenschaftslehre) (실재-이상주의/이상-실재주의) 철학 (인간 정신의 실용적 역사) 상호 인정 (Gegenseitig anerkennen) 상호 결정의 원리 충격 (Anstoss) 사행 (Tathandlung) 요구 (Aufforderung) 철학적 반성 (지적 직관) 실천의 우선성 (Handeln) 근원적 충동 (Urtrieb) |
영향 | 이마누엘 칸트 잘로몬 마이몬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 Gottlob Ernst Schulze 장자크 루소 바뤼흐 스피노자 Ernst Platner 등 |
영향받은 인물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 노발리스 루돌프 슈타이너 막스 슈티르너 빌헬름 폰 훔볼트 토마스 칼라일 파울 틸리히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기무라 소에 난바라 시게루 무타이 리사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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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피히테는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우연한 기회에 밀리티츠 남작의 후원을 받아 나움부르크 근처 포르타 학교에서 공부했다.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한 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밀리티츠 남작이 사망하면서 학업을 중단했지만, 바뤼흐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을 저술했다. 1791년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 특히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쾨니히스베르크로 칸트를 찾아간 피히테는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이 칸트의 저서로 오해받으면서 오히려 피히테의 명성이 알려졌다. 1792년 예나 대학 교수가 되었고, 1793년 요하나 한(Johaanna Hahn)과 결혼했다. 1798년 철학 잡지에 발표한 논문이 무신론 논쟁을 야기하여 1799년 예나 대학에서 물러났다.[58]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 등 낭만파 사람들과 교류하며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 상황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 ∼ 1808년)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빌헬름 폰 훔볼트의 주도로 베를린 대학교가 설립되자 피히테는 초대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58] 나폴레옹과의 전투 중, 종군간호사로 일하던 부인에게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814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베를린의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매장되었으며, 헤겔이 그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6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피히테는 상부 루사티아(Upper Lusatia)의 람메나우(Rammenau)에서 루터교 신자로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14] 그는 리본 직조공의 아들로,[15] 여러 세대 동안 그 지역에 살았던 경건한 가정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피히테(1737~1812)는 마리아 도로테아 피히테(결혼 전 성씨 슈리히)(1739~1813)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신분보다 약간 높았다. 피히테 자신이 평생 동안 보여준 어떤 불안함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6]어린 시절 피히테는 아버지에게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지방 지주인 밀리츠 남작(Freiherr von Miltitz)은 현지 목사의 설교를 듣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는데, 근처의 한 소년이 거의 ''똑같이'' 설교를 반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후원하고 수업료를 지불했다.[16]
이후 피히테는 마이센 근처 니더아우(Niederau)에 있는 크레벨(Krebel) 목사의 집에 맡겨져 고전(classics)에 대한 철저한 기초 교육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와 거의 만나지 못했다. 1774년 10월,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 포르타(Pforta)에 있는 유명한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밀리츠(von Miltitz) 자작은 계속 그를 지원했지만 1774년 사망했다. 포르타 학교는 노발리스(Novalis),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 프리드리히 슐레겔(Karl Wilhelm Friedrich Schlegel|Friedrich Schlegel),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Nietzsche)와 관련이 있다. 이 기관의 분위기는 반(半)수도원적이었고, 교육은 훌륭했지만, 피히테에게 충분한 사회 생활과 세상과의 접촉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6]
그는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은 바뤼흐 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이마누엘 칸트 철학을 알게 되면서, 특히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칸트를 찾아 쾨니히스베르크로 갔고,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람들은 칸트의 저서로 오해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로 피히테의 명성이 알려졌다.
2. 2. 칸트 철학과의 만남과 초기 저술 활동
피히테는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바뤼흐 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은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을 저술하였다.[15] 1791년에 이마누엘 칸트 철학을 알게 되면서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24]그 후 칸트를 찾아 쾨니히스베르크로 갔고, 칸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16] 이 책은 처음에는 칸트의 저서로 알려졌으나, 칸트가 직접 정정하고 피히테를 추천하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26] 칼 라인홀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옌스 바게손은 피히테를 "철학적 천상의 세 번째 태양"이라고 칭송하였다.[27]
피히테는 1790년 여름부터 칸트의 저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피히테의 제자 중 한 명이 칸트의 저작에 대해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24] 칸트의 저작들은 그의 삶과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디터 헨리히에 따르면,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에서 피히테는 신의 계시와 칸트의 비판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2. 3. 예나 대학 교수 시절과 무신론 논쟁
피히테는 1792년에 예나 대학 교수가 되었고, 1793년 요하나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였다.[29] 예나 대학교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관념론" 체계를 설명하는 강의를 시작했고, 그의 진지함과 강렬한 개성 덕분에 뛰어난 강사로 명성을 얻었다. 이 강의들은 나중에 ''학자의 소명''(''Einige Vorlesungen ü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5][16]1798년, 피히테는 철학 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무신론 논쟁을 야기했다.[58] 피히테는 신을 도덕적 질서 그 자체로 보았으며, "살아 있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도덕 질서는 신 그 자체이다. 우리는 다른 신이 필요 없으며, 다른 신을 이해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무신론 혐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1799년 예나 대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58]
2. 4. 베를린 시기와 독일 국민에게 고함
1807년 12월부터 1808년 3월까지 피히테는 "독일 민족"과 그 문화와 언어에 관한 일련의 강연을 했다. 그는 프랑스에게 패배한 수치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그러한 민족 교육이 독일 민족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예상했다.[46] 혁명 프랑스를 지지했던 피히테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횡단하여 독일 영토를 점령하고 원자재를 약탈하며 외세 지배를 받게 되자 1804년 환멸을 느꼈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 혁명의 미덕을 미래로 이어갈 책임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실망으로 그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독일 민족으로 눈을 돌렸다.[47]이 강연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Addresses to the German Nation'')이라는 제목으로, 바론 폰 슈타인(Baron vom Stein) 총리 재임 중 프로이센 정부의 개혁 시기에 맞춰 이루어졌다. 이 연설은 그 당시 피히테가 인간 정신적 발전의 수단으로서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피히테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초기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접근 방식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독일 민족의 목표는 "정신과 이성의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조잡한 물리적 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48] 헤르더의 독일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문화적이었으며 미적, 문학적, 도덕적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46]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 ∼ 1808년)이란 강연은 매우 유명하다.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제시한 민족주의는 1세기 이상 후에 독일의 나치당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나치당은 피히테를 자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선구자로 여겼다.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와 나치 정권의 연관성은 전후 시대 피히테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49]
나폴레옹 1세의 베를린 점령하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인 『독일 국민에게 고함』[63]을 행하였다.
2. 5. 말년과 죽음
피히테는 1810년 빌헬름 폰 훔볼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베를린 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총장이자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교육적 주제 때문이었고, 예나 대학교에서의 이전 업적 때문이기도 했다.[58] 동료들의 투표로 이듬해 만장일치로 총장에 선출되었으나, 특유의 기질 때문에 마찰이 빚어져 1812년에 사임했다.[15]나폴레옹에 대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베를린의 병원은 환자들로 가득 찼다. 피히테의 아내는 간호에 전념하다 치명적인 열병에 걸렸고, 회복되자 피히테가 티푸스에 걸려 1814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16] 그의 시신은 베를린의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매장되었다.[63]
피히테의 뒤를 이어 헤겔이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훗날 헤겔의 강한 희망에 따라 그의 시신은 피히테의 묘 옆에 매장되어, 현재 피히테 부부와 헤겔 부부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3. 주요 사상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 특히 "사물 자체"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칸트가 인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초감각적 현실, 즉 "사물 자체"를 상정했던 반면, 피히테는 이러한 구분이 회의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사물 자체"라는 개념을 버리고, 의식이 어떠한 것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피히테에 따르면, 현상 세계는 의식, 즉 개인의 활동과 도덕적 인식에서 비롯된다.[36] 그의 사상은 당시 학계에서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35] 피히테는 선입견 없이 자신의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6]
1807년부터 1808년 사이, 프랑스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속 강연을 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 민족의 문화와 언어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독일인의 통일과 내적 자유, 상업적 독립을 역설했다.[71] 그는 독일어가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라고 보았으며, 애국심과 세계 시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즉, 인류의 발전을 지향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목표와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같은 일이라고 보았다.[72] 이러한 피히테의 국가관은 프리드리히 셸링, 아담 뮐러,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73]
피히테는 초기 저작에서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을 "국가 안의 국가"로 칭하며, 독일 민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50] 유대인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서는 그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유대적 관념이 없는 다른 머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64] 그러나 이후 피히테는 자신의 과거 발언을 반성하고,[67] 유대인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항의하여 대학교 총장직에서 사임하는 등[51] 반유대주의적 태도와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3. 1. 지식학 (Wissenschaftslehre)
피히테의 비평가들은 그의 칸트 모방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35] 그러나 피히테는 그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선입견 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명료하다고 주장했다.[36]피히테는 칸트의 "사물 자체" 개념을 비판하고, 의식이 토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이 그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여 명성을 얻었다. 현상은 의식, 즉 나의 활동과 도덕적 인식에서 발생한다.
피히테는 『자연법의 기초』(1797)에서 자기의식이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즉, 자기의식은 다른 이성적 주체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이들이 주체를 무의식에서 깨워 자기 인식으로 이끌어낸다(fordern auf).[37]
피히테는 '나'(das Ich)는 자신을 전제하기 위해서는 개인으로서 자신을 전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자유로운 개인(들)의 부름 또는 요구(Aufforderung)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며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성적 개인들의 상호 인식(gegenseitig anerkennen)은 개인적 자아의 조건이다.[38][39] 자아 개념은 『지식 과학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1795)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진다.[40]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은 자아가 아닌 무언가에 의한 저항이나 제약에 의존하지만, 특정 감각적 지각에 즉각 귀속될 수는 없다. 그의 후기 강의(Nova methodo)에서 피히테는 부름이 절대적 자유에 대한 제한과 나의 전제에 대한 조건으로 원초적 감각과 함께 Anstoss(아래 참조) 대신 자리를 차지한다고 수정하여 제시했다.
'나'는 자신을 전제하며, 이는 의식의 대상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본질은 자기 동일성의 주장에 있으며, 의식은 자기 의식을 전제한다. 즉각적인 자기 동일성은 심리적 사실이나 실체의 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행위이자 존재이며, "사실 및/또는 행위"(Thathandlung)로서 경험적 의식의 모든 사실과 행위에 전제되지만,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을 제한된 것으로서만 전제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한계는 스스로 생성할 수 없다. 유한한 나는 수동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나는 자신이 제한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하는데, 이것이 "충동",[41] "반발",[42] 또는 "저항"[43] (Anstoss; 현대 독일어: Anstoß)이다. 나의 원초적 제한은 내가 그것을 제한으로 전제하는 한에서만 나에게 제한이다. 피히테의 분석에 따르면, 나는 감각, 사물에 대한 직관, 다른 사람의 부름으로 자신의 제한을 전제한다.
Anstoss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경험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계를 경험적 개인으로서 의식하는 활동의 복잡한 과정을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자극이다. Anstoss는 칸트 철학에서 사물 자체와 유사하지만, 나에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유한성과의 원초적 만남이다. '비-나'(das Nicht-Ich)가 Anstoss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피히테는 Anstoss에 대한 의식을 갖기 위해 Anstoss를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에 의해 비-나가 전제된다고 주장한다.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은 자기 의식이 발생하려면 Anstoss가 발생해야 함을 보여주지만 Anstoss의 실제 발생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경험의 선험적 추론에는 한계가 있으며, 피히테에게 있어서 이것은 칸트의 초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피히테에 따르면, 초월 철학은 세계가 공간, 시간, 인과관계를 가져야 함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사물이 특정한 감각적 속성을 가지는 이유나 내가 이 특정 개인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나가 자신의 자유를 발견하는 동시에 단순히 발견해야 하는 것이며, 후자의 조건이 된다.
디터 헨리히(1966)는 피히테가 "반성적 의식 이론"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는 반성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이미 자신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내가 의식적인 주체임을 인식하는 조건 하에서만 어떤 대상도 의식에 이른다").[44] 이 아이디어는 헨리히가 피히테의 독창적인 통찰이라고 불렀다.[45]
피히테의 주요 저작 중 지식학(Wissenschaftslehre)과 관련된 저작은 다음과 같다.
- ''Über den Begriff der Wissenschaftslehre oder der sogenannten Philosophie'' (1794)
-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1795) 『전체 학문학의 기초』
- ''Wissenschaftslehre nova methodo'' (1796–1799)
-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1797/1798)
- ''Die Wissenschaftslehre'' (1804) 및 이후 판본 (1812)과 (1813).
3. 2. 윤리학과 법철학
피히테는 Grundlage des Naturrechts|자연법의 기초de(1797)에서 자기의식은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즉, 모든 주체의 자기의식은 다른 이성적 주체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주체들은 주체 또는 자아를 무의식에서 깨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이끈다.[37]피히테는 '나'(das Ich)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을 전제하려면 다른 자유로운 개인(들)의 부름 또는 요구(Aufforderung)를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름은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국, 이성적 개인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것(gegenseitig anerkennen)은 개인적 자아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38][39] 자아 개념에 대한 논의는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지식 과학의 기초de(1794/1795)에서 전개된 자아 개념의 중심 내용이다.[40]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은 자아가 아닌 무언가에 의한 저항이나 제약에 의존하지만, 특정한 감각적 지각에 즉각적으로 귀속될 수는 없다. 그는 1796~99년의 후기 강의(그의 Nova methodo)에서 이 점을 자신의 체계에 대한 수정된 제시에 통합했다. 여기서 부름은 절대적 자유에 대한 제한과 '나'의 전제에 대한 조건으로서, 이전의 Anstoss(아래 참조) 대신 원초적 감각과 함께 자리 잡는다.
'나'는 스스로를 전제한다. 여기서 전제한다는 것은 의식의 대상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단순히 '나'의 본질이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의식은 자기 의식을 전제한다. 이러한 즉각적인 자기 동일성은 심리적 사실이나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실체나 존재의 행위 또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행위이지만, 이 동일한 '나'의 존재와 동일한 행위이다. 피히테의 전문 용어로, 자기 의식의 원초적 통일성은 동일한 '나'의 행위이자 산물이며, "사실 및/또는 행위"(Thathandlung; 현대 독일어: Tathandlung)로서 경험적 의식의 모든 사실과 모든 행위에 의해 전제되고 포함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을 제한된 것으로만 전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생성하거나 창조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조차 전제할 수 없다. 유한한 '나'는 자신의 수동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대신, 피히테에게 있어서, 만약 '나'가 자신을 전제하려면, 단순히 자신이 제한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하는데, 피히테는 이것을 "충동",[41] "반발",[42] 또는 "저항"[43] (Anstoss; 현대 독일어: Anstoß)으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원초적 제한은 '나'가 그것을 제한으로 전제하는 한에서만 '나'에게 있어서 제한이다. 피히테의 분석에 따르면, '나'는 처음에는 단지 감각으로, 다음에는 감각으로, 다음에는 사물에 대한 직관으로, 마침내 다른 사람의 부름으로 자신의 제한을 전제함으로써 이것을 행한다.
Anstoss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경험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계를 경험적 개인으로서 의식하는 복잡한 과정을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필수적인 자극을 제공한다. Anstoss는 칸트 철학에서 사물 자체와 유사한 역할을 하지만, 칸트와 달리 피히테의 Anstoss는 '나'에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나'의 유한성과의 원초적 만남을 나타낸다. 비-나(das Nicht-Ich)가 Anstoss의 원인이나 근거라고 주장하는 대신, 피히테는 Anstoss에 대한 의식을 갖기 위해 Anstoss를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에 의해 비-나가 전제된다고 주장한다. Wissenschaftslehre는 자기 의식이 발생하려면 Anstoss가 발생해야 함을 보여주지만 Anstoss의 실제 발생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경험의 선험적 추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피히테에게 있어서 이것은 칸트의 초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피히테에 따르면, 초월 철학은 세계가 공간, 시간, 인과관계를 가져야 함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사물이 우연히 가지는 특정한 감각적 속성을 가지는 이유나 내가 다른 개인이 아니라 이 특정 개인인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나'가 자신의 자유를 발견하는 동시에 단순히 발견해야 하는 것이며, 실제로 후자의 조건이 된다.
디터 헨리히(1966)는 피히테가 "반성적 의식 이론"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는 반성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이미 자신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내가 의식적인 주체임을 인식하는 조건 하에서만 어떤 대상도 의식에 이른다").[44] 이 아이디어는 헨리히가 피히테의 독창적인 통찰이라고 부른 것이다.[45]
3. 3. 국가철학과 민족주의
1807년 12월부터 1808년 3월까지 피히테는 "독일 민족"과 그 문화와 언어에 관한 일련의 강연을 했다. 프랑스에 패배한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피히테는 이러한 민족 교육이 독일 민족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예상했다.[46]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피히테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횡단하여 독일 영토를 점령하고 원자재를 약탈하며 외세 지배를 받게 되자 1804년 환멸을 느꼈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 혁명의 미덕을 미래로 이어갈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프랑스에 대한 실망으로 독일 민족을 그 도구로 삼게 되었다.[47]피히테의 강연은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Addresses to the German N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바론 폰 슈타인(Baron vom Stein) 총리 재임 중 프로이센 정부의 개혁 시기에 맞춰 이루어졌다. 이 연설은 피히테가 인간 정신적 발전의 수단으로서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피히테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초기 사상을 기반으로 자신의 접근 방식을 통합하려 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독일 민족의 목표는 "정신과 이성의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조잡한 물리적 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48] 헤르더의 독일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문화적이었으며 미적, 문학적, 도덕적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46]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제시한 민족주의는 1세기 이상 후에 독일의 나치당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나치당은 피히테를 자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선구자로 여겼다.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와 나치 정권의 연관성은 전후 시대 피히테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49] 이러한 해석은 1793년의 미발표 편지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수정하기 위한 기여」(''Contributions to the Correction of the Public's Judgment concerning the French Revolution'')를 참고하여 강화되기도 했는데, 이 편지에서 피히테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고, 유대인들을 독일 민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부르는 등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표출했다.[50]
그러나 이 편지의 각주에서 피히테는 유대인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열렬히 호소했다. 더욱이 피히테의 학문 경력의 마지막 행위는 동료들이 유대인 학생들의 괴롭힘을 처벌하기를 거부했을 때 항의의 표시로 베를린 대학교 총장직에서 사임한 것이었다.[51] 최근의 학술 연구는 피히테의 민족주의에 관한 글과 나치당에 의한 채택을 분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연관성은 여전히 그의 유산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52]
나폴레옹 전쟁 중 1807년 12월부터 이듬해 1808년에 걸쳐 프랑스군 점령하의 베를린 학사원 강당에서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연속 강연했다.[71] 이 강연에서 피히테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독일 국민 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독일 국민의 통일, 독일인의 내적 자유, 상업적 독립을 주장하며, 독일 국민 정신을 고양시켜 독일 해방 전쟁을 준비하는 힘이 되었다.[71]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우월성의 근거를 독일어가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할 수 있는 특성에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애국심과 그 반대』에서는 애국심과 세계 시민주의가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세계 시민으로서 인류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과 그 목표를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달성하는 것은 같은 일이었다. 그 점에서 피히테 국가론에는 자문화 중심주의와 세계 시민주의가 혼재되어 있다.[72]
이러한 피히테의 국가관은 프리드리히 셸링, 아담 뮐러,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지지되었다.[73]
3. 4. 반유대주의 논란
피히테는 1793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수정하기 위한 기여」라는 미발표 편지에서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며, 그들을 독일 민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국가 안의 국가"라고 칭하며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드러냈다.[50] 그는 유대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위해 약속의 땅을 얻어주고,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66] 또한 유대인이 시민권을 얻으려면 그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유대적 관념이 없는 다른 머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64]그러나 피히테는 같은 편지의 각주에서 유대인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열렬히 호소했다.[51] 또한, 동료들이 유대인 학생들의 괴롭힘을 처벌하기를 거부했을 때, 항의의 표시로 베를린 대학교 총장직에서 사임하기도 했다.[51] 1795년에는 과거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반성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67] 야코비와 같은 유대인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68]
최근 학계에서는 피히테의 민족주의 관련 글과 나치당이 이를 채택한 것을 분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여전히 그의 유산에 오점으로 남아있다.[52]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피히테를 국민으로서의 강한 자각을 통해 도덕성을 높이는 사상의 선구자로 보았고, 반시온주의 유대계 철학자 헬만 코헨도 피히테가 국민이 전체의 자유에 봉사한다는 구약 성서의 이상을 인정했다고 칭찬했다.[74]
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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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요 저작
Wissenschaftslehrede 또는 소위 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1794)
전체 학문 이론의 기초 (1794/1795)
새로운 방법에 의한 학문 이론 (1796–1799)
학문 이론의 새로운 제시에 대한 시도 (1797/1798)
학문 이론의 제시 (1801)
학문 이론 (1804, 1812, 1813)
그 일반적인 개요에서 제시된 학문 이론 (1810)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 (1792)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여 (1793)
학자의 임무에 대한 몇몇 강의 (1794)
자연법의 기초 (1796)
학문 이론의 원리에 따른 도덕 철학 체계 (1798)
신성한 세계 정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에 대하여 (1798)
선제후 작센의 몰수 명령서에 의해 그에게 돌려진 무신론적 발언에 대한 대중에게 호소 (1799)
폐쇄된 상업 국가. 법학에 대한 부록이자 미래의 정치에 대한 시험으로서의 철학적 설계 (1800)
인간의 운명 (1800)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의 삶과 특이한 견해[61] (1801)
프리메이슨의 철학. 콘스탄트에게 보내는 편지 (1802/03)
현 시대의 기본 원리 (1806)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 또는 종교 교리 (1806)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 (1807/1808)
법학 체계 (1812)
야코비와 피히테 (1799/1816)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에서 편찬한 ''Gesamtausgabe''("전집")는 피히테 저작의 새로운 독일어판 표준본이다. 피히테의 저작은 ''GA''를 인용하며,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조합하여 각각 시리즈와 권, 그리고 페이지 번호를 표시한다. 또 다른 판본으로는 이마누엘 헤르만 피히테(I. H. Fichte) 편, ''Johann Gottlieb Fichtes sämmtliche Werke''(약칭 ''SW'')가 있다.
한국어판으로는 「피히테 전집」(晢書房, 1995-2016년)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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