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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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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발리스는 1772년 독일에서 태어나 1801년 사망한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소설가, 철학자이다. 그는 초기 낭만주의의 핵심 인물로, 그의 삶과 작품은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 신비주의적 경향, '마법적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밤의 찬가》, 소설 《푸른 꽃》 등이 있으며, 20세기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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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799년 초상화
본명게오르크 필립 프리드리히 프라이헤어 폰 하르덴베르크
출생일1772년 5월 2일
출생지비더슈테트, 작센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801년 3월 25일
사망지바이센펠스, 작센 선제후국
직업작가, 철학자, 시인, 귀족, 신비주의자, 광물학자, 토목 기사
국적독일
활동 기간1791년–1801년
장르
소설
단편
연설
주제철학
자연 과학
종교
정치
사조예나 낭만주의
필명노발리스
학력
모교예나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비텐베르크 대학교
프라이베르크 광산 아카데미
주목할 만한 작품밤의 찬가
푸른 꽃
서명

2. 생애

노발리스는 1772년 5월 2일 독일 작센 선제후국의 오버비더슈테트 성(Schloss Oberwiederstedt])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작센안할트 주 아른슈타인의 일부이다. 하르덴베르크 남작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니더작센의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오버비더슈테트 성]]
]아버지 하인리히 울리히 에라스무스 폰 하르덴베르크(1738-1814)는 영지 소유 및 소금 광산 관리자로 일했으며, 엄격한 경건주의 신앙인이었다.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모라비아 형제회와 교류했다. 이후 아우구스테 베른하르디네 뵐칙(1749-1818)과 재혼하였다. 노발리스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9세 때 이질을 앓았고, 후유증으로 위장 이완을 겪었다. 이 병을 계기로 시적, 지적 재능이 발달했다고 전해진다.

하르덴베르크 가문의 문장


어린 시절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1790년에는 아이스레벤의 김나지움 졸업반에 다니며 수사학과 고대 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수많은 습작시를 짓고 희랍어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1]

예나, 라이프치히, 비텐베르크에서 대학 공부를 했다.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으나, 예나에서는 실러의 역사학 강의를 듣고 개인적 친분을 맺는 등 문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실러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곁에서 직접 간호했던 지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괴테, 헤르더, 장 폴, 루트비히 틱, 프리드리히 셸링, 슐레겔 형제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와 친분을 맺었다. 1794년, 최고점수로 법학대를 졸업했다.[1]

1794년, 영지 관리인 쵤레스틴 아우구스트 유스트의 서기로 일했다. 1795년, 소피 폰 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13세 생일을 맞은 소피와 약혼했지만, 1797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프라이베르크 광업대학교에서 광산학, 수학, 화학 등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다. 1797년 말, 프라이베르크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작센의 바이센펠스 염전 직원 자격을 갖추었다. 아브라함 고틀로브 베르너에게 지질학을 배웠고, 전기, 갈바니즘, 연금술, 의학, 화학, 물리학, 수학, 자연 철학을 연구했다. 셸링을 만나 드레스덴에서 미술 투어를 했고,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A. W. 슐레겔, 라이프치히에서 장 폴을 만나는 등 지적 교류를 넓혔다.

노발리스 집 현판, 자유 대학교


1798년, 쥘리 폰 샤르팽티에와 두 번째 약혼을 했다. 쥘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채광 연구 책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투생 폰 샤르펜티에의 딸이었다. 쥘리와는 1801년 노발리스가 사망할 때까지 약혼 관계를 유지했으며, 쥘리는 그의 마지막 병상에서 그를 간호했다.

1799년부터 제염소 관리자로 일하며 관리위원으로 승진했고, 갈탄 채굴에 공헌했다. 1800년, 29세의 나이로 튀링겐 지역 최고관리로 임명되었으나, 180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바이센펠스의 노발리스 묘지

2. 1. 출신과 가문

노발리스는 북부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작센 선제후국의 오버비더슈테트 성(Schloss Oberwiedersted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현재는 작센안할트 주 아른슈타인의 일부이다.

그의 가문은 하르덴베르크의 남작 가문으로, 니더작센의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아버지 하인리히 울리히 에라스무스 폰 하르덴베르크(1738-1814)는 영지를 소유하고 소금 광산 관리자로 일했으며, 엄격한 경건주의 신앙인이었다.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모라비아 형제회와 교류했다. 이후 아우구스테 베른하르디네 뵐칙(1749-1818)과 재혼하였다. 노발리스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형제들은 대부분 병약하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9세 때 이질을 앓았고, 후유증으로 위장 이완을 겪었다. 이 병을 계기로 시적, 지적 재능이 발달했다고 전해진다.

2. 2. 교육

노발리스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790년에는 아이스레벤의 김나지움 졸업반에 다니며 수사학과 고대 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수많은 습작시를 짓고 희랍어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1]

1790년에 예나를 시작으로, 라이프치히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 공부를 했다.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으나, 특히 예나에서는 실러의 역사학 강의를 듣고 개인적 친분을 맺는 등 문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실러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곁에서 직접 간호했던 지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 시절에 괴테, 헤르더, 장 폴 등의 인물들을 만났으며, 같은 나이대의 루트비히 틱, 프리드리히 셸링, 슐레겔 형제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와 친분을 맺었다. 1794년, 노발리스는 최고점수를 받으며 법학대를 졸업했다.[1]

2. 3. 직업과 사랑, 그리고 죽음

1794년, 노발리스는 공직 대신 영지 관리인 쵤레스틴 아우구스트 유스트의 서기로 일했다. 유스트는 노발리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그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1] 1795년, 노발리스는 그뤼닝엔 성에서 소피 폰 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얼마 후 13세 생일을 맞은 소피와 약혼했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이른 나이에 약혼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2] 그러나 1797년, 소피는 결핵성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은 노발리스의 예술과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피는 1796년에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같은 해, 노발리스는 프라이베르크 광업대학교에서 광산학, 수학, 화학 등 당대 최고 수준의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3년 과정의 교육을 1년 반 만에 수료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797년 말, 노발리스는 프라이베르크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작센의 바이센펠스 염전 직원 자격을 갖추었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주요 멘토는 지질학자 아브라함 고틀로브 베르너였다. 노발리스는 전기, 갈바니즘, 연금술, 의학, 화학, 물리학, 수학, 자연 철학을 포함한 광범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을 만나 함께 드레스덴에서 미술 투어를 했고,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라이프치히에서 작가 장 파울을 만나는 등 지적 교류를 넓혔다.

1798년, 노발리스는 쥘리 폰 샤르팽티에와 두 번째 약혼을 했다. 그의 약혼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채광 연구 책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투생 폰 샤르펜티에의 딸이었다. 소피와의 관계와 달리, 노발리스의 쥘리에 대한 애정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처음에 쥘리에 대한 애정을 소피에 대한 "천상의" 열정에 비해 "세속적인" 열정으로 보았지만, 점차 이 구분을 완화했다. 쥘리에 대한 감정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쓰인 ''영적 노래''를 포함한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노발리스와 쥘리는 1801년 노발리스가 사망할 때까지 약혼 관계를 유지했으며, 쥘리는 그의 마지막 병상에서 그를 간호했다.

1799년부터 제염소 관리자로 일하며 관리위원으로 승진했고, 갈탄 채굴에 공헌하는 등 실무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1800년, 29세의 나이로 튀링겐 지역 최고관리(오늘날의 도의원)로 임명되었으나, 180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3. 작품 세계와 사상

노발리스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함께 "낭만주의 파편"이라는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문학 작업은 "세계의 낭만화"와 더불어 학문과 문학을 융합하려는 사상으로 함축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문학은 제반 학문과 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적 보편문학"(Progressive Universalpoesie)의 통일된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낭만주의 파편"은 이처럼 불완전성을 통해서 부재하는 전체를 가리키려는 문학적 시도이다.[2]

1799년 여름, 예나로 여행을 간 노발리스는 루트비히 티크를 만났는데, 그는 노발리스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큰 지적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이들은 슐레겔 형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공식적인 사교 모임의 일원이 되었고, 이 모임은 예나 낭만주의 (초기 낭만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2] 티크의 영향으로 노발리스는 17세기의 신비주의자 야코프 뵈메의 작품을 연구했는데, 그는 뵈메와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또한 플라톤주의 미학인 헴스터후이스의 작품과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글에도 몰두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작품은 노발리스에게 기독교 혹은 유럽 (''Christenheit oder Europa'')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고, 이는 유럽을 문화적, 사회적 통일성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었으며, 그 해석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Geistliche Lieder''(''영적 노래'')라는 시를 쓰고, 소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을 쓰기 시작했다.

3. 1. 주요 특징

노발리스는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핵심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삶과 이른 죽음은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2] 그는 자연과학, 법학, 철학,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2]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함께 '낭만주의 파편'이라는 문학 장르를 창시했다.[2]

'세계의 낭만화'와 학문과 문학의 융합을 추구하며, '발전적 보편문학'의 통일된 형태를 지향했다.[2] '낭만주의 파편'은 불완전성을 통해 부재하는 전체를 가리키려는 문학적 시도이다.[2]

루트비히 티크, 아우구스트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 형제와 교류하며, 시문학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잡지 『아테네움』에 평론 등을 기고했다.

노발리스 작품의 특징은 "조피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경향, 무한한 것에 대한 지향, 중세 공동체 지향에 있다. 시 『밤의 찬가』, 소설 『푸른 꽃(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평론 『기독교 세계 또는 유럽』 등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기독교 세계 또는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 이전의 세계를 기독교라는 하나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민족성을 넘어선 보편적 지반을 가진 공동체로 칭송하였다.

필리프 오토 룽게의 펜화 ''밤'' (1803). 룽게의 낭만주의적 알레고리 상징주의는 노발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함께 노발리스는 독일 문학에서 단편을 문학적 예술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슐레겔에게 단편은 겉으로 보이는 대립을 매개하는 문학적 수단이었다. 그 모델은 부분에서 전체를 연상시키거나, 유한함에서 상상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연상시키는 고전 조각의 단편이었다. 단편의 사용은 노발리스가 다루고 싶어하는 지적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쉽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슐레겔의 "진보적인 보편 시학"이라는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장르는 특히 노발리스에게 적합했는데, 그가 철학과 시를 지속적인 관계 속에 유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단편을 문학 형식으로 처음 사용한 주요 작품인 《꽃가루》(Pollen)는 1798년 《아테네움》에 게재되었다.

3. 2. '마법적 관념론'

노발리스의 개인적인 세계관은 교육, 철학, 전문적인 지식, 그리고 경건주의적인 배경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마법적 관념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름은 노발리스가 1798년 노트에서 언급한 문학적 예언자 유형인 ''magischer Idealist''(마법적 관념론자)에서 유래했다. 이 세계관에서 철학과 시는 하나로 통합된다. 마법적 관념론은 독일 관념론인 피히테와 셸링의 사상과 창의적인 상상력을 노발리스가 종합한 것이다. 창의적인 상상력의 목표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장벽, 그리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마법'은 우리의 의지에 반응하는 자연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노발리스의 마법적 관념론의 또 다른 요소는 '사랑'의 개념이다. 노발리스의 관점에서 사랑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와 공감의 감각이며, 이는 마법의 근본이자 목표로 여겨진다. 한편, 노발리스가 '마법'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는 것은 그가 인식한 현대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탈마법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노발리스가 저술에서 '마법'과 '사랑'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철학적, 문학적 목표의 핵심적인 측면을 실행하는 수행적 행위이다. 이 단어들은 독자들을 주의 깊게 만들고, 그가 예술, 특히 은유와 상징성을 사용하여 그의 포괄적인 탐구에서 자연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탐구하고 통합하는 데 시를 사용하는 것을 인식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마법적 관념론은 또한 건강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룬다. 노발리스는 스코틀랜드 의사인 존 브라운의 의학 체계에서 건강 이론을 도출했는데, 이는 질병을 감각 자극과 내부 상태 간의 불일치로 본다. 노발리스는 이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질병이 자아와 자연 세계 사이의 불화에서 발생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건강에 대한 이해는 내재적인 것이다. 즉,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환경과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발리스에 따르면, 건강은 우리가 세상을 통제하기보다는 세상을 민감하게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몸을 사용할 때 유지된다. 이상적인 것은 개인과 세상이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노발리스의 마법적 관념론에는 실제적인 접촉을 부정하고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이끌며, 이를 "원격 접촉"의 개념으로 대체하는 불안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3. 3. 시

노발리스는 독일 낭만주의 시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2] 그의 두 편의 시 모음집인 ''밤의 찬가''와 ''영적인 노래''는 그의 주요 서정시적 업적으로 여겨진다. ''밤의 찬가''는 조피 폰 큔이 죽은 후 1797년에 시작되었다. 이 시들이 완성된 지 약 8개월 후, 개정판이 ''아테네움''에 게재되었다. 1799년에 쓰여진 ''영적인 노래''는 1802년에 사후 출판되었다. 노발리스는 이 시들을 ''기독교 찬가''라고 불렀으며, 원래는 ''새로운 경건한 찬송가집의 표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예정이었다. 그의 사후 많은 시들이 루터교 찬송가에 포함되었다.

1800년 8월 <아테네움>의 마지막 호에 <밤의 찬가>가 수록되었는데, 이는 초기 낭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밤의 찬가>는 약혼녀 소피의 죽음과 관련된 내적 체험의 문학적 결과물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인 동시에,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정신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사철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밤의 찬가>를 집필할 당시에 노발리스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실러의 <그리스의 신들>, 에드워드 영의 <밤의 상념>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밤의 찬가>는 6편의 찬가로 이루어져 있다. 첫 4편의 찬가는 소피의 죽음에 대한 내면의 체험과, 신비적 인식의 공간인 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5번째는 고대의 황금기와 인류의 타락,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황금기에 대한 예감을 그리고 있으며, 6번째 찬가는 "죽음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약혼녀 소피와의 체험이 그 근저에 깔려 있어 <밤의 찬가>는 마술적인 관념의 세계를 계시하는 어구들은 깊고 암울한 환상과 신비한 죽음에의 동경으로 차 있다. 예술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이 융합된, 보다 높은 세계를 지향하는 노발리스의 시는 낭만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루트비히 티크,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슐레겔 형제 등과 친교를 맺고, 시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론과 실천에서 추구했다. 잡지 『아테네움』에 참여하여 평론 등을 썼다.

노발리스의 작품의 특징은 조피의 죽음, 이른바 "조피 체험"을 중핵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경향, 특히 무한한 것에 대한 지향과 중세공동체 지향에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조피의 묘 앞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시 『밤의 찬가』에 잘 나타나있다.

1845년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아이헨스의 사후 낭만주의 초상화 (프란츠 가레이스의 1799년 그림을 기반으로 함)


영어 번역 시집은 다음과 같다.

3. 4. 소설 (유작)

Heinrich von Ofterdingende(1802)은 '푸른 꽃'이라는 낭만주의의 핵심 상징을 통해 세계의 조화를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de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 구상되었는데, 노발리스는 괴테가 이야기에서 경제적인 것을 시적인 것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Heinrich von Ofterdingende을 승리적으로 시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Die Lehrlinge zu Saisde(1802)는 문학을 통해 세계의 조화를 회복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으며, 동화 "히아신스와 장미 꽃잎"이 포함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두 소설은 프라이부르크에서 자연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은유를 통해 인간의 경험을 반영한다.

노발리스의 필적 ( 발췌)

3. 5. 파편집

Blüthenstaubde (1798년)는 슐레겔 형제가 발행한 <아테네움>지에 발표된 철학적 단편 모음이다. Glauben und Liebe oder Der König und die Königinde (신앙과 사랑 또는 왕과 왕비한국어, 1798년)는 프로이센의 왕과 왕비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통합에서 '신앙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3. 6. 정치적 저술

Die Christenheit oder Europade (Die Christenheit oder Europa|기독교 세계 혹은 유럽de)(1799)는 중세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긍정적 묘사를 통해 유럽의 통합을 촉구한 작품으로, 다양한 해석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 노발리스는 이 에세이에서 유럽이 가톨릭 교회 아래 통일되었던 신화적인 중세 황금기를 시적으로 언급하며, 당시 유럽의 통일을 촉구했다.

노발리스의 작품은 조피의 죽음, 이른바 "조피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특히 무한한 것에 대한 지향과 중세공동체 지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소설 『푸른 꽃(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은 중세의 민네징어를 주인공으로 하며, 평론 『기독교 세계 또는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 이전의 세계를 기독교라는 하나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민족성을 넘어선 보편적 공동체로 칭송했다. 노발리스는 이 평론을 『아테네움』지에 게재하려 했으나, 평론 내 시적 역사관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주변의 판단에 따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문을 구했고, 결국 발표는 보류되었다.

4. 영향

노발리스는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그의 작품은 문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2]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밤의 찬가''와 ''영적인 노래''가 있다. ''밤의 찬가''는 조피 폰 큔의 죽음 이후 1797년에 쓰기 시작했으며, ''영적인 노래''는 1799년에 쓰여 1802년 사후 출판되었다. 그의 시들은 루터교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노발리스의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 '''밤의 찬가'''

번역자출판 정보
W. Hastie188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T. & T. Clark
M. J. Hope1891년, 시카고, McClurg
George MacDonald1897년 (2005년 재출간),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Dick Higgins1988년, 킹스턴, NY, McPherson & Company (독일어 원문 포함)


  • '''영적인 노래'''

번역자출판 정보
W. Hastie188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T. & T. Clark
F. V. M. T, U. C. B.1903년, 런던, Methuen
George MacDonald1897년 (2005년 재출간),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George MacDonald2001년, 런던, Temple Lodge Publishing (Sergei O. Prokofieff 서문)



월터 페이터는 『르네상스 연구』 결론에 "철학하는 것은 무관심을 벗어 던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라는 노발리스의 말을 인용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智학에 미친 노발리스의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프란츠 로의 ''magischer Realismus''는 노발리스의 ''magischer Realist''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 첫 페이지에서 "철학은 진정 향수병이며, 모든 곳에서 고향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라는 노발리스의 단편을 사용한다.

영국 자선 단체 "노발리스 트러스트",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 구슬 놀이』, 요제프 보이스의 경구 "모두가 예술가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 크라프트록 밴드 노발리스, 스위스 AVC 오디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AG의 노발리스 레코드, 스탠 브래키지의 단편 영화 ''밤의 첫 번째 찬가 – 노발리스'', 크리스 파월의 애니메이션 영화 ''노발리스'', 자크 랑시에르영화 이론[6], 에릭 뵐로의 곡 "노발리스", 페넬로페 피츠제럴드의 소설 『푸른 꽃』 등은 모두 노발리스에게서 영향을 받거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4. 1. 기타 영향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유적인 주장을 했는데, 이는 노발리스가 그의 저서 『꽃가루』에서 "속물"을 묘사한 것에 기인한다. "그들의 소위 종교는 마치 아편과 같다: 자극하고, 진정시키며, 신경을 통해 고통을 멎게 한다."

죄르지 루카치는 노발리스에게서 초월적 고독이라는 그의 철학 개념을 이끌어냈다. 1914~1915년 에세이 『소설의 이론』에서 "철학은 진정 향수병이다. 모든 곳에서 고향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2]라는 노발리스의 말을 인용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본에는 노발리스의 상징적 언어, 특히 그의 『밤의 찬가』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밤과 낮의 이분법에 대한 강한 암시가 담겨 있다.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조지 맥도널드 등 많은 작가들이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앙드레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은 노발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5] 브르통은 미술사 연구서인 『마법의 예술』에서도 노발리스를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5. 작품 목록


  • Glauben und Liebe, oder der König und die Königinde (1798)
  • Die Christenheit oder Europade (1799, 1826년 출판)

참조

[1] 서적 Magnificent Rebels: The First Romantics and the Invention of Self Knopf Doubleday Publishing
[2] 서적 Notes for a romantic encyclopaedia : Das Allgemeine Brouillon https://www.worldcat[...]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3] 간행물 Georg Friedrich Philipp von Hardenberg [Novalis]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4
[4] 서적 Fortschritt und Reaktion in der deutschen Literatur Aufbau-Verlag
[5] 뉴스 Surrealism in 1960: A Backward Glance Poetry 1960-03
[6] 서적 Film, Negation and Freedom: Capitalism and Romantic Critique Bloomsbury Academic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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