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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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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범신론 논쟁은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철학적 논쟁으로,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을 둘러싸고 무신론, 범신론, 유신론 등의 입장이 격돌했다. 이 논쟁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과의 대화를 통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했고,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논쟁은 야코비가 멘델스존의 허락 없이 서신을 공개하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 당대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이 논쟁은 스피노자 철학을 재조명하고 독일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이 무신론이 아닌 범신론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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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론 논쟁
개요
제목범신론 논쟁
다른 이름야코비-멘델존 논쟁
주요 인물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모세스 멘델스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임마누엘 칸트
헤르더
슐라이어마허
피히테
셸링
헤겔
발발 시점1785년 레싱의 죽음 이후
핵심 쟁점레싱의 범신론적 성향에 대한 논쟁, 이성/계시/신앙의 관계, 스피노자 철학의 해석
영향독일 관념론 철학 발전에 기여, 무신론 비판,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 논의 촉발

2. 논쟁의 배경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은 곧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사상 때문에 당시 기독교로부터 무신론으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주요 저작인 에티카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스피노자적'이라는 표현은 무신론과 동일시되며 일종의 금기어가 되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오랫동안 잊혔고, 독일에서 스피노자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연구 시도조차 위험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이 자신의 작품 현자 나탄과 저서 인류의 교육에서 개별 종교의 교리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지평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시하며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레싱은 만년에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이 논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레싱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같다고 언급한 것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81년 레싱이 사망한 후, 1783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레싱의 절친인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이 레싱에 대한 저술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에게 서신을 보내 레싱이 만년에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질문했고, 멘델스존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답했다. 멘델스존은 야코비에게 레싱이 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문의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1785년 야코비는 멘델스존과의 서신 왕래를 공개하며 "스피노자의 교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공개는 이마누엘 칸트, 요한 게오르크 하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의 주목을 받으며 대대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다.

3. 논쟁의 전개

1789년 스피노자 학설(Über die Lehre des Spinoza) 제2판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은 계몽주의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을 중심으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모제스 멘델스존의 관계가 펼쳐진다. 세 사상가의 중심 문제는 그때까지 학계에서 주목을 끌지 못한 바뤼흐 스피노자였다. 이 논쟁은 야코비가 멘델스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스피노자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야코비가 주변 인물들과 교환한 서신을 통해 그 전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야코비는 스피노자 철학이 하나의 체계로서 큰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개념의 필연적 연관성에만 집중하여 숙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이며 범신론은 곧 숙명론이라고 주장한다. 야코비는 인과적으로 결합한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며, 진정한 자유는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저서를 통해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비판하고자 했다.

야코비와 레싱의 대화는 스피노자 논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레싱은 스피노자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야코비는 스피노자주의를 반대한다. 레싱은 정통적인 신성(神性) 개념을 부정하고 이를 전일성(全一性)으로 대치하며, 모든 존재가 하나의 존재와 통일되어 있다는 헨카이판(hen kai pan) 사상을 주장한다. 레싱의 이 주장은 독일 관념론의 중심 문제로 떠오르며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를 출발시키고, 스피노자를 철학적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야코비의 저서 《스피노자 철학에 관하여》(1판 1785년, 2판 1789년)는 철학의 독단주의 체계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를 표현했으며, 모제스 멘델스존이 이끄는 베를린 그룹의 격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교리가 순수한 유물론이며, 결국 절대적인 무신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멘델스존은 유신론범신론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당시 유럽 문명에 주요한 지적, 종교적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마누엘 칸트는 초월적인 현실을 구상하려는 시도가 사상적 모순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부했다.

스피노자의 "신은 곧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사상은 당시 기독교로부터 무신론으로 낙인찍혀, 주저 『에티카』(Ethica)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스피노자적"이라는 표현은 무신론을 의미하는 일종의 금기어였으며, 이로 인해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랫동안 잊혀졌다. 당시 독일에서의 스피노자 연구 수준은 상당히 낮았고, 연구 자체가 무신론으로 위험시되어 "과감하게" 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독일 극작가 레싱이 작품 『현자 나탄』과 저서 『인류의 교육』에서 개별 종교의 교리를 초월하여 보편적 지평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하고, 만년에 "자신은 스피노자주의자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서신 교환과 논쟁의 공개, 확산 등을 통해 18세기 말 철학이 계몽주의에서 초기 낭만주의 및 독일 관념론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스피노자 논쟁은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3. 1. 야코비와 레싱의 대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과의 대화에서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임을 확인했다. 레싱은 "헨 카이 판"(hen kai pan, 만유는 하나) 사상을 언급하며,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 스피노자주의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 대화는 바뤼흐 스피노자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780년, 레싱은 야코비와의 대화에서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스피노자주의 외에는 알지 못한다고 공언했다.

3. 2.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서신 교환

1783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절친이자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 레싱에 대한 저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코비는 지인인 엘리제 라이마르스를 통해 멘델스존에게 서신을 보내, 레싱이 만년에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질문했다. 멘델스존은 레싱과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야코비에게 왜 레싱이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문의했다.

멘델스존은 당시 일반적인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생각과는 달리,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해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며 훌륭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레싱 혼자만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에게 서신을 보내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레싱과의 대화 내용을 밝혔다. 이를 통해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논쟁(주로 서신 왕래)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신은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저작이나 대학 강의와 동등한 영향력을 가졌다.

1784년, 멘델스존은 야코비의 스피노자주의 비판을 담은 "Erinnerungen"(회상록)이라는 논문을 보냈다. 여기에는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비판과 야코비의 스피노자 이해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이해가 원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며, 레싱과의 대화 내용도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이 스피노자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과거 헤이그의 절친 헨무스터호이스에게 보낸 프랑스어 논문을 멘델스존에게도 보냈다.

1785년, 멘델스존은 야코비에게 『회상록』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편지로 말했다. 야코비는 헨무스터호이스에게 보낸 논문을 보는 것이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이해를 고려할 때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나에게는 그저 방관하는 회상록"이라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이 편지에서 야코비는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이해 부족을 다시 한번 지적했다.

이후 멘델스존은 몇 달간 연락이 없다가, 최근 무관한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회상록"을 분실했으니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멘델스존은 야코비의 스피노자 논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며, 다음 기회에 야코비의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저작을 하겠다고 말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의 행동에 분노하여 그의 허락 없이 왕복 서신을 공개했다. 1785년 1월 28일, "스피노자의 교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서신은 이마누엘 칸트, 요한 게오르크 하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이 주목하는 대대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다. 멘델스존은 "레싱의 친구들에게"라는 저작으로 반론했고, 야코비도 "멘델스존의 고발에 항거하여"라고 반박했지만, 멘델스존이 『레싱의 친구들에게』를 발표하기 전 사망하면서 논쟁은 끝났다.

3. 3. 논쟁의 공개와 확산

1783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절친이자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 레싱에 대한 저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코비는 지인인 엘리제 라이마르스를 통해 멘델스존에게 서신을 보내, 레싱이 만년에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질문했다. 멘델스존은 레싱과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야코비에게 레싱이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 이유를 문의했다.

멘델스존은 당시 일반적인 바뤼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생각과는 달리,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훌륭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레싱 혼자만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에게 서신을 보내,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레싱과의 대화 내용을 밝혔다. 이로 인해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논쟁이 주로 서신 왕래를 통해 시작되었다. 당시 서신은 저작이나 대학 강의와 동등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784년 멘델스존은 야코비의 스피노자주의 비판을 담은 "Erinnerungen"(회상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보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이 스피노자를 원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레싱과의 대화 내용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멘델스존이 스피노자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과거 헤이그의 절친 헨무스터호이스에게 보낸 프랑스어 논문을 멘델스존에게도 보냈다.

1785년 멘델스존은 야코비에게 『회상록』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편지로 알렸다. 야코비는 헨무스터호이스에게 보낸 논문을 보는 것이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이해에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나에게는 그저 방관하는 회상록"이라는 편지를 멘델스존에게 다시 보냈다. 여기서 야코비는 멘델스존의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몇 달 후, 무례함을 사과하고 무관한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는 야코비에게 그 논문을 읽어보기를 기대하지 않고 보내지도 않았지만, 야코비는 친구 요한 게오르크 하만을 통해 이미 그 논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회상록"을 분실했다며 야코비에게 사본을 요청했고, 야코비의 스피노자 논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며, 다음 기회에 야코비의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저작을 하겠다고 말했다.

야코비는 멘델스존의 행동에 분노하여, 그의 허락 없이 왕복 서신을 "스피노자의 교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785년 1월 28일에 공개했다. 이 공개는 이마누엘 칸트, 하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의 주목을 받아 대대적인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멘델스존은 "레싱의 친구들에게"라는 저작으로 반박했고, 야코비도 "멘델스존의 고발에 항거하여"라고 반론했지만, 멘델스존이 『레싱의 친구들에게』를 공표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논쟁은 종결되었다.

4. 논쟁의 영향 및 의의

범신론 논쟁은 18세기 말 독일 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계몽주의에서 초기 낭만주의독일 관념론으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논쟁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모제스 멘델스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뤼흐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야코비는 스피노자 철학이 숙명론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 반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스피노자주의를 옹호했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철학이 하나의 체계로서 큰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개념의 필연적 연관성에만 집중하는 철학은 숙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과적으로 결합한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며, 진정한 자유는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싱은 스피노자주의자로 자처하며, 정통적인 신성(神性) 개념을 부정하고 전일성(全一性)으로 대체했다. 그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존재와 통일되어 있다는 헨카이판(hen kai pan)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독일 관념론의 중심 문제로 떠올랐다.

야코비의 출판물은 스피노자 교리의 수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수 세기 동안 스피노자의 철학적 저작의 뉘앙스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4. 1. 스피노자 철학의 재조명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대화는 바뤼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레싱은 진정한 철학은 스피노자주의뿐이라고 선언했다.[2] 야코비는 저서 《스피노자 철학에 관하여》(1785년 초판, 1789년 재판)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유물론적이며,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모제스 멘델스존유신론범신론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유럽 지성계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야코비는 비이성적 믿음을 철학에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저서 ''데이비드 흄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1787)에서 Glaube|글라우베de(믿음, 신념)라는 용어 사용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추론과 구별되는 사실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랫동안 무신론으로 여겨져 금기시되었던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 논쟁을 통해 재조명받았다. 스피노자의 "신은 곧 자연"(deus sive natura) 사상이 범신론적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스피노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을 생명력 있는 통일체로 보는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성립을 촉진했으며, 프리드리히 셸링과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4. 2.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에 미친 영향

스피노자의 철학은 무신론이 아니라 범신론적이라는 점이 철학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자연을 생명으로 가득 찬 통일체로 숭배하는 독일 낭만주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2] 이는 셸링과 헤겔과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 또한 범신론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으며, 범신론 논쟁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적 범신론의 생각이 복선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4. 3. 야코비 철학에 대한 비판

야코비는 비이성적인 믿음을 철학에 도입하려 한다는 이유로 조롱받았다. 그는 이성의 적, 경건주의자, 변장한 예수회원 등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그가 사용한 ''Glaube''(독일어: "믿음, 신념")라는 용어의 모호함이 공격 대상이었다.[2]

5. 한국 철학계에 미친 영향

스피노자 철학은 한때 무신론으로 여겨져 금기시되었으나, 범신론 논쟁을 거치며 범신론적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하나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자연을 생명으로 가득 찬 통일체로 숭배하는 독일 낭만주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셸링, 헤겔과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범신론 논쟁이 있은 지 14년 후, 피히테가 예나에서 추방된 무신론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피히테의 범신론적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범신론 논쟁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범신론 사상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고 평가된다.

6. 같이 보기

6. 1. 관련 인물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독일의 극작가로, 작품 『현자 나탄』과 저서 『인류의 교육』에서 보편적 지평을 추구하는 사상을 제시했다. 만년에 스피노자주의자일 수 있다고 언급하여 범신론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모제스 멘델스존에게 알리고, 멘델스존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이해 부족을 지적하며 논쟁을 격화시켰고, 멘델스존의 허락 없이 서신을 공개하여 논쟁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 모제스 멘델스존: 레싱의 절친한 친구이자 철학자로, 야코비에게서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듣고 놀랐다. 처음에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야코비와의 논쟁 과정에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냈다. 야코비의 서신 공개 이후 반박 저술을 준비했으나, 출판 전에 사망하여 논쟁은 미완으로 끝났다.
  • 임마누엘 칸트, 요한 게오르크 하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야코비의 서신 공개 이후 범신론 논쟁에 주목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특히 괴테는 스피노자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6. 2. 관련 개념

범신론 논쟁과 관련된 주요 개념은 다음과 같다:

  • 스피노자주의: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로,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사상을 핵심으로 한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스피노자주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1]
  • 유물론: 모든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신적인 현상도 물질의 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교리가 순수한 유물론이라고 비판했다.[1]
  • 무신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이다. 야코비는 스피노자 철학이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결과이며, 결국 절대적인 무신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
  • 유신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상이다.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신론과 범신론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1]

참조

[1] 논문 The Secret Religion of Germany: Christian Piety and the Pantheism Controversy https://www.journals[...]
[2] 서적 Spinoza's Modernity: Mendelssohn, Lessing, and Hein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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