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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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지녕은 수나라 문제 치세에 태어나 당나라 고종 치세에 사망한 인물로, 수나라 말기에 관직을 버리고 당나라 건국 후 이세민의 참모로 활약했다. 그는 당 고조와 태종 시대를 거치며 중서시랑, 산기상시, 태자좌서자 등을 역임했고, 칠묘 논쟁과 공신 자손의 자사 세습 반대 등 정치적 소신을 드러냈다. 고종 대에는 시중, 광록대부, 연국공을 지냈으며, 역사 편찬에 참여하고 태자를 보좌했다. 그는 장손무기의 몰락에 연루되어 좌천되었으나, 사후 유주도독으로 추증되었다.
우지녕은 수나라의 내사 사인 우선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 양제 재위 말기, 관씨현(冠氏, 현대의 랴오청시, 산둥성) 현령을 지냈으나, 산동에서 반란이 빈발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 대업 13년, 이연이 태원시에서 거병하여 장안시(옹주)로 진격했을 때, 우지녕은 이연을 장춘궁으로 맞이하여 은청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1] 이후 진왕 이세민 휘하에서 위북도행군원수부 기실에 임명되었고, 설인고가 평정되자 포로 속에 있던 저량을 석방했다. 천책부 중랑, 문학관 학사로 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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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
2. 생애
629년,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하고 여양현공(黎陽縣公)에 봉해졌다.[4] 당나라에서 칠묘(七廟)를 세우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군신들은 서량의 무소왕(武昭王) 이고를 시조로 청원했으나, 우지녕은 홀로 반대했다. 또한 태종이 공신의 자손에게 자사(刺史) 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우지녕은 반대했다. 태종은 두 사안 모두 우지녕의 의견을 따랐다. 640년부터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하면서 태자 이승건의 교육을 맡았는데,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태자는 듣지 않았다. 643년 이승건이 폐태자가 되자 태종은 동궁 관원들에게 죄를 물었으나, 우지녕만은 위로를 받았다. 이후 진왕(晉王) 이치가 새 황태자로 책봉되자 우지녕은 다시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임명되었다.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고 이치가 고종으로 즉위하자 우지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5] 650년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지고 연국공(燕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이적과 함께 본초병도(本草倂圖) 54편을 편찬했다. 이홍태(李弘泰)가 태위(太尉) 장손무기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을 때 고종이 이홍태를 참형에 처하려 하자 우지녕은 춘계(春季)에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추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아뢰었고 고종도 이에 따랐다. 형산공주[5]가 장손전(長孫詮)에게 하가(下嫁)하려고 했을 때 우지녕은 공주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혼례를 치르는 것은 예를 잃은 것이라고 상소했으므로, 공주는 3년상이 끝난 후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같은 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어 재상의 반열에 들었으며, 또 그 이듬해 태자소사(太子少師)를 겸했다. 656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옮겼으며, 659년 태자태사(太子太師)·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었다. 고종이 왕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하자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강하게 반대했으나, 우지녕은 중립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손무기가 모반의 혐의로 자결한 후 이에 연루되어 면직당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영주자사(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664년 화주자사(華州刺史)로 옮긴 후 이듬해 집에서 향년 78세로 졸하자 유주도독(幽州都督)으로 추증되고 '정(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676년 다시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태자태사로 추증되었다.
2. 1. 수나라에서의 생애
수나라 문제 재위 기간인 588년에 수나라의 수도 옹주(雍州, 대략 현재의 시안시, 산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선비족 출신으로, 수나라 이전 왕조인 북주 시대에 이름난 장군 가문이었다. 특히 증조부 우진(于謹)은 서위와 북주 후기에 유명한 장군이었다. 아버지 우선도(于宣道)는 정부 입법부인 내사성(內史省)의 중간급 관료였다.[1]
수 양제 재위 말기, 우지녕은 관씨현(冠氏, 현대의 랴오청시, 산둥성) 현령을 지냈다. 당시 수나라 대부분 지역이 농민 반란에 휩싸이자, 허가 없이 직책을 버리고 고향인 옹주로 도망쳤다.[1] 대업 13년, 이연이 태원시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시(옹주)로 진격했다. 양제가 강도(江都, 현대의 양저우시, 장쑤성)에 가 있는 틈을 타 그해 겨울 장안을 점령하고 양제의 손자 양유를 대왕으로 옹립하여 공제(恭帝)로 선포했다. 우지녕은 무리를 이끌고 양제의 별궁 중 하나인 장춘궁(長春宮)에서 이연을 맞이했다.[1] 이연은 우지녕의 능력에 대한 명성을 듣고 그에게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1] 이연의 아들이자 주 장군인 이세민이 당시 위수 북쪽 도시들을 평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지녕을 자신의 참모로 임명했다.[1]
2. 2. 당 고조와 태종 치세
629년(정관 3년)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하고 여양현공(黎陽縣公)에 봉해졌다.[4]
당나라에서 칠묘(七廟)를 세우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군신들은 서량의 무소왕(武昭王) 이고를 시조로 청원했으나, 우지녕은 홀로 반대했다.
또한 태종이 공신의 자손에게 자사(刺史) 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우지녕은 반대했다. 태종은 두 사안 모두 우지녕의 의견을 따랐다.
640년(정관 14년)부터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하면서 태자 이승건의 교육을 맡았는데,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태자는 듣지 않았다.
643년(정관 17년) 이승건이 폐태자가 되자 태종은 동궁 관원들에게 죄를 물었으나, 우지녕만은 위로를 받았다. 이후 진왕(晉王) 이치가 새 황태자로 책봉되자 우지녕은 다시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임명되었다.
626년,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고조를 압박하여 황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처음에 우지녕을 등용하지 않았으나, 629년에 우지녕은 정부 입법부의 부수장으로 승진했다. 한번은 태종이 고위 관료들을 잔치에 초대했을 때 우지녕이 참석하지 않자 의아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우지녕은 예법에 따라 3품 이상의 관료만 초대한다는 내용에 따라 참석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직위는 4품의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은 특별히 우지녕에게 직접 초청장을 보냈고, 곧 그에게 3품 2등에 해당하는 명예직인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수여하고, 맏아들인 황태자 이승건의 핵심 참모로 임명하여 예양공(黎陽公)에 봉했다.
635년 고조가 죽은 후, 태종은 자신의 조상(아버지 포함)을 숭배하기 위한 황실 사당을 짓기 시작했다. 재상 방현령은 고조의 7대 조상인 이고 (십육국 시대 서량의 창시자)를 당나라의 주요 조상으로 칭할 것을 제안했지만, 우지녕은 당나라의 황권이 이고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므로 이고를 주요 조상으로 칭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태종은 이에 동의했다.
639년, 태종이 당나라 통치에 핵심적인 기여를 한 이들에게 현(縣)의 자사(知事)직을 주고 그들의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하는 봉건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우지녕은 이에 반대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결국, 태종의 매형인 장손무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봉건 제도는 취소되었다.
우지녕이 이승건의 참모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종종 이승건의 행동을 개선하기 위해 조언을 했고, 태종은 이를 전해 듣고 우지녕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했다. 640년, 그는 우지녕을 이승건의 가주(家主)로 승진시켰다. 641년, 우지녕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지만, 곧 다시 복귀했다. 그가 3년 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자, 태종은 관료 잠문본을 보내 그를 설득하며 "이 경우, 당신의 충성과 효심이 상충될 수 있소. 내 아들은 당신의 지도가 필요하고, 나는 당신이 감정을 자제해주기를 바라오."라고 말했고, 이에 우지녕은 다시 복귀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우지녕은 이승건의 행동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여름 더위에 궁궐을 짓는 것을 반대하는 그의 충고, 이승건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환관들과의 친밀한 관계 등에 대한 여러 상소가 남아 있다. 한번은 우지녕이 이승건의 참모들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과 돌궐 출신인 다거요(達哥友)를 궁궐에 들이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직설적인 상소를 올리자, 이승건은 격분하여 자객 장사정(張思政)과 갈간승기(紇干承基)를 보내 우지녕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장사정과 갈간승기는 우지녕의 집으로 가서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우지녕이 검소하게 살면서 어머니의 상을 계속 치르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다.
643년, 이승건이 삼촌인 이원창 한왕(漢王), 매형인 조절(趙節)과 두하(杜荷), 그리고 장군 후군집과 함께 태종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드러났다. 태종은 이승건을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이치 진왕(晉王)을 후임으로 세웠다. 이승건의 참모들은 그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을 물어 대부분 강등되거나 유배되었지만, 우지녕은 이승건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태종은 이후 그를 이치의 참모로 임명했다.
2. 3. 당 고종 치세
649년 당 태종이 사망하고 이치가 고종으로 즉위하자 우지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5]
650년(영휘 원년)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지고 연국공(燕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이적과 함께 본초병도(本草倂圖) 54편의 편찬을 주관했다.
이홍태(李弘泰)가 태위(太尉) 장손무기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을 때 고종이 이홍태를 참형에 처하려 하자 우지녕은 춘계(春季)에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추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아뢰었고 고종도 이에 따랐다.
형산공주[5]가 장손전(長孫詮)에게 하가(下嫁)하려고 했을 때 우지녕은 공주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혼례를 치르는 것은 예를 잃은 것이라고 상소했으므로, 공주는 3년상이 끝난 후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같은 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어 재상의 반열에 들었으며, 또 그 이듬해 태자소사(太子少師)를 겸했다.
656년(현경 원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옮겼으며, 659년(현경 4년) 태자태사(太子太師)·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었다.
고종이 왕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하자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강하게 반대했으나, 우지녕은 중립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손무기가 모반의 혐의로 자결한 후 이에 연루되어 면직당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영주자사(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664년(인덕 원년) 화주자사(華州刺史)로 옮긴 후 이듬해 집에서 향년 78세로 졸하자 유주도독(幽州都督)으로 추증되고 '정(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676년(상원 3년) 다시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태자태사로 추증되었다.
3. 평가
4. 가족 관계
우선민(于宣敏) 형 우영녕(于永寧) 동생 우보녕(于保寧) 장남 우립정(于立政) 차남 우신언(于愼言) (우휴열의 증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