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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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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건성은 당 고조 이연의 장남으로, 589년에 태어나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건국 과정에서 활약하여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동생 이세민과의 권력 다툼 끝에 살해되었다. 이후 식왕으로 추봉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이세민에 의해 폄하된 평가를 받았으나, 현대에는 재평가를 통해 다른 시각으로 조명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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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성
기본 정보
신분
직위군공 → 황태자
칭호황태자 (시호: 은태자)
생애
출생개황 9년 (589년)
사망무덕 9년 6월 4일 (626년 7월 2일)
사망 장소장안, 현무문
가족 관계
아버지고조
어머니두황후
배우자정관음
자녀이승종
이승도
이승덕
이승훈
이승명
이승의
이완순
귀덕현주
낙릉현주
기타 2녀
소속
가문이씨
기타
주요 역할당나라의 황태자

2. 생애

618년 아버지 이연황제가 되자 황태자에 봉해졌다.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에 의해 이원길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시호는 은(隱)이다.

수나라 말기와 당나라 초기, 동생 이세민의 공이 커지자 이건성은 태자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그는 태자중윤 왕규(당)와 태자세마 위징 등을 모사로 삼고, 장첩여와 윤덕비 등 후궁 비빈들과 결탁하여 이세민을 여러 번 무고했다. 또한 용감한 병사들과 장안의 불량 청소년들을 모아 호위병으로 삼고 장림문에 주둔시켜 '장림병'이라 불렀다. 624년(무덕 7년), 경주총관 양문간이 징발한 병사를 장안으로 보내는 것을 기회로 군사 행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이연에게 벌을 받았다. 626년(무덕 9년), 돌궐이 변경을 침략하자, 이원길을 북벌에 추천하고 그 병사로 군사 행동을 일으키려 했다. 이원길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던 중, 현무문에서 이세민의 병사에게 공격받아 이세민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10]

이건성의 다섯 아들은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며, 이건성의 가계는 황실 족보에서 제거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이건성은 식왕(息王)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은(隱)으로, 제후의 예로 다시 장사지냈다. 역사책에서는 그를 '은태자'라고 부른다. 이후 태종은 이건성을 식왕('쉴 식' 자 사용)으로 봉하고 이원길을 자왕('찌를 자' 자 사용)으로 봉하면서 그들을 부득이하게 죽였지만 형제로 인정했으며, 10년 후에는 이건성을 태자로 추서하고 장례를 치러주며 정식으로 매장했다. 이때 옛 이건성파들의 장례 참석을 허용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당 건국 참여

589년(개황 9년), 이연과 두부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자)은 비사문이다.[3]

수나라 말기 아버지 이연이 산서 하동 위무대사로서 도적을 토벌할 때, 이건성은 하동에서 유수를 지켰다.[4] 617년, 이연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좌령군대도독에 임명되어 롱서군공에 봉해졌다. 이때 이건성은 좌군을, 동생 이세민은 우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서하군(西河, 대략 현대의 산시성 여량시)을 점령하고 장안(대흥성)을 평정했다. 공제가 즉위하자 무군대장군, 동토원수가 되어 왕세충과 싸웠으며,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이연이 공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즉위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장군 상현화와 함께 사죽의 무리를 토벌하여 평정했다. 양주의 안흥귀가 이궤를 사로잡아 항복을 요청하자, 원주에서 이를 접견했다. 계호의 유선성이 변경을 침략하자, 부주에서 이를 격파했다. 623년 (무덕 6년), 이원길과 함께 하북의 유흑달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8]

616년, 반란이 중국 북부를 휩쓸고 동돌궐의 국경 침입이 잦아지자, 수나라 양제는 이연에게 태원 사령관을 맡겨 반군과 동돌궐로부터 태원을 방어하도록 했다. 태원 총사령관으로서 이연은 법적으로 가족을 떠나야 했다. 따라서 이건성이 저택을 맡아 이연 부재 중일 때 하동(河東, 현대의 산시성 운성)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4] 이연은 막내아들 이세민을 데리고 태원 행정 중심지인 진양으로 갔다.

신당서를 비롯한 전통적인 서술에 따르면, 617년 이연은 이세민의 설득으로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다른 자료인 온대야의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는 반란 결정을 이연 본인에게 귀속시킨다.[5] 616년 이연이 처음 진양에 배정되었을 때 그는 기뻐하며 자신의 임명을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여겼다.[6] 그러나 1년 후인 617년, 이연은 이세민에게 "수나라는 멸망하려 하고, 이 나라를 다스릴 다음 가문은 우리다. 내가 아직 반란을 시작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너희 형제들이 아직 하동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7] 이연은 하동으로 비밀 사자를 보내 가족을 진양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동 중 이건성의 동생 중 한 명인 이지윤이 사망했다. 그는 또한 사위인 채소를 장안에서 소환했다. 이연의 딸의 권유로 채소는 장안을 스스로 떠났고 그녀는 숨어 들어갔다.

이건성, 이원길, 채소가 진양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연은 반란을 일으켰고, 양제의 손자이자 황제인 대왕 양유를 지지하여 양제를 ''태상황''(퇴위한 황제)으로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양유는 당시 수도 장안을 명목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이연은 이건성과 이세민을 핵심 장군으로 임명했고, 그들은 9일 만에 서하군을 점령하여 아버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후, 이연은 자신의 군대를 6개 군으로 나누고 이건성과 이세민에게 각각 3개 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는 또한 이건성을 롱시공으로, 이세민을 둔황공으로 임명했다. 이연은 그 후 장안으로 진격했다. 하동에 접근했을 때 폭우로 인해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유무주와 동돌궐이 태원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연은 처음에는 태원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건성과 이세민은 이는 확실한 패배를 의미한다고 주장했고 이연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건성과 이세민은 그 후 곽읍(霍邑, 현대의 산시성 린분시) 요새를 점령하여 결국 이연이 하동을 우회하여 장안으로 직접 진격하도록 설득했다. 그가 황하를 건너 관중(장안 지역)으로 들어간 후, 그는 이건성과 유문정을 동쪽으로 보내 동관과 영풍창을 지키고 동쪽 수도 낙양으로부터의 잠재적인 수나라 지원군을 막도록 했다. 그는 또한 이세민을 위수 북쪽으로 보내 영토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연 자신이 장안에 접근하자 그는 이건성과 이세민을 소환하여 장안 포위에 합류시켰다. 617년 12월 19일, 이연은 장안을 점령하고 양유를 황제로 선포했다(공제).[8] 그는 12월 20일에 당왕으로 봉해졌고, 양유의 섭정이 되었다.

618년 봄, 이연은 이건성과 이세민을 낙양으로 보냈다. 낙양은 당시 반란 지도자 위공 이밀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거기에 있는 수나라 군대를 돕기 위해서였다. 수나라 군대는 제안을 거부했고, 이건성과 이세민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2. 2. 황태자 시절 및 이세민과의 갈등

이연618년 황제가 되자 이건성은 황태자에 봉해졌다.[9] 이건성은 관대한 성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술과 사냥을 즐겨 이연의 걱정을 샀다. 이연은 이강과 정선과를 이건성의 참모로 임명하여 정치에 힘쓰도록 했다.

620년 가을, 이연은 태원을 책임지던 이중문(李仲文)이 반란을 계획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건성을 부번(蒲反, 현재의 하동)으로 보내 이중문을 견제하게 했다. 이중문은 수도로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621년 봄, 흉노 추장 유선성(劉仚成)이 당나라 변경을 침략하자, 이건성은 흉노족 다수를 사로잡고 지도자들을 석방하여 대규모 항복을 이끌어냈다. 622년, 이건성은 이세민, 이자화(李子和), 단덕조(段德操)와 함께 동돌궐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이 무렵, 진왕 이세민과 이건성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건성은 당나라 통일에 기여했지만, 이세민이 설거 (진 황제), 왕세충 (정 황제), 두건덕 (하왕) 등 주요 경쟁자들을 물리치면서 군대 내에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이원길은 이건성을 지지하며, 이건성이 황제가 되면 자신을 황태자로 삼아줄 것을 기대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연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은 이건성의 입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연은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후궁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622년 겨울, 유흑타가 당나라에 저항하자, 이건성은 왕규와 위징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흑타 토벌을 자원했다. 이연은 이건성에게 이원길을 지원군으로 붙여 유흑타를 공격하게 했다. 이건성은 관도에서 유흑타를 격파하고, 동돌궐로 도망친 유흑타는 부하에게 배신당해 이건성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623년, 동돌궐이 다시 당나라를 침략하자, 이연은 이건성과 이세민을 보내 맞서게 했다. 이원길은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암살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건성은 거절했다.

624년, 이건성은 이연의 규정을 어기고 호위 부대를 보충하려다 발각되어 질책받았다. 그럼에도 이건성은 경주(慶州, 현재의 간쑤 칭양) 지휘관 양문간(楊文幹)에게 병력 징집을 요청했는데, 이는 이세민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연은 이건성을 소환하여 체포했지만, 이원길, 후궁들, 재상 풍덕의의 옹호로 석방하고 황태자 지위를 유지시켰다. 이연은 아들들 간 불화의 책임을 이건성의 참모 왕규와 위정, 이세민의 참모 두언에게 돌려 유배 보냈다.

그해 말, 이연은 동돌궐의 침략에 시달려 수도를 번성으로 옮기려 했으나, 이세민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세민은 낙양에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 군사력을 강화했다.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에 의해 이원길과 함께 살해됐다.[9] 시호는 은(隱)이다. 이후 태종 이세민은 이건성을 식왕('쉴 식' 자 사용)으로 봉하고 이원길을 자왕('찌를 자' 자 사용)으로 봉하면서 그들을 부득이하게 죽이기는 했지만 형제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이건성을 태자로 추서하고 그들의 장례를 치러주며 정식으로 매장했다. 이때 옛 이건성파들의 장례 참석을 허용하기도 했다.

2. 3. 현무문의 변과 죽음

618년 아버지 이연황제가 되자 황태자에 봉해졌다.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에 의해 이원길과 함께 살해됐다.[10] 시호는 은(隱)이다. 이후 태종 이세민은 이건성을 식왕('쉴 식' 자 사용)으로 봉하고 이원길을 자왕('찌를 자' 자 사용)으로 봉하면서 그들을 부득이하게 죽였지만 형제로 인정했으며, 10년 후에는 이건성을 태자로 추서하고 장례를 치러주며 정식으로 매장했다. 이때 옛 이건성파들의 장례 참석을 허용하기도 했다.

당시 진왕 칭호를 가지고 있던 이세민과 이건성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건성이 당의 중국 통일에 기여했지만, 이세민은 설거 (진 황제), 왕세충 (정 황제), 두건덕 (하왕) 등 중요한 경쟁자들을 물리쳐 군대 내에서 더 강력한 명성을 얻었다. 이원길 또한 이연에게 장군으로 의존했으며, 제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는 이세민과의 경쟁에서 이건성을 지지했으며, 이건성이 황제가 되면 황태자가 되기를 바라며 이건성을 더 강경한 입장으로 밀어붙였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세민보다 이연이 총애하는 어린 후궁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그들의 어머니 두씨는 당 건국 전에 사망했다), 이 후궁들은 이연 앞에서 이건성의 입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연은 이건성 대신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의 후궁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622년 겨울, 당 통치에 대한 유일하게 남은 주요 위협은 한동왕 유흑타였다. 그는 하나라의 장군이었으며, 이연이 두건덕을 처형한 후 당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그해 초에 이세민에게 패배했다. 이건성의 참모 왕규와 위징은 그에게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기 위해 몇 번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건성은 유흑타에 맞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자원했다. 이연은 이건성에게 이원길의 지원을 받아 유흑타를 공격하도록 보냈다. 연말 무렵, 유흑타의 군대는 당의 위주(魏州, 현재의 허베이 한단)를 공격하다가 고착 상태에 빠졌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관도에서 그와 교전하여 격파했다. 유흑타는 동돌궐로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부하인 제갈덕위에게 매복되어 체포되었고, 제갈덕위는 그를 이건성에게 넘겨주었다. 이건성은 유흑타를 처형했다. 이때 중국은 당에 의해 거의 완전히 통일되었다.

623년, 동돌궐이 다시 당 영토를 침략했을 때, 이연은 다시 이건성과 이세민을 보내 이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그동안 이원길은 이건성에게 이세민이 이원길의 저택을 방문할 때 이세민을 암살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이건성은 형제를 죽일 마음이 없어 거절했다.

624년, 이건성은 자신의 호위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장군 이의 (연왕)에게 병사를 징집했는데, 이는 이연의 규정에 어긋났다. 이연은 이 사실을 알고 이건성을 꾸짖고 호위 대장 가달지(可達志)를 유배 보냈다. 그럼에도 이건성은 나중에 경주(慶州, 현재의 간쑤 칭양) 지휘관 양문간(楊文幹)에게 병력을 징집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이세민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부관 얼주환(爾朱煥)과 교공산(橋公山)은 이연에게 이건성이 양문간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겨 함께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알렸다. 당시 임지궁 (仁智宮, 현재의 산시 퉁촨)에 있던 이연은 분노하여 장안에 있던 이건성을 임지궁으로 소환했다. 이건성은 명령을 받아들이는 대신 장안을 점령하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결국 임지궁에 보고하여 용서를 구했다. 이연은 그를 체포했다. 양문간은 이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연은 이세민을 보내 양문간을 공격하게 했다. 이연은 이세민에게 이건성을 황태자에서 교체하고 사천 지역으로 보내 촉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세민이 떠난 후 이원길, 이연의 후궁들, 재상 풍덕의가 모두 이건성을 옹호했고, 이연은 마음을 바꿔 이건성을 석방하고 황태자로서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연은 아들들 간의 불화 원인을 이건성의 참모 왕규와 위정, 이세민의 참모 두언에게 돌려 그들을 유배 보냈다. 양문간은 결국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그해 말, 이연은 반복되는 동돌궐의 침략에 시달리며 장안을 불태우고 수도를 번성으로 옮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는데, 이건성, 이원길, 재상 배적이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이 계획에 반대했고,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그동안 이세민은 측근들을 낙양으로 보내 그곳의 군대에 대한 개인적인 통제력을 강화했다.

자치통감》에[10] 따르면, 626년 음력 6월 초하루, 즉 현무문 사변 3일 전, 이건성이 동궁에서 이세민과 이원길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이세민은 술을 마신 후 집으로 실려갔다. 이세민은 집에 돌아온 후 피를 많이 토했다고 측근을 통해 보고했다. 이원은 이건성에게 칙령을 내려 "진왕(秦王, 이세민)은 술에 약하니 밤에 나가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한다."라고 했다. 이세민은 이 술을 암살 시도로 해석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원은 이건성에게 내린 칙령에서 독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원은 이세민이 세력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낙양을 지키도록 보낼 생각을 했지만,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세민이 개인적인 힘을 키울 기회를 얻을 것이라 믿고 이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원의 신하들에게 우려를 표명했고, 신하들은 이 계획이 형제 간의 경쟁을 내전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원은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현무문의 변 참고

626년경, 이세민은 이건성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참모인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는 이세민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을 먼저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마찬가지로, 위징은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먼저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이건성은 이원에게 방현령과 두여회를 제거하고, 이세민의 측근 경호 장교인 울지공과 정지절을 이세민의 참모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설득했다. 이세민의 참모로 남아 있던 장손무기는 이세민에게 먼저 공격하도록 계속 설득했다.

626년 여름, 동돌궐이 또다시 침략해 왔다. 이원은 처음에는 이세민을 보내 저항하려 했으나, 이건성의 제안에 따라 이원길을 대신 보냈다. 이원길은 이전 이세민이 통솔하던 군대의 대부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세민은 더욱 불안해졌고, 군대가 이원길의 손에 들어가면 공격에 저항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세민은 울지공에게 비밀리에 방현령과 두여회를 자신의 저택으로 소환하게 한 후,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원의 후궁들과 간통하고 있다는 내용의 고발서를 이원에게 보냈다. 이원은 다음 날 아침 이건성과 이원길을 소환하여, 고위 관리인 배적, 소우, 진숙달을 소집하여 이세민의 고발 내용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원의 궁궐로 통하는 정문인 현무문(玄武門)에 접근하자, 이세민이 그들을 매복했다. 그는 이건성을 죽인 화살을 직접 쏘았고, 울지공은 이원길을 죽였다. 이세민의 군대가 궁궐로 진입했고, 이 위협에 이원은 이세민을 태자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두 달 후, 이세민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건성의 다섯 아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건성은 처음에는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당 태종이 즉위한 후, 이건성에게 서왕의 작위를 추증하고 아들 이복을 이건성의 후계자로 이건성의 혈통에 배속시켰다. 또한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예우로 이건성을 장례했다. 642년 7월, 이건성의 태자 칭호를 복원했다. 그러나 이건성은 완전히 복권되지 못했고, 딸들은 여전히 황태자의 딸이 아닌 일반 왕자의 딸 신분을 유지했다.

수말 당초의 전란 속에서 동생 이세민의 전공이 눈부시자, 이건성은 태자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태자중윤 왕규와 태자세마 위징 등을 등용하여 모사로 삼았다. 장첩여와 윤덕비 등 후궁의 비빈과 결탁하여, 여러 번 이세민을 아버지에게 무고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또한 용감한 사졸과 장안의 악소년을 모아 호위로 삼고, 장림문에 주둔시켜 장림병이라 불렀다. 무덕 7년, 경주총관 양문간이 징발한 병사를 장안으로 보내, 이를 기회로 병변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이연으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무덕 9년, 돌궐이 변경을 침략한 틈을 타, 이원길을 북벌을 위해 추천하고, 그 병사로 병변을 일으키려 했다. 이원길과 함께 궁정에 참배하는 도중, 현무문에서 이세민의 병사에게 공격을 받아, 이세민이 쏜 화살에 맞아 살해되었다.[10]

이건성의 다섯 아들은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조칙에 의해 이건성의 속적은 제거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식왕(息王)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은(隱)으로, 제후의 예로 개장되었다. 사서에서는 은태자라고 칭했다.

3. 사후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에 의해 이원길과 함께 살해되었다.[9] 시호는 은(隱)이다. 이후 이세민은 이건성을 식왕('쉴 식' 자 사용)으로 봉하고 이원길을 자왕('찌를 자' 자 사용)으로 봉하면서 그들을 부득이하게 죽였지만 형제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이건성을 태자로 추서하고 그들의 장례를 치러주며 정식으로 매장했다. 이때 옛 이건성파들의 장례 참석을 허용하기도 했다.

당 태종이 즉위한 후, 이건성에게 서왕의 작위를 추증하고 그의 아들 이복을 이건성의 후계자로 이건성의 혈통에 배속시켰다. 또한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예우로 이건성을 장례했다. 642년 7월, 이건성의 태자 칭호를 복원했다. 그러나 이건성은 완전히 복권되지 못했고, 그의 딸들은 여전히 황태자의 딸이 아닌 일반 왕자의 딸 신분을 유지했다.

4. 가족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이연566년635년당나라 초대 황제
어머니태목황후 두씨??신무공(神武公) 두의(竇毅)와 북주 양양공주의 딸
동생이세민598년649년당나라 제2대 황제
배우자정관음(郑观音)599년676년정씨(太子妃 郑氏)[22]
장남이승종(李承宗)??태원군왕(太原郡王)
차남이승도(李承道)?626년안륙군왕(安陆郡王)[24]
3남이승덕(李承德)?626년하동군왕(河东郡王)
4남이승훈(李承训)?626년무안군왕(武安郡王)
5남이승명(李承明)?626년여남군왕(汝南郡王)
6남이승의(李承义)?626년거록군왕(钜鹿郡王)
장녀이씨??요절
차녀이완순(李婉順)622년661년문희현주(聞喜縣主)[25], 유응도에게 시집감
5녀???귀덕현주(歸德縣主)
자부양사낭(杨舍娘)598년668년양씨(承徽 杨氏)[23]
손녀???령릉현주(乐陵县主), 유선순에게 시집감


5. 평가

이건성은 당나라 건국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동생 이세민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역사 속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618년 당나라 건국 직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9] 619년에는 농민 반란군 지도자 저산해를 격파하고, 양나라 황제 이궤를 당나라에 항복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622년에는 유흑타를 격파하여 당나라의 통일을 완수하는 등 군사적인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이세민과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세민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군대 내에서 강력한 명성을 얻었고, 이원길은 이건성을 지지하며 이세민을 견제했다. 624년, 이건성은 이세민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현무문의 변으로 살해되었다.

5. 1. 전통적 평가

정사에서는 이건성이 호색하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고 절도가 없으며, 교만하여 선비를 아끼지 않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서는 주색과 사냥을 좋아한 것을 제외하고는, "태자 이건성은 성품이 너그럽고 간략하다"(당기 6, 무덕 5년)나 "이건성은 성품이 꽤 어질고 후하다"(당기 7, 무덕 7년)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가 보인다.[21] 이 때문에, 태종 혹은 그 주변 인물이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상의 이건성에 대한 평가를 낮추도록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현무문의 변에 이르는 경위를 보아도, 기록상에서는 이건성·이원길 형제가 적극적으로 이세민을 몰아내려 하고, 이세민은 수세적으로 자위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일방적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건성은 관대한 명성을 얻었지만, 술과 사냥에 중독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연은 이건성이 정치에 무지하고 국정을 돌보는 데 관심이 없다고 걱정하여, 핵심 대신들인 이강과 정선과를 이건성의 참모진에 추가하기도 했다.

5. 2. 현대적 재평가

이건성은 당나라 건국 초기에 황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세민의 집권 이후 역사 기록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묘사가 이세민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15][17][18][19][20]

당 고조 이연의 기록 담당관이었던 문대아가 저술한 ''대당창업기거주''는 당나라 건국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이세민의 역사 검열 이전에 작성되었다.[13] 이 책은 이건성이 당나라 건국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유능하고 관대한 지도자였다고 묘사한다.[14][15] 이는 이세민이 권력을 잡은 후 편찬된 공식 역사서(''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서 이건성을 무능하고 방탕한 인물로 묘사한 것과 대조적이다.

''자치통감''에서도 이건성이 "성품이 너그럽고 간략하다"거나 "꽤 어질고 후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난다. 그러나 주색과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 이러한 상반된 기록은 이세민 혹은 그 주변 인물들이 이건성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낮추도록 조작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당창업기거주''와 같은 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공식 역사서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이건성의 실제 모습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15][17][18][19][20]

6. 이건성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Jiu Tang Shu
[3] 서적 Jiu Tang Shu
[4] 서적 New Book of Tang
[5] 서적 Da Tang chuangye qiju zhu Shanghai guji publishing house 1983
[6] 서적 Da Tang chuangye qiju zhu
[7] 서적 Da Tang chuangye qiju zhu
[8] 서적 Jiu Tang Shu
[9] 서적 Jiu Tang Shu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the Old Book of Tang
[12] 서적 簡明文史知識詞典 Shaanxi renmin chubanshe 1990
[13] 서적 the old book of Tang
[14] 서적 COURT HISTORIOGRAPHY IN EARLY TANG CHINA:: HISTORIOGRAPHY IN EARLY TANG ASSIGNING A PLACE TO HISTORY AND HISTORIANS AT THE PALACE https://www.jstor.or[...] Brill 2020-10-31
[15] 논문 Wen Ta-ya: The First Recorder of T'ang History. 1937
[16] 서적 the Old Book of Tang
[17] 서적 T'ang-tai wen-huashih 1955
[18] 서적 Tangsbih k'ao-pien 1965
[19] 간행물 Dai To sogyo kikyo-chu ko 1961
[20]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3, "Sui and T'ang. China, 589–906, Part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21] 서적 Da-Tang chuangye qijuzhu 大唐創業起居注 Encyclopedia of China Publishing House 1992
[22] 문서 Lady Zheng's epitaph (大唐故隐太子妃郑氏墓志铭并序)
[23] 문서 Lady Yang's epitaph (大唐隐太子承徽乐陵县主母故杨氏墓志铭并序)
[24] 서적 Old Book of Tang
[25] 문서 Lady Li's epitaph (大唐吏部郎中刘应道妻故闻喜县主墓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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