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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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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적은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수나라 말 농민 봉기에 참여하여 이밀 휘하에서 활약하며 당나라에 귀순했다. 당 고조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고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동돌궐, 설연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668년에는 설인귀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측천무후 시대에는 손자의 반란으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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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세적 초상화
이세적의 초상화
이름이세적 (李世勣)
출생594년
출생지둥밍현, 산둥성, 수나라
사망669년 12월 31일 (향년 75세)
사망지시안시, 산시성, 당나라
다른 이름모공 (懋功/茂功)
서세적 (徐世勣)
이적 (李勣)
영정무공 (英貞武公)
아버지서개
형제자매이비 (형제)
이간 (형제)
자매 2명
자녀이진
이사문
딸 2명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생애
활동 시기수나라 말기 ~ 당나라 초기
주요 활동당나라의 건국 공신, 당 태종 이세민의 측근
가계
성씨이 (李) / 서 (徐)
봉작영국 진무공 (英貞武公)
기타
관련 작품설당
수당연의

2. 생애

수나라 말기 산동성 조주(曺州) 이호(離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세적(徐世勣, 594년 추정 ~ 669년)은 17세 때인 611년 농민 봉기에 가담하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처음 적양(翟让)을 따라 와강군(瓦岗军)에 합류했으며, 이후 이밀(李密)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그의 휘하에서 활약하며 동해군공(东海郡公)에 봉해지고 여양(黎阳) 방어를 맡았다.[5] 이밀이 왕세충(王世忠)에게 패배하자(618년), 서세적은 자신이 관할하던 영토와 군민의 명단을 이밀에게 보내 그가 당나라에 바치도록 함으로써 옛 주군에게 공을 돌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당 고조 이연은 그의 충성심과 의리에 감탄하여 "순신(纯臣)"이라 칭찬하고 국성(國姓)인 이씨(李氏)를 하사하여 이세적(李世勣)이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조국공(曹国公)에 봉했다.[9][10]

당나라에 귀순한 후 이세적은 진왕 이세민 휘하에서 유무주, 왕세충, 두건덕, 유흑달, 서원랑, 부공석 등 여러 군벌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당의 중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충성심으로 태종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며, 626년 현무문의 변 당시에는 중립을 지켜 이세민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태종 즉위 후에는 북방의 위협이었던 동돌궐설연타 정벌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관 3년(629년) 동돌궐을 대파하고 5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8] 정관 15년(641년)에는 설연타를 크게 격파했다.[8] 이후 병주(并州) 도독으로 오랫동안 북방을 안정시켰다. 정관 18년(644년)에는 태종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총관으로 참전했으나 안시성 전투의 패배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8] 태종은 임종 직전, 태자 이치(당 고종)에게 이세적을 잠시 좌천시켰다가 다시 중용하여 충성을 얻으라는 계책을 남겼고, 고종은 즉위 후 이 계책에 따라 이적(李勣, 태종의 휘 '세(世)'를 피하기 위해 개명)을 다시 재상으로 중용했다.[10]

당 고종 치세에 이적은 상서좌복야, 사공 등을 역임하며 조정을 이끌었다. 655년 고종이 왕 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려 할 때,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이적은 "폐하의 집안일"이라며 고종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10] 이는 결과적으로 측천무후의 집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장 원년(668년), 이적은 고구려 원정의 총사령관(요동도행군대총관)이 되어 설인귀, 신라문무왕 등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최후의 공적을 세웠다.[10]

고구려 멸망 이듬해인 669년 12월, 이적은 7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고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7일간 조회를 폐하고 태위(太尉)·양주대도독(扬州大都督)으로 추증했으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종의 능원인 소릉에 배장(陪葬)하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10]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끼는 장수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사후 손자 이경업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684년) 일족이 주살되고 이적 자신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705년 당 중종이 복위한 후에야 그의 명예와 관작, 무덤이 복구되었다.[10]

2. 1. 초기 생애와 와강군 가담

서세적(徐世勣)은 594년경[1] 조주(曹州) 이호(離狐,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허쩌시 부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수나라 말기에 화주(滑州)(현재의 허난성 안양시 부근)로 이주했으며, 아버지 서개(徐蓋)와 함께 재산을 나누어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관대했다고 전해진다.

수나라 대업 7년(611년), 17세의 나이로 수말당초 시기 농민 봉기에 가담하여, 인근에서 봉기한 적양(翟让)을 따라 와강군(瓦岗军)에 합류했다. 서세적은 적양에게 아는 사람이 많은 지역에서의 약탈을 피하고, 송(宋)・정(鄭) 지역의 황하를 오가는 상선이나 여객선을 습격하여 물자를 확보하자는 계책을 내놓아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양현감의 난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이밀(李密)이 적양에게 의탁해 오자,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도록 권유했다.

이밀이 와강군의 수령이 된 후, 서세적은 수나라 장수 왕세충(王世忠)의 군대를 기묘한 계책으로 격파하는 등 군공을 세워 이밀로부터 동해군공(东海郡公)에 봉해졌고, 여양(黎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밀이 적양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을 때, 서세적은 이밀 측과 싸우다 부상을 입었으나 왕백당(王伯当)에게 구조되었다.

617년 2월, 이밀이 위공(魏公)에 즉위하자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이 되었다. 그해 하남과 산동 지역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기근이 심각해지자, 같은 해 9월 서세적은 민중 구제를 위해 원보장(元寶藏), 학효덕(郝孝德), 이문상(李文相) 등과 함께 여양(黎陽)의 거대한 녹비창(수나라의 국영 곡물 창고)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창고의 식량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하자 순식간에 20만 명이 넘는 병력이 모여들었다.

618년 3월, 수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고, 이밀이 낙양의 월왕 양동에게 명목상 항복하자 서세적은 다시 우무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여양 창고를 계속 지켰으며, 북진해 온 우문화급 군대에게 포위당하자 해자를 깊게 파고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지하도를 통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우문화급을 격퇴했다.

무덕 원년(618년) 10월,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귀순하자, 여양과 산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서세적은 휘하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밀의 패배를 이용해 자신이 직접 땅과 백성을 당에 바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관할하던 10개 군의 호적을 정리하여 이밀에게 보내 그가 당 조정에 바치도록 함으로써 공을 이밀에게 돌리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 고조 이연은 서세적이 직접 상표(上表)하지 않은 것을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으나,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덕을 생각하고 공을 양보하니, 참으로 순수한 신하(純臣)이다"라고 칭찬했다. 이연은 서세적을 여양총관(黎阳总管), 상주국(上柱國), 래국공(萊國公)에 임명하고 하남과 산동의 병력을 통솔하여 왕세충에 대비하도록 했다.

같은 해 12월, 이밀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되자, 서세적은 이연에게 청하여 이밀의 유해를 받아 군신의 예를 갖춰 여양산 남쪽에 매장해주었다. 무덕 2년(619년) 윤 3월, 서세적은 마침내 여양의 백성들과 하남 10개 군을 이끌고 정식으로 당나라에 귀순했다. 이연은 그를 여주총관(黎州總管)으로 삼고 조국공(曹國公)에 봉했으며, 황실의 성씨인 이(李)씨를 하사하여 이때부터 이세적(李世勣)으로 불리게 되었다.[9]

2. 2. 이밀 휘하에서의 활약

수나라 말기, 산동성 조주 이호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세적은 대업 7년(611년) 17세의 나이로 농민 봉기에 참여했다.[5] 처음에는 적양(翟讓)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가담했는데, 그는 고향 사람들을 약탈하는 대신 경항대운하의 여행객을 습격하여 물자를 확보하자고 제안했고, 적양은 이를 받아들였다. 616년 말, 서세적은 수나라의 명장 장수타( )를 전사시켜 적양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이 시기 단웅신( )과도 가까워져 의형제를 맺었다.

양현감의 난에 참여했던 이밀(李密)이 망명해 오자, 서세적은 왕백당( )과 함께 적양을 설득하여 이밀을 지도자로 추대하도록 했다. 이밀이 와강군의 수령(위공(魏公))이 된 후, 서세적은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 칭호를 받았다. 그는 수나라 장수 왕세충을 상대로 기묘한 계책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 공으로 이밀에게서 동해군공(東海郡公)에 봉해졌다. 대업 13년(617년), 서세적은 이밀에게 건의하여 주요 식량 저장소인 여양창( )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열흘 만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밀에게 합류했으며, 두건덕주찬 같은 다른 반란군 지도자들도 귀순했다.

617년 겨울, 이밀은 정적인 적양을 연회에서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서세적 역시 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이밀이 직접 치료해주며 목숨을 건졌다. 이밀은 서세적, 단웅신, 왕백당 등에게 적양의 부대를 인수하게 했다.

대업 14년(618년), 수 양제가 강도(江都)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이밀은 명목상 낙양의 수나라 잔존 세력(양동 정권)과 손잡고 우문화급에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서세적은 우무후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밀은 서세적에게 여양창 방어를 맡겼고, 서세적은 우문화급의 포위를 견뎌냈을 뿐 아니라, 해자를 깊이 파고 방어를 굳건히 하며 지하도를 이용한 기습 등으로 그를 격파했다.

같은 해 10월, 낙양에서 왕세충이 정권을 장악하고 이밀과의 동맹을 파기했다. 왕세충은 곧 기습으로 이밀 군대를 격파했고, 패배한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하기 위해 장안으로 향했다. 당시 여양 및 하남·산동 일대를 맡고 있던 서세적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관할하던 이밀의 옛 영토와 군대의 명단을 정리하여 부하 곽효각( 郭孝恪중국어 )을 통해 이밀에게 보냈다. 그는 곽효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땅과 백성은 모두 위공(이밀)의 소유이다. 내가 이것을 직접 당나라에 바치면 주군의 패배를 이용하여 부귀를 탐하는 것이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10개 군의 군민 호적을 기록하여 위공에게 보내고, 스스로 헌상하게 하면, 이는 위공의 공적이 될 것이다."

당 고조 이연은 서세적이 자신에게 직접 표(表)를 올리지 않고 이밀을 통해 보고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곽효각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다. 서세적의 충성심과 의리에 감명받은 고조는 "서세적은 덕을 느끼고 공을 양보하니, 참으로 순수한 신하(純臣)로다"라고 칭찬하며 그에게 황족의 성인 이씨(李氏)를 하사하여 이후 이세적으로 불리게 되었다.[9] 또한 여양총관(黎陽總管), 상주국(上柱國), 래국공(萊國公) 또는 조국공(曹國公)에 봉하고 하남·산동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여 왕세충에 대한 방비를 맡겼다.

2. 3. 당나라 귀순과 이씨 성 하사

618년 10월, 이밀왕세충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귀순하자, 당시 이밀 휘하에서 여양과 산동 일대를 관할하던 서세적은 자신이 가진 영토와 백성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장사(長史) 곽효각에게 말했다. "이 땅과 백성은 본래 위공(이밀)의 것이다. 내가 이것을 (당나라에) 바치는 것은 주군의 패배를 틈타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10개 군의 군민 호적을 기록하여 위공에게 보내고, 그가 직접 (당에) 바치도록 하면 이는 위공의 공적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서세적은 고조 이연에게 직접 표를 올리지 않고, 이밀을 통해 귀순 의사를 전하려 했다. 고조는 서세적이 직접 표를 올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사자를 보내 그 이유를 물었고, 서세적이 옛 주군인 이밀에게 공을 돌리려 한다는 속뜻을 알고 크게 감탄하며 "서세적은 은덕을 생각하고 공을 양보하니, 참으로 순수한 신하(純臣)로다"라고 칭찬했다. 고조는 즉시 서세적을 여양총관(여양), 상주국에 임명하고 내국공(萊國公)에 봉하여 하남과 산동 지역의 군사를 통솔하며 왕세충에 대비하도록 했다.

618년 12월, 당에 귀순했던 이밀이 다시 당을 배반하고 거병하려다 살해되었다. 고조는 이 소식을 서세적에게 알렸다. 서세적은 고조에게 이밀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간청했고, 고조는 이를 허락했다. 서세적은 옛 주군에 대한 예를 갖춰 여양 남쪽 언덕에 이밀의 무덤을 만들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619년 가을, 하나라 왕 두건덕이 황하 북쪽 지역을 공격해왔다. 두건덕은 려양을 함락시키고 당 고조의 사촌 이신통, 위징 등과 함께 서세적의 아버지 이가이를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인질로 잡히자 서세적은 어쩔 수 없이 두건덕에게 항복했다. 두건덕은 서세적을 장군으로 삼아 려양을 계속 다스리게 했지만, 이가이는 인질로 삼아 수도인 명주로 보냈다. 서세적은 두건덕 밑에 있으면서도 당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다시 귀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두건덕을 속이고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결국 619년 말 동료 이상호와 함께 당나라 영토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두건덕은 서세적이 비록 자신을 배신했지만 옛 주군(이밀)과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했던 점을 높이 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아버지 이가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619년 윤2월, 서세적은 마침내 여양의 백성과 하남 10개 군을 이끌고 정식으로 당나라에 귀순했다. 고조 이연은 그의 귀순을 크게 기뻐하며 여양총관(여양)으로 삼고 조국공에 봉했으며, 국성(國姓)인 이씨를 하사하여 이세적(李世勣)이라는 이름을 내렸다.[9] 이로써 그는 당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중요한 장수로 자리 잡았다. 훗날 당 태종 이세민의 휘(諱)를 피하여 이적(李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 4. 당나라 통일 전쟁에서의 공헌

이밀왕세충에게 패배하여 에 귀순하자(618년 10월), 여양(黎陽, 현 허난성 준 현)과 산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서세적(이세적의 본명)은 당분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와 백성들이 원래 이밀의 소유였음을 인정하며, 자신이 직접 당에 땅을 바치는 것은 옛 주군의 패배를 이용하는 행위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장사(長史) 곽효각과 상의하여, 점령지의 호적을 정리해 이밀에게 보내 그가 직접 당 조정에 바치도록 함으로써 공을 이밀에게 돌리고자 했다. 당 고조 이연은 이 소식을 듣고 서세적의 의도를 파악하여 "덕을 생각하고 공을 양보하니 참으로 순신(純臣)이다"라고 칭찬하며, 그에게 여양총관(黎阳总管), 상주국(上柱国) 등의 관직과 함께 래국공(萊國公)의 작위를 내렸다. 또한 하남과 산동의 군사를 통솔하여 왕세충에 대비하도록 했다.

618년 12월(또는 619년 새해 즈음), 당에 귀순했던 이밀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가 성언사에게 살해되었다. 고조는 이세적에게 사자를 보내 이밀의 죽음을 알렸다. 이세적은 이밀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고조는 이를 허락했다. 이세적은 려양 남쪽에서 군주의 예우를 갖춰 이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619년 윤3월, 이세적은 여양의 백성과 하남 10개 군을 이끌고 정식으로 당에 귀순했다. 고조는 그를 다시 여주총관(黎州總管)에 임명하고 조국공(曹國公)에 봉했으며,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를 하사하여 이때부터 이세적이라 불리게 되었다.[9]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夏)나라를 세운 두건덕이 황하 북부 지역을 공격해왔다. 당의 회안왕 이신통은 려양으로 후퇴하여 이세적과 합류했으나, 두건덕이 려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신통, 이세적의 아버지 이가이, 위징, 동안공주 등을 사로잡았다(619년 가을). 이세적은 간신히 탈출했지만 아버지가 인질로 잡히자 두건덕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건덕은 이세적을 장군으로 삼아 려양을 계속 다스리게 하고, 이가이는 인질로 수도 명주 (현 허베이성 한단)로 보냈다.

이세적은 당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곽효각의 조언에 따라 먼저 두건덕의 신뢰를 얻기 위해 왕세충의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두건덕은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세적은 두건덕을 유인하여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두건덕의 부하 조단(曹旦)의 약탈 행위로 인해 다른 반군 지도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이상호 등이 먼저 조단을 공격하려다 실패했다. 이세적은 이상호와 함께 당으로 탈출했다. 두건덕의 신하들이 이가이를 처형할 것을 건의했지만, 두건덕은 "이세적은 당의 신하였다. 우리에게 포로가 되었어도 옛 주군을 생각하니 충신이다. 그의 아비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이가이를 살려주었다.

당으로 돌아온 이세적은 진왕 이세민의 휘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당의 통일 전쟁에 기여했다.

  • 유무주 토벌 (620년): 이세민을 따라 산시성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던 유무주 세력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유무주의 장군 송금강과의 교전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이세민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결국 유무주를 격파하여 동돌궐로 도망치게 하는 데 공헌했다.
  • 왕세충 토벌 (620년 ~ 621년): 이세민이 낙양을 수도로 삼은 정나라 공격을 시작하자, 항복한 관주 (현 허난성 정저우)를 접수하고 왕세충의 태자 왕현응을 격퇴했다. 이후 형주 태수 위륙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설득하여 성공시켰고, 이는 정나라 동부 영토의 연쇄적인 항복으로 이어졌다. 또한 왕세충의 부하 심열의 항복을 받아내어 이세적의 부하 왕군廓이 호뢰관을 점령하고 왕세충의 조카 왕행본을 사로잡는 데 기여했다.
  • 두건덕 토벌 (621년): 왕세충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진한 두건덕의 군대와의 호뢰 전투에 참전하여 정지절, 진숙보 등과 함께 두건덕의 선봉 부대를 격파했다. 이세민이 이끄는 당군이 두건덕을 사로잡고 왕세충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이세민이 처형하려던 정나라 장수이자 이세적의 의형제인 산웅신을 구명하려 애썼으나 실패했다. 이세적은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산웅신에게 먹이며 "내 살이 형제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게 해주시오. 이것으로 맹세의 일부라도 지킬 수 있기를 바라오."라고 말하며 의리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 공로로 이세적은 이세민과 함께 금색 갑옷을 입고 당나라 황실 사당에 포로를 바치는 영예를 누렸으며, 하 정권 붕괴 후 풀려난 아버지 이가이와 재회했다.
  • 유흑달 토벌 (621년 ~ 622년): 두건덕 사후 하나라 부흥을 외치며 봉기한 유흑달과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처음에는 유흑달에게 패배하여 명주를 내주고 후퇴하기도 했으나, 이후 이세민을 따라 반격에 나서 유흑달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전투 중 이세적의 부하 반모가 유흑달의 핵심 참모 고아현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서원랑 토벌 (622년 ~ 623년): 유흑달의 동맹이었던 서원랑(현 산둥성 중서부 지역 장악) 토벌 작전에 참여하여 이신통, 임귀 등과 함께 공세를 이어갔다. 623년 봄, 서원랑을 격파하고 그의 수도인 연주 (현 산둥성 제녕)를 함락시켰으며, 도주하던 서원랑은 살해되었다. 이세적은 그의 머리를 수도 장안으로 보냈다.
  • 부공석 토벌 (623년): 강남의 단양 (현 장쑤성 난징)에서 송나라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부공석 토벌에도 참여했다. 조군왕 이효공의 지휘 아래 박망산 (현 안후이성 마안산) 전투에서 부공석 군대를 격파하고, 도주하는 부공석을 추격하여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처럼 이세적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핵심 참모이자 장수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당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당나라 초기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여러 군벌 세력을 격파하여 당나라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5. 돌궐, 설연타 정벌과 고구려 원정

무덕 8년(625년) 돌궐이 당나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아냈고, 정관 3년(629년)에는 당 태종이 동돌궐의 가리 칸 아시나 도비를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을 때 이정 휘하의 주요 장군으로 참전했다. 630년 봄, 이세적은 白道|바이따오중국어(현재 후허하오터)에서 동돌궐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이정과 합류하여 아시나 도비의 주력을 다시 격파하고 5만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웠다.[8] 이후 병주(并州, 현재 타이위안) 도독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머물며 북방 국경을 안정시켰다. 태종은 그의 활약에 대해 "수 양제는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이세적을 진양(병주)에 두었을 뿐인데 변방이 평안해졌으니, 그가 만리장성보다 낫다"라고 평가했다.[8]

630년 동돌궐 정벌 당시 당나라 군대의 모습


정관 15년(641년), 이세적은 (현재 우란차부 인근)에서 설연타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같은 해 겨울, 설연타의 진주 칸 이난이 당의 동맹인 동돌궐의 길비 칸 아시나 시모를 공격하자, 태종은 이세적을 포함한 지원군을 파견했다. 이세적은 (현재 바오터우 인근 강)에서 이난의 아들 大度|다두중국어가 이끄는 설연타군을 격파했다. 이세적은 설연타를 완전히 멸망시키려 했으나, 위징의 건의를 받아들인 태종의 명령으로 중단했다.[8] 646년, 내부 혼란에 빠진 설연타를 다시 공격하여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항복한 지도자 도모지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다.[8]

정관 18년(644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자, 이세적은 고구려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 원정을 결정했고, 이세적은 병부상서로서 6만 명의 육군을 이끄는 총관이 되어 요동반도로 진격했다.[8] 645년 봄, 이세적은 이도종과 함께 蓋牟|개모성중국어(현재 푸순)을 함락시키고, 중요한 거점인 (현재 랴오양)을 포위하여 태종이 도착한 후 함락시켰다.[8] 이후 당군은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安市|안시성중국어(현재 안산)을 포위했다. 고연수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도착하자, 태종의 지휘 아래 이세적과 장손무기 등이 협공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했다.[8] 그러나 안시성 성주의 뛰어난 방어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보급 문제까지 겹치자 그해 가을 태종은 철수를 명령했으며, 이세적은 후퇴하는 군대의 후방을 맡았다.[8]

647년, 태종은 고구려 국경 지대를 약화시키기 위한 연례적인 침공을 시작했고, 이때 이세적은 육로 공격을 담당했다.[8]

당 고종 때인 총장 원년(668년), 이세적은 다시 대규모 고구려 원정군의 총사령관(요동도행군대총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설인귀 등이 이끄는 당군 및 신라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했고, 이세적은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을 사로잡아 당으로 돌아왔다.[10]

2. 6. 고구려 멸망과 죽음

총장(總章) 원년(668년), 이적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는 667년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인 연남생연남건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고,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10] 당 고종은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 원정을 지휘하게 했고, 투항한 연남생(당시에는 고조의 휘를 피해 천남생(泉男生)으로 개명)이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667년 가을, 이적은 먼저 신성(新城, 현재의 푸순)을 함락시키고 진군했다. 휘하 장수 설인귀, 방동선(龐同善), 고간(高侃) 등도 연남건의 군대를 격파하며 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곽대봉(郭待封)이 이끄는 수군은 보급 문제에 부딪혔는데, 이 사실이 고구려군에게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암호시(暗號詩)로 이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적은 처음에는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분노했으나, 비서 원만경(元萬頃)이 해독하여 보급품을 보낼 수 있었다. 원만경은 이후 고구려를 향한 격문에서 압록강 방어를 언급했다가 오히려 고구려가 이를 참고하여 방어를 강화하는 바람에 유배되기도 했다.

고구려-당 전쟁.


668년 가을, 이적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포위했다. 신라문무왕이 이끄는 군대도 합류하였다. 보장왕과 연남건의 동생 연남산 등 많은 관료들이 항복했으나, 연남건은 저항을 계속했다. 며칠 후, 연남건의 부하 장수였던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서 평양성은 함락되었다. 연남건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사로잡혔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고, 이적은 보장왕과 왕족,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 이적이 수도 장안으로 개선하자 성대한 환영 행사가 열렸으며, 당 고종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이적에게 다음 순서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특별한 영예를 내렸다.

고구려 멸망 이듬해인 총장(總章) 2년(669년) 12월 3일, 이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당 고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7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태위(太尉) 겸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으로 추증했으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유해는 당 태종의 능원인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고종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동돌궐설연타 영토 내의 여러 큰 산 모양으로 만들도록 명했다.

이적은 죽기 전 병상에서 고종과 태자 이홍이 보낸 약 외에는 다른 치료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본래 산동의 농부에 불과했는데, 우연히 성스러운 황제를 만나 삼공의 지위에 올랐고, 나이도 거의 80이니 이는 하늘의 보살핌이 아니겠는가? 수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 어찌 의원에게 목숨을 연장해달라 구하겠는가?" 또한 임종 직전 동생 이필(李弼)에게 자신의 사후 자손들을 잘 단속해 줄 것을 당부하며, 만약 불량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처리하라고 유언했다. "나는 방현령과 두여회가 평생 공들여 명성을 쌓았지만, 사악한 후손 때문에 가문이 뒤집히는 것을 보았다. 내 아들과 손자들을 모두 너에게 맡긴다. 내가 죽어 묻힌 후, 내 침실로 가서 아이들을 돌보아라.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 위험한 생각을 하거나 덕 없는 자들과 어울리는 자가 있으면 때려죽이고 황제께 보고하라."

655년 당 고종이 왕 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려 할 때, 이적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손무기, 저수량 등 대부분의 중신들이 반대하거나 침묵했지만, 고종이 의견을 묻자 이적은 "이는 폐하의 가사(家事)이니 어찌 다른 사람에게 물으십니까?"라고 답하여 고종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 일로 인해 이적은 측천무후 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684년, 당 고종 사후 측천무후당 중종을 폐위시키고 당 예종을 옹립하며 실권을 장악하자, 이적의 손자 이경업이 중종 복위와 측천무후 타도를 내걸고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이적의 일족은 대부분 주살되었으며 이적 자신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작위가 추탈되는 수모를 겪었다. 705년, 당 중종이 복위한 후에야 이적의 무덤과 작위가 복원되고 다시 예우를 갖추어 장사 지내졌다.

2. 7. 측천무후 시대

태종 사후 고종 이치(李治)가 즉위하자, 피휘(避諱) 규정에 따라 태종의 이름 '세민(世民)'의 '세(世)' 자를 피해 이세적(李世勣)은 이적(李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종은 즉위 직후 이적을 낙양(洛陽)을 관할하는 장군으로 임명했다가, 곧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아 사실상의 재상으로 복귀시켰다. 이는 태종이 임종 전에 태자에게 "내가 이적을 일부러 좌천시켰으니, 네가 즉위한 뒤 다시 불러 중용하면 그가 은혜를 느껴 너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조언한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10] 이적은 태종의 의중을 파악하고 조칙을 받자마자 바로 첩주(叠州) 부임지로 떠났었다. 653년에는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공(司空)의 명예직을 더했으나 재상직은 계속 유지했다.

655년, 고종이 왕 황후를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 무소의(武昭儀)를 황후로 세우려 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무소의가 태종의 후궁이었기에 근친상간의 문제와 신분상의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 원로대신들이 반대하거나 침묵했지만, 고종이 직접 이적의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이것은 폐하의 가사(家事)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此陛下家事,何必更問外人)라고 대답했다. 이 발언에 힘입어 고종은 왕 황후와 소 숙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적은 책봉 의례에서 사절 역할을 맡았다. 이 일로 이적은 결과적으로 무측천의 집권과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무 황후는 이후 반대파 대신들을 숙청했지만, 이적은 반대하지 않았기에 화를 피하고 오히려 더 큰 신임을 얻었다. 그는 장손무기 숙청 사건의 조사 책임자였으나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 보이며, 663년에는 무 황후의 측근 이의부의 부패 조사를 담당하여 그를 실각시키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666년 고구려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연남생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장남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자, 고종은 667년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고, 연남생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적의 군대는 먼저 신성(新城) 등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설인귀, 고간(高侃) 등 부장들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의 저항을 격파하며 진격했다. 668년 가을, 이적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했다. 신라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도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보장왕과 연남산 등은 항복했으나 연남건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곧 부하 장수 신성(信誠) 등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서 평양성은 함락되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족,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개선했다. 고종은 이적의 공을 높이 사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자신의 다음 순서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특별한 영예를 내렸다.

669년 말, 이적은 병으로 위독해졌다. 고종은 그의 형제와 아들들을 모두 장안으로 불러 간호하게 했으나, 이적은 고종 황제와 이홍 태자가 준 약만 복용했을 뿐, 다른 치료는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산동의 농부에 불과했습니다. 우연히 성스러운 황제를 만나 삼공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한 거의 80세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보호가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살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어찌 의사에게 더 오래 살 것을 구하겠습니까?"

어느 날, 이적은 그의 동생 이필(李弼)을 불러 그날 기분이 좋아졌으니 모든 친척을 불러 잔치를 열라고 말했다. 잔치가 끝날 무렵, 그는 이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제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 잔치는 여러분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으세요. 저는 제 눈으로 방현령과 두여회가 평생 열심히 일하고 명성을 쌓았지만, 그들의 가문을 뒤엎을 사악한 후손을 만나 희망이 없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나의 모든 아들과 손자들이 여기 있으니 그들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내가 죽어 묻힌 후, 내 침실로 가서 어린아이들을 돌보세요.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들 중 위험한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덕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있으면 때려 죽이고 황제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69년 12월 3일(음력)에 사망했다. 향년 76세. 고종은 7일간 조회를 폐하며 애도했고, 태위(太尉)·양주대도독(扬州大都督)으로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태종의 능인 소릉에 배장(陪葬)하는 영예를 주었다. 그의 무덤은 동돌궐과 설연타 지역의 산 모양을 본떠 만들어 그의 전공을 기렸다.

송나라 역사가 사마광자치통감에서 이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적은 군 지휘관으로서 전략에 능통하고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문제를 논의할 때 흐르는 물처럼 좋은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승리를 거두었을 때 부하들에게 공을 돌렸습니다. 그가 받은 금, 은, 비단의 포상은 모두 그의 장교와 병사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기 때문에 그가 공격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성공했습니다. 그는 항상 외모가 바르고 관대하며 진지한 사람을 그의 장교로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불운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의 가문에 대한 통치는 엄격했지만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번은 그가 '부야'였을 때, 그의 누이가 병들자 그가 직접 죽을 끓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길이 그의 수염을 태웠습니다. 그의 누이가 '당신에게는 많은 남녀 하인이 있습니다. 왜 당신이 스스로 고생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가 명령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늙었고 저도 늙었을 뿐입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죽을 끓일 시간이 정말 충분하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이적 사후, 그의 손자 이경업이 684년 측천무후의 집권에 반대하여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진압되자 측천무후는 이적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부수는 부관참시했으며, 그의 관작을 추탈하고 집안을 몰락시켰다. 705년 중종이 복위한 후에야 이적의 관작과 명예가 회복되고 무덤도 다시 정비되었다.

3. 평가

(내용 없음)

4. 일화


  • 《수당가화》에는 이밀을 섬기던 시절 의형제였던 단웅신과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단웅신은 용맹이 남달랐는데, 이밀이 죽은 뒤 단웅신은 낙양의 왕세충을 섬겼고, 이세적은 이연을 도왔다. 이세적이 이원길과 함께 낙양을 포위했을 때, 이원길이 자신의 힘을 믿고 나섰다가 왕세충의 명을 받은 단웅신에게 습격당해 위험에 처했다. 단웅신의 창이 이원길에게 거의 닿을 뻔한 순간, 이세적이 다급하게 "형님, 형님! 그분은 제 주군이십니다!"라고 외쳤다. 단웅신은 이세적을 알아보고는 "네놈하고만 엮이지 않았어도 바로 이놈을 끝장냈을 텐데."라며 돌아섰다고 한다. 왕세충이 패망한 후, 이세적은 의형제인 단웅신을 살리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단웅신 앞에서 이세적은 과거의 맹세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의 처자는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이세적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칼로 베어 단웅신에게 주며 맹세했고, 단웅신은 그것을 받아 먹고 의심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1]

  • 이세적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열두세 살 때 무뢰한 도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마다 죽였고, 열네다섯 살 때는 감당 안 되는 도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모조리 죽였다. 열일고여덟 살에는 좋은 도적(好賊)이 되어 전장에서 사람을 죽였고, 스무 살에는 천하의 대장(大將)이 되어 병사를 지휘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냈다."[1]

  • 복야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병든 누나를 위해 직접 죽을 끓였다고 한다. 죽을 끓이다가 수염을 태우는 일이 잦았는데, 누나가 "네게 아내와 첩이 많은데 왜 직접 나서서 고생하느냐?"고 묻자, 이세적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님도 저도 이제 늙었고, 평생 죽을 끓여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

  • 이세적의 외모는 당시 호인을 닮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수당가화》에는 일곱 살에 신동으로 불렸던 가가은(賈嘉隱)과의 일화가 남아있다. 조정에 출사한 가가은을 본 이세적이 다른 관료들에게 "저 녀석은 얼굴이 꼭 서남쪽 오랑캐(獠) 같은데 어떻게 저리 총명할까?"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가가은이 "북쪽 오랑캐(胡) 머리로도 재상이 되는데, 서남쪽 오랑캐 얼굴이라고 총명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받아쳐 주위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한다. 《수당가화》의 저자 유속(劉餗)은 이 일화 끝에 "서씨(이세적)의 생김새가 북쪽 오랑캐를 닮았기 때문이다."(徐狀胡故也)라고 덧붙였다.[1]

5. 이세적이 등장하는 작품


  • 기타
  • * 이세적은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 문신으로 숭배받으며, 보통 위징과 짝을 이룬다.
  • * 이세적은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 11''에 특별 캐릭터로 등장하는 32명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서적 Old Book of Tang
[3] 서적 Old Book of Tang
[4] 서적 New Book of Tang
[5] 서적 Old Book of Tang
[6] 문서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Bo Yang Edition
[9] 서적 旧唐書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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