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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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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지형은 선비족 출신으로 서위의 장군 위치기도의 아들이자 우문태의 조카이다. 금명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후경의 난 당시 촉 지역을 정벌하는 등 활약했다. 서위 시기에는 익주 자사를 역임했으나, 북주 건국 후 촉국공에 봉해지고, 군부 장관, 태보, 태사를 거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양견이 섭정으로 권력을 잡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결했다. 당 고조 때 제대로 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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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형

2. 가계 및 초기 생애

위지경은 선비족 위치(尉遲) 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서위의 장군 위치기도(尉遲俟兜)이고 어머니는 우문태의 누이인 장락공주(昌樂大長公主)이다.[2] 서위 문제의 딸 금명공주(金明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지적이며 야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위지경의 가족 관계
배우자금명공주(金明公主) (서위 문제의 딸)
장녀낙현군(洛縣君) 우치씨(尉遲氏) - 북주의 의동(仪同) 탁발경과 결혼
부인왕씨(王氏)
장남우치이(尉遲谊) - 자중군공(资中郡公)
차남우치관(尉遲宽) - 장락군공(长乐郡公)
삼남우치순(尉遲顺) - 좌국공(胙国公)
사남우치돈(尉遲惇) - 위안군공(魏安郡公)
오남우치우(尉遲祐) - 서도군공(西都郡公)
차녀
삼녀우치씨(尉遲氏)


3. 서위 시기의 활동

우문태의 딸인 금명공주(金明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후경의 난 당시 촉(蜀) 지역을 정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촉국공(蜀國公)에 봉해졌다.[2]

552년, 양나라에 내분이 일어나자, 서위우문태익주 공격을 결정했다. 이때, 위치후이는 다른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주장하여, 우문태의 신임을 얻었다.

553년 봄, 위치후이는 1만 2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 검각에서 안주 자사 낙광(樂廣)과 양주 자사 양건운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6월에는 성도를 포위하고, 파군에서 온 소기의 구원군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결국 소휘와 소원숙을 포함한 문무 관료들이 항복하면서, 위치후이는 촉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위치후이는 익주 자사로 임명되어 검각 이남의 18개 주를 통치했다. 그는 엄격한 군령과 공정한 상벌로 한인(漢人)과 소수 민족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영토를 안정시켰다.

557년, 북주 효민제 즉위 후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으로 지위가 올라가고, 영촉공(寧蜀公)에 봉해졌으며, 이후 촉공(蜀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575년에는 상주국대장군(上柱國大將軍)에 임명되었다.

4. 북주 시기의 활동

557년 북주 건국 후 위척경은 촉국공(蜀國公)에 봉해졌다.[1] 북주 명제 재위 기간 동안 그의 활동에 대한 역사 기록은 부족하다.[1] 562년 군부(軍部)의 장관을 역임했다.[1] 564년 북제 공격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1] 568년 태보(太保)에 임명되었다.[1] 572년 북주 무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태사(太師)에 임명되었다.[1] 576년 북제 정벌 참여 여부는 불분명하다.[1] 578년 북주 선제 즉위 후 상주(相州, 대략 오늘날의 허베이성 한단) 총관으로 부임했다.[1]

5. 양견에 대한 반란과 최후

580년 북주 선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양견이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평소 명망이 높았던 울지형은 양견이 왕위를 찬탈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 그는 북주의 황실 혈통을 보호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선제의 삼촌 우문소의 아들을 황제로 옹립했다.[2]

우중문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초반에는 기세를 올렸으나, 위효관고경에게 패배했다.[1] 울지형은 자결했고, 그의 아들들도 살해되었다. 자결 직전 그는 양견에게 모욕을 퍼부었다.[2]

당나라 고조 재위 기간 동안, 울지형의 증손자인 울지기복(尉遲耆福)이 울지형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달라고 청원했다.[2] 고조는 울지형이 북주에 충실했음을 인정하여 이를 허락하고 개장(改葬)을 명했다.[2]

참조

[1] 기타 gengwu day of the 8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Daxiang era Book of Zhou
[2] 서적 Zhou Shu, vo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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