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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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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주 명제는 서위의 권력자 우문태의 서장자로, 557년 북주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즉위 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내치를 다졌으며, 외교 관계를 안정시키고 군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559년에는 연호를 사용하고, 행정 제도를 개편하는 등 중원 왕조의 체제를 갖추려 노력했다. 명제는 560년 권신 우문호에 의해 독살당했으며, 2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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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명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주나라 황제
이름우원 (Yǔwén)
우문 육(Yù)
아버지우문태
어머니요부인
생애
출생534년
사망560년 5월 30일
매장지소릉(昭陵)
통치
즉위557년 11월 5일
퇴위560년 5월 30일
이전 통치자효민제
다음 통치자무제
섭정우문호
연호무성(武成): 559년-560년
가족
왕조북주
사후 정보
묘호세종(世宗)
시호효명황제(孝明皇帝, "효성스럽고 이해심이 있는")

2. 생애

557년 후반, 15세의 효민제가 완전한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려 했고, 우문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우문호가 이 음모를 알아차리자 그는 효민제를 폐위하고 살해했다. 우문호는 우문육장안으로 불러들여 천왕의 칭호로 왕위를 이어받게 했다.[2]

명제는 관대한 성격으로 인정 많고 도량이 컸으며, 친족, 특히 동생 우문옹과 사이가 좋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글 짓는 것을 장려하여 시문에도 능했다. 즉위 후에는 학자 80명 이상을 불러 북주의 역사서를 간행하게 했고, 자신도 많은 책을 수집하여 10권의 저작을 남겼다.

명제는 죽기 직전 "생사는 필연이다. 나는 부덕하였지만 독서를 했고 성인과 현인들과 논의를 하여 민심을 알려고 노력했으나 아직도 알지 못한 것도 있다. 군신들이 아버지인 태조 우문태를 모시고 일해 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 나는 재위 4년이 되었지만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모두 협력하여 태조 황제의 유지를 완수하기를 바란다."라고 유언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534년, 서위의 권력자 우문태의 서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요씨였다. 우문태하주의 통만성에 머물렀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자는 '''통만돌'''이 되었다.

548년, 영도군공(寧都郡公)으로 책봉되었다.[1] 556년 대장군이 되어 농서 지방을 방어•통치했다. 이복 동생 우문제(효민제)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주국에 임명되었고, 기주자사로 선정을 펼쳤다.[2] 사촌 형인 진공 우문호가 효민제를 폐위시킨 후, 우문육을 기주에서 새 황제로 맞이하려 했지만, 우문육은 고향에 머물며 제위를 굳게 사양했다. 군신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황제의 수레인 법가를 준비해 맞이하려 했지만, 우문육은 다시 사양했다. 그러나 군신들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우문육은 천왕 즉위를 승낙, 557년 대사를 행하고, 동생인 대장군·보성공 우문옹을 주국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3]

2. 2. 치세

558년, 재상 우문호는 태사(太師)가 되었고 독고씨(獨孤氏)를 왕후로 세웠다.[1] 559년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옹주목(雍州牧)으로, 경조군수(京兆郡守)를 경조윤(京兆尹)으로 개칭하였다.[1] 북위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부터 살던 하남의 백성과 북주가 관중에 도성을 건설한 이후에 관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경조인(京兆人)으로 부르기로 하고 중원 왕조로서의 체제를 정비하고자 태사 우문호를 옹주목으로 임명하여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1] 그 해에는 에프탈과 돌궐의 사신이 내조하고 조공을 하였다.[1]

진나라 군이 침공했을 때는 스스로 갑옷을 착용하여 태백산(太白山) 동쪽에서 요격하였다.[1] 이어서 토욕혼이 침공하자 대사마(大司馬) 하란상(賀蘭祥)이 군대를 이끌고 요격하였다.[1] 주력(周暦)을 만들었고,[1] 주국인 보성공(輔城公) 우문옹을 대사공으로 임명하였다.[1] 서위 시대에 죄를 지었을 경우엔 처벌하지 않았고 이후 계속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칙령을 내렸다.[1]

하란상은 요양(洮陽)과 홍화(洪和)를 공격하였고 토욕혼은 병력의 열세로 도망갔다.[1]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에서 사신이 내조했고 조공하였다.[1] 심하게 장마가 일어나자 공경, 경, 대부, 선비뿐 아니라 각지의 주목, 군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직접 상주문을 올렸고 이를 해결하도록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1] 재해가 일어난 곳에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였고,[1] 우문태가 하주(夏州)에 병력을 이끌고 정복했을 때 전사한 유족에게 금전이나 비단을 주었듯이 재난으로 처자를 잃은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금전이나 비단을 주는 칙령을 내렸다.[1] 이 때 천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아버지 우문태를 문황제로 추존하고,[1] 연호를 무성(武成)으로 개원했다.[1]

560년 돌궐의 사신을 군신과 함께 맞이하였다.[1] 우문호는 명제가 현명하고 식견이 있는 뛰어난 군주인 것을 알아채고 이를 두려워하여 요리사에게 독약이 든 떡을 올리게 하여 황제를 독살하려고 했다.[1] 명제는 이것을 알아채고는 일부러 먹었다.[1]

559년 봄, 우문호는 명제에게 정식으로 자신의 권한을 반환했고, 명제는 모든 정부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통치를 시작했지만, 우문호는 군대에 대한 권한을 유지했다.[2] 명제는 일반적으로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어른들에게 겸손하며, 그들을 적절히 존경하고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2]

559년 가을, 명제는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연호 (무성)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

560년 봄, 소장북주의 속국이자 북주가 지원했던 서량의 서량 선제에 대한 라이벌인 양나라 왕위 요구자—가 북주의 장군인 왕린과 함께 진나라 영토를 공격하자, 북주는 장군 시녕(史寧|스닝중국어)을 보내 소장의 수도인 강하(江夏, 현재 후베이성 우한)를 공격하게 했다.[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과 왕린이 진나라 장군 후전(侯瑱|허우톈중국어)에게 패배하여 북제로 도망치고 진나라 군대가 강하에 접근하자 북주는 강하에 대한 작전을 포기했지만 소장의 이전 영토의 일부—현재 후난성을 차지할 수 있었고, 북주는 이를 서량에 넘겨주었지만 방어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2] 560년 봄, 진나라는 북주에 평화 제안을 했고, 북주는 이를 수락했다.[2]

560년 여름, 우문호는 명제의 지능과 능력에 불안감을 느껴 황실 요리사 이안(李安|이안중국어)에게 황제에게 바치는 설탕 과자에 독을 넣도록 지시했다.[2] 명제는 그것을 먹고 병이 났다.[2]

2. 3. 독살과 죽음

560년, 권신 우문호는 명제의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하여 독살을 계획했다. 그는 요리사 이안(李安중국어)에게 명제에게 바치는 떡에 독을 넣도록 지시했다. 명제는 독이 든 떡인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먹었다.

명제는 죽기 직전 "나의 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나라를 다스리는 소임에는 부족하다. 나의 동생인 우문옹은 너그럽고 인정이 많고 도량이 크다. 우문옹을 지지하여 천하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라고 유언했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명경황후 독고씨황태자 (558년 출생)[5]
서씨
불명


3. 1. 조부모와 부모

구분이름
조부덕황제(德皇帝) 우문굉
조모명덕황후(明德皇后) 왕씨(王氏)
부친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우문태
모친부인(夫人) 요씨(姚氏)


3. 2. 후비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천왕후(天王后)명경황후(明敬皇后)독고씨(獨孤氏)[6]557년 ~ 558년? ~ 558년위국여공(衞國戾公)
독고신(獨孤信)
부인(夫人)
곽씨(郭氏)
소릉(昭陵)[7]
비(妃)서씨(徐氏)


  • 명경황후 독고씨 (明敬皇后 河南獨孤氏|명경황후 하남독고씨중국어; 사망 558년)
  • 서씨 (妃 徐氏|비 서씨중국어)
  • 독고황후 (독고신의 장녀. 우문육이 기주에 있을 때 그의 부인이 됨. 558년 1월, 왕후로 책봉. 4월에 사망하여 소릉에 안장. 무성 2년 (559년), 황후로 추존)
  • 서비(필왕 현의 어머니)

3. 3. 황자

서씨(妃 徐氏중국어)에게서 장남 필왕(畢王) 우문현(559~580)[8], 차남 풍왕(酆王) 우문정(?~581)[9], 삼남 송왕(宋王) 우문실(?~581)[10]을 얻었다. 이외에 하남공주와 또 다른 딸이 있었는데, 하남공주는 위지강의 아들 위지경(尉遲敬)에게 시집갔고, 다른 딸은 하란상의 아들 헬란사(賀蘭師중국어)에게 시집갔다.

3. 4. 황녀

봉호이름생모부마비고
하남공주울지경 (위지강의 아들)자녀는 확인되지 않음
공주박릉군공 하란사자녀 없음[5]


4. 평가

명제 우문육은 관대하고 인정 많은 성품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한 군주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많은 책을 수집하고 저술을 남기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1]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즉위 후에는 80명이 넘는 학자들을 불러 북주의 역사서를 간행하게 하였다. 스스로도 10권의 저작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능했다.[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명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내치를 안정시킨 군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권신 우문호에게 휘둘리고 결국 독살당한 점은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1] 특히, 명제가 독살당하고 북주 무제 시기에 우문호가 숙청된 일련의 사건들은, 권력 암투의 비극적인 결말과 권력 집중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5. 연호

명제원년2년3년4년
서력557년558년559년560년
간지정축무인기묘경진
연호--무성 원년2년


참조

[1] 서적 Book of Zhou
[2] 서적 Book of Zhou
[3] 웹사이트 1 piece Chinese North Zhou Dy. Cash Coins(Bu Quan) - xiangxiangkafeizha https://chinese-coin[...] 2020-07-25
[4] 웹사이트 Northern Zhou Dynasty 北周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2020-07-25
[5] 문서 died in infacy, not counted
[6] 문서 영도공부인(寧都公夫人)
[7] 문서 사후 명제 칭제 때 황후로 추존됨.
[8] 문서 필국공(畢國公)
[9] 문서 풍국공(酆國公)
[10] 문서 송국공(宋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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