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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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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문호는 서위의 권력자 우문태의 최측근이자 북주의 실권자로, 우문태 사후 그의 아들들을 보좌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조귀와 독고신을 제거하고 효민제를 폐위, 살해한 후 우문육을 옹립했으며, 이후 명제를 독살하고 우문옹을 옹립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다. 군사적으로는 북제와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나, 우문태의 노선을 이어받아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72년, 우문옹에게 암살당하며 그의 부하들 또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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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랑은 531년 고환에 의해 북위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532년 효무제에게 양위하고 살해되었으며, 북위 절민제와 황위를 다투고 고환의 지지 속에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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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호
기본 정보
북제 교서도에 그려진 우문호
북제 교서도에 그려진 우문호 (오른쪽에서 세 번째)
우문(宇文)
이름호(護)
시호탕(蕩)
생애
출생513년
사망572년
사인암살
가계
아버지우문굉(宇文顥)
우문육(宇文毓)
우문도(宇文導)
아들우문회(宇文會)
우문운(宇文運)
우문협(宇文協)
우문술(宇文述)
우문탄(宇文坦)
우문천(宇文遷)
우문모(宇文謨)
우문경(宇文慶)
우문옹(宇文邕)
우문충(宇文充)
우문회(宇文巋)
손자우문선(宇文衎)
우문양(宇文량)
우문조(宇文肇)
주요 활동
직위대사마(大司馬)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
대총재(大冢宰)
진공(晉公)
봉호진공(晉公)
활동 시기북주(北周)
주요 업적북주 정권 장악
3명의 황제 폐위 및 옹립
주요 사건우문옹에게 암살당함

2. 생애

북위 말기 혼란 속에서 숙부인 우문태 휘하의 장수로 공적을 세웠고, 우문태가 서위의 실권을 장악하자 그의 최측근이자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556년 우문태가 사망하자, 어린 후계자 우문각(훗날의 효민제)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실권을 장악했다.[1][2][3]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557년 서위 공제로부터 우문각에게 선양을 받아 북주를 건국하게 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우문호가 행사했다. 그의 전횡에 반발한 중신 조귀와 독고신이 제거를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숙청되었고,[1][3] 심지어 황제인 효민제마저 우문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된 후 살해당했다.[1][3]

이후 우문호는 효민제의 이복형 우문육(명제)을 황제로 옹립했지만, 명제가 총명함을 드러내자 560년 그마저 독살하고[1][3] 명제의 동생 우문옹(무제)을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1][3] 무제는 이전 두 황제와 달리 우문호 앞에서 어리석은 척하며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그를 안심시켰다.[1][3] 우문호는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황제마저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고 믿었으나, 무제는 뒤에서 조용히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1][3]

572년, 무제는 질노태후에게 금주(禁酒)를 간언해 달라는 핑계로 우문호를 궁으로 유인한 뒤, 직접 홀으로 내리치고 동생 우문직과 함께 그를 살해했다.[1][3] 우문호가 제거된 후 그의 아들들과 측근 세력은 모두 숙청되었고, 무제는 비로소 실권을 되찾아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1][3]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우문호는 513년, 북위무천(武川, 현재 후허하오터시, 내몽골 자치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 농민 지도자였던 우문공(宇文肱)의 아들 우문호(宇文顥)이며, 어머니는 연씨 부인이다. 우문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할아버지 우문공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524년, 북위 북부 지방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우문공과 그의 아들들은 다른 지역 지도자 하발도발(賀拔度拔) 부자와 함께 반란 세력 파륙한발릉(破六韓拔陵)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잠시 질서를 회복했으나, 곧 다른 반란 지도자 선우수례(鮮于修禮)의 군대에 합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우문공이 전사했으며, 아버지 우문호(宇文顥)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526년, 선우수례가 부하에게 살해된 후에는 갈영(葛榮)이 그 세력을 흡수했고, 우문호는 숙부들과 함께 갈영의 군대에 속하게 되었다.

528년, 갈영이 북위의 장군 이주영에게 패배하자, 우문호는 다른 우문씨 일족과 함께 이주영의 근거지인 진양(晉陽, 현재 타이위안시, 산시성)으로 강제 이주되어 수년간 머물렀다.

531년 또는 532년, 숙부 우문태가 서부 지방에서 하발악(賀拔岳)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우문호는 평량으로 가서 우문태에게 합류했다. 이때 어머니 연씨 부인과 우문태의 누이인 숙모는 진양에 남겨두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우문태는[5] 군사 작전을 나갈 때마다 우문호에게 집안 살림을 맡겼다. 우문호는 엄격하지 않으면서도 가정을 잘 관리하여 질서 있고 엄숙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이에 우문태는 "이 아이의 포부와 재능은 나와 같다"고 칭찬하며 그를 신임했다.

533년, 하발악이 하주(夏州, 대략 현재 위린시, 산시성)를 점령하고 우문태를 그곳의 지사로 임명했을 때, 우문호는 우문태를 따라가지 않고 하발악 휘하에 남아 복무했다. 534년 초, 하발악이 동료 장수 후모진열(侯莫陳悅)에게 암살당하자, 하발악의 부하들은 우문태에게 지휘권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우문태는 이를 수락했다. 이후 우문태가 후모진열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우문호는 숙부 휘하의 장수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2. 2. 우문태 휘하에서의 활동

531년 또는 532년, 우문호는 어머니 연씨 부인과 숙모(우문태의 누이)를 진양(현재 타이위안, 산시성)에 남겨두고 평량으로 가서 삼촌인 우문태에게 합류했다.[5] 당시 우문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5], 군사 작전을 나갈 때마다 자신의 집안일을 우문호에게 맡겼다. 우문호는 가정을 관리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으면서도 집안을 잘 정돈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본 우문태는 "이 아이의 포부와 재능은 나와 같다"고 말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533년, 하발악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하주(夏州, 대략 현재 위린, 산시성)를 장악하자, 우문태를 그곳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우문태는 우문호를 하발악 밑에 남겨두어 계속 복무하게 했다. 534년 초, 하발악이 동료 장수 후모진열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발악 휘하의 장수들은 우문태에게 지휘권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우문태는 이를 수락했다. 이후 우문태가 후모진열을 격파하고 후모진열이 자결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우문호는 삼촌인 우문태 휘하의 장수로서 활약하며 공을 세웠다.

이후 우문호는 숙부 우문태 밑에서 꾸준히 공적을 쌓았고, 우문태가 서위의 실권을 장악했을 무렵에는 그의 가장 신임받는 측근이자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556년 우문태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자녀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우문호는 우문태의 유언에 따라 후계자인 우문각(훗날의 효민제)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우문호가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 3. 권력 장악과 전횡

숙부 우문태556년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어린 후계자 우문각을 보좌하며 실권을 장악했다.[1][2][3] 처음에는 우문태 휘하의 장군과 관리들이 그의 지휘를 따르기를 주저했으나, 원로 장군 우진(于謹)이 우문씨 가문의 맏이라는 이유로 지지를 선언하자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3]

557년 초, 우문호는 당시 14세였던 우문각의 권위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서위 공제에게 선양하도록 압력을 넣어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건국했다.[3] 우문각은 황제(효민제)로 즉위했으나, 주(周)의 전통을 따라 '천왕' 칭호를 사용했고, 우문호는 진공(晉公)으로 봉해졌다.[3] 그러나 우문호의 권력 장악에 대한 불만은 곧 표출되었다. 효민제 즉위 약 한 달 후, 원로대신인 초공(楚公) 조귀와 위공(衛公) 독고신이 우문호 제거를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조귀는 처형되고 독고신은 자결을 강요당했다.[1][3] 또한 자신의 섭정에 비판적이었던 제궤(齊軌)도 처형되었다.[3]

효민제 역시 친정을 원하며 이식, 손항(孫恆), 을불봉(乙弗鳳), 하발제(賀拔提) 등과 함께 우문호 제거를 모의했으나, 이 음모는 장광락(張光洛)의 밀고로 발각되었다.[1][3] 우문호는 결국 장군 하란상(賀蘭祥)과 위지강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효민제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3] 효민제는 옛 저택에 유폐되었고, 우문호는 고위 관료들을 모아 효민제를 폐위하고 그의 이복형인 영도공(寧都公) 우문육을 옹립할 것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3] 효민제는 여양공(呂滎公)으로 강등된 지 한 달 만에 살해되었고, 그의 아내 원공주(元公主)는 강제로 불교 비구니가 되었다.[1][3]

557년 우문육이 명제(明帝)로 즉위했다.[1][3] 명제는 우문호를 계속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559년 봄 우문호는 공식적으로 정권을 명제에게 반환했지만 군권은 계속 장악했다.[3] 명제는 그해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 그러나 560년 여름, 우문호는 총명하고 유능한 명제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황실 요리사 이안(李安)을 시켜 독살했다.[1][3] 명제는 죽기 직전, 아들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인 노공(魯公) 우문옹에게 제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3]

명제가 사망하자 우문옹이 무제(武帝)로 즉위했고, 우문호는 다시 정치와 군사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1][3] 무제는 이전 두 황제와 달리 어리석은 척하며 우문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그를 안심시켰다.[1][3] 심지어 무제의 어머니 친태후(叱奴太后)는 우문호와 만날 때 그를 자신과 동석하게 하고 무제는 옆에 서서 시중들게 할 정도였다.[3] 561년, 무제는 우문호에게 다른 5개 부서를 총괄하는 대총재(大冢宰) 직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3] 563년에는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된 양공(涼公) 호모천 충(侯莫陳崇)에게 자결을 명했고,[3] 같은 해 말에는 무제가 공식 문서에서 우문호의 이름 휘(諱)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등, 황제가 아닌 신하로서는 이례적인 예우를 받았다.[3]

우문호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564년, 돌궐과 연합하여 북제를 공격했으나 낙양 공략에 실패하고 곡률광고장공 등 북제 장수들의 명성만 높여주었다.[1][3] 역사학자들은 이 패배의 원인을 우문호의 소극적인 태도와 전략 부족으로 평가한다.[3] 567년에는 진(陳)의 장수 화교(華皎)의 투항을 받아들여 지원군을 보냈으나, 진나라 장수 오명철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지휘관이었던 무제의 동생 우문직은 우문호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3] 570년 겨울에는 북제 장수 홀률광에게 분수(汾水) 북쪽 지역을 빼앗겼다.[3] 한편, 563년 돌궐과 동맹을 맺었고,[1] 564년에는 북제와의 협상을 통해 북제에 억류되어 있던 어머니 연씨 부인을 돌려받기도 했다.[3] 565년, 불만을 토로한 장군 허뤄 둔(賀若敦)을 다시 불러들여 자결하게 했다.[3]

겉으로는 우문호에게 복종했지만, 무제는 비밀리에 동생 우문직, 측근 우문 신거(宇文神舉), 왕궤(王軌), 우문 효백(宇文孝伯) 등과 함께 우문호 제거를 모의하고 있었다.[1][3] 572년 봄, 무제는 친태후에게 금주를 간언해 달라는 핑계로 우문호를 태후궁으로 유인했다.[1][3] 우문호가 태후 앞에서 금주에 관한 글인 '주고(酒誥)'를 읽는 사이, 무제가 뒤에서 옥으로 만든 홀(笏)으로 우문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1][3] 우문호가 쓰러지자 숨어있던 우문직이 나타나 그의 숨통을 끊었다.[1][3] 향년 60세였다.[4] 우문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들과 핵심 측근들은 모두 처형되었다.[1][3] 사후 574년 공작으로 추증되고 예를 갖춰 다시 매장되었으나, '탕(蕩, "방탕하고 절제 없음"을 의미함)'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시호를 받았다.[3]

2. 4. 명제 시해와 무제 옹립

557년 효민제 우문각을 폐위하고 시해한 우문호는 효민제의 이복형인 우문육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명제이다.[3][2] 명제는 우문호를 계속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높은 작위와 명예를 내렸고, 558년에는 우문호의 아들 우문지(宇文至)를 숭업공(崇業公)으로 봉했다.[4]

559년 봄, 우문호는 형식적으로나마 권력을 명제에게 반환하여 명제가 모든 정무를 공식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으나, 우문호는 여전히 군사적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다.[4] 같은 해, 명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

그러나 560년 여름, 우문호는 명제의 총명함과 능력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2] 황실 요리사 이안(李安)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설탕 과자에 독을 넣도록 지시했다.[4] 독이 든 과자를 먹은 명제는 병세가 위독해졌고,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황위를 동생인 노공(魯公) 우문옹에게 넘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4][2]

명제가 사망하자 우문옹이 무제로 즉위했으며, 우문호는 다시 모든 정치 및 군사 권력을 장악했다.[4][2] 무제는 앞서 폐위되거나 시해된 두 형들과는 달리, 우문호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우둔한 모습을 연기했다.[2][3] 우문호는 자신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다 황제마저 어리석다고 판단하여 안심하고 있었다.[3] 하지만 무제의 이러한 모습은 모두 계산된 연기였고, 그는 남몰래 측근들과 함께 우문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3][2]

572년, 우문호는 지방에 머물다 오랜만에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무제를 알현했다.[3][2] 이때 무제는 고령임에도 술을 좋아하는 질노태후에게 술을 줄이도록 간언해 달라고 우문호에게 부탁했다.[3][2] 우문호가 태후를 알현하여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주나라 성왕 시기의 글인 『서경』의 '주고(酒誥)' 편을 읽어주게 되었다.[3] 우문호가 글을 읽는 데 집중하는 틈을 타, 무제가 뒤에서 홀으로 그의 등을 강타하여 넘어뜨렸다.[3][2] 쓰러진 우문호는 무제와 그의 동복동생인 위공(衛公) 우문직에 의해 살해되었다.[3][2]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3] 우문호가 암살되자, 무제는 즉시 그의 아들들과 측근들을 모두 숙청하여 후환을 제거했다.[3][2]

2. 5. 최후

560년 우문옹(무제)을 황제로 옹립한 후, 무제는 이전 두 황제(효민제, 명제)와 달리 우문호에게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우문호는 자신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황제가 유약하다고 판단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제의 유약함은 연기였고, 뒤에서는 동생 우문직(宇文直) 위공(衛公)과 측근인 우문신거(宇文神舉), 왕궤(王軌), 우문효백(宇文孝伯) 등과 함께 우문호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 있었다.

572년 봄, 우문호는 지방에 있다가 오랜만에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무제를 알현했다. 이때 무제는 우문호에게, 고령임에도 술을 좋아하는 어머니 질노태후(叱奴太后, 혹은 친태후)가 자신의 금주 권고를 듣지 않으니 우문호가 직접 나서서 간언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제는 주나라 성왕이 술을 경계하며 쓴 글인 『주고(酒誥)』를 건네주며, 태후 앞에서 이를 읽어 달라고 제안했다.

우문호가 태후의 처소에서 무제의 요청대로 『주고』를 읽기 시작하자, 그가 다 읽기도 전에 무제가 뒤에서 다가가 옥홀(玉笏, 또는 홀)로 그의 머리 뒤를 강타했다. 우문호가 바닥에 쓰러지자, 근처에 숨어 있던 우문직이 즉시 나타나 칼로 그의 숨통을 끊어 암살했다. 당시 우문호의 나이는 60세였다.

우문호가 암살된 직후, 그의 아들들과 핵심 측근들은 모두 숙청되어 권력 기반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574년, 우문호는 사후 공작(公爵)의 작위로 추증되고 공작의 예우를 갖춰 다시 매장되었으나, 시호는 "탕(蕩)"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방탕하고 절도가 없다'는 의미를 가진 매우 부정적인 평가였다.

3. 정치적 업적과 평가

북주 초기 효민제명제 시기에는 우문호(宇文護)가 동주(同州)에서 패부(霸府)를 열어 실권을 장악했다.[1]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황제 살해와 폭정을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우문태의 정책을 계승하여 북주의 발전에 기여한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1] 이러한 상반된 평가 속에서 그의 집권기는 북주가 북제와의 국력 차이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다.[1]

3. 1. 정치적 업적

북주는 효민제, 명제 시기에도 실질적인 권력은 우문호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동주(同州)에서 패부(霸府)를 열어 권력을 행사했다. 사서에는 우문호와 그의 아들들, 측근들이 폭정을 일삼고 재물을 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황제 두 명을 시해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

그러나 정치가로서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문태의 정책 노선을 계승하여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등 북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문호 집권기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초기 열세였던 북제와의 국력 차이를 역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3. 2. 부정적 평가

북주 효민제와 명제 시기에 실권을 장악했으나, 역사 기록상 폭정을 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우문호 본인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부하들이 백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재물을 탐하는 등 포악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정권을 독재하고 효민제명제 두 황제를 연달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평판이 매우 좋지 않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인원씨서위의 안창왕 원균의 딸
아들우문훈(宇文訓)중산공(中山公), 세자
아들우문회(宇文会)담국공(譚国公), 우문십비(宇文什肥)의 양자
아들우문지(宇文至)거국공(莒国公), 우문락생(宇文洛生)의 아들 우문보제(宇文菩提)의 양자
아들우문정(宇文静)숭업공(崇業公)
아들우문심(宇文深)창성공(昌城公)
아들우문건가(宇文乾嘉)정평공(正平公)
아들우문건기(宇文乾基)
아들우문건광(宇文乾光)
아들우문건울(宇文乾蔚)
아들우문건조(宇文乾祖)
아들우문건위(宇文乾威)
신흥공주소위에게 시집감
우문씨우의에게 시집감
우문씨달해무의 아들 달해과에게 시집감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연도작품명배우
2013난릉왕정샤오닝
2016난릉왕비린웨이첸
2018독고천하쉬자오
2018독고황후장카이


참조

[1] 서적 Book of Zhou
[2] 서적 Zizhi Tongjian 572-04-14
[3] 논문 Zoroastrian scenes on a newly discovered Sogdian tomb in Xi’an, Northern China//Studia Iranica 2004
[4] 논문 Investigations on the Chinese version of the Sino-Sogdian bilingual inscription of the tomb of Lord Shi Paris 2005
[5] 서적 Book of Zhou
[6] 서적 新編東洋史事典 東京創元社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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