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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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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주는 557년 우문각이 건국한 중국 북조 시대의 왕조이다. 우문태가 서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고환의 동위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키웠으며, 우문태 사후 조카 우문호가 섭정을 하면서 효민제, 명제, 무제를 옹립했다. 무제는 우문호를 제거하고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했으나, 무제의 사후 선제가 폭정을 일삼아 국력이 쇠퇴했다. 581년, 정제가 양견에게 선위하면서 수나라에 멸망했다. 북주는 선비족의 호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불교 미술이 번성했다. 주요 통치자로는 효민제, 명제, 무제, 선제, 정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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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위는 535년 우문태가 북위 효무제를 독살하고 원보거를 옹립하여 건국되었으며, 우문태 사후 우문각이 북주를 건국하면서 멸망한, 짧은 기간 존재했던 북조 왕조로, 불교 미술의 융성기를 이루었으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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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북주 (北周)
일반 명칭북주
로마자 표기Běi Zhōu
수도장안
존속 기간557년 ~ 581년
576년경 아시아의 북주
576년경의 북주 () 와 아시아 주요 국가
560년의 남북조
밝은 파란색으로 표시된 북주 영토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통치자 칭호황제
주요 통치자효민제 (557년)
명제 (557년–560년)
무제 (560년–578년)
선제 (578년–579년)
정제 (579년–581년)
역사
건국557년 2월 15일
멸망581년 3월 4일
이전 국가서위
이후 국가수나라
주요 사건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함 (577년)
경제
통화중국 주화, 엽전
인구 통계
577년 추정 면적1,500,000km²
언어 및 민족
공용어선비족 언어, 중국어
현재 국가

2. 역사

우문태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하발악이 죽자 그 기반을 계승하여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키웠다. 효무제가 북위 승상 고환으로부터 도망쳐 우문태에게 오자, 고환은 동위를 건국하였다.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여 서위를 건국하고 승상이 되었다.

우문태 사후 승상 자리를 물려받은 우문각은 557년 서위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북주'''를 건국했으나,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 우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효민제(우문각), 명제(우문육), 무제(우문옹)를 차례로 세우며 권세를 누렸다. 무제는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그를 주살하고, 577년 발해 고씨가 세운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했다. 무제는 폐불을 단행했는데, 이것을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부른다.[1]

무제가 죽고 그의 아들 선제가 즉위했으나,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통치로 국가를 크게 약화시켰다. 580년 선제가 죽은 후, 그의 장인 양견이 권력을 잡았고, 581년 선제의 아들 정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웠다. 어린 정제와 황족 우문씨는 이후 양견에 의해 학살되었다.[1]

2. 1. 건국 배경

우문태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하발악이 죽자 그 기반을 계승하여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효무제가 북위 승상 고환으로부터 도망쳐 그에게 왔다. 그 후 고환이 동위를 건국하자 우문태도 사이가 나빠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였다. 이것이 서위가 되었다. 우문태는 서위의 승상이 되었다.

우문태북위육진의 난에 참여했다가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하발악이 죽은 후에는 그 기반을 이어받아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떨쳐 관서대도독이 되었다. 534년, 북위 대승상 고환의 압박으로 낙양에서 도망친 효문제는 우문태에게 의지했고, 효문제는 우문태를 대승상으로 삼아 고환과 대립했다. 효문제가 도망친 후, 고환은 효정제를 옹립하여 동위를 세웠다. 한편 우문태는 곧 효문제와 사이가 틀어져 그 해 안에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여 서위를 세웠다. 이로써 북위는 둘로 나뉘었다. 우문태는 서위의 대총재가 되어 황제를 꼭두각시로 삼아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537년, 동위의 고환이 대규모 공세를 펼쳤으나, 우문태의 서위는 결사적인 저항으로 격퇴했다. 538년에는 우문태가 서위군을 이끌고 공세를 펼쳤으나, 동위의 맹장 후경 때문에 대패하여 장안을 위협받았지만, 간신히 우문태가 저항하여 지켜냈다. 556년 우문태가 사망하고, 셋째 아들이자 적장자인 우문각이 대총재를 계승하여 그 해 12월 주공에 봉해졌다. 557년 정월 초하루, 우문각은 서위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천왕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다.

2. 2. 북주의 건국과 발전

우문태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하발악이 죽자 그 기반을 계승하여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효무제가 북위 승상 고환에게서 도망쳐 그에게 왔다. 고환이 동위를 건국하자 우문태는 사이가 나빠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여 서위를 건국했다. 우문태는 서위 승상으로 승진했다.[1]

우문태 사후 승상 자리를 물려받은 우문각은 557년 서위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으나,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 우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효민제(우문각), 명제(우문육), 무제(우문옹)를 차례로 세우며 권세를 누렸다. 무제는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그를 주살하고, 577년 발해 고씨가 세운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했다. 무제는 폐불을 단행했는데, 이것을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부른다.[1]

무제는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점령했다.[2]

2. 3. 멸망

577년 무제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제4대 황제인 선제는 온갖 포악한 행동을 하여 인망을 크게 잃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받던 수국공 양견의 힘이 강해졌으며, 선제가 죽자 양견은 외척이라는 명목으로 섭정이 되어 황제의 실권이 사라지게 되었다.[1]

581년에 제5대 황제인 정제가 양견에게 선양하면서 수나라가 세워지고, 북주는 멸망하였다. 북주의 황족인 우문씨는 전 황제 정제를 포함한 대다수가 양견에 의해 모두 학살당해 단절되었다고 전해진다.[1]

무제가 죽고 그의 아들 선제가 즉위했으나,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통치로 국가를 크게 약화시켰다. 580년 선제가 죽은 후, 그의 장인 양견이 권력을 잡았고, 581년 선제의 아들 경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수를 세웠다. 어린 경제와 황족 우문씨는 이후 양견에 의해 학살되었다.[1]

3. 정치 체제

북주는 유교 경전인 《주례》에 기초하여 관제부병제를 만들고 시행했다. 옛 주나라의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 이래의 한화(漢化) 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의 풍습으로 돌아갈 것을 표방하였다(호화(胡化) 정책).[16][17][18]

서위와 북주의 두드러진 특징은 주례에 기초한 관제와 부병제이다. 북위탁발씨가 원씨로 개성한 것처럼, 선비 고유의 성에서 한식으로 개명되었던 성을 선비 고유의 성으로 되돌렸다. 영내 한인에게도 선비풍의 성으로 개성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군사 제도는 군 요직으로 팔주국(八柱國)·십이대장군(十二大將軍)을 두고, 그 20명에게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현(북위의 군사 기지) 출신자를 많이 임명했다(무천진 군벌). 수나라양씨는 십이대장군, 당나라이씨는 팔주국의 가계이다. 더 나아가 그 아래에 이십사개부(二十四開府)를 두고, 이 24개 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했다.

북주에서는 556년 건국 초, 황제의 칭호 대신 "천왕"을 칭했기 때문에 제후의 왕은 설치되지 않았고, 국공이 최고위의 작위가 되었다. 559년에 천왕의 칭호가 황제로 되돌아간 것을 계기로, 제후왕위의 부활이 논의되었고, 574년에는 제후왕 (국왕·현왕·군왕)이 설치되었다. 왕위는 종실에만 수여되었고, 그것이 수나라와 당나라를 통해 같았기 때문에, 마침내 원칙화되어 후세에 계승되었다.[18]

3. 1. 6관

북주는 유교 경전인 《주례》에 기초하여 관제부병제를 만들고 사용하였다. 3성 6부는 대총재(大冢宰)·대사도·대종백(大宗伯)·대사마·대사구(大司寇)·대사공의 6관(六官)으로 변경·개편되었다. 또한 옛 주나라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주는 북위 효문제 이래의 한화(漢化)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의 풍습으로 회귀함을 표방하였다(호화(胡化)정책).[16][17][18]

3. 2. 부병제

북주는 군 요직으로 8주국(柱國)과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武川鎭,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있었던 북위의 군사기지) 출신자들이 많았다. 이들 밑에 24개부를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훗날 수나라를 건국하는 (楊)씨가 12대장군이었고, 역시 훗날 당나라를 건국하는 (李)씨가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그대로 수나라·당나라까지 이어졌다. 한편, 山下将司|야마시타 마사시일본어는 "팔주국"은 당대의 창작이라는 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6]

4. 사회

북주는 선비족 고유 문화를 중시하여 한족에게 선비족 풍습을 강요하는 호화(胡化) 정책을 펼쳤다. 왕조의 의례를 선비족 풍습으로 바꾸고, 선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한족성씨를 다시 선비족 성씨로 되돌렸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 사회와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4. 1. 호화 정책

북주는 의례 등을 선비족풍으로 행하고, 공용어도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으며, 성씨도 원래의 선비족 성씨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행했다(원씨탁발씨). 북주는 영내의 한인들에게도 선비족풍의 성씨로 고칠 것을 강요했는데, 이를 호화(胡化) 정책이라고 한다.

4. 2. 한족과의 관계

북주는 유교 경전인 주례에 기초한 관제를 채택하면서도, 북위 효문제 이후의 한화 정책에 역행하는 선비족 고유의 습속으로의 회귀를 표방했다. 이는 선비족 복고주의라고 불린다. 북주는 주(周)라는 중화풍 국호를 사용했지만,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시행했다.

  • 국조의 의례 등을 선비족 풍습으로 변경하였다.
  • 공용어는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다.
  • 북위의 탁발씨원씨로 바꾼 것처럼, 선비족 고유의 성에서 한족식으로 바뀐 성을 다시 선비족 고유의 성으로 되돌렸다.
  • 영내 한족에게도 선비족 풍의 성씨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과의 관계에 있어 긴장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4. 3. 소그드인과의 교역

안자 묘는 북주 시대 중국에 거주했던 소그드인 상인(518-579년)의 묘로, 당시 돌궐인(돌궐 제1 카간국)의 존재를 보여준다. 돌궐은 아마도 중국 내 소그드인들의 주요 무역 파트너였을 것이다.[8] 에프탈은 실질적으로 등장하지 않거나, 돌궐 카간유르트 바깥에서 종속적인 통치자로 한 번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돌궐의 지배로 대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에프탈은 556년에서 560년 사이에 사산 제국과 돌궐의 동맹에 의해 멸망했다).[8] 반면에 에프탈은 위르카크 묘에 만연하게 등장한다. 위르카크는 안자와 같은 시대에 죽었지만 85세로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주로 에프탈과 거래했을 수 있다.[8] 혼인 동맹도 있었다. 북주의 주 무제는 아시나 황후라는 돌궐 출신 황후를 두었다.

북주 시대 시안의 위르카크 묘에 있는 소그드 음악가들

5. 문화

북주 시대에는 수많은 유물이 알려져 있는데, 그중 다수는 중국에 거주하며 종종 공식 행정 직책을 맡았던 소그드인 상인들과의 교류를 보여준다(예: 안지묘 또는 위르카크 묘). 심지어 북인도(예: 이단 묘)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도 있다. 중앙 아시아의 귀중한 유물은 선비-탁발 북주 장군 이현의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종종 높은 계급의 중국인 장례 자료에 포함되었다.

북주 시대 불교에 대한 내용은 #불교 문단을 참고하라.

5. 1. 불교

북주 시대에는 불교불교 미술이 번성했다.[12] 북조는 둔황 석굴의 일부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428굴에 있는 부처의 전기에 대한 서사 그림은 간다라와 키질 석굴의 원형을 따른다.[13]

무제(武帝)는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삼무일종의 폐불의 두 번째) 이는 불교 탄압을 통해 도교불교 두 종교 교단을 없애고 통도관(通道觀)이라는 사원을 세워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국가 권력 아래 통일, 종교 위에 존재하는 황제 권력의 확립을 목표로 했으며, 당시 불교의 타락에 대한 단속을 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6. 역대 황제

(德皇帝)
(명제 추숭)우문굉----주 태조
(명제 추숭)문황제
(文皇帝)우문태--성릉(成陵)제1대-효민황제
(孝閔皇帝)우문각-557년정릉(靜陵)제2대주 세종명황제
(明皇帝)우문육무성 559년 ~ 560년557년 ~ 560년소릉(昭陵)제3대주 고조무황제
(武皇帝)우문옹보정 561년 ~ 565년
천화 566년 ~ 572년
건덕 572년 ~ 577년
선정 578년560년 ~ 578년효릉(孝陵)제4대-선황제
(宣皇帝)우문윤대성 579년578년 ~ 579년정릉(定陵)제5대-정황제
(靜皇帝)우문천대상 579년 ~ 580년
대정 581년579년 ~ 581년공릉(恭陵)


7. 가계도

북주 황제 가계도
1대2대3대4대5대
효민제
(재위 557)
명제
(재위 557–560)
무제
(재위 560–578)
선제
(재위 578–579)
경제
(재위 579–581)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논문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1979
[4]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3-01-01
[5] 서적 Pre-Modern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Volume I: To 1800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3-01-01
[6] 서적 A History of East Asi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7] 서적 ARS ORIENTALIS https://books.google[...] Freer Gallery of Art, Smithsonian Institution 1986
[8] 간행물 A Reflection of the Hephthalite Empire: The Biographical Narra- tive in the Reliefs of the Tomb of the Sabao Wirkak (494-579) https://www.podgorsk[...] 2003
[9] 서적 History of Central Asia, The: 4-volume se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8-04-18
[10] 간행물 Early Turks: Male Costume in the Chinese Art http://www.transoxia[...] 2009-08
[11] 간행물 Exotic Goods as Mortuary Display in Sui Dynasty Tombs--A Case Study of Li Jingxun's Tomb https://www.academia[...] 2004
[12] 서적 Buddhist Sculpture from China: Selections from the Xi'an Beilin Museum : Fifth Through Ni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China Institute Gallery 2007
[13] 서적 Early Buddhist Narrative Art: Illustrations of the Life of the Buddha from Central Asia to China, Korea and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0-04-26
[14] 서적 Chinese Architecture in an Age of Turmoil, 200-6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4-12-31
[15] 간행물 Ancient Genome of Empress Ashina reveals the Northeast Asian origin of Göktürk Khanate https://onlinelibrar[...] 2023-01-09
[16] 간행물 唐初における『貞観氏族志』の編纂と[八柱国家]の誕生
[17] 간행물 西魏八柱国の序列について
[18] 간행물 柱国と国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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