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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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워털루 전역은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이후, 영국-프로이센 연합군과 프랑스군 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은 벨기에에서 선제 공격을 감행했으나, 카트르 브라 전투, 리니 전투를 거쳐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퇴위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프랑스는 파리 조약(1815)을 통해 영토를 잃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워털루 전역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에도 간접적으로 서구 열강의 세력 확대를 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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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5년 프랑스 -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 전쟁 중 나폴레옹의 복귀에 대항하여 결성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몰락시키고 프랑스 왕정 복고를 이끌었으며, 파리 조약으로 해체되고 프랑스는 국경 축소와 배상금 지불 조건으로 종전되었다. - 1815년 프랑스 - 파리 조약 (18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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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4월 11일 퐁텐블로에서 체결된 퐁텐블로 조약은 나폴레옹 1세의 황제 권한 박탈 및 엘바섬 유배, 마리 루이즈에게 파르마 공국 양도 등을 규정했으나 영국 반대와 나폴레옹의 귀환으로 파기되었다.
워털루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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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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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워털루 전역 |
파트 |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기간 | 1815년 6월 15일 ~ 1815년 7월 8일 (3주 2일) |
장소 | 프랑스 네덜란드 |
결과 |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제1제국 |
교전국 2 |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하노버 나사우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제1제국 지휘관 | 나폴레옹 1세 미셸 네 에마뉘엘 드 그루시 장바티스트 드루에, 에를롱 백작 장드디외 술트 루이-니콜라 다부 |
연합군 지휘관 |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한스 에른스트 카를 폰 지에텐 |
프랑스군 지휘관 추가 | 오노레 샤를 릴리에 제롬 보나파르트 도미니크 방담 피에르 조제프 드루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로바우 백작 조르주 무통 에두아르 아돌프 카시미르 조제프 모르티에 장 바티스트 주르당 |
연합군 지휘관 추가 | 롤랜드 힐 헨리 파제트 토마스 픽턴 헨리 클린턴 그나이제나우 백작 게오르크 폰 퍼치 요한 폰 틸만 프리드리히 폰 뷜로 오라녜공 빌럼 헨드리크 게오르그 다비드 헨드리크 샤세 장 앙투안느 드 콜라에 카를 폰 알텐 크리스티안 폰 옴프테다 베른하르트 공자 아우구스트 폰 크루즈 프리드리히 폰 고데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엘리아스 올퍼만 |
병력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병력 | 124,000–126,000명, 약 350문 |
연합군 병력 | 웰링턴: 107,000명, 블뤼허: 123,000명, 총 230,000명 |
피해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피해 | 63,000명 |
연합군 피해 | 61,000명 |
관련 전투 |
2. 배경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에서 유배 생활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루이 18세는 3월 19일 파리에서 도망쳤다. 나폴레옹은 다음 날 파리에 입성했다.[1] 한편, 빈 회의에 모인 유럽 열강(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과 그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나폴레옹을 불법자로 선언했으며, 1815년 3월 13일 이 선언에 서명하면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이 품었던 평화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고, 전쟁은 이제 불가피했다.
3월 25일에는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동맹 조약이 비준되었고, 이 조약에서 각 유럽 열강들은 다가오는 전쟁을 위해 1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상비군 규모가 다른 세 열강보다 작아 병력 숫자를 맞출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고, 많은 부대가 최근 1812년 전쟁이 끝난 캐나다에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은 다른 열강과 분견대를 제공할 유럽의 다른 국가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수적 열세를 보충했다.
동맹국들이 동원하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침공은 1815년 7월 1일에 시작하기로 합의되었다. 이는 블뤼허와 웰링턴이 선호했던 시기보다 늦은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군대는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보다 먼저 6월에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아직 거리가 멀었다. 이 늦은 침공 날짜의 장점은 모든 침공하는 동맹군이 동시에 준비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기된 침공 날짜는 나폴레옹에게 군대와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주었다.
나폴레옹은 방어전과 공격전 중 공격을 선택했는데, 이는 모든 적들이 완전히 집결하여 협력하기 전에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은 주요 동맹군 중 일부를 파괴함으로써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정부를 평화 회담에 불러들여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논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은 벨기에에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어 개별적으로 격파될 수 있다는 판단과,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즉시 지원을 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 벨기에 주둔 영국군은 대부분 2선급 부대였고, 네덜란드 군대 역시 장비와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벨기에에서 친프랑스 혁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2. 1. 엘바 섬 탈출과 프랑스 복귀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3월 19일 파리에서 도망쳤고, 나폴레옹은 다음 날 파리에 입성하여 권력을 되찾았다.[1] 한편, 빈 회의에 모인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 열강과 그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1815년 3월 13일 그를 불법자로 선언했다.[1] 이 선언으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의 평화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1]
3월 25일, 유럽 열강들은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동맹 조약을 비준하여 다가오는 전쟁을 위해 각자 1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영국은 상비군 규모가 작아 이 숫자를 채우기 어려웠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병력과 1812년 전쟁 이후 캐나다에 주둔 중인 부대 등의 문제도 있었다. 이에 영국은 다른 열강과 분견대를 제공할 유럽 국가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병력 부족을 메웠다.
동맹군이 동원을 시작한 후, 1815년 7월 1일에 프랑스 침공을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프로이센의 블뤼허와 영국의 웰링턴이 원했던 시기보다 늦었는데, 그들의 군대는 6월에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늦은 침공 날짜는 모든 동맹군이 동시에 준비할 수 있게 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배치해 나폴레옹을 확실히 격파하고 프랑스 국경 내에서의 패배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연기는 나폴레옹에게 군대와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주어, 결국 동맹군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방어전과 공격전 중 공격을 선택했다. 모든 적군이 완전히 집결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주요 동맹군 일부를 격파함으로써,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정부를 평화 회담으로 이끌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 즉 프랑스의 평화 유지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확보하려 했다. 만약 동맹국들이 평화를 거부하면, 전쟁을 계속하여 나머지 동맹군을 격파할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벨기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은 넓게 분산되어 있어 각개격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아직 이동 중이거나 동원 중이었기 때문에 즉시 지원을 올 수 없었다. 또한, 벨기에 주둔 영국군은 대부분 2선급 부대였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 참전 용사들은 미국으로 파견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을 지원하는 네덜란드군은 장비와 경험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벨기에에서 승리하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주민들 사이에서 친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2. 2.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루이 18세를 파리에서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유럽 열강(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빈 회의에서 나폴레옹을 불법자로 선언했고,[1] 1815년 3월 13일 이 선언에 서명하면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3월 25일, 유럽 열강들은 추가 조약을 비준하여 각국이 1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영국은 상비군 규모가 작아 병력 제공에 어려움을 겪었고, 다른 국가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했다.
동맹군은 1815년 7월 1일에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프로이센의 블뤼허와 영국의 웰링턴이 원했던 것보다 늦은 시기였는데, 이들의 군대는 이미 6월에 준비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늦은 침공은 모든 동맹군이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여 나폴레옹에게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군대와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나폴레옹은 방어 대신 공격을 선택하여, 모든 적이 집결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주요 동맹군을 격파하여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평화 회담으로 이끌어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를 맺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벨기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분산되어 있어 각개격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즉시 지원을 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벨기에 주둔 영국군은 대부분 경험이 부족한 2선급 부대였고, 네덜란드 군대 역시 장비와 경험이 부족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벨기에에서 친프랑스 혁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3. 군사적 충돌
1815년 6월 15일, 나폴레옹은 12만 8천 명의 북부군을 이끌고 벨기에 국경을 넘어 샤를루아 근처 토윈으로 은밀하게 진입하여 연합군 전초 기지를 격파하고, 웰링턴 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만나는 지점인 "중앙 위치"를 확보했다.[1]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몬스를 거쳐 브뤼셀 서쪽으로 이동하여 연합군을 포위하려 할 것으로 예상하고, 항구와의 통신이 끊길 것을 우려했다. 나폴레옹은 허위 정보를 통해 이러한 견해를 부추겼다.
웰링턴은 오후 3시까지 샤를루아 점령 소식을 듣지 못했고, 오렌지 공의 메시지를 통해 확인한 후, 그의 군대에 집결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주 공격이 몬스를 통해 올지 확신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야 나폴레옹의 의도를 확신하고 니벨과 카트르브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자정 직전에 발송했다.
프로이센 참모는 프랑스군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지에텐 장군은 6월 13일 야영지 불빛 수를 주목했고, 블뤼허는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먼저 공격했다. 6월 15일, 그라프 폰 지에텐의 제1군단 후위 부대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저지하여 블뤼허가 솜브레프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네 원수에게 카트르브라 교차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고, 네의 정찰병은 그날 저녁 카트르브라에 도착했다.
6월 16일, 네 원수는 카트르 브라에서 웰링턴 군대의 네덜란드군과 마주쳤으나, 병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교차로 점령에 실패했다. 웰링턴이 직접 지휘를 맡고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선은 강화되었고,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같은 날, 나폴레옹은 리니 전투에서 블뤼허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에 중심부가 무너졌지만 측면은 굳건히 버텼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이 전역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전날 밤 내린 비로 인해 공격이 몇 시간 지연되었고, 늦은 오후까지 프랑스군은 웰링턴 공작의 군대를 몰아내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하여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면서, 연합군을 분산시키려던 나폴레옹의 전략은 실패했고, 프랑스군은 전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날 아침, 나폴레옹은 마르샬 그루시에게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바브르 전투는 프랑스의 헛된 승리로 끝났다. 그루시가 이끄는 북부군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했고, 다른 프랑스군 부대들은 그 주변에 재결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연합 세력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고, 파리를 향해 퇴각했다.
3. 1. 프랑스군의 배치와 전략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했다. 루이 18세가 남긴 5만 6천 명의 병력에서 시작해 5월 말까지 19만 8천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1] 이 병력을 여러 군단으로 나누어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했다. 주요 부대는 다음과 같다.- 알프스 근처 남쪽에 배치된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의 이탈리아 진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 프랑스-프로이센 국경에 배치된 군대는 프로이센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다.
- 라르메 뒤 노르(북부군)는 네덜란드 국경에 배치되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 라마르크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는 라 방데 지역의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부에 배치되었다.
나폴레옹은 직접 라르메 뒤 노르(북부군)를 이끌고 워털루 전역에 참여했으며, 군단은 다음과 같이 배치했다.
군단 | 지휘관 | 주둔지 |
---|---|---|
제1군단 | 에를롱 | 릴과 발랑시엔 사이 |
제2군단 | 르일 | 발랑시엔과 아벤 사이 |
제3군단 | 방담 | 로크루아 주변 |
제4군단 | 제라르 | 메츠 |
제6군단 | 로바우 | 라옹 |
제1, 2, 3, 4 예비 기병 군단 | 그루시 | 기즈 |
제국 근위대 | 모르티에 | 파리 |
전역이 시작되자 나폴레옹은 6월 15일 저녁 네 원수에게 군대 좌익(제1군단과 제2군단)을 맡겨 카트르 브라에서 웰링턴과 대결하게 했다. 6월 17일 아침, 우익(제3군단과 제4군단)을 그루시 원수에게 맡겨 후퇴하는 프로이센군(바브르로 후퇴)을 추격하게 했다. 그는 예비군(제국 근위대, 제6군단, 제1, 2, 3, 4 기병 군단)을 이끌고 네의 부대에 합류하여 웰링턴을 워털루까지 추격했다.
3. 2. 연합군의 배치와 전략

1815년 6월 초,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은 현재 벨기에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93,000명)은 브뤼셀에 사령부를 두었고, 블뤼허의 프로이센군(116,000명)은 나뮈르에 사령부를 두었다.
웰링턴의 군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군단 | 지휘관 | 병력 | 사령부 위치 | 배치 지역 |
---|---|---|---|---|
제1군단 | 오렌지 공 | 30,200명 | 브레인르콩트 | 앙기앙-제나페-몬스 |
제2군단 | 힐 경 | 27,300명 | 아스 | 아스-오드나르데-겐트 |
예비 기병 | 어스브리지 경 | 9,900명 | 드렌드르 강 계곡 | 헤라르츠베르헌과 니노베 사이 |
예비군 | 웰링턴 친솔 | 25,500명 | - | 브뤼셀 주변 |
군단 | 지휘관 | 병력 | 사령부 위치 | 배치 지역 |
---|---|---|---|---|
제1군단 | 지텐 백작 | 30,800명 | 샤를루아 | 삼브르 강을 따라, 퐁텐뢰베크-플뢰뤼-무스티에 |
제2군단 | 피르히 1세 | 31,000명 | 나뮈르 | 나뮈르-아뉘-위 |
제3군단 | 틸레만 | 23,900명 | 시네 | 뫼즈 강 굽이, 디낭-위-시네 |
제4군단 | 뷜로 | 30,300명 | 리에주 | 리에주 주변 |
연합군의 전선은 약 약 144.84km에 걸쳐 뻗어 있었고, 주둔지의 평균 깊이는 약 48.28km였다. 전 병력을 어느 한쪽 측면에 집중시키려면 6일, 샤를루아 주변의 중앙 지점에서는 3일이 걸렸다.
네 원수는 6월 16일 콰트르 브라에서 웰링턴 군대의 네덜란드군과 마주쳤으나, 병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교차로 점령에 실패했다. 웰링턴이 직접 지휘를 맡고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선은 강화되었고,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다음 날, 연합군은 워털루 전투를 위해 더 유리한 지형으로 후퇴했다.
3. 3. 초기 전투 (6월 15일)

1815년 6월 15일, 나폴레옹은 12만 8천 명의 북부군을 이끌고 벨기에 국경을 넘어 샤를루아 근처 토윈으로 은밀하게 진입했다.[1] 프랑스군은 연합군 전초 기지를 격파하고 나폴레옹이 선호하는 "중앙 위치"를 확보했다. 이 위치는 북서쪽의 웰링턴 군과 북동쪽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몬스를 거쳐 브뤼셀 서쪽으로 이동하여 연합군을 포위하려 할 것으로 예상했다. 웰링턴은 이러한 움직임이 보급을 위해 의존하는 항구와의 통신을 끊을까 두려워했다. 나폴레옹은 허위 정보를 통해 이러한 견해를 부추겼다.
웰링턴은 오후 3시까지 샤를루아 점령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는 웰링턴의 정보 책임자인 콜컨 그랜트의 메시지가 뢴베르크 장군에 의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오렌지 공의 또 다른 메시지를 통해 확인이 빠르게 이어졌다. 웰링턴은 그의 군대에 사단 본부 주변에 집결하라고 명령했지만, 샤를루아 공격이 위장 공격이고 주 공격은 몬스를 통해 올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웰링턴은 저녁 무렵에야 나폴레옹의 의도를 확신했고, 그의 군대에 니벨과 카트르브라로 집결하라는 명령은 자정 직전에 발송되었다.
프로이센 참모는 프랑스군의 의도를 훨씬 더 정확하게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센군은 방심하지 않았다. 지에텐 장군은 6월 13일 일찍이 야영지의 불빛 수를 주목했고 블뤼허는 그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북부군의 우익과 예비군을 동원하여 먼저 공격했다. 6월 15일 그라프 폰 지에텐의 제1군단 후위 부대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저지하여 블뤼허가 방어적 속성이 좋은 곳으로 이전에 선택했던 솜브레프 위치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네 원수를 프랑스 좌익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웰링턴이 급히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있던 카트르브라의 교차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네의 정찰병은 그날 저녁 카트르브라에 도착했다.
3. 4. 카트르 브라 전투 (6월 16일)
16일에 진격한 네 원수는 웰링턴 군대의 네덜란드군이 가볍게 점령하고 있던 카트르 브라를 발견했다.[1] 네는 하루 종일 연합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고 산발적인 전투를 벌여 결국 교차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1] 오후 중반에 웰링턴은 카트르 브라에서 연합군의 개인적인 지휘를 맡았다.[1] 연합군이 교차로로 모여들면서, 그날 내내 전선은 꾸준히 강화되었다.[1] 전투는 전술적 무승부로 끝났다.[1] 다음 날, 연합군은 워털루 전투의 전주곡으로, 브뤼셀로 가는 길을 따라 북쪽의 더 유리한 지형에서 병력을 통합하기 위해 카트르 브라 전장을 양보했다.[1]3. 5. 리니 전투 (6월 16일)
한편, 나폴레옹은 같은 날 블뤼허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군대의 우익과 예비대를 사용하여 리니 전투에서 승리했다.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에 중심부가 무너졌지만 측면은 굳건히 버텼다. 프로이센 기병대의 몇 차례의 맹렬한 돌격은 프랑스군의 추격을 막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6월 18일 아침까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다르론의 제1군단은 콰트르 브라 전투에도, 리니 전투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두 전투 사이를 방황했다. 나폴레옹은 네에게 편지를 보내 다르론이 너무 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둔 것이 콰트르 브라에 대한 공격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할 수 있었음에도 다르론을 소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명령 어조는 그가 도움 없이 리니에서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실제로 그랬다).[1]3. 6. 워털루 전투 (6월 18일)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이 전역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전날 밤 내린 비로 인해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느라 나폴레옹이 공격을 몇 시간 지연시켰다. 늦은 오후까지 프랑스군은 웰링턴 공작의 군대를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대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하여 점점 더 많은 수로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면서, 연합군을 분산시키려던 나폴레옹의 핵심 전략은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연합군의 총공세에 밀려 혼란 속에 전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날 아침, 나폴레옹은 북부군 우익 사령관 마르샬 그루시에게 프로이센군이 재편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오전 6시경에 전달되었고, 그루시의 군단은 오전 8시에 이동을 시작했다. 정오 무렵에는 워털루 전투의 포성이 들려왔다. 그루시의 군단 지휘관들, 특히 제라르는 "포성이 들리는 곳으로 행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 그러나 이는 "프로이센군을 와브르를 지나 몰아내고 여기서 나와 합류하는 칼이 될 것입니다"라는 나폴레옹의 명령과 상반되는 것이었고, 그루시는 이 조언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과 그루시 모두 프로이센군이 더 이상 궤멸되거나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4시경, 같은 지시를 반복하는 두 번째 명령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폴레옹과 합류할 수 없었다.
3. 7. 와브르 전투 (6월 18-19일)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마르샬 그루시는 바브르 인근에서 요한 폰 틸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제3군단을 공격했다. 그루시는 자신이 여전히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의 후위 부대와 교전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틸만 장군의 제3군단만 남았을 뿐, 나머지 3개 프로이센 군단(제1, 제2, 그리고 아직 신선한 제4군단)은 리니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재편성되어 워털루 전투를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바브르 전투는 프랑스의 헛된 승리로 끝났다. 그루시가 이끄는 북부군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했고, 다른 프랑스군 부대들은 그 주변에 재결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연합 세력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고, 파리를 향해 퇴각했다.
4. 프랑스 침공과 나폴레옹의 몰락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웰링턴 공작의 영국-연합군과 블뤼허 공의 프로이센군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로이센군은 샤를루아를 거쳐 아베느와 라옹으로 진격하여 추격을 맡았고, 영국-연합군은 니벨과 빈슈를 거쳐 페론으로 진격했다.[1] 그나이제나우 원수 지휘 하의 프로이센 기병대는 프랑스군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나폴레옹은 필리프빌로 이동하여 구루시 원수와 연락을 취하고, 다른 장군들에게는 군단을 파리로 급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요새 사령관들에게는 끝까지 저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웰링턴의 군대는 프랑스 민간인을 연합국의 일원처럼 대우하며 진격했지만,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인을 적으로 간주하며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아베느를 점령한 프로이센군은 점령지에서 약탈과 만행을 저질렀다.
워털루 전투 이후 3일 만인 6월 21일, 나폴레옹은 파리에 도착했지만, 국민적 저항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1815년 6월 22일, 나폴레옹은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푸셰가 이끄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연합군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6월 29일, 나폴레옹은 로슈포르로 피신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해군의 봉쇄로 인해 좌절되었다.
7월 2일, 프로이센군은 파리 남쪽의 이시 마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다음날인 7월 3일, 이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파리는 연합군에게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 지휘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요청했다. 생 클루 궁전에서 양측 대표가 만나 협상한 결과, 생 클루 협약에 따라 파리는 항복했다. 7월 4일, 프랑스군은 파리를 떠났고, 7월 6일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임시 정부는 해산되었고, 하원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4. 1. 연합군의 진격과 프랑스군의 저항
웰링턴 공작 휘하의 영국-연합군과 블뤼허 공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후, 프로이센군이 샤를루아를 거쳐 아베느와 라옹으로 진격하여 추격을 맡고, 영국-연합군은 니벨과 빈슈를 거쳐 페론으로 진격하기로 합의했다.[1]그나이제나우 원수 지휘 하의 4,000명의 프로이센 기병은 적극적인 추격을 통해 프랑스군이 회복할 기회를 박탈하고 대부분의 대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패배한 프랑스군은 후위 부대 없이 퇴각했으며, 프로이센군의 추격으로 보몽과 필리프빌 방향으로 도망쳤다.
나폴레옹은 샤를루아에서 필리프빌로 이동하여 구루시 원수와 소통하고, 장 라프 장군, 르코르브 장군, 라마르크에게 군단을 파리로 급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요새 사령관에게 최후까지 방어하라고 지시하고, 술트 원수에게 병력을 모아 라옹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술트 휘하의 프랑스군은 혼란 속에 라옹으로 퇴각했고, 구루시는 레텔을 거쳐 랭스로 진격하여 술트와 합류하려 했다. 웰링턴은 프랑스 심장부로 빠르게 진격하며 프랑스 민간인을 연합국의 일원처럼 대우하도록 군사 명령을 내렸고, 그의 군대는 대체로 이를 따랐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인을 적으로 취급하며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보몽에서 프로이센군은 아베느를 점령했는데,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저항했으나 탄약고 폭발로 400명이 사망하자 항복했다. 프로이센군은 점령된 마을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웰링턴은 말플라케 선언을 발표하여 자신의 군대가 따라야 할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 후 3일 만인 6월 21일 파리에 도착했지만, 국민적 저항의 희망은 사라진 상태였다. 나폴레옹과 그의 형제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의회를 해산하고 나폴레옹을 독재자로 선포하려 했으나, 다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운명이 의회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22일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위해 퇴위했다.
나폴레옹의 퇴위와 함께 프랑스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고, 푸셰가 이끌었다. 임시정부는 다부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연합군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6월 24일, 찰스 콜빌 경은 캉브레를 점령했고, 생캉탱은 프랑스군에 의해 버려졌으며, 기즈 성은 프로이센군에 항복했다. 6월 25일, 나폴레옹은 푸셰로부터 파리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고 말메종으로 물러났다.
6월 27일, 르 케누아는 웰링턴 군대에 항복했고, 6월 26일에는 페론이 점령되었다. 6월 28일, 프로이센군은 크레피, 생리스, 라 페르테-밀론에 있었고, 6월 29일에는 선발대가 생 드니, 곤느스에 있었다.
술트는 군 최고 지휘관에서 해임되고 구루시 원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임시 정부는 술트의 충성심을 의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구루시는 빌레-코트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 후 마른 강을 건너 퇴각했지만, 프랑스군은 탈영으로 인해 병력 수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구루시는 남은 병력과 함께 파리로 퇴각하여 주력군의 잔당과 합류했다. 파리는 국민 방위군, '근위대 티레르', '페데레' 등 40,000명 이상의 병력이 있어 강력한 저항이 가능했다. 6월 29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로슈포르로 물러나 미국으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영국 해군의 봉쇄로 무산되었다.
6월 30일, 블뤼허는 오베르빌리에를 점령하고 센 강을 건너 파리의 서남쪽에 병력을 투입했다. 7월 1일, 웰링턴 군대가 도착하여 파리 북쪽의 연합군 진지를 점령했다. 파리 남쪽 로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기병 여단을 격파했지만, 프로이센군의 파리 남쪽 이동을 막지는 못했다.
4. 2. 나폴레옹의 퇴위와 유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21일 파리로 돌아왔으나, 의회와 대중은 국민적 저항 조직에 부정적이었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했지만, 아들이 오스트리아에 있었기에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다.[1]조제프 푸셰가 이끄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연합군 사령관들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1] 6월 25일, 나폴레옹은 임시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를 떠나 말메종으로 거처를 옮겼다.[1]
6월 29일, 나폴레옹은 헨리 호섬 부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봉쇄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7월 3일, 이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며 파리는 연합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했고, 프랑스 지휘부는 항복과 함께 즉각적인 휴전을 요청했다.
생 클루 궁전에서 양측 대표가 협상하여 생 클루 협약에 따라 파리가 항복했다. 7월 4일, 프랑스군은 파리를 떠났고, 7월 6일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임시 정부는 해산되었고, 하원은 항의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5. 전후 처리와 영향
루이 18세는 1815년 7월 8일 파리에 입성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항복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1821년 5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1815년 7월 8일 임시 정부가 붕괴된 후에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던 프랑스 요새들 중 마지막으로 항복한 곳은 샤를몽 요새로, 1815년 9월 8일에 항복했다.
5. 1. 파리 조약 (1815)
1815년 11월, 프랑스와 제7차 동맹국 간에 정식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파리 조약 (1815년)은 파리 조약 (1814년)보다 프랑스에 덜 관대했다. 프랑스는 영토를 잃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최소 5년 동안 점령군을 주둔시키는 데 동의했다.5. 2. 빈 체제의 성립과 영향
나폴레옹이 1815년 엘바 섬에서 돌아와 프랑스 황제에 복귀하자, 유럽 열강(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과 그 동맹국들은 빈 회의에서 나폴레옹을 불법자로 선언하고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1] 이들은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각국이 1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동맹군은 1815년 7월 1일에 프랑스 침공을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블뤼허와 웰링턴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이 이미 준비를 마친 6월보다 늦은 시점이었지만,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이 합류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로써 동맹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시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군대와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주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방어 대신 선제공격을 선택했다. 그는 주요 동맹군을 각개격파하여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정부를 평화 회담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은 벨기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분산되어 있어 각개격파하기 쉽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증원이 늦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벨기에 주둔 영국군은 대부분 2선 병력이었고, 네덜란드 연합군은 경험이 부족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승리가 벨기에에서 친프랑스 혁명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6. 역사적 평가와 논쟁
이 전역은 프로이센의 군사 전략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적 수준에서 심도 있게 연구한 대상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1827년경 《1815년 전역: 1815년 전역의 전략적 개요》를 집필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그의 성숙한 이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1]
6. 1. 군사적 관점에서의 평가
이 전역은 유명한 프로이센 군사 전략 이론가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전략적 수준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1815년 전역: 1815년 전역의 전략적 개요》로, 1827년경에 집필되었다. 이 연구는 클라우제비츠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러한 연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성숙한 이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여겨진다.[1] 클라우제비츠의 연구는 웰링턴의 참모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웰링턴에게 전역에 관한 유일하게 출판된 에세이, 즉 그의 즉각적인 공식적인 사후 보고서("배서스트 경에게 보낸 워털루 보고서" 등) 외에, 1842년의 《워털루 전투에 관한 각서》를 쓰도록 했다. 이 클라우제비츠와의 논의는 19세기에 영국에서 매우 유명했다 (예를 들어, 체스니의 《워털루 강의》(1868)에서 널리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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