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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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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후는 887년에 태어나 오대 십국 시대 후당, 후진, 후한을 거치며 활동한 역사가이자 관료이다. 그는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왕처지 휘하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후당 장종, 명종 시기에 태상박사, 한림학사 등을 역임했다. 이사원 치세에는 재상에 올랐으며, 후진 시대에는 구당서 편찬을 주도했다. 후진 멸망 후 요나라에 의해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94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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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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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유후는 887년 당나라 희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탁주(涿州, 현재의 바오딩시, 허베이성)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유승(劉乘)과 아버지 유인(劉因)은 모두 유주(幽州, 현재의 베이징시)에서 관리로 근무했다.[1]

유후는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와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형 유현(劉晅, 구오대사에서는 劉晅, 오대사신에서는 劉暄으로 표기)[1][2]과 남동생 유호(劉皞) 또한 고향에서 이름을 알렸다. 거란족의 군대가 탁주를 점령했던 천우 연간(904~907년)에 유후는 포로로 잡혀 신주(新州, 현재의 장자커우시, 허베이성)로 끌려갔지만, 거란족에게서 탈출했다. 그는 이후 대녕산(大寧山)에 머물며, 훗날 후당 관리가 된 여몽기(呂夢奇) 및 장린(張麟)과 함께 시를 읊고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1]

어느 시점에, 당시 의무절도사(義武, 본부는 현재 바오딩)를 통치하던 왕처지는 양자 왕도를 예주(易州, 현재 바오딩)의 자사로 임명했다. 왕도는 유후에게 군사 사무 담당 비서로 그의 참모진에 합류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왕도가 예주 자리를 마치고[1] 유후는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대신 왕도는 그를 의무의 수도 중산(中山)으로 함께 가자고 초대했다. 당시 유후의 형 유현 또한 탁주에서 도착했고, 왕도는 그들 두 사람을 아버지 왕처지에게 추천했다. 왕처지는 유후를 본부 사무 담당 비서로 임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처지가 관찰사(觀察使)로 임명되면서 유후를 비서로 승진시켰다.[1]

약 2년 후,[1] 921년, 왕도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왕처지로부터 절도를 빼앗았다.[3] 왕도의 측근 중 한 명인 하소미(和少微)는 이전에 유현과 불화가 있었기에, 유현을 모함했고 왕도는 유현을 죽였다. 유후는 절도를 탈출하여 진 영토인 창주(滄州, 현재의 창저우시, 허베이성)에 머물렀다. 형해절도사(橫海, 본부는 창주) 이존심은 그를 비서로 초대했다.[1]

3. 후당(後唐) 시대

후당 장종 때 태상박사와 한림학사를 지냈고, 명종 때는 병부시랑과 단명전학사를 역임했다.[1]

3. 1. 이존욱(李存勖) 치세

923년, 이존심의 군주이자 양아버지인 이존욱후당 황제의 칭호를 주장한 후,[5] 유후는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었다. 그는 태상시(太常寺)의 학자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또한 예부(禮部)의 하급 관리인 선부원외랑(膳部員外郎)을 거쳐 형부(刑部)의 감독 관리인 비부랑중(比部郎中)으로 승진했다.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일정 기간 관직을 떠나 애도 기간을 가졌으며, 그 기간이 끝나자 병부(兵部)의 감독 관리인 고부랑중(庫部郎中)이 되었고, 한림학사 역할도 다시 수행했다.[1]

3. 2. 이사원(李嗣源) 치세

이사원이 황제가 된 후, 유서는 중서성(中書省)의 입법부에서 중간급 관료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1] 그는 후에 호부시랑(戶部侍郎), 단명전(端明殿) 학사 직책도 맡았다.[1] 이사원은 그의 우아함을 존경하고, 그의 온화한 성품을 좋아했다고 한다.[1]

933년, 유서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입법부 부장)과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받아 재상이 되었고,[7] 형부상서(刑部尚書)도 겸임했다.[1] 명종 때 병부시랑·단명전학사에 임명되었다.

3. 3. 이사원 사후

이종후가 933년에 사망한 후, 그의 참모였던 주홍조와 봉윤은 이종가석경당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전출시키려 하였다.[8] 이에 반발한 이종가는 반란을 일으켜 황도 낙양으로 진격했다. 이종후는 도주하고 주홍조는 자살, 봉윤은 살해당했다.[8] 안총진은 풍도를 포함한 문관들에게 이종가를 맞이하도록 요청하여, 이종가가 낙양에 입성하여 황제가 되었다.[8]

이종가는 유욱에게 삼재정 기관(세금, 재무, 소금 및 철 독점)을 맡기고, 이부상서 및 ''문하시랑'' 직함을 주었다.[1][8] 유욱은 재정 기록을 검토하여 부풀려진 재무 준비금과 회수 불가능한 채무를 발견하고, 이종가에게 보고하여 채무 탕감을 건의했다. 이종가는 이를 받아들여 창흥 연호 (930-933) 이전의 채무를 탕감하는 조치를 내렸다.[8] 가난한 백성들은 기뻐했지만, 삼재정 기관의 행정관들은 유욱에게 불만을 품었다. 얼마 후 유욱은 재상직에서 해임되고 ''우복사''로 임명되었으며, 행정관들은 이를 축하하며 유욱을 배웅하지 않았다.[8]

4. 후진(後晉) 시대

후진 시기, 유후는 사공, 동평장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개운 2년(945년), 석중귀의 명으로 『구당서』 200권 편찬에 참여했으나, 실제 편찬은 장소원, 가위, 조영 등이 주도하였다.[1]

4. 1. 석경당(石敬瑭) 치세

936년, 석경당은 하동 절도사(河東, 현재 산시성 타이위안에 위치)에서 후당 이from ke에게 반기를 들었고, 요나라 요 태종의 지원을 받아 이from ke를 전복하고 후당을 멸망시킨 후, 스스로 후진을 건국했다.[9] 937년, 주장군 판옌광이 천웅 절도사(天雄, 현재 허베이성 한단에 위치)에서 석경당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장군 장총빈(張從賓)은 낙양(당시 수도는 카이펑이었음)에서 판옌광을 지지하며 석경당의 아들인 하양 절도사(河陽, 현재 허난성 자오쭤에 위치) 사충신(石重信)과 낙양 수비대리 사충애(石重乂)를 죽였다. 사충애는 석경당이 그 지역을 맡긴 인물이었다. 장의 반란이 곧 진압된 후,[10] 유서는 낙양 수비대와 하남 부(河南, 즉 낙양 지역)의 시장 대행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금 및 철 독점 관리국을 다시 맡겼다.[1]

938년, 석경당이 요 태종(아마도 이때 국호를 거란에서 요로 바꿨을 것으로 추정)과 태종의 어머니 술률 황태후에게 웅대한 명예 칭호를 헌상할 때, 펑다오와 유서를 거란으로 보내 펑다오가 황태후에게, 유서가 태종에게 칭호를 바치도록 했다.[10] 그들이 돌아오자, 유서는 태자태보와 좌복야의 칭호를 받았고, 조공에 봉해졌다. (그의 태자태보 칭호는 곧 태자태부로 바뀌었다.)[1]

후진 때, 사공·동평장사의 관위에 이르렀다. 개운 2년(945년)에 석중귀가 『구당서』 200권의 편찬에 초빙했다. 실제로는 장소원, 가위, 조영 등이 지었다.

4. 2. 석중귀(石重貴) 치세

944년, 석경당이 사망하고 그의 조카 석중귀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에 후진은 석중귀가 요나라에 반항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때 유후는 다시 '문하시랑'과 재상, 그리고 '사공'(司空중국어)에 임명되었다.[11] 그는 또한 황실 역사 편찬과 세 개의 재정 기관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1] 945년에 새로 완성된 ''구당서''를 석중귀에게 올린 사람은 유후와 역사가 장소원이었으며, 그들은 그 공로로 포상을 받았다.[12] (그러나 석경당 재임 시절 재상을 지냈던 조영은 장소원을 포함한 다른 다섯 명의 역사가들과 함께 941년 무렵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1][13] 945년, 석중귀의 측근 봉유 (석중귀의 부인 봉황후의 형제)와 이언도(李彥韜중국어)가 재상 겸 참모총장 상위한을 반복적으로 비방하자, 석중귀는 상위한을 해임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유후와 동료 재상 이송의 간청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고, 대신 봉유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여 상위한의 권한을 분산시켰다.[11]

5. 후진 멸망 이후

946년, 석중귀가 장수 두중위와 이수진을 요나라로 공격하게 하자 요 태종은 반격하여 두중위와 이수진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았다. 그 후 요 태종은 개봉을 향해 남쪽으로 공격해 왔고, 개봉은 방어 병력이 없었다. 석중귀는 항복했고, 후진은 멸망했다.[14] 947년 초, 요 태종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로 선포했다. 얼마 동안 유후와 다른 후진 재상들은 재상의 자리에 머물렀지만, 유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병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사임은 허가되었고 태보의 칭호를 받았다. 그해 늦게 요 태종이 개봉에서 철수할 때, 많은 후진 고위 관리들을 데려갔지만,[15] 유후는 질병 때문에 개봉에 남을 수 있었다. 947년 여름에 유후는 사망했다. 이후 후진 장군 유지원이 새로운 후한의 황제를 칭하자 유후를 기렸다.[1]

6. 저서

참조

[1]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2]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문서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2]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3]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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