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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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대목은 조위의 인물로, 원래 조씨의 노예였다가 황제 조방을 섬기며 전중교위까지 올랐다. 249년 고평릉의 변에서 사마의의 명으로 조상에게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사마의가 조상을 처형하자 복수를 위해 사마사의 부하가 되었다. 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문흠에게 사마사의 죽음을 암시하며 항복을 권유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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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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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윤대목 |
로마자 표기 | Yun Daemok |
시대 | 삼국시대 |
국적 | 위 |
직업 | 전중교위 |
주군 | 조방 → 조모 |
상세 정보 | |
활동 시기 | 조방과 조모 시기 |
주요 활동 | 조모 옹립 시도 실패 후 처형 |
2. 생애
윤대목은 본래 조씨 가문의 노예 출신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황제 조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신임을 얻어 관직에 나아갔다.[2]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상에게도 신임을 받았다.
249년 정월,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을 때, 윤대목은 사마의의 명령으로 조상에게 항복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낙수를 가리키며 조상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으나,[3][4] 사마의는 결국 조상과 그 일파를 처형했다. 이 일로 인해 윤대목은 조씨 가문에 대한 충성심과 죄책감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윤대목은 사마사의 휘하에 들어가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사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자(관구검·문흠의 난), 윤대목은 사마사를 따라 종군했다. 전투 중 사마사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윤대목은 문흠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파견된 기회를 이용해 사마사의 위급함을 알려 조씨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문흠은 윤대목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질책하며 활을 겨누었다.[5] 윤대목은 눈물을 흘리며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리고 돌아섰다.[5]
관구검·문흠의 난이 진압된 후, 윤대목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 1. 초기 생애와 출세
윤대목은 본래 조씨 가문의 노예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제 조방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2] 관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정치 실권을 쥐고 있던 조상에게도 신임을 받았다. 전중교위를 지냈다.2. 2. 고평릉의 변
원래 조씨 가문의 노예였으나, 어릴 적부터 황제 조방 곁에서 시중을 들며 관직에 발탁되었다.[2] 당시 정치 실권을 쥐고 있던 조상에게도 신임을 받았다.249년(정시 10년) 정월, 당시 실권자였던 조상 형제가 황제 조방과 함께 수도를 비운 사이, 태부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평릉의 변).[3][4] 사마의는 윤대목에게 조상을 찾아가 항복을 설득하도록 명령했다. 윤대목은 낙수를 가리키며 사마의가 조상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맹세했고,[3][4] 이를 믿은 조상은 결국 항복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약속을 어기고 조상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했다(『삼국지』 조상전 주석 『세어』, 『진서』 선제기).
2. 3. 관구검·문흠의 난
255년(위나라 정원 2년), 관구검과 문흠이 수춘(壽春, 현재의 수현)에서 사마사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며, 윤대목도 이때 종군했다. 전투 중 사마사가 안질로 인해 병세가 위독해졌다.[5]사마사는 윤대목에게 문흠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하라고 명령했다. 윤대목은 사마사의 명령을 따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조씨 왕조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단기로 문흠을 찾아가 "군후[1]께서는 무엇 때문에 며칠간의 고생을 참지 못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며, 사마사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은밀히 알리려 했다.[5]
그러나 문흠은 윤대목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크게 질책했다.
:너는 선제의 가신이었으면서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마사와 함께 반역을 저지르려 하느냐?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하늘이 네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5]
문흠은 분노하여 활로 윤대목을 쏘려 했다. 윤대목은 눈물을 흘리며 "일은 이제 실패할 것 같으니, 부디 최선을 다하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5]
결국 관구검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고, 문흠은 오나라로 도망쳤다. 사마사 역시 반란을 진압한 후 허창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윤대목이 문흠에게 사마사의 위독함을 알리려 한 것은, 과거 고평릉의 변 당시 사마의에게 속아 조상을 죽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과 조씨 가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3][4][5]
2. 4. 그 후
관구검과 문흠의 난 이후 윤대목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참조
[1]
문서
くんこう。諸侯への敬称。
[2]
서적
위말전
[3]
서적
삼국지
[4]
서적
위진세어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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