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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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후는 조선 선조 때의 무관으로, 1572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1591년 신묘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창신교위에 초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 선전관으로 활동했다. 이순신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천부사로 추증되었지만, 관련 기록이 미비하고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이광후는 형 이광선, 숙부 이몽상과 함께 '일가족 삼충신'으로 불리며, 2001년과 2006년에 이광후의 무과 급제 및 난중일기 관련 기록이 확인되었다.
함성군 이극해의 7세손으로, 1572년(선조 5) 나주에서 참봉 이몽정(李夢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형 이광선과 함께 사촌(莎村) 최사물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나, 내우외환의 엄중한 시기에 경사(經史) 탐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무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1591년(선조 24) 신묘별시 무과에 형과 나란히 급제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당시 숙부 이몽상(李夢祥) 역시 1589년 무과에 급제한 상태여서, 세 숙질이 연이어 홍패를 받아 일가를 빛냈다.
함성군 이극해(李克諧)의 7세손으로, 1572년(선조 5) 나주에서 참봉 이몽정(李夢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함성군 이극해의 7세손인 이광후는 1572년(선조 5년) 나주에서 참봉 이몽정(李夢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형 이광선(李光先)과 함께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나,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학문 탐독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형제가 함께 무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광후가 사후에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절차로 숙천부사로 추증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전관에 제수되어 종전 무렵 전사했다고 전해지나, 공식적인 전사자 명부에는 이름이 없다. 또한 사후에 숙천부사를 역임했다고 하나, 관련 관안 명부에도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직계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현재 나주시 다시면 사동(寺洞) 선영에 있는 형 이광선 장군 묘역 서남쪽 위에 가묘(假墓)가 마련되어 있다.
2. 생애
그러나 영광도 잠시, 1592년(선조 25)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 숙질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가족 삼충신(三忠臣)'이라는 호칭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란의 혼란 속에서 이들의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숙부 이몽상은 군자감 판관을 역임했다는 기록만 남았고, 형 이광선은 건공장군 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하고 행주대첩비, 이치대첩비에 이름이 올랐으며, 선무원종공신 녹권 등 일부 유물이 남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반면 이광후는 승정원 선전관으로서 선조의 명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전달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사후 숙천부사로 추증되었다는 기록 외에는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후손마저 남기지 못하고 절사(絶嗣)하였다.
2. 1. 무과 급제
1591년(선조 24년) 10월, 20세의 나이로 무과에 응시하여 300명 중 병과 4위(전체 39등)로 합격하였다. 이는 형 이광선과 나란히 급제한 쾌거였다. 이광후는 훈련원 창신교위(彰信校尉)에, 형 이광선은 훈련원 현신교위(顯信校尉)에 처음으로 임명되었다.
2. 2. 임진왜란 참전
1592년(선조) 5월 1일(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2. 3. 전사 및 불분명한 기록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선전관으로 참전한 이광후의 전사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종전 무렵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공식적인 전사자 명단에는 이름이 없다. 사후 숙천부사에 추증되었다고는 하나, 이 역시 관직 임명 기록인 관안(官案) 명부에서 확인되지 않아 추증 시점과 절차 등이 불분명하다.
이광후의 생존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이다. 1595년 8월 7일 자 기록에 따르면, 선전관 이광후가 임금의 유지(諭旨)를 가지고 이순신을 찾아와 삼도 수군을 통솔하여 적진으로 바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으며, 이순신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날인 8월 8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을미년〔1595년〕 8월 7일 비가 계속 내렸다. 저녁에 표신(標信)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李光後)가 임금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원수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 8일 오전 비 오는데 선전관이 나갔다.
이 기록을 통해 적어도 1595년 8월까지는 이광후가 생존해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후손들은 이광후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해전에서 총사령관인 이순신마저 전사하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지휘 체계의 혼란 속에서 이광후의 전사 소식이 제대로 기록되거나 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전투 중 바다에 빠져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을 경우, 전사 사실 자체가 확인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측이다.
결과적으로 이광후는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해 절사(絶嗣)하였다. 그의 묘소는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사동(寺洞) 선영에 형 이광선 장군의 묘 서남쪽에 가묘(假墓) 형태로 마련되었다. 직계 후손은 없으나, 방계 후손들이 1916년 묘 앞에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랫동안 문헌 기록에서 누락되었던 이광후의 행적은 2000년대 들어 후손 이재향(李載香)의 노력으로 일부 밝혀졌다. 2001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 옌칭 도서관 소장 신묘 별시 문무과 방목에서 이광후의 무과 급제 사실을 확인했고, 2006년에는 난중일기 초본에서 앞서 언급된 1595년의 기록을 찾아냈다.
3. 가계 및 가족
어려서 형 이광선(李光先)과 함께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경서(經史) 공부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형과 함께 무장의 길을 선택했다. 이광후는 20세의 나이로 1591년 신묘별시 무과 병과 4위로 급제하였고, 형 이광선은 29세의 나이로 같은 해 신묘별시 무과 을과 15위로 급제했다. 한 집안에서 연이어 무과 급제자가 나온 것은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광후는 숙부 이몽상(李夢祥), 형 이광선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 세 사람은 일가족 삼충신(三忠臣)으로 불리며 대대로 전해 내려오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광후 자신은 승정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선조 임금의 명령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아 있으며, 사후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후손을 두지 못하고 절사(絶嗣)하였다.
가계는 다음과 같다.관계 성명 비고 증조부 이진충(李盡忠) 현감(縣監) 역임 조부 이운(李雲) 충순위(忠順衛) 부 이몽정(李夢禎) 참봉(參奉) 역임 숙부 이몽상(李夢祥) 1589년 무과 급제, 군자감 판관(判官) 역임 형 이광선(李光先) 1591년 무과 급제, 소강진(所江鎭) 첨사(僉使) 역임, 1605년 선무원종공신 책록, 관련 유물 12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 지정 본인 이광후(李光後) 1591년 무과 급제, 선전관 역임, 숙천부사 추증 동생 이광립(李光立)
4. 일가족 삼충신
1589년(선조 22년) 숙부(叔父) 이몽상(李夢祥, 1547~1608)이 4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데 이어, 1591년(선조 24년)에는 이광후가 20세의 나이로 신묘별시 무과 병과 4위에, 형 이광선이 29세의 나이로 같은 해 신묘별시 무과 을과 15위로 나란히 급제하였다. 한 집안에서 세 명의 숙질(叔姪)이 연이어 무과에 급제하는 것은 드문 일로, 가문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인물 급제 연도 (왕) 시험 종류 과(科) 등위 (전체 선발 인원 중 순위) 이몽상 1589년 (선조 22) 기축 증광시 병과 11위 (19/28) 이광선 1591년 (선조 24) 신묘별시 을과 15위 (16/300) 이광후 1591년 (선조 24) 신묘별시 병과 4위 (39/300)
그러나 영광도 잠시,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함대 700여 척이 부산포를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큰 위기에 처했다. 이몽상, 이광선, 이광후 세 숙질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으며, 이로 인해 '일가족 삼충신(一家族 三忠臣)'이라는 칭호를 얻어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란의 혼란 속에서 이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숙부 이몽상은 군자감 판관을 역임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형 이광선은 건공장군 수군첨절제사를 지냈으며, 행주대첩비와 이치 전투비에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선무원종공신 녹권과 교지, 고문서 등 일부 유물이 남아 있어, 관련 유물 12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이광후 본인에 대해서는 승정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선조의 명령을 전달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사후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추증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안타깝게도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5. 추모 및 추가 연구 필요성
직계 후손이 없기 때문에, 방계 후손들이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1916년 2월, 방 8세손 은서(恩緖)와 방 10세손 병헌(秉憲)이 묘 앞에 상석(床石)을 설치했으며, 교위공문중(校尉公門中)에서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선대와 함께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2021년부터는 방 14세손 이재흥(李載興)의 제안으로 매년 3월 셋째 주 일요일에 문촌공문중에서 형 이광선 장군과 함께 향사를 올리고 있다.
이광후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방계 후손 이재향은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마저 전사하는 혼란 속에서 지휘 체계가 무너져 이광후의 전사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이광후가 해전 중 총에 맞아 바다에 빠져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면, 전사 사실 자체가 기록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끝난 지 400년이 넘었지만, 이광후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구전만 있을 뿐, 관련 문헌 기록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어 있었다. 심지어 선대가 만든 족보에도 '통정 숙천부사'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기록 부재는 그의 행적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조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다행히 2001년, 후손 이재향이 미국 하버드 옌칭 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 소장 자료에서 이광후가 1591년 신묘 별시 무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신묘 별시 문무과 방목)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또한 2006년에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본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된 사실을 확인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광후의 행적 일부를 밝혀내는 성과가 있었다. 이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그의 삶과 공적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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