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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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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누카이 내각은 1931년 12월 13일 발족하여 1932년 5월 15일 5.15 사건으로 붕괴된 일본의 내각이다.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 사변과 관련된 만주국의 건국, 제1차 상하이 사변 등 국내외 문제에 직면하여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정 정책을 통해 금 수출 재금지, 금본위제 탈퇴, 관리 통화 제도 이행, 인플레이션 정책 전환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만주국 승인 문제와 군부의 강경 노선, 민주주의 불안정 등의 문제에 직면했으며,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되면서 내각이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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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내각
기본 정보
친임식 후의 각료
내각 정보
내각 명칭이누카이 내각
후리가나いぬかいないかく
대수29대
수상 이름이누카이 쓰요시
수상 전직중의원 의원, 입헌정우회 총재
성립 연도1931년
성립 월일12월 13일
종료 연도1932년
종료 월일5월 26일
여당입헌정우회
선거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해산1932년 1월 21일
명단각료 명단 (일본 총리대신 관저 웹사이트)
정부 구성
국가 원수쇼와
국가 원수 직함천황
정부 수반이누카이 쓰요시
정부 수반 직함내각총리대신
성립일1931년 12월 13일
해산일1932년 5월 15일
이전 내각제2차 와카쓰키 내각
다음 내각사이토 내각
의회 회기제60회 제국의회, 제61회 제국의회
소속 정당
중의원 블록입헌정우회
참의원 블록겐큐카이
고유 클럽

2. 내각의 성립 배경

1931년 12월 10일, 만주 사변 대처 문제로 고심하던 제2차 와카츠키 내각(입헌 민정당)은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움직임으로 인해 내각 내 불일치가 발생하여 총사직했다. 아다치 내무대신은 입헌 정우회와의 협력 내각(대연립) 구성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내각 분열로 이어졌다.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아다치 내무대신 한 명만 파면하여 내각을 유지하려 했지만,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이온지는 와카츠키 총리가 아다치 파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원로의 권위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판단했고, 결국 와카츠키 내각의 정권 운영 실패로 간주하여 총사직을 수리했다.

이후 사이온지 원로는 당시 정치 관례였던 헌정의 정도에 따라 야당 제1당인 입헌 정우회의 이누카이 쓰요시 총재를 차기 총리로 추천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온지는 와카츠키 내각 말기에 만연했던 협력 내각 추진 움직임이 헌정의 정도에 어긋난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이누카이 총재와 직접 만나 정우회가 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할 것을 명확히 하고, 정당 내각제를 유지하며 헌정의 정도를 지켜나갈 것을 서로 확인했다.

3. 주요 정책 및 활동

1931년 12월 13일 출범한 이누카이 내각은 1932년 5월 26일까지 166일간 존속했다. 이 시기 일본은 만주 사변의 확대와 세계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심각한 국내외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내각의 주요 정책 및 활동은 다음과 같다.


  • 다카하시 재정: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 주도로 금 수출을 재금지하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하여 관리 통화 제도로 전환했다. 또한, 이전 내각의 긴축 재정(디플레이션 정책)을 확장 재정(인플레이션 정책)으로 바꾸어 경제 불황 극복을 시도했다.
  • 만주 사변 대응 및 만주국 문제: 국제 연맹의 조사단 파견 결정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만주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1932년 3월에는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국했다. 이누카이 내각은 국제 사회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만주국 즉시 승인을 보류했으나, 이는 군부 및 강경 여론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 제1차 상하이 사변 발발: 만주 사변 중 상하이에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1932년 1월 일본군과 중국군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은 군대를 증파하여 전면전을 벌였고, 3월에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정전, 5월에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 민주주의의 위기 심화: 경제 불황과 사회 불안 속에서 정당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깊어졌다. 혈맹단 사건과 같이 정치인과 재계 거물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으며(이노우에 준노스케 전 재무대신, 단 다쿠마 미쓰이 재벌 총수 암살), 사회 전반에 걸쳐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932년 2월 총선거에서 집권 입헌 정우회가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서기관장이 "300석은 힘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는 등, 의회와 정당은 폭력과 테러 위협 앞에서 통치 능력을 상실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를 습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는 5.15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누카이 내각은 총사직했으며, 후임 총재 선출을 둘러싼 정우회 내부의 혼란과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의 결정에 따라 정당 내각제는 막을 내리고 사이토 마코토를 총리로 하는 거국 내각(사이토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이는 일본 정치가 군부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1. 다카하시 재정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은 이누카이 내각이 성립하자마자 즉시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금본위제에서 벗어나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하였다. 더 나아가 이전 입헌 민정당 정권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전환하여, 세계 대공황 이후 계속된 불황에 대한 대책 마련에 잇따라 착수했다.

3. 2. 만주사변과 만주국

만주 사변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누카이 내각은 이전 와카츠키 내각 시기 국제 연맹이 파견한 조사단(리턴 조사단)의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관동군의 만주 지역 치안 유지를 인정한 결정을 이어받았다. 이를 빌미로 관동군은 점차 만주 전역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932년 3월 1일, 관동군은 현지 유력자들을 내세우는 등 절차를 꾸며 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교로 푸이를 집정으로 하는 만주국 건국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국을 즉시 국가로 승인하면 국제 연맹과의 관계가 파탄 날 것을 우려하여 승인을 보류했다. 대신 만주국이 건국을 선언했다는 성명만을 접수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신중한 입장은 만주국 승인을 강력히 요구하는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과 그 휘하의 청년 장교들(황도파), 그리고 군부의 팽창 정책을 지지하는 당시 사회 여론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3. 제1차 상하이 사변

만주 사변이 진행 중이던 시기, 열강의 공동 조계가 있던 상하이에서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폭동이 격화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조계 내 분담 구역 경비를 맡고 있던 일본 해군 육전대와 중화민국의 제19로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은 육군과 해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1932년 2월 20일부터는 제19로군과의 전면적인 전투로 확대되었다. 전투는 1932년 3월 3일 일본에 유리한 전황으로 정전되었으며, 이후 상하이에 주재하던 영국 총영사의 중재를 거쳐 1932년 5월 5일 상하이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사건은 만주 사변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 팽창과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4. 내각 구성원

이누카이 내각은 입헌정우회 소속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자신을 비롯하여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하토야마 이치로 (문부대신), 스즈키 기사부로 (사법대신 → 내무대신) 등 대부분의 각료가 입헌정우회 출신이었다.[1]

다만 육군대신에는 아라키 사다오, 해군대신에는 오스미 미네오 등 군부 인사가 기용되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요시자와 겐키치나 사법대신을 맡은 가와무라 다케지와 같이 무소속 인사도 일부 포함되었다.[1]

내각 출범 초기에는 이누카이 총리가 외무대신을 겸임했으나 곧 요시자와 겐키치에게 자리를 넘겼고, 임기 중 내무대신과 사법대신이 교체되는 등 일부 각료 변동이 있었다.[1] 내각서기관장, 법제국 장관을 포함한 정무차관, 참여관(사무차관에 해당) 역시 대부분 입헌정우회 인사들로 채워졌다.[1]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되면서 내각은 막을 내렸고, 이후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이 임시 총리로서 사후 처리를 담당했다.[3]

4. 1. 국무대신

1932년 5월 15일 5·15 사건으로 암살[4][3]-다카하시 고레키요--입헌정우회민간1932년 5월 16일 ~ 1932년 5월 26일임시 겸임
(대장대신 겸임)[3]외무대신41이누카이 쓰요시--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1월 14일내각총리대신 겸임
1932년 1월 14일 면겸[5]42요시자와 겐키치--무소속외무성1932년 1월 14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
1932년 1월 14일 임명[5]내무대신42나카하시 도쿠고로--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3월 16일1932년 3월 16일 면[6][7]43이누카이 쓰요시--입헌정우회중의원1932년 3월 16일 ~ 1932년 3월 25일내각총리대신 겸임
1932년 3월 16일 겸[7]
1932년 3월 25일 면겸[8]44스즈키 기사부로--입헌정우회중의원[9]1932년 3월 25일 ~ 1932년 5월 26일1932년 3월 25일 임명[8]대장대신31다카하시 고레키요
입헌정우회민간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내각총리대신 임시 겸임육군대신21아라키 사다오
군 (육군)육군중장
(육대 19기)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해군대신15오스미 미네오
군 (해군)해군대장
(해대 갑종 5기)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사법대신33스즈키 기사부로
입헌정우회귀족원
(연구회)1931년 12월 13일 ~ 1932년 3월 25일1932년 3월 25일 면[8]34가와무라 다케지
무소속귀족원
(교우 구락부)1932년 3월 25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
1932년 3월 25일 임명[8]문부대신40하토야마 이치로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농림대신7야마모토 데이지로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상공대신8마에다 요네조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체신대신34미쓰치 조조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철도대신10도코나미 다케지로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척무대신5하타 도요스케
입헌정우회중의원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26일첫 입각


4. 2. 기타

wikitext

직책성명소속/출신
내각서기관장31모리 카쿠중의원, 입헌정우회
법제국 장관29시마다 토시오중의원, 입헌정우회


4. 3. 정무차관 및 참여관

1931년(쇼와 6년) 12월 15일에 임명된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아래와 같다.[10]

'''정무차관'''

직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외무 정무차관이와키 다카노리귀족원/무소속(연구회)/자작
내무 정무차관마쓰노 쓰루헤이중의원/입헌정우회
대장 정무차관호리키리 젠베중의원/입헌정우회
육군 정무차관와카미야 사다오중의원/입헌정우회
해군 정무차관호타 마사쓰네귀족원/무소속(연구회)/백작
사법 정무차관구마가이 나오타중의원/입헌정우회
문부 정무차관안도 마사즈미중의원/입헌정우회
농림 정무차관스나다 시게마사중의원/입헌정우회
상공 정무차관나카지마 지쿠헤이중의원/입헌정우회
체신 정무차관우치다 노부야중의원/입헌정우회
철도 정무차관와카오 쇼하치귀족원/입헌정우회 (교우구락부)
척무 정무차관가토 구메시로중의원/입헌정우회



'''참여관'''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외무 참여관다카하시 구마지로중의원/입헌정우회
내무 참여관후지이 다쓰야중의원/입헌정우회
대장 참여관오타 마사타카중의원/입헌정우회
육군 참여관도키 아키라귀족원/무소속(연구회)/자작
해군 참여관니시무라 시게오중의원/입헌정우회
사법 참여관나가와 가니치중의원/입헌정우회
문부 참여관야마시타 다니지중의원/입헌정우회
농림 참여관이마이 다케히코중의원/입헌정우회
상공 참여관가토 료고로중의원/입헌정우회
체신 참여관사카이 다이스케중의원/입헌정우회1932년 5월 9일 사망으로 결원[11]
도고 미노루중의원/입헌정우회1932년 5월 14일 임명[12]
철도 참여관노다 슌사쿠중의원/입헌정우회
척무 참여관마키노 시즈오중의원/입헌정우회


5. 내각의 종말: 5.15 사건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를 습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는 사건(5.15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혈맹단 사건 등 테러가 잇따르며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던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누카이 총리의 사망으로 이누카이 내각은 총사직했으며,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이 임시로 총리직을 겸임했다. 헌정의 정도에 따라 후임 정우회 총재가 정권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우회 내부에서는 차기 총재로 선출된 스즈키 키사부로 대신 다른 인물을 총리로 내세우려는 정치 공작이 벌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정당 내각제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군부 출신의 비정당인인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을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 이로써 사이토 내각이 성립되었고, 다이쇼 시대부터 이어져 온 헌정의 정도, 즉 정당 내각제의 관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일본 정치사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정당 정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이누카이 내각은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일본 현대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한 내각으로 평가된다. 출범 당시 만주 사변의 처리 문제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기, 혈맹단 사건과 같은 정치 테러가 연이어 발생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극도의 혼란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이누카이 내각은 군부의 독주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으며, 정당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심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특히 만주국 승인 문제를 둘러싼 군부와의 갈등은 내각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냈다.

결정적으로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하면서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래 이어져 온 정당 내각의 관례, 즉 헌정의 정도가 사실상 종언을 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후임 총리로 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지명되면서, 일본 정치는 군부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따라서 이누카이 내각의 붕괴는 단순히 한 정권의 퇴진을 넘어, 일본이 군국주의와 전쟁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6. 1. 부정적 평가

만주 사변 처리 과정에서 관동군의 독주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으며, 만주국의 승인을 둘러싸고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을 비롯한 군부 강경파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는 국제 사회와의 관계를 고려해 만주국 즉시 승인을 보류하려던 이누카이 총리의 입장과 군부의 요구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결과이며, 내각의 정책 결정 능력이 군부의 압력에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국내적으로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 불황과 사회 불안이 지속되면서 정당 정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크게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혈맹단 사건과 같은 극우 세력에 의한 정치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여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1932년 2월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 정우회가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내각 서기관장이었던 모리 카쿠가 "300석은 힘이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은 테러 위협과 극단적인 여론 앞에서 의회와 정당이 점차 통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정적으로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를 습격하여 이누카이 총리를 암살하는 5.15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정치사에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15 사건 이후,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후임 총리로 정당 총재가 아닌 퇴역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를 지명함으로써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부터 이어져 온 헌정의 정도, 즉 정당 내각의 관례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이는 이누카이 내각이 당시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정당 정치를 수호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평가되며, 이후 일본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는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Inuka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1-12-13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彙報」 https://dl.ndl.go.jp[...] 1932-05-16
[4] 문서 五・一五事件により殺害される。
[5]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1-14
[6] 문서 病気療養のため辞任。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3-16
[8]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3-25
[9] 문서 鈴木は12年近く務めた貴族院勅選議員を辞職して1932年(昭和7年)2月の第18回衆議院議員総選挙に出馬し当選。
[10] 간행물 『官報』第1490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1-12-16
[11] 간행물 『官報』第1612号「彙報」 https://dl.ndl.go.jp[...] 1932-05-18
[12] 간행물 『官報』第1610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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