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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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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키 사다오는 1877년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육군대신, 문부대신을 역임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베리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육군대학교 교장, 제6사단 사령관 등을 거쳤다. 그는 군부 내 파벌인 황도파의 수장으로, 국가주의와 군국주의 사상을 주창하며 1930년대 일본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을 지원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주도하며 팽창주의를 지지했다. 2.26 사건 이후 예비역으로 물러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가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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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사다오
기본 정보
아라키 사다오
이름아라키 사다오
원어 이름荒木 貞夫
로마자 표기Araki Sadao
출생일1877년 5월 26일
출생지도쿄도고마에시
사망일1966년 11월 2일
사망지나라현요시노군도쓰카와무라
별칭죽창 장군
정치 경력
제49대 문부대신제1차 고노에 내각
히라누마 내각
문부대신 임기 시작1938년 5월 26일
문부대신 임기 종료1939년 8월 30일
제21대 육군대신이누카이 내각
사이토 내각
육군대신 임기 시작1931년 12월 13일
육군대신 임기 종료1934년 1월 23일
군사 경력
소속 군대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1898년 ~ 1936년
최종 계급육군대장
주요 지휘육군대신
교육총감부 본부장
제6사단
헌병 사령관
참전 전투러일 전쟁
시베리아 출병
주요 훈장욱일동화대수장
금치훈장 (2등)
서보장 (1등)
기타

2. 초기 이력

아라키 사다오는 육군사관학교를 9기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1] 러일 전쟁에 참전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러시아 제국에서 종군했으며, 시베리아 전쟁에는 특무장교로 참전했다.[1]

러일 전쟁 이후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군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러시아 주재 통역장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무관으로 복무하며 러시아와 관련된 경험을 쌓았다.[1] 시베리아 개입 기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원정군 사령부 참모 및 제23보병연대장으로 복무하며 러시아 극동과 바이칼 호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1]

전후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1]

2. 1. 출생과 성장

가나가와현 다마군(多摩郡, 지금의 도쿄도 고마에시)에서 히토쓰바시가의 가신이었던 소학교 교장 아라키 사다노스케(荒木貞之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라키가 태어난 날은 유신삼걸 기도 다카요시의 사망일과 같다.[1] 니혼 중학을 중퇴하였고 1897년 육군사관학교를 9기로 졸업하였다.[1] 이어 1907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1]

1877년(메이지 10년) 5월 26일, 도쿄도 고마에시(출생 당시는 가나가와현 다마군 이즈미촌)에서 초등학교 교장이자 구 이치하시 도쿠가와가 가신이었던 아라키 사다노스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생일은 기도 다카요시의 기일이기도 하다.[1] 일본학원중학교·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897년(메이지 30년) 11월 육군사관학교를 9기로 졸업했다.[1]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제16대 연대기수를 역임했다.[1]

러일전쟁 중에는 근위후비혼성여단의 부관으로 메자와 미치하루 소장을 보좌했다.[1] 여단사령부에는 참모가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1] 메자와 미치하루 소장은 뛰어난 지휘관으로 그 여단은 "꽃의 메자와 여단"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아라키 부관의 이름도 육군 내부에서 주목받게 되었다.[1]

1907년(메이지 40년) 11월,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은사의 군도 수여).[1]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 종군 무관이었다.[1] 시베리아 출병에서는 특무기관장으로 참가했다.[1] 이후 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다.[1]

2. 2. 군 경력

가나가와현 다마군(多摩郡, 지금의 도쿄도 고마에시) 출신인 아라키 사다오는 1897년 육군사관학교를 9기로 졸업하고, 1907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1]

1900년 11월 중위, 1904년 6월 대위로 승진하여 러일 전쟁에 제1근위연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1] 육군대학교 졸업 후 1908년 4월 육군참모본부에서 근무했고, 1909년 11월부터 1913년 5월까지 러시아 주재 통역장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무관으로 복무했다.[1] 1909년 11월 소령, 1915년 8월 중령으로 승진하여 관동군에 배속되었다.[1]

1918년 7월 대령으로 진급한 아라키는 시베리아 개입 기간인 1918년과 1919년에 블라디보스토크 원정군 사령부 참모 및 제23보병연대장으로 복무했고, 러시아 극동과 바이칼 호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1]

1923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8보병여단장이 되었다.[1] 1924년 1월부터 1925년 5월까지 헌병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참모본부 국장으로 복귀했다.[1] 1927년 7월 중장으로 승진, 1928년 8월 육군대학교 교장이 되었다.[1]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제6사단 사령관을 지내고, 1933년 10월 대장으로 승진하여 훈련감찰관에 임명되었다.[1]

3. 황도파의 수장

쇼와 초기 일본 육군에서 아라키 사다오는 육군 창설 이래 장주 번벌(그리고 그 계승자인 우가키 파)로부터의 탈피와 육군 중추로부터의 사회 혁신을 목표로 하는 장교들의 모임인 일석회의 지도자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한편, 아라키는 쿠데타를 통한 급진적인 사회 변혁(쇼와 유신)을 표방하는 젊은 장교들에게도 존경받았으며, 출장 시에는 도쿄역 승강장이 그를 맞이하는 젊은 장교들로 가득 차 마치 개선 장군과 같았다고 한다.

아라키는 히라누마 기이치로가 사법 관료와 육해군 고급 장교들을 모아 조직한 국수주의 단체인 국본사에서 우가키와 함께 이사를 맡았고, 히라누마를 존경했다.[6] 1931년 7월 16일 하라다 구마오의 『하라다 일기』에 따르면, 당시 아라키는 히라누마를 천황의 측근으로 만들기 위한 궁중 진입 운동을 했지만, 니시토인 공망에 의해 저지되었다.[7] 헌병 사령관 시절부터 히라누마와 오카와 슈메이, 키타 이키, 이노우에 히사메 등 우익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기 때문에, 1931년(쇼와 6년) 사쿠라회가 쿠데타를 기도했을 때(10월 사건) 하시모토 킨고로로부터 수상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아라키 자신의 반대와 의견 불일치로 계획은 실패했다.

만주 사변 한창이던 같은 해 12월, 아라키는 교육총감부 본부장에서 일석회의 나가타 테츠잔과 스즈키 테이이치[8] 등의 주선으로 이누카이 내각의 육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일석회는 아라키, 마사키 진자부로 및 그 주변의 젊은 장교들과 아라키의 인사의 엄청남과 젊은 장교들의 급진적인 사상을 방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내의 참모급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특히 그 인사는 「키요모리의 횡포」나 「교만한 다이라씨도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원망의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33년 5월경에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인 1934년(쇼와 9년) 1월, 아라키는 병을 이유로 육상에서 사임한다. 퇴임 후에는 군사참의관으로 전보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친보식에 참석하지 않았다.[9]

1936년의 2.26 사건에서 아라키는 이 사건 이후의 숙군으로 예비역으로 물러나 군인으로서의 최전선에서 사라졌다.

다른 A급 전범 지명자들과 함께 호송되는 아라키(1946년 5월 3일)

3. 1. 황도파와 통제파

1929년 쇼와 천황 즉위 초, 육군 지휘부는 마사키 진자부로를 타이완군 사령관으로 좌천시키면서 아라키 사다오도 함께 좌천시키려 했다. 그러나 무토 노부요시 교육총감의 구명운동으로 아라키는 제6사단장에서 교육총감 본부장으로 영전했다. 무토는 황도파 옹호자였고, 통제파 우가키 가즈시게의 독주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1931년 12월, 아라키는 이누카이 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었다.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참모총장으로,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임명하여 황도파가 요직을 차지하고 과격한 청년 장교들을 도쿄 제1사단에 집결시켰다. 이들을 황도파라 불렀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통제파라 불렀다.

그러나 아라키는 과격 청년 장교들을 자중시키려다 인망을 잃고 통제파에게도 견제를 받았다. 1934년 1월, 병을 이유로 육군상을 사임했다. 후임 육군대신으로 마사키를 원했으나 간인노미야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황도파 수장으로서 쿠데타군에게 원대복귀를 강권했지만, 사건 이후 황도파 숙군 작업으로 예편되었다.

4. 정치 활동

1931년 10월 사건 당시 하시모토 긴고로에게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본인이 내켜하지 않아 수락하지 않았다.[2] 같은 해 12월, 아라키는 이누카이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참모총장에는 황족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원수로 임명하여 허수아비로 만들려 했고, 실세 참모차장으로 마사키 진자부로를 임명하여 불러들였다. 아라키는 자신의 패거리를 요직에 앉히고 과격한 청년 장교들을 도쿄의 제1사단에 불러들였다. 이후, 아라키와 마사키를 황도파라 부르고, 이들에 반대했던 세력을 통제파라 부르게 되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당하자, 아라키는 암살자들을 칭찬하며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2] 그는 이시이 시로와 그의 731 부대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후, 타협의 결과로 사이토 마코토가 수상이 되었지만, 아라키는 육군대신으로 남아 아마우 선언을 발표하며 일본의 팽창주의를 드러냈다.

1932년 9월, 아라키는 전체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고도하("황도") 사상을 언급하며 국가 신토를 강조하고, 육군의 ''정신교육''을 지지했다.[2]

그러나 아라키는 자신을 따르는 과격 청년 장교들을 자제시키려다 인망을 잃고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통제파에게도 견제를 받던 아라키는 1934년 1월, 병을 이유로 육군상에서 사임했다. 1936년 2.26 사건이 일어나자, 황도파의 수장으로서 연루될 것을 우려하여 쿠데타군에게 원대 복귀를 강권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황도파 숙군 작업에서 예편 처분되었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수상에 취임하고, 1938년 아라키를 문부대신으로 임명했다. 아라키는 국가 교육 제도에 사무라이 도덕을 통합하고, ''코쿠타이노 홍기''("일본 국체의 홍범")와 ''신민노 미치''("국민의 길") 사용을 장려하며 군국주의 이념을 증진시켰다. 아라키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에서도 문부대신직을 유지했고, 이후 국무원으로서 정부 고문으로 활동했다.

1939년 1월, 아라키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여하여 대중 집회, 라디오 방송, 선전 등을 통해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1945년 11월 19일,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아라키를 전쟁범죄인으로 체포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했다.[12]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1표 차이로 사형을 면했다.[13]

5. 황도 교육 추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발탁된 아라키 사다오는 "황도교육"(皇道敎育)의 강화를 주창하였다.[10] 국민정신총동원 위원장도 겸임하여 사상적인 전시체제 구축이라는 선전을 추진했다. 이 무렵부터 군부의 대학·학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인민전선사건과 평가숙학을 대표로 하는 사상 탄압이 행해지게 되었다.[10]

문부대신 시절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문부대신 시절의 일에도 중점이 두어졌다.[10] 증인으로 출두한 다이치 몬페이(大内兵衛)는 검사의 심문에 응하여 선서 증언서를 제출한 후, 변호단의 반대 심문에서, 군사 교육을 통해 군부에 의한 학원 탄압이 강화되어 갔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38년,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문부대신 시절, 각 대학에서의 군사 교육이 더욱 강제적이 되어 군부의 학교 지배가 강화되었다." "군사 훈련은 아라키 씨가 육상대신 시절, 도쿄대학에서 채용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때 도쿄대학은 거절했지만, 1938년 아라키 씨가 문부대신이 된 시절, 군사 훈련은 강제적으로 되었다."[10]

극동국제군사재판 검사는 "아라키는 침략 사상을 선전하고 교육·고취했다"고 지적했지만, 아라키의 변호인인 스가와라 유타카(菅原裕)는 "아라키가 선전한 것은 침략이 아니라 황도였으며, 침략 사상과는 정반대의 일본 고래의 정신주의이다"라고 전면적으로 부정했다.[10]

6.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라키는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A급 전쟁 범죄 혐의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공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3] 1955년, 건강상의 이유로 스가모 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1947년 ''화족'' 폐지와 함께 세습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1947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 범죄 재판을 받는 아라키 사다오


가석방 이후, 아라키는 건강을 회복하여 전국을 돌며 강연 활동을 하였다. 1966년 강연 중 심장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후추의 다마묘지에 있다. 그의 추모비 비문은 당시 현직 수상이었던 사토 에이사쿠가 직접 작성하였다.

7. 평가 및 비판

아라키 사다오는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발탁되어 "황도교육"(皇道敎育) 강화를 주창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위원장을 겸임하며 사상 면에서 전시체제 선전 작업을 추진했고, 군부의 학원 및 대학 사상 자유 억압에 앞장섰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 당시 행위에 대한 전범 혐의로 집중 추궁을 받았다.[12]

1933년(쇼와 8년) 12월, 법정대학 고문에 취임했고[10], 1937년(쇼와 12년) 7월에는 법정대학 예과의 수신과 강사가 되어[11], “자유와 진보”를 자랑하던 법정대학에 군국주의적 학풍을 침투시켰다.

1938년(쇼와 13년) 5월 26일, 제1차 근위 내각의 문부대신에 취임하여 “황도 교육” 강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국민정신총동원 위원장을 겸임하며 사상적인 전시체제 구축 선전을 추진했다. 이 무렵부터 군부의 대학·학원 탄압이 시작되어, 인민전선사건과 평가숙학을 대표로 하는 사상 탄압이 행해졌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문부대신 시절의 일에도 중점이 주어졌다. 재판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다이치 몬페이(大内兵衛)는 검사 심문에 응하여 선서 증언서를 제출한 후, 변호단의 반대 심문에서, 군사 교육을 통해 군부에 의한 학원 탄압이 강화되어 갔던 과정을 “1938년,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문부대신 시절, 각 대학에서의 군사 교육이 더욱 강제적이 되어 군부의 학교 지배가 강화되었다.”, “군사 훈련은 아라키 씨가 육상대신 시절, 도쿄대학에서 채용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때 도쿄대학은 거절했지만, 1938년 아라키 씨가 문부대신이 된 시절, 군사 훈련은 강제적으로 되었다.”고 증언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검사는 “아라키는 침략 사상을 선전하고 교육·고취했다”고 지적했지만, 아라키의 변호인 스가와라 유타카(菅原裕)는 “아라키가 선전한 것은 침략이 아니라 황도였으며, 침략 사상과는 정반대의 일본 고래의 정신주의이다”라고 전면 부정했다.

1932년 9월, 아라키는 전체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를 더욱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9월 23일 기자 회견에서 아라키는 처음으로 천황, 국민, 땅, 도덕을 하나의 불가분의 존재로 연결하는 ''코도하''("황도") 사상을 언급했고, 국가 신토를 강조했다. 또한 육군의 ''정신교육''(정신 수련)을 강력히 지지했다.

코노에 후미마로가 1937년 수상이 되었고, 1938년, 코노에 수상은 ''토세이하''("통제파")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아라키를 문부대신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에게 국가 교육 제도와 일반 대중을 통해 군국주의 이념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를 제공했다. 아라키는 국가 교육 제도에 ''사무라이'' 도덕을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공식 학문 교재인 ''코쿠타이노 홍기''("일본 국체의 홍범")와 국가, 종교, 문화, 사회, 이념적 주제에 대한 효과적인 교리 문답인 "국민의 길"(''신민노 미치'') 사용을 장려했다. 아라키는 코노에가 히라누마 기이치로에게 수상직을 물려준 후에도 문부대신직을 유지했고, 이후 국무원으로서 정부 고문으로 활동했다.

1939년 1월 아라키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여하여 대중 집회, 라디오 방송, 인쇄된 선전 및 토나리구미(tonarigumi) 지역 주민회에서의 토론 세미나를 후원함으로써 이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아라키의 입버릇은 "비상시(非常時)", "황국정신(皇國精神)", "황군(皇軍)"이었다. 그때까지 "국군(國軍)"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던 일본 육군에서 "황군"이라고 부른 것은 아라키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별명은 "만성 비상시 남자(慢性非常時男)", "정신가(精神家)"(정신과와의 말장난), 너무 길고 지루한 연설 때문에 "소의 침(牛のよだれ)" 등이었다. 1933년 10월에는 외국인 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서 "300만 자루의 죽창만 있으면 열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자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300만 자루의 죽창론). 방일 중이던 조지 버나드 쇼와의 회담에서 일본인은 지진으로 인해 강인한 정신을 단련했다고 주장했다(지진론). 이러한 비과학적인 정신론을 강조하는 그의 언행은 청년 장교들을 매료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학기술 정책에도 힘썼으며, 문부대신 시절인 1939년에는 해군의 히라가 조(平賀譲)와 함께 과학연구비 제도의 창설에 힘썼다.

8. 연보


  • 1897년(메이지 30년) 11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9기)
  • 1898년(메이지 31년) 6월 - 소위로 진급. 근위보병 제1연대 배속.
  • 1900년(메이지 33년) 11월 - 중위로 진급.
  • 1901년(메이지 34년) 3월 - 육군중앙소년학교 학생대 배속
  • 1904년(메이지 37년)
  • * 2월 - 근위예비보병 제1연대 중대
  • * 5월 - 근위예비혼성여단 부관
  • * 8월 - 대위로 진급.
  • 1905년(메이지 38년) 12월 - 근위보병 제1연대 배속
  • 1907년(메이지 40년) 11월 - 육군대학교 졸업(19기 은사). 참모본부 출사(러시아 주재).
  • 1908년(메이지 41년) 4월 - 참모본부원
  • 1909년(메이지 42년)
  • * 11월 - 소좌로 진급.
  • * 12월 - 러시아 주재.
  • 1912년(메이지 45년) 5월 - 러시아 공사관 부 무관보좌관
  • 1913년(다이쇼 2년) 4월 - 참모본부원
  • 1914년(다이쇼 3년)
  • * 3월 - 육군성 부관
  • * 8월 - 육군대학교 교관.
  • 1915년(다이쇼 4년)
  • * 4월 - 러시아 출장.
  • * 6월 - 러시아군에 종군( - 1918년(다이쇼 7년) 4월)
  • * 8월 - 중좌로 진급. 참모본부 부속 명령(하얼빈 특무기관).
  • 1918년(다이쇼 7년)
  • * 7월 24일 - 대좌로 진급. 관동도독부 부속.
  • * 11월 1일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 1919년(다이쇼 8년) 7월 25일 - 보병 제23연대장
  • 1921년(다이쇼 10년) 4월 1일 - 참모본부 구미과장
  • 1923년(다이쇼 12년) 3월 17일 - 소장으로 진급. 보병 제8여단장.
  • 1924년(다이쇼 13년)
  • * 1월 9일 - 헌병 사령관
  • * 5월 - 국본사 이사
  • 1925년(다이쇼 14년) 5월 1일 - 참모본부 제1부장
  • 1927년(쇼와 2년) 7월 26일 - 중장으로 진급.
  • 1928년(쇼와 3년) 8월 10일 - 육군대학교 교장
  • 1929년(쇼와 4년) 8월 2일 - 제6사단
  • 1931년(쇼와 6년)
  • * 8월 1일 - 교육총감부 본부장
  • * 12월 13일 - 이누카이 내각에서 육군대신( - 1934년(쇼와 9년) 1월 23일)
  • 1932년(쇼와 7년) 2월 11일 - 『쇼와 일본의 사명』발행
  • 1933년(쇼와 8년) 10월 20일 - 대장으로 진급. 같은 해 법정대학 고문 취임.[10]
  • 1934년(쇼와 9년) 1월 23일 - 군사참의관
  • 1935년(쇼와 10년) 12월 26일 - 남작
  • 1936년(쇼와 11년) 3월 10일 - 예비역 편입
  • 1937년(쇼와 12년) 10월 15일 - 내각참의
  • 1938년(쇼와 13년) 5월 26일 - 1939년(쇼와 14년) 8월 30일까지 제1차 고노에 내각히라누마 내각의 문부대신으로서 국민의 군국화 교육에 매진.
  • 1940년(쇼와 15년) 1월 20일 - 내각참의( - 7월 22일).

참조

[1]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2] 서적 Japan at War Time-Life 1980
[3] 서적 Judgment at Tokyo: The Japanese War Crimes Trials
[4]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5] 서적 陸軍郷土歩兵聯隊写真集 わが聯隊 ノーベル書房 1979
[6] 서적 昭和維新試論
[7] 서적 昭和維新試論
[8] 서적 満州事変と政党政治
[9] 뉴스 荒木陸相辞任、後任は林銑十郎 東京日日新聞 1934-01-23
[10] 간행물 法政大学校友名鑑 1941
[11] 서적 法政大学の100年 <1880-1980> 法政大学
[12] 뉴스 荒木・南・小磯・松岡ら十一人に逮捕命令 朝日新聞 1945-11-20
[13] 웹사이트 取れなかった原稿2 (大島浩さん) http://www.zen-kansh[...] 全日本漢詩連盟 2007-01-01
[14] 문서 文献によっては、少尉に任官したばかりの20歳前後の者が、真夜中に「荒木はいるか!」と大声で叫びながら遊びにやってくるようなこともあり、荒木は怒るどころかニコニコしながら「若い者は元気があって良いのお」と上機嫌であったというエピソードもあるが、デフォルメされた描写である可能性も指摘されている。
[15] 서적 1932年の大日本帝国 草思社 2020
[16] 웹사이트 なにわ人物伝 -光彩を放つ-ゴーストップの人たち(2) http://www.nnn.co.jp[...] 大阪日日新聞 2008-03-29
[17] 서적 華族たちの昭和史 毎日新聞社
[18] 뉴스 市民が残した駅前の緑地 狛江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9-07-10
[19] 웹사이트 狛江の新たな顔に、狛江駅北口再開発事業 https://www.city.kom[...] 狛江市
[20] 서적 岡田啓介回顧録 中公文庫 1987
[21] 간행물 法政大学校友名鑑 1941
[22] 법률문서 法廷証第103号: 荒木貞夫ニ關スル人事局履歴書
[23]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898-07-25
[24]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01-03-01
[25]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04-10-29
[26]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09-12-21
[27]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15-02-01
[28]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23-05-23
[29]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27-11-12
[30]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31-12-23
[31]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33-12-21
[32]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39-06-19
[33]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32-01-16
[34] 정부발표 叙任及辞令 官報 1935-12-27
[35] 정부발표 辞令二 官報 1941-10-23
[36] 간행물 官報 第1972号「叙任及辞令」 193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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