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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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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중국 만주를 침략한 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왔으며,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켜 만주 침략을 시작했다. 관동군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제소했지만, 국제 연맹의 미온적인 대처와 일본의 탈퇴로 실질적인 제재를 받지 못했다. 만주사변은 일본 군국주의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으며,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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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 [전쟁]에 관한 문서
구글 지도
사건 개요
명칭만주 사변
다른 명칭9·18 사변
심양 사변
만슈우 지헨 (일본어: 満洲事変)
만주 사변 (한자: 滿洲事變)
일부일본의 만주 침공
제2차 중일 전쟁
날짜1931년 9월 18일
장소만주, 중국
결과일본의 승리
만주국 수립
일본의 만주 침공
교전 세력
교전국 1중화민국
교전국 2일본 제국
지휘관
지휘관 1장쉐량
마잔산
펑잔하이
지휘관 2혼조 시게루
미나미 지로
이시하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아이신 교로 푸이
장하이펑
병력
병력 1160,000명
병력 230,000명 ~ 66,000명
사상자
사상자 1340명 이상 사망
사상자 225명 사망
전투 목록
전투 목록류타오후 사건
장치아오 전역
눈강 다리 저항
진저우 작전
하얼빈 방어전
만주 진압전
러허 사변
만리장성 방어전
내몽골
쑤이위안 전역
기타
만주 사변 당시 일본군이 선양에 진입하는 모습
만주 사변 당시 선양에 진입하는 일본군

2. 배경

포츠머스 조약(1905년)으로 일본은 만주의 창춘-뤼순간 철도 이권을 획득하고 관동주를 조차(1905년)하면서 만주는 일본의 중요한 이익 거점이 되었다.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05년부터 만주에 주둔했다. 신해혁명(1911년) 이후 만주에는 보안부대와 신군이 편성되었고, 장쭤린의 봉계 군벌 군대(봉천파)는 세력을 확장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1918) 이후, 봉천파를 지원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1927년 장제스국민혁명군은 '북벌운동'을 통해 봉천파의 장쭤린을 압박했고, 일본은 장쭤린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기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직접 지배권을 요구하며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1928년 6월 4일 장쭤린 폭살사건을 일으켰다.

장쭤린 피살로 관동군과 봉천파 간의 협조 관계는 끝났다. 국민당 정부는 청일통상조약(1896년) 폐기를 통고하며 배일공세를 강화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여 일본상품 배척과 이권 회수 운동을 벌였다. 장쉐량 정권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 회수 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위축되었다. 중국 국민정부의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했다. 1920년대 만주 투자 자본의 70% 이상이 일본 자본이었으나,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1929~39년)으로 일본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했다.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 등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 필요성을 느꼈다. 일본은 이를 <만·몽의 위기>로 선전하고 침략을 정당화했다. 관동군 중심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시데하라 외교를 비난하며 무력에 의한 동북침략 기회를 노렸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만주 점령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했다. 1931년 6월 나카무라 대위 사건(中村大尉事件)과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다. 나카무라 대위 사건은 중국 동북의 흥안령 지방에서 스파이 활동 중이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중국군에게 사살된 사건이다. 만보산 사건은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문제로 충돌이 발생한 사건이다.

1929년 중소 국경 분쟁(7월-11월)은 중동 철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만주에서 곧 봉천 사변으로 이어질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소련 적군이 장쉐량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만주 내 중동 철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을 재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관동군 장교들이 즉시 알아차린 중국군의 약점을 드러냈다.[10]

소련 적군의 활약은 일본 관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만주는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의 중심이었다. 1930년까지 관동군은 더욱 강해지는 적군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행동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본의 만주 정복 계획은 가속화되었다.[11]

2. 1. 러일전쟁과 일본의 만주 진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동청철도 중 뤼순-장춘 간 남만주 지선과 부속지의 탄광 임차권, 관동주 임차권을 획득했다.[38] 관동도독부와 철도 부속지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관동군이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는 남만주 철도 지역 내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행정권을 주장했다. 열차와 선로의 안전을 위해 이 지역에 배치된 일본 철도 경비대는 정규 일본군 병사였으며, 철도 지역 밖에서 훈련을 자주 실시했다.

2. 2. 중화민국의 성립과 민족주의 고조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중원 지역은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38]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내에서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발과 민족주의 의식이 고조되었다.

일본은 1919년 21개조 요구를 통해 중화민국의 권익 보호를 도모했지만, 이는 중국 내 반일 폭동을 야기했고 만주 지역의 치안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만주 군벌 장쭤린은 일본의 특권을 박탈하려 했으나, 일본 관동군에 의해 암살당했다.[7] 그의 아들 장쉐량반일 감정으로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 정부에 합류했다.[7] 이후 장쉐량은 "만주국민외교협회"를 설립하고, 만주를 중원과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를 유포하며 일본의 이권 침해를 시작했다. 그는 남만주철도의 병행선 부설을 시작하는 등 일본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931년 4월, 난징에서 장제스와 장쉐량은 회담을 갖고, 만주에서 중국의 주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로 합의했다.[12]

2. 3. 세계 대공황과 일본의 경제 위기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이노우에 재정 아래 금본위제 해제를 실시했던 일본은 그 여파로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11] 이러한 경제 위기는 사회 불안을 야기했고, 공산주의자본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국가 사회주의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경제 위기를 타개하고 사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주 침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관동군은 만주를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 4.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대위 사건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은 만주 지역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7] [8] [9] 당시 만주는 "현안 500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문제가 쌓여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시데하라 외교를 통해 장쭤린 군벌과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참모본부도 이러한 외교적 노력을 지지했다.

3. 만주사변의 발단: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관동군만주 침략을 위한 자작극을 벌였다.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와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이 주도하여, 류탸오후(柳條湖) 부근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동북군의 소행으로 조작했다.

29연대 일본군 병사들, 봉천 서문


이 사건은 대공황으로 서구 열강의 개입이 어려운 상황과 장쉐량 군대의 주력이 베이징과 남쪽에 집중된 틈을 타 발생했다. 장쉐량은 사건 확대를 막기 위해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로 인해 관동군은 빠르게 지린성까지 점령했다.

9월 21일, 조선군 사령관의 독단적인 월경으로 전쟁은 남만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일본 정부는 사건을 공식 인정하고 전쟁 불확대 방침을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만주 침략을 묵인하고 지원했다.[51]

만주사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일본이 만주에 보유하고 있던 권익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 탄광 임차권, 관동주 임차권 등을 획득했다.[38] 그러나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성립과 함께 만주 지역의 치안이 불안해졌다.

일본은 21개조 요구를 통해 권익 보호를 시도했지만, 이는 중국 내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일본 정당들은 외교 정책에서 다른 입장을 보였다. 헌정회는 '시데하라 외교'를 통해 중화민국 전체를 안정적인 시장으로 만들고자 했고, 입헌정우회는 '다나카 외교'를 통해 만주를 개발 대상으로 보고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

1928년 장쭤린 폭사 사건 이후, 장쉐량장제스와 협력하며 중화 민족주의에 따른 반일 감정이 만주에 유입되었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경, 봉천 교외 류자호 부근 남만주철도 선로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관동군은 이를 장쉐량 동북군의 소행으로 발표하고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40]

이 사건은 관동군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하라 간지 등이 주도한 음모였다.[41] 간카스 마사히코 등은 하얼빈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 시내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3. 1. 이시하라 간지 등 관동군의 음모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만주 침략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1931년 5월 31일까지 이 사건에 대한 계획을 완료했다.[14]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일본 전문가들이 “파괴된” 남만주 철도를 조사하고 있다.


류탸오(柳條) 철도의 일부. 캡션에는 "철도 파편"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계획은 제29 보병 연대의 독립 수비대(獨立守備隊) 소속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실행했다.[4] 9월 18일 밤 10시 20분(22:20)경 폭발물이 폭발했으나, 폭발은 미미했고 레일 한쪽의 1.5미터 구간만 손상되었다.[15] 실제로 창춘에서 출발한 열차는 이 손상된 선로를 어려움 없이 통과하여 밤 10시 30분(22:30)에 선양에 도착했다.[15]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하라 간지는 류탸오후(柳條湖)(; ''liǔtiáohú'') 근처의 철도 구간을 파괴하기로 선택했다.[13] 이 지역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고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장쉐량의 지휘하에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북대영(北大營)(; ''běidàyíng'') 중국군 주둔지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져 있었다.[13] 일본의 계획은 폭발로 중국군을 유인한 후, 중국군이 소란을 일으켰다고 비난하여 일본의 공식적인 침략을 위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13]

3. 2. 일본 정부의 묵인과 추인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관동군의 독단적인 행동에 당황했지만, 결국 이를 묵인하고 추인했다. 이는 일본 정부 내에서도 만주 침략에 대한 지지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9월 19일 새벽, 관동군은 육군 중앙에 타전을 보내 군사 행동 개시를 보고하고, 만주 치안 유지를 위해 3개 사단 증파를 요청했다. 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행동 합리성과 군비력에 따른 증파 필요성을 이해하면서도, 정부의 불확대 방침과의 딜레마에 빠졌다.[44]

같은 날 오전 각의에서 남(南) 육상대신은 전투가 "관동군의 순수한 자위 행위"라고 해명했지만, 각료들의 비판을 받았고, 불확대 방침이 결정되었다. 오후, 남 육상대신과 김곡범삼(金谷範三) 참모총장은 관동군에 정부의 불확대 방침에 따라 행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조선군에 대해서도 만주 출병을 금지하는 통지를 했다.[44] 같은 날 오후, 남 육상대신은 와카쓰키(若槻) 수상을 만나 상황의 긴박함을 설명하고, 군사 행동 확대(예산 승인)를 허용하도록 설득했다. 와카쓰키 수상에게는 이미 외무성으로부터 이번 충돌이 관동군의 모략에 의한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와 불확대 방침을 관철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44]

조선군9월 19일 린(林) 사령관의 독단으로 국경을 넘어 관동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9월 22일, 각의에서 남 육상대신은 조선군의 국경 침범 허가를 요청했지만, 하이하라(幣原) 외교의 계속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각료들의 반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9월 23일, 와카쓰키 수상은 "출병하지 않을 때는 그만두지만, 출병한 후에 그 경비를 지출하지 않으면 병사는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판단 아래 조선군 파병 경비를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조선군 국경 침범은 사후 승인되어 합법화되었다.[46]

9월 24일, 일본 정부는 사변에 대한 첫 번째 성명을 발표하여,

  • 사변을 확대시키지 않도록 노력할 것
  • 길림(吉林)으로의 관동군 출동 목적은 만철(満鉄) 부속지의 치안 유지이며, 목적 달성 후에는 즉시 장춘(長春)으로 철병할 것
  • 만주에서의 영토 획득 의사는 없을 것

을 선언했다.[46]

4. 만주사변의 전개



육군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와 이시와라 간지 중좌는 독자적으로 만주 침략 계획을 꾸몄다. 이들은 류탸오후(柳條湖)(; ''liǔtiáohú'') 근처 철도를 파괴하여 중국군의 도발을 유도하려 했다. 이 지역은 "젊은 장군" 장쉐량이 지휘하는 중국군 주둔지인 북대영(北大營)(; ''běidàyíng'')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일본은 폭발을 일으켜 중국군을 끌어들인 후, 중국군이 소란을 일으켰다고 비난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 언론은 이 지역을 "류탸오 구(柳條溝)"(; ''liǔtiáo'''gōu''''') 또는 "류탸오 교(柳條橋)"(; ''liǔtiáo'''qiáo''''')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평평한 땅에 놓인 작은 철도 구간이었다.[13]

9월 18일 밤, 류탸오후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 관동군은 이를 구실로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9월 19일 아침, 선양 장교 클럽에 설치된 포병이 중국군 주둔지를 공격했고, 장쉐량의 소규모 공군은 파괴되었다. 약 500명의 일본군이 약 7000명의 중국군 주둔지를 공격하여, 저녁 무렵에는 전투가 끝나고 일본군이 봉천(Mukden)을 점령했다. 중국군 사망자는 500명, 일본군 사망자는 2명이었다.[16]

도이하라 겐지 대좌는 선양을 봉천시로 개칭하고 임시 시장이 되었다. 간카스 마사히코 전 대위는 하얼빈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 시내 여러 곳에 폭탄을 투척하는 공작을 벌였다.

9월 19일 새벽, 관동군은 육군 중앙에 군사 행동 개시를 보고하고 3개 사단 증파를 요청했다. 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정부의 불확대 방침과의 딜레마에 빠졌다. 각의에서는 미나미 지로 육상대신이 전투를 “관동군의 순수한 자위 행위”라고 해명했지만, 각료들의 비판을 받고 불확대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와카쓰키 수상은 외무성으로부터 이번 충돌이 관동군의 모략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불안감을 느꼈다.

20일 밤, 관동군 수뇌부는 정부의 불확대 방침에 대응하기 위해 지린 출병을 결정하고, 21일 제2사단(일본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지린은 같은 날 희협 성주석 대리로부터 점령 승인을 받았다.

관동군은 당초 만주 전역을 일본 영토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9월 24일 정부와 참모본부의 북만주 진출 금지 명령에 따라 친일 지역 정권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같은 달 만주 각지의 한족 유력자들과 접촉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현지 거류민들은 관동군의 출동을 환영하고 치안 유지 활동에 협력했다. 만주 청년 연맹은 무장 단체를 관동군에 제공하고, 주둔지 사회 기반 시설 업무에 종사했다. 9월 21일 봉천에서 전만(全滿) 일본인 대회를 개최하여 관동군의 만주 전역 진출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29일 육상성에 친일 정권 수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관동군은 10월 2일 「만주 문제 해결 방안」을 작성하여, 「만몽(滿蒙)을 독립국으로 하고 이를 우리의 보호하에 두어 만몽 각 민족의 평등을 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봉천(瀋陽) 점령 직후 성내 모습

4. 1. 주요 도시 점령과 저항

관동군 사령관 본조 시게루 장군은 처음에는 자신의 허가 없이 침략 계획이 실행된 것에 경악했지만,[17] 결국 이시와라의 설득으로 사후 승인을 내렸다. 본조는 관동군 본부를 선양으로 이전하고 조선군 하야시 센주로 장군에게 증원군 파병을 명령했다. 9월 19일 새벽 4시에 선양은 안전하다고 선포되었다.

장쉐량은 일본군이 침략할 때 그의 부하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무기를 치우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큰 어려움 없이 창춘과 단둥 등 주요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주둔했다. 그러나 11월에 헤이룽장성의 권한대행 총독 마잔산 장군이 그의 성군을 이끌고 저항을 시작했고, 1월에는 정조와 리두 장군이 지린성의 지역군을 이끌고 저항에 합류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봉천 사건 5개월 만에 일본 제국 육군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13]

4. 2. 하야시 센주로의 독단 월경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직후,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상부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로 군대를 파견했다. 참모본부는 조선군의 월경(越境)을 막으려 했으나, 하야시는 이미 혼성 제39여단에 국경을 넘도록 명령을 내린 후였다.[46]

참모본부는 하야시의 독단적인 월경에 놀랐지만, 결국 9월 23일 내각이 조선군의 파병 경비를 지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후 승인을 받았다.[46] 그러나 천황은 군 수뇌부에 불쾌감을 표명하고, 김곡범삼 참모총장에게 “장래를 삼가도록” 주의를 주었다.[46]

이는 일본 육군성의 통제를 벗어난 일본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과 문민통제 부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4. 3. 국제연맹의 개입과 일본의 탈퇴

1931년 9월 21일, 중국의 국제연맹 대표 스자오지(施肇基)는 국제연맹규약 제11조에 따라 사무총장에게 이사회 개최를 요구했고, 이 문제는 국제연맹 이사회로 넘겨졌다. 일본은 양국 간 협상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다. 초기에는 일본 측이 현지 정보 부족과 관동군 통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9월 24일 일본 정부가 불확대 방침을 표명하고 관동군의 북만주 진출을 억제하면서 사태 수습의 실마리가 보였다. 9월 25일 영국은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고, 9월 28일 중국은 중립적 위원회를 통한 협상 지원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모두 거부했다. 일본은 불확대 방침에 따른 철병 조정을 이유로 일본의 선처를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국제연맹 이사국들은 만주가 군벌의 횡포에 맡겨지는 것보다 일본의 관리하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보장 점령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자, 9월 30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양국에 2주 이내에 "정상 관계 회복을 촉진"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휴회했다.

그러나 1931년 10월 8일, 관동군 폭격기 12대가 이시하라 참모의 지휘 아래 장학량의 근거지인 진주(錦州)를 공습했다.[1] 이시하라는 정찰 중 대공포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취한 자위 행위라고 설명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억이 생생한 유럽 열강은 이에 반발했다.[1] 철병 유예 기간 중 발생한 이 사건으로 국제연맹 내에서 일본의 입장은 악화되었다.[1]

국제연맹 이사회는 11월 16일 이사회 개최를 새로운 기한으로 정하고 11월 24일 휴회했다.[2] 11월 26일, 일본 정부는 만주사변에 관한 두 번째 성명을 발표하고, 장래의 일중 관계의 기초가 되는 5대 항목을 제시했다.[2] 이는 국제연맹 이사회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양국 간 협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였다.[2]

5. 만주국 수립

관동군은 만주 전역을 일본 영토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1931년 9월 24일 일본 정부와 참모본부의 북만주 진출 금지 명령에 따라 친일 지역 정권 수립 및 연계 방안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만주 각지의 한족 유력자들과 접촉하여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13]

현지 일본 거류민들은 관동군의 출동을 환영하며 치안 유지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이들은 9월 21일 봉천에서 전만(全滿) 일본인 대회를 개최하고 관동군의 만주 전역 진출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으며, 9월 29일에는 육상성에 친일 정권 수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내고 일본 내지에 유세단 파견을 요구했다.[13]

1931년 10월 2일, 관동군은 '만주 문제 해결 방안'을 작성하여 "만몽(滿蒙)을 독립국으로 하고 이를 우리의 보호하에 두어 만몽 각 민족의 평등을 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일본의 권익 보호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13]

한편, 일본 육군 중앙에서는 하시모토 킨고로(橋本欣五郎)를 중심으로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를 총리로 하는 내각을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으나, 10월 17일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으로 관동군과 육군 중앙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으나, 육군 중앙은 관동군에 독립 등의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도록 명령했고, 관동군은 독립 의도가 없음을 주장하며 오해를 풀었다.[13]

이 무렵, 육군 중앙은 만주에서의 사실상 지배권 확립을 우선시하고, 신정권과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명확히 하지 않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국제 연맹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11월 21일,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군사참의관이 만주를 방문하여 관동군에 이 방침을 직접 전달했다.[13]

일본 정부 역시 국제 연맹의 개입을 배제하고 양국 간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협상 상대를 중화민국이 아닌 만주에 수립될 신정권으로 변경하는 것을 시사했다. 11월 26일, 일본 정부는 만주 사변에 관한 두 번째 성명을 발표하고, 장래의 일중 관계의 기초가 되는 5대 항목을 제시했다.[13]

일본 정부가 만주에서의 새로운 정권 수립을 묵인함에 따라, 다음 쟁점은 정부가 진출을 금지한 북만주(흑룡강성)로의 침투 공작이었다. 관동군은 장해붕에게 무기를 지원하여 10월 상순부터 치치하얼을 목표로 북상하게 했으나, 마잔산이 이끄는 흑룡강성군과 대치하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관동군은 11월 2일 마잔산과 장해붕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11월 4일 다리 수리를 위해 파견된 관동군과 마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13]

육군 중앙은 다리 수리를 위한 파병은 인정하면서도 북만주 일대 전개는 금지하고, 다리 수리 후 즉시 철병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공작용' 자금이라고 용도를 한정하여 활동 경비를 지급하는 등 관동군의 독주를 막으려 했다. 11월 5일에는 참모총장에게 관동군에 대한 위임 명령이 내려져, 참모본부가 관동군과 조선군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국제 연맹의 여론 악화와 소련과의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소련과의 북만주 장악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력 전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참모본부의 간섭에 분개했다.[13]

관동군과 마군과의 전투는 이틀간 계속된 후 마군이 후퇴했다. 관동군은 대흥 부근에 진주한 후 마군의 진격을 건의했지만, 참모본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군 사이에서 협상이 이루어졌고, 관동군은 마찬산의 하야와 치치하얼 철수를 요구했지만, 마찬산은 일본 정부의 국제 연맹에서의 철병 약속을 이유로 거부했다.

5. 1. 괴뢰 정권 수립과 푸이 추대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의 집정으로 추대하여 괴뢰 정권임을 명확히 하였다.

5. 2. 만주국의 실체

만주국은 표면상 독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만주의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13]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후, 10월 2일 「만주 문제 해결 방안」을 통해 "만몽(滿蒙)을 독립국으로 하고 이를 우리의 보호하에 두어 만몽 각 민족의 평등을 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13] 이는 일본의 권익 보호를 넘어, 여러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제로는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관동군은 만주 각지의 한족 유력자들과 접촉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하도록 지원했다. 현지 일본 거류민들은 관동군의 활동을 환영하며 치안 유지에 협력했다. 이들은 9월 21일 선양에서 전만(全滿) 일본인 대회를 개최하고 관동군의 만주 전역 진출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일본 육군 중앙은 만주를 사실상 지배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신정권과 중화민국의 관계는 명확히 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 이는 국제 연맹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일본 정부 역시 국제 연맹의 개입을 배제하고 양국 간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만주에 수립될 신정권을 협상 상대로 내세웠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주국이 수립되었지만, 이는 일본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다.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만주의 자원을 수탈하고,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6. 만주사변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만주사변은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여론은 장쉐량의 일본 침략에 대한 무저항을 강하게 비난했다. 일본의 위협이 실재했지만,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 척결에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 장쉐량의 25만 동북군이 1만 1천 명 관동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장쉐량의 군대는 탱크, 약 60대의 전투기, 4000정의 기관총, 4개의 포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3]

장쉐량 군대의 약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관동군은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朝鮮)에서 철도로 수송 가능한 예비 병력이 있었다.
  • 장쉐량 부대 절반 이상이 장성 남쪽 허베이성에 주둔, 장성 북쪽 부대는 만주 전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 장쉐량 부대는 훈련 부족, 지휘 부실, 보급 열악, 사기 저하, 충성심 의심 등의 문제가 있었다.
  • 장쭤린의 일본 군사 고문 의존으로 일본 첩자가 장쉐량 지휘부에 침투했다.[13]


중국 정부는 광저우 호한민 정부 독립, 중국 공산당 봉기, 양쯔강 1931년 중국 대홍수 등 내부 문제에 압도당했다. 장쉐량은 당시 만주에 없었고, 홍수 피해 모금을 위해 베이징에 있었다. 중국 신문은 장쉐량을 "항일 무저항 장군"이라 조롱했다.

1932년 봉천사변 이후 중국 대표가 국제연맹에서 연설하는 모습.


중국은 국제 사회에 평화적 해결을 의존했다. 중국 외무부는 일본에 항의, 군사 작전 중단 요구, 국제연맹에 호소했다. 10월 24일 국제연맹은 일본군 철수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거부하고 중국과 직접 협상을 주장했다. 협상은 성과가 없었다.[13]

11월 20일 중국 정부 회의에서 국민당 광저우파는 장제스 사임을 주장했다. 12월 15일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직에서 사임, 쑨원 아들 손과가 중화민국 국무총리가 되었다. 랴오닝성 진저우는 1932년 1월 초 일본에 함락, 왕징웨이가 손과를 대신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18]

1932년 1월 7일,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1월 14일, 빅터 불워-리턴 국제연맹 위원회가 상하이에 상륙, 상황을 조사했다. 3월, 푸이가 국가 원수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19]

10월 2일, 리턴 보고서가 발표, 일본 주장을 기각, 만주국은 일본 군사 침략 산물임을 확인했다. 국제연맹은 만주국을 불인정,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9][13] 이후 일본은 중국에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20]

도이하라 겐지는 봉천사변을 이용, 허위 정보 작전을 계속했다. 일본 정보부는 장쭤린장쉐량을 만주 "잘못된 통치"로 비난했다. 그러나 마약 밀매, 부패는 장쭤린 치하에서 대부분 진압되었다.[21]

1931년 11월, 남만주에서 장쉐량이 반격, 진저우에 병력을 집결하며 정세가 불안해졌다. 도이하라 겐지 특무기관은 톈진에 있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와 만주 신국가 지원에 합의, 11월 8일 톈진 사건을 이용, 푸이는 뤼순으로 이동했다.

1931년 12월 10일, 와카츠키 내각이 총사퇴,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출범했다.

2017년,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을 일본 제국에 대한 "항일전쟁" 시작으로 공식 인정했다.[26]

6. 1. 일본 군국주의 강화와 대륙 침략 확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부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이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52]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52] 이 사건으로 일본 군부는 정국을 장악하고 군국주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52]

만주사변은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만주 지역에서 발생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남만주 철도 지선을 임차하고, 남만주 철도 지역 내 행정권을 확보했다. 일본은 철도 경비대를 배치했지만, 이들은 관동군 소속 정규군으로 철도 지역 밖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군벌들의 지배 이후 국가 권력을 재확립하려 했고, 불평등 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일본인을 추방했다.[7][8] 만주 군벌 장작림도 일본의 특권을 박탈하려 했으나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장쉐량반일 감정으로 난징 정부에 합류했다.[7][9]

1929년 중소 국경 분쟁은 만주 내 긴장을 고조시켰고, 소련 적군의 승리는 중국군의 약점을 드러냈다.[10] 일본은 만주를 동아시아 정책의 중심으로 여겼고, 1929년 적군의 승리는 일본의 만주 정복 계획을 가속화시켰다.[11]

1931년 4월, 난징에서 장제스장쉐량은 만주에서 중국의 주권을 주장하기로 합의했다.[12] 그러나 관동군 일부 장교들은 만주 침략을 모의했고, 도쿄에서도 이를 지원했다.

1932년 1월 말,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 육전대와 중국군이 충돌하자, 3월 1일 만주국이 성립되었고 만주는 일본의 병참 기지가 되었다.

6. 2. 국제연맹의 무력함 노출

만주사변은 국제연맹이 침략 행위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11월 16일, 일본군 철수 시한을 맞아 연맹 이사회가 재개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와 조사단 파견이 논의되었다.[48] 일본 정부는 제3자의 어떠한 개입에도 반대했지만, 일본 연맹 대표는 조사단 파견으로 연맹의 체면을 세우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만주 실정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우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12월 10일, 조사단 파견을 결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에서는 일본군 철병에 대해서는 철도 부속지역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면서도 기원은 명시되지 않았고, 중화민국 측이 요구한 “조사단 파견과 동시에 즉각 일본군이 철병할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평화를 교란할 우려가 있는 모든 사정”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일화 양국의 협상이나 군사 합의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더 나아가 “마적(馬賊) 등 만주 지역의 무법자 행위”에 대해서는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조사단의 보고가 접수될 때까지 만주 문제 자체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는 등 연맹 내 논의는 일본 측에 유리하게 결론이 났다.[48]

6. 3.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만주사변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희생되었으며, 독립운동 단체들은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더욱 적극적인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19]

7. 화북분리공작

1933년 탕구 정전협정을 통해 일본은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지배하는 것을 중국 국민정부로 하여금 사실상 인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일본 육군은 중국 화베이 5성을 국민정부에서 분리 독립시켜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화북 지역을 분리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 두려고 시도하였다.

7. 1. 목적

일본은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려 했고, 1933년 5월 말 탕구 정전협정을 통해 중국 국민정부가 이를 사실상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35년 일본 육군은 화베이 5성을 국민정부에서 분리, 독립시켜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이유는 반만 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화베이에 있었고, 만주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화베이 5성을 지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화베이 지역의 석탄, 등 자원과 농산물 시장을 장악하고 수탈하려는 목적도 있었다.[50]

7. 2. 경과

일본은 1933년 5월 말 탕구 정전협정을 통해 중국 국민정부로 하여금 만주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일본 육군은 중국의 화베이 5성을 국민정부에서 분리 독립시켜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반만항일군의 근거지가 화베이에 있어 만주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화베이 5성의 지배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또한 화베이의 석탄, 등의 자원과 농산물 시장 지배 및 수탈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8. 논란

만주사변은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했다.

도쿄 대학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등 일부 지식인들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라디오, 신문, 잡지 등을 엄중하게 검열하여 비판적인 언론이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었다.[53]

윤치호는 만주사변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쿠데타로 규정하고,[54] 일본이 이를 대륙 진출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 홍보한 것에 대해 일본 군부의 성과 올리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A. J. P. 테일러는 국제 연맹이 이 사건에 굴복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헤게모니를 보장했기에 미국 개입은 협정 위반이었고, 금본위제에서 벗어나 위기에 처했던 영국도 결정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강대국들의 유일한 반응은 "도덕적 비난"이었다.[25]

만주사변 이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되고, 사이토 마코토 내각이 성립되었다. 사이토 내각과 군부 중추는 국제 사회와의 협조 방침을 고수했고,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 현지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국제 연맹 내 중소국은 관동군의 움직임을 비판했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 열강은 각국의 국익 관점에서 타협적이었다.


  • 영국: 일영 동맹 이래 우호 관계, 홍콩 등 권익 보호, 소련 남하 저지 필요성으로 일본의 만주 치안 유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프랑스: 인도차이나 및 광저우만 권익 안정, 나치당 통치 하 독일 견제를 위해 일본과 협력을 모색했다.
  • 미국: "기회균등", "개방문호" 기치로 일본과 대립했으나, 일미 무역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만주에 미국 자본을 유치하여 협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소련: 만주와 국경을 접했지만, 사변 직후 일소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는 등 일본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국내 여론은 만주국 승인을 강하게 요구했고, 우치다 코우야 외무대신은 여론에 영합하여 강경론을 내세웠다. 모리 가쿠는 이러한 분위기를 "60년간 모방해 온 서구 물질 문명과 작별하고 전통적인 일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평가하며, 만주 문제를 협조 외교에 대한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결국 일본은 1931년 9월 15일, 일만 의정서 체결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8. 1. 류탸오후 사건의 진범 논란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 류타오후 사건)의 진범이 일본 관동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강력한 증거들이 이를 뒷받침하며, 전후 조사 결과 일본군이 설치한 폭탄이 폭발하지 않아 다른 폭탄을 설치해야 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22] 중화인민공화국이 1991년 9월 18일에 선양에 개관한 9·18사변 역사박물관(九・一八歷史博物館)과 도쿄야스쿠니 신사 내에 위치한 유슈칸 박물관 역시 관동군 소속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선양의 9·18사변 역사박물관


그러나 일본 내 일부 극우 세력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은 2006년 8월, "쇼와 전쟁"의 책임자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하면서 만주 사건과 관련하여 야심 찬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그들을 억제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비난했다.[23][24]

8. 2. 일본의 역사 왜곡

일본은 만주사변을 자국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정당화하고, 만주국을 독립된 국가로 보이게 하려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54] 윤치호는 만주사변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계획된 쿠데타이며, 일본 군부의 성과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 18일 선양에 9·18사변 역사박물관(九・一八歷史博物館)을 개관하고, 폭발물이 일본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도쿄야스쿠니 신사 내 유슈칸 박물관 역시 관동군 소속원들에게 책임을 돌린다.[22]

2006년 8월, 요미우리 신문은 만주 사건에 대해 야심 찬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그들을 억제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23][24]

9. 한국의 관점과 기억

만주사변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5·15 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해군 대장이 총리로 임명되면서 (사이토 내각) 일본 정계는 변화를 맞이했다.[1] 사이토 내각과 군부는 국제 사회와의 협조를 유지하려 했지만, 국내 여론은 만주국 승인을 강하게 요구했다.[2] 우치다 코우야(内田康哉) 외무대신은 여론에 따라 강경론을 펼치며, 8월 25일 "초토연설(焦土演説)"에서 만주국 승인 의지를 확고히 했다.[3] 이는 60년간의 서구 모방을 벗어나 일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협조 외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4] 결국 9월 15일, 일만 의정서 체결로 일본은 만주국을 승인했다.[5]

당시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 조사를 진행 중이었고, 주요 국가들은 만주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다.

국가입장
영국일영 동맹 이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홍콩 등 자국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의 만주 지역 질서 유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소련의 남하를 막는 데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프랑스인도차이나와 광주만(廣州灣)의 권익 안정을 위해 영국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또한, 유럽에서 나치당 통치하의 독일 국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의 강국인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미국전통적으로 "기회균등", "개방문호"를 내세워 열강의 중국 진출을 견제해 왔지만,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과 이해관계가 대립했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만주에 미국 자본을 유치하여 협조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도 있었다.
소련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1931년 12월 일소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는 등 일본에 대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9. 1. 일제 식민지배의 연장

만주사변은 5·15 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해군 대장이 총리로 임명되면서 (사이토 내각) 시작되었다.[1] 사이토 내각과 군부는 국제 사회와의 협조를 유지하려 했지만, 국내 여론은 만주국 승인을 강하게 요구했다.[2] 우치다 코우야(内田康哉) 외무대신은 여론에 따라 강경론을 펼치며, 8월 25일 "초토연설(焦土演説)"에서 만주국 승인 의지를 확고히 했다.[3] 이는 60년간의 서구 모방을 벗어나 일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협조 외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4] 결국 9월 15일, 일만 의정서 체결로 일본은 만주국을 승인했다.[5]

9. 2. 독립운동의 시련과 항일 의식 고취

만주사변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9. 3. 분단과 냉전의 기원

5・15 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해군 대장이 총리로 임명되면서 (사이토 내각) 일본 정계는 변화를 맞이했다. 사이토 내각과 군부는 국제 사회와의 협조를 유지하려 했다. 당시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 조사를 진행 중이었고, 국제 연맹 및 주요 국가들은 만주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다.

  • 영국: 일영 동맹 이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홍콩 등 자국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의 만주 지역 질서 유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소련의 남하를 막는 데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 프랑스: 인도차이나와 광주만(廣州灣)의 권익 안정을 위해 영국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또한, 유럽에서 나치당 통치하의 독일 국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의 강국인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 미국: 전통적으로 "기회균등", "개방문호"를 내세워 열강의 중국 진출을 견제해 왔지만,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과 이해관계가 대립했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만주에 미국 자본을 유치하여 협조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도 있었다.
  • 소련: 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1931년 12월 일소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는 등 일본에 대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관동군도 만주 경영을 위해 국력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일본 국내 여론은 만주국 승인을 강력히 요구했고, 우치다 코우야(内田康哉) 외무대신은 여론에 따라 강경론을 펼치며 초토연설(焦土演説)을 통해 만주국 승인 의지를 확고히 했다. 이는 일본이 60년간 모방해 온 서구 문명과 결별하고 전통적인 일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만주 문제는 국제 연맹 이사국으로서의 협조 외교에 대한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1932년 9월 15일, 일만 의정서 체결을 통해 일본은 만주국을 승인했다.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The Twentie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An instinct for War: Scenes from the battlefields of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3] 서적 Concise dictionary of modern Japanese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The Twentie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Chiang Kai-shek: China's Generalissimo and the Nation He Lost Carroll & Graf
[6] 서적 Encyclopedia of war crimes and genocide Facts on File
[7] 논문 Manshūkoku no Hou to Seiji: Josetsu https://repository.k[...]
[8] 서적 Manchuria Under Japanese Dominio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7-01-23
[9] 서적 Kieta Teikoku Manshū The Mainichi Newspapers Co., Ltd.
[10] 서적 The 1929 Sino-Soviet War: The War Nobody Knew University Press of Kansas
[11] 서적 The 1929 Sino-Soviet War: The War Nobody Knew University Press of Kansas
[12] 서적 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3] 논문 The Mukden Incident: September 18–19, 1931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4] 서적 The Last Emperor https://archive.org/[...] Bantam Books
[15] 간행물 Chronology of Major International Events from 1931 through 1943, with Ostensible Reasons Advanced for the Occurrence Thereof http://www.ibiblio.o[...] 78th Congress, 2d Session
[16] 서적 The Last Emperor
[17] 데이터베이스 World War II Database
[18] 서적 Japan's Struggle with Internationalism: Japan, China, and the League of Nations, 1931–3 Routledge
[19] 서적 Japan's Struggle with Internationalism: Japan, China, and the League of Nations, 1931–3
[20] 서적 Arise, Africa! Roar, China! Black and Chinese Citizens of the World i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1] 서적 The Last Emperor
[22] 논문 Misguided Intelligence: Japanese Military Intelligence Officers in the Manchurian Incident, September 1931
[23] 뉴스 War Responsibility – delving into the past (1) / Who should bear the most blame for the Showa War? http://www.yomiuri.c[...] Yomiuri Shimbun 2008-09-18
[24] 뉴스 War Responsibility – delving into the past (1) / Manchuria start of slide into war http://www.yomiuri.c[...] Yomiuri Shimbun 2008-09-18
[25]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Atheneum
[26] 웹사이트 How China's leaders changed the history of the War of Resistance to bolster Party prestige https://nuvoices.com[...] 2023-07-09
[27] 웹사이트 Sept. 18 Incident marked across China_"中国梦 我的梦"_中国山东网 http://dream.sdchina[...] 2014-09-18
[28] 웹사이트 我国多个地区拉防空警报纪念九一八事变_新闻中心_新浪网 http://news.sina.com[...] News.sina.com.cn 2019-03-16
[29] 서적 Remote Homeland, Recovered Borderland Manchus, Manchoukuo, and Manchuria, 1907–198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23-05-31
[30] 서적 Culture, Music Education, and the Chinese Dream in Mainland China https://books.google[...] Springer Nature Singapore 2023-05-31
[31] 서적 The Russian Kurosawa Transnational Cinema, Or the Art of Speaking Differently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23-05-31
[32] 웹사이트 No Regrets for Our Youth: A Retrospective on Kurosawa's Postwar Gem – Toho Kingdom https://www.tohoking[...] 2023-05-31
[33] 서적 Patriots and Traitors: Sorge and Ozaki: A Japanese Cultural Casebook MerwinAsia
[34] 웹사이트 Senkō no Night Raid's 7th Episode Streamed, Not Aired http://www.animenews[...] Anime News Network 2010-06-03
[35] null null null
[36] 서적 만주사변은 이렇게 계획되었다 知性 1956-12
[37] 웹사이트 九・一八歴史博物館
[38] 서적 1910-30年代の日本 2024-10
[39]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春文庫
[40] 웹사이트 満洲事変発生地名の再検討――『柳條溝』から『柳條湖』へ http://www.cneas.toh[...]
[41] 서적 (제목 없음)
[42] 서적 革命とナショナリズム 1925-1945 岩波書店 2010-10-20
[43] 서적 2017
[44] 서적 現代史資料7 満洲事変 みすず書房
[45] 서적 政党内閣の崩壊と満州事変 2022-03
[46] 서적 満州事変と政党政治 2024-09
[47] 서적 消えた帝国 満州 2022-03
[48] 논문? (제목 없음)
[49] 서적 2000
[50] 기타 (제목 없음)
[51] 뉴스 특집 다큐멘터리 용산공원 '제1부 한반도 영구 지배의 꿈 용산영구병영' KBS 2019-12-16
[52] 뉴스 “나도 피해자” 우기던 푸이, 일제 만행 확인하고 통곡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4-10-05
[53] 서적 송건호전집 4 한길사 2002
[54] 서적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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