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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야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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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야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전국 시대에 잇코잇키 세력과 벌인 일련의 전투로, 특히 이시야마 혼간지를 공격한 사건을 가리킨다. 렌뇨가 건설한 이시야마 혼간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성장하여 종교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고, 노부나가는 교토 재건 비용 명목으로 자금을 요구하며 혼간지를 압박했다. 1570년,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홍간사를 공격하며 전면전에 돌입했고, 1580년 겐뇨가 항복하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 전투는 종교 세력의 약화와 정교분리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혼간지는 분열되었고, 가가 잇코 잇키도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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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야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우타가와 요시후지의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그림
우타가와 요시후지(1828-1887)의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그림
분쟁센고쿠 시대
시기1570년 8월 ~ 1580년 8월
장소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 요새; 기타 잇키 거점
결과오다 승리, 코사 항복
교전 세력
공격측오다 노부나가
방어측잇코잇키 승려
아시카가 요시아키
모리 가문
지휘관
공격측 지휘관오다 노부나가
사쿠마 노부모리
니와 나가히데
아케치 미쓰히데
하라다 나오마사
아라키 무라시게
다카야마 우콘
호소카와 후지타카
이나바 요시미치
안도 모리나리
이코마 치카마사
방어측 지휘관코사
시모쓰마 나카유키
시모쓰마 라이류
사이카 마고이치
아시카가 요시아키
롯카쿠 요시카타
모리 데루모토
병력
공격측 병력최소 30,000명
방어측 병력최소 15,000명
해군 병력 (1차 기즈가와구치 전투)공격측: 약 306척
방어측: 약 700척
해군 병력 (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공격측: 6척
방어측: 600척
사상자
공격측 사상자불명
방어측 사상자불명
관련 전투
관련 전투덴노지 전투 (1576년)
기즈가와구치 전투
기타 정보
관련 캠페인오다 노부나가의 전투

2. 배경

이시야마 혼간사 모형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시대 일본을 통일하려는 과정에서, 그의 야망에 맞선 마지막 세력 중 하나는 무장한 승려와 일반 백성들로 구성된 일향일기(一向一揆) 연맹이었다. 노부나가는 이전에 미카와 국 등지에서 일향일기와 싸워 승리한 경험이 있었고, 1570년에는 이시야마 혼간지와 나가시마 두 곳이 일향일기의 마지막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 두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하여, 1570년 8월에는 이시야마를, 1571년에는 나가시마를 공격했다.[5]

이시야마 전투는 넓은 의미에서 1570년 9월 12일 이시야마 거병부터 1580년 8월 2일 겐뇨(顕如)가 퇴거할 때까지 10년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1580년 윤3월 7일 혼간지가 오사카 퇴거 서약서를 노부나가에게 제출하고 전투를 중지했기 때문에, 윤3월 7일을 끝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전투는 전국 시대 최대의 종교적 무장 세력이었던 혼간지 세력과,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한 오다 노부나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결전이었다. 이 전투의 종결과 함께 각지의 일향일기는 그 세력을 크게 잃었으며, 에도 시대에 혼간지가 분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6]

2. 1. 혼간지의 성장과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시대 일본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세력 중 하나는 승려와 백성들로 구성된 일향일기(一向一揆) 연맹이었다. 혼간지는 15세기 말 렌뇨(蓮如)가 오사카 이시야마에 터를 잡으면서 급성장했다. 이시야마는 작은 산과 강이 많아 방어에 매우 유리했고, 야마시나 혼간지(山科本願寺)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비를 강화하여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16세기 중반,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하고 교토에 입성하면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권력을 장악하고 천하 통일을 위한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5]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를 비롯한 이전의 권력자들은 혼간지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맺는 등 전면전을 피했지만, 노부나가는 달랐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비롯한 종교 세력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했고, 혼간지는 이에 응하여 자금을 지불하기도 했다.[6]

2. 2. 초기 갈등

오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포함한 종교 세력에 자금 지원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혼간지는 노부나가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미요시 씨 등 반(反) 노부나가 세력과 연대하며 견제했다.[5]

1568년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한 직후, 기내의 혼간지 계열 사찰에 군자금을 요구하고, 교토고쇼 재건 비용 명목으로 혼간지에 5000관을 요구했다. 겐뇨는 이를 지불했다.

1569년 노부나가가 미요시 씨 정벌을 시작하자, 당시 혼간지에 의지하고 있던 고노에 마에히사는 겐뇨에게 미요시 씨 지원을 건의했다. 그러나 마에히사는 조정과 막부 내 대립에서 요시아키를 배제하려는 목적이었고, 노부나가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후, 고노에는 교토로 돌아와 노부나가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5]

3. 전투

덴쇼 6년(1578년) 10월, 셋쓰국에서 이시야마 혼간지 토벌을 담당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켜(아리오카 성 전투) 노부나가의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 전략에 큰 차질이 생겼다. 이를 계기로 노부나가는 조정을 통해 혼간지에 화의를 타진했으나, 혼간지와 모리 가문의 찬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거부당했다. 노부나가는 모리 가문과도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칙사를 파견하려 했으나, 제2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오다 수군이 대승하자 화평 교섭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의 모반 진압에 집중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주변 장수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오래 지속되었지만,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2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모리 수군이 패퇴하면서 보급망이 끊긴 혼간지는 탄약과 병량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여, 덴쇼 7년(1579년) 12월, 노부나가와의 영구적인 화의를 검토하고 비밀리에 조정에 화평 교섭 재개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노부나가 측에서도 조정에 화평 교섭 중개를 재차 요청하여, 덴쇼 8년(1580년) 3월 1일, 조정에서 혼간지에 칙사를 보내자 혼간지는 화평 교섭에 동의했다. 노부나가는 고노에 사키히사를 파견하여 혼간지와의 타협점을 찾았다. 칙명강화라는 방식으로 화의를 맺기를 제안한 것은 노부나가 측이었으나, 실제로 화평 교섭을 신청한 것은 혼간지 측이었다는 설도 있다.

윤 3월 7일, 혼간지는 노부나가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여 세 번째 화의를 맺었다. 4월 9일, 겐뇨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아들 교뇨에게 넘기고 기이 사기노모리 별원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이시야마에 있는 병량으로 처자를 먹여살리던 사이카와 아와지 문도들은 이시야마를 떠나면 궁핍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 노부나가에게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교뇨도 이에 동조했다. 겐뇨가 이시야마를 떠난 뒤에도 이시야마는 노부나가에게 저항하는 교뇨 파가 점거하여, 이시야마를 손에 넣으려던 노부나가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7월 2일, 겐뇨는 사자를 보내 노부나가에게 감사를 표했고, 노부나가는 답례했다. 아라키 무라시게 모반 진압이 끝나고 고노에 사키히사가 재차 설득하여 교뇨 파는 이시야마를 노부나가에게 넘기고 사이카로 퇴거했다. 8월 2일, 마침내 이시야마는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왔다. 교뇨 파가 퇴거한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에 화재가 발생하여 3일 밤낮으로 불타 전소했다. 《신초코키》에서는 오다 측의 과실로 인한 실화였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3. 1. 요도가와 둑 전투 (1570년)

겐키 원년(1570년) 9월 12일, 겐뇨는 "오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멸망시키려는 불적이다"라는 격문을 혼간지 문도들에게 보내고, 셋쓰국 후쿠시마(福島)에서 미요시 가문(三好氏)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오다 군을 급습했다. 이시야마에서 출격한 혼간지 군은 9월 14일 요도가와 둑(淀川堤)에서 오다 군과 직접 격돌했으나, 오다 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전투가 끝나고 혼간지 군은 이시야마로 퇴각하여 농성전에 들어갔다.[1][2][3] 오다 군은 이미 주위가 적대 세력으로 둘러싸여 사면초가 상태였기 때문에, 이시야마에는 감시를 위한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조정을 통해 혼간지 군에게 창을 거두라는 칙서를 내리는 등 혼간지와의 전투를 피했다. 이 때문에 이시야마 혼간지의 제1차 거병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끝났다.

3. 2. 나가시마·에치젠 잇키 궤멸 (1573-1575년)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와 북 오미아자이 나가마사를 연이어 멸망시키고, 아사쿠라 가문의 본거지 에치젠에 마에바 요시쓰구를 슈고다이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요시쓰구는 강압적인 행위를 일삼아 고쿠진 영주들의 반감을 샀고, 그 다음 해인 1574년 1월에 고쿠진 영주와 손을 잡은 잇코잇키가 발생하여 요시쓰구는 살해당했다. 이로써 에치젠은 잇코잇키 세력에게 넘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겐뇨는 시모쓰마 라이쇼를 에치젠 슈고에 임명하여,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화의는 자연스럽게 파기되었다. 1573년 4월 2일, 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 가문에 대하여 다시 병력을 일으켰다.

혼간지는 나가시마·에치젠·이시야마 세 거점에서 노부나가에게 맞섰으나, 각 거점이 반독립적인 군정을 펼치는 약점이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를 이용하여 각개격파 전술을 펼쳤다. 1572년 7월, 노부나가는 대동원령을 발령하여 나가시마를 육상과 해상 양면에서 포위하고, 산발적인 공격과 함께 보급로를 봉쇄하는 병량 공격을 가했다. 나가시마 성은 이러한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9월 29일에 항복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에 불을 질러 잇키 세력을 궤멸시켰다. 주도자인 혼쇼지의 사교(佐堯)도 자결했다.

1575년,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를 격파하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뒤, 그해 8월 12일 에치젠으로 진군했다. 한편, 에치젠에서는 시모쓰마 라이쇼 등 혼간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에치젠 잇코잇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커져 잇코잇키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오다군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순식간에 에치젠을 제압하고, 100여 년간 잇코슈의 지배하에 있던 가가 남부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9월, 노부나가는 기타노쇼 성에 입성하고, 미노기후성으로 돌아가 이시야마를 견제했다.

혼간지의 세 거점 중 두 곳이 격파되고, 특히 나가시마 잇코잇키가 철저하게 진압된 것을 본 이시야마의 겐뇨는 노부나가에게 사죄하고 서약서를 바쳐 다시 화의를 맺었다. 지난번 화의와는 달리, 노부나가는 "이번 대응을 봐서 사면 여부를 결정하겠다"라고 하여 노부나가에게 현저하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부나가는 아직 우에스기·다케다·모리 가문 사이에 끼어 있어, 군사적으로 화의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3. 3. 덴노지 전투·기즈가와구치 해전 (1576-1578년)

1576년 봄, 겐뇨는 모리 가문의 비호를 받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손을 잡고 다시 봉기했다.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명하여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혼간지는 해상을 통해 보급을 받아 저항했고, 덴노지 전투에서 노부나가 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기도 했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모리 데루모토의 지원 요청에 따라 무라카미 수군과 모리 수군은 제1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오다 수군을 격파하고 혼간지에 보급을 성공시켰다.[10]

1577년, 혼간지에 협력하던 사이카슈와 네고로슈 일부가 노부나가에게 내응을 약속했다. 노부나가는 이즈미·기이 방면을 공격했고, 스즈키 마고이치의 거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사이카슈의 항복 제안을 받아들여 철수했다.

1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의 패전 이후, 노부나가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철갑선을 건조하게 했다. 1578년 6월, 철갑선 여섯 척을 중심으로 한 선단이 오사카 근해로 출진했다. 혼간지는 이 선단을 요격하려 했으나, 철갑선의 위력에 밀려 실패했다.

11월 6일, 모리 수군은 다시 기즈가와 하구에 나타났지만, 제2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철갑선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패전으로 혼간지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3. 4. 기이 방면 전투 (1577년)

1577년 2월 2일, 오다 노부나가는 기이의 사이카슈 중 혼간지에 비협조적이었던 사이카 3인방[7]과 네고로지의 스기노보가 노부나가 군에 내응하자, 이를 받아들여 기이 공격을 개시했다(기슈 정벌). 노부나가 군은 가이즈카의 사이카슈를 공격하고 사노로 진격하여 신타츠에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기이로 공격해 들어갔다. 3월 1일, 사이카슈의 두목이자 유력한 문도인 스즈키 시게히데(스즈키 마고이치)의 거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전선이 교착되자, 사이카슈는 다음 날 오사카의 혼간지 지원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제의했고, 노부나가는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7]

3. 5. 강화 (1580년)

오다 노부나가아라키 무라시게의 모반과 장기화된 포위전으로 인해, 조정을 움직여 혼간지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1578년 11월 4일, 오기마치 천황의 칙명이 내려져 간슈지 하루토요와 니와다 시게야스가 혼간지에 파견되었다.[8] 노부나가는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지만,[8] 혼간지는 모리 데루모토와의 "근년의 좋은 관계"를 이유로 단독 화의를 거부했다.[8]

하지만 제2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오다 수군이 승리하고 이바라키 성이 함락되자, 노부나가는 강화 교섭을 중단했다.[8] 이후 아리오카 성 함락(1579년 10월)과 미키 성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혼간지는 1579년 12월 영구적인 화의를 검토하게 되었고, 조정을 통해 다시 화해를 제안했다.[8]

1580년 1월, 미키 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칙사로 간슈지 하루토요와 니와다 시게야스를 다시 혼간지에 보냈고, 혼간지는 화의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고노에 사키히사도 파견되어 타협점을 모색했다.[8]

윤 3월 7일, 혼간지는 노부나가에게 서약서를 제출했고, 세 번째 강화가 성립되었다. 조건은 겐뇨 등의 오사카 철거 등이었다.[8] 4월 9일, 겐뇨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아들 교뇨에게 넘기고 기이 국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교뇨는 잡가 문도들의 지지를 받아 저항을 계속했다.[8]

7월 2일, 겐뇨는 노부나가에게 사례했고, 고노에 사키히사의 설득으로 교뇨 측도 이시야마를 넘겨주고 잡가로 물러났다. 8월 2일, 이시야마는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왔다.[8]

그러나 인계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사흘 밤낮으로 불길이 이어져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몬인 일기에는 교뇨 측의 방화 소문이 기록되어 있다.[8] 사쿠마 노부모리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8]

4. 결과

이시야마 전투는 전국 시대 최대의 종교적 무장 세력인 본원사 세력과,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한 오다 노부나가와의 군사적·정치적 결전이었다. 이 전투는 당시 최대의 종교 봉기였기 때문에, 이 전투가 종결되면서 각지의 종교 봉기는 격감했다.[5] 이시야마 전투의 종결과 동시에 각지의 일향일기(一向一揆)는 그 기세를 현저히 잃었다.

또한, 이 전투는 에도 시대에 본원사 세력이 분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에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던 자리에 오사카성 축성을 시작했으며, 20세기에 그 복제품이 건설되었다.

4. 1. 혼간지의 분열

1580년 윤3월 7일에 본원사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오사카 퇴거 서약서를 전달하여 전투 행위를 중지했지만, 겐뇨 퇴거 후에도 쿄뇨가 강화에 반대하며 이시야마를 점거했기 때문에, 본원사는 겐뇨와 쿄뇨의 두 파로 나뉘었다.[5] 결국 쿄뇨도 이시야마를 떠나면서 내분은 일단락되었고,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한 직후 겐뇨와 쿄뇨는 조정의 중재로 화해했다. 그러나 겐뇨는 내분의 핵심이었던 쿄뇨를 폐적하고 셋째 아들인 준뇨를 적자로 정했다. 1592년 11월, 겐뇨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쿄뇨가 본원사를 이었지만, 뇨슌(겐뇨의 처, 쿄뇨·준뇨 등의 모) 등이 겐뇨의 유지에 따라 히데요시에게 요청하여, 이듬해에 쿄뇨는 은거하고 동생 준뇨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쿄뇨는 오사카의 오타니 본원사(난바 미도, 현재의 진종오타니파 난바 별원)를 본거지로 하여, 각지의 문도에게 본존을 하부하는 등 법주로서의 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본원사는 준뇨를 지지하는 파와 쿄뇨를 지지하는 파로 사실상 분열되었다. 1602년, 쿄뇨는 이전부터 친밀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토지를 기증받아 교토의 시치조 카라스마루에 히가시혼간지를 세웠기 때문에, 본원사는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4. 2. 가가 잇코 잇키 진압

오다 노부나가와 혼간지의 강화 조건에도 불구하고, 교뇨가 항전을 호소했기 때문에 가가 잇코 잇키와 노부나가의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의 교전은 계속되었다. 노부나가와 겐뇨는 정전을 명령했지만 전투는 계속되어, 1580년(덴쇼 8년) 11월 17일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여러 장수를 잃었다. 1582년 3월에는 시로야마 산기슭 도리고에 성의 잇키가 진압되어 「백성의 나라인 나라」는 종언을 맞이했다.[1]

5. 영향

이시야마 전투는 전국 시대 최대의 종교적 무장 세력인 본원사 세력과,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한 오다 노부나가와의 군사적·정치적 결전이었다. 이 전투의 종결과 동시에 각지의 일향일기(一向一揆)는 그 기세를 현저히 잃었다. 또한, 에도 시대에 본원사 세력이 분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5]

이시야마 전투 결과, 종교 세력의 비무장화가 가속화되었고, 종교 단체는 독립성을 잃고 정권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ese Warrior Monks AD 949–1603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Ltd. 2003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4] 서적 Hideyoshi Harvard UP 1982
[5] 문서 [[진종고다파]]·[[진종삼문도파]]처럼 정토진종 안에서도 반본원사 세력 제파는 본원사 세력에 호응하지 않았다. 또한, 본원사 세력 하에서도 [[부타야마사내정]]처럼 노부나가 측에 의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중립 혹은 노부나가 측에 붙은 자도 있었다.
[6] 학술지 전국·중근세 이행기의 오사카 본원사의 호칭-『이시야마』표현을 둘러싸고- 오사카 역사학회
[7] 문서 잡가에는 정토진종의 사기모리 오보 외에 [[정토종 서산파]]의 본산인 [[총지사 (와카야마시)|총지사]]가 있기 때문에 정토종 신자도 많고, 이시야마 합전의 대응에 대해서도 진종 문도나 노부나가에 반발하는 비문도의 국인이 많아 본원사 지원에 적극적인 「잡가장」「십가향」과 소극적인 「중향(중가향)」「남향(삼상향)」「궁향(사가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8] 서적 모리 란마루의 어머니와 그 흐름~묘원사사에 따라서 근대문예사 1996
[9] 문서 다만, 여기서 다루는 혼간지는 현재의 정토진종 혼간지파(서 혼간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정토진종 전체가 혼간지 측에 선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10] 문서 실제로는 600척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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