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양구는 1916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938년 식품 도매상 대양공사를 설립했으며, 1947년 월남 후 외상거래를 통해 과자를 판매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전쟁 중 설탕 도매업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제과업과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여 풍국제과와 동양시멘트를 인수, 발전시켰다. 그는 사회 공헌에도 힘써, 1960년대 어려운 농민을 돕고, 교육기관에 기부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1962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창립 위원 및 이사, 1963년 한국양회공업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0년 석탑산업훈장, 1987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고,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이양구는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 기업인으로, 어린 시절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했다. 1916년 함주군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15세에 영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서 일하며 사업 경험을 쌓았다.
2. 생애
1938년 식품도매상 '대양공사'를 설립했고, 1947년 남한으로 내려와 '수형거래'라는 외상거래 방식으로 과자를 판매해 성공했다.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나, 부산에서 설탕 도매업으로 재기에 성공, '설탕왕'으로 불렸다.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업"이라는 신념으로 풍국제과를 인수하고, 이병철 등과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 삼척시멘트를 인수했다. 이후 동양시멘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한국경제인연합회 창립, 한국양회공업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젊은 지식인을 후원했다. 흉년에는 농민들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고, 삼척시 하천 정비 사업을 지원했다. 배재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기부하고, 서남장학재단(현 오리온재단)을 설립해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했다.
2. 1. 생애 초반
이양구는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의 기업인으로, 어린 시절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했다. 1916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에 영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서 일하며 사업 경험을 쌓았다.
이후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설립, 1947년 남한으로 내려와 '수형거래'라는 외상거래 방식으로 과자를 판매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부산에서 설탕 도매업으로 재기에 성공, 전쟁 직후 설탕 수입 계약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설탕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2. 1. 1. 출생과 성장
이양구는 1916년 함경남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아버지 이교흠(李敎欽)과 어머니 김성자(金成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함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함경남도 삼평면 풍서리였다. 이양구는 아버지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백부가 벌인 한약방 사업이 실패한 탓에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15세에 영신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 ‘함흥물산’에 취직했다.
8년간 돈을 모은 이양구는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설립했다. 이후 1947년 단신 월남한 뒤 ‘수형거래’로 불리는 외상거래제를 통해 과자를 판매하였다. 이는 남한에서 실시된 최초의 외상거래였다. 이양구는 새로운 거래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으나, 전쟁으로 이를 모두 잃었다.
2. 1. 2. 사업 기반 마련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설립했다. 1947년 단신 월남한 뒤 '수형거래'로 불리는 외상거래제를 통해 과자를 판매하였는데, 이는 남한에서 실시된 최초의 외상거래였다. 이양구는 새로운 거래방법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이를 모두 잃었다.
이후 이양구는 부산에서 설탕도매업을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1950년 6월 10일을 전후하여 한 회사와 설탕 40만 근 매입 계약을 맺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설탕이 일 년 가까이 지나 부산항에 들어왔다. 당시 생필품 가격은 전쟁으로 인해 7~8배 올라있는 상황이었고, 계약 업체는 배송 지연에 대한 보상으로 계약한 물량에 대한 2배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계약자는 더 많은 배송을 요구했지만 이양구는 업체의 2배 제안을 받아 들이고,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남은 20만 근의 설탕까지 모두 구입했다. 이로써 부산항에 하역된 설탕 100만 근이 모두 이양구의 것이 되었고, 이 사건으로 이양구는 부산과, 마산, 대구 등에서 '설탕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2. 기업 활동
이양구는 제과업과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풍국제과를 인수하고, 이병철 등과 함께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는 등 활발한 기업 활동을 펼쳤다. 이후 삼척시멘트를 단독 인수하여 동양시멘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2. 2. 1. 제과업 진출
이양구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과자다운 과자를, 가난한 집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과자를 만들고자 제과업에 진출했다. 설탕 도매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경영난에 허덕이던 풍국제과를 인수하는 데 모두 투자했다. 풍국제과의 지분 50%에 해당하는 2억원의 자본을 출자하여 풍국제과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2. 2. 2. 시멘트 사업 진출
1955년 이양구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풍국제과의 배동환과 공동출자로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양제당이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면서 이양구는 자연스럽게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당시 삼척시멘트는 연간 생산 능력 80000ton, 종업원 900여 명에 이르는 최고의 역사를 가진 회사였지만 연간 생산량은 50000ton에 불과했다. 또한, 원조 물자와 값싼 외국 시멘트 수입으로 국내 시멘트 공급이 넘쳐날 정도였다. 결국 동업자였던 이병철, 배동환 등은 인수 6개월 만에 자본금 이 잠식되고 에 이르는 적자 상태가 되자 자본 철수를 결정했다.
이양구는 ‘사업을 통해 국가를 일으킨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삼척시멘트 단독 인수를 결정하고 1957년 6월 15일 동양시멘트(전 동양세멘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2. 3. 사회 활동
이양구는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 기여했다.
; 대내외 활동
한국경제인연합회 창립 및 한국양회공업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젊은 지식인을 후원하는 등 대내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 사회 공헌
흉년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고, 삼척시의 하천 정비 사업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또한 배재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기부하고, 서남장학재단(현 오리온재단) 설립을 통해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에 앞장섰다.
2. 3. 1. 대내외 활동
이양구는 1962년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여 창립위원 및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963년 한국양회공업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64년 한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양구는 학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학문과 지식을 수용하기도 했다. 특히 강원용 목사, 강영훈 전 총리, 백영훈 박사, 이동원 전 장관, 박익수 교수, 조동필 교수, 이태성 교수, 이어령 교수, 이기택 교수, 이영호 전 장관, 박정수 전 의원 등을 핵심으로 한 이른바 ‘이양구 학파’와 어울리며 “이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젊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젊은 지식인을 후원했다.
2. 3. 2. 사회 공헌
1959년 역사적 흉년으로 전국적으로 굶어 죽는 농민의 이야기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당시 이양구는 삼척공장을 단독 인수하여 시설 보수, 증설 공사로 자금난에 시달리고, 미국개발차관기금(DLF)을 빌려 18만 톤 증설공사를 마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보살피고자 거금 1000만원을 헌납하였다.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당시 이양구가 쾌척한 돈은 농민구호자금으로 활용되어 밀가루와 생필품 구입에 쓰였으며, 전국 각지의 어려운 농가에 배급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말 혁명정부는 삼척시 읍내를 관류하는 오십천(五十川)의 물길을 변경하는 하천부대공사를 동양시멘트에서 진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잦은 수해를 방지하고 10만여 평의 주택용지와 농경지 및 공업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공사였으나 1.8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양구는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여 1962년 1월 26일 당시 삼척군수 김동석(金東石) 씨와 함께 공사시공계약을 체결, 2월부터 남산 절단공사에 들어갔다. 이 공사는 공공사업 성격이 짙었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는 삼척군수가 지정한 실업자 직업안정소를 통해 채용했으며, 이들의 거의 대다수가 구호대상자였다. 공사에 동원된 연 인원은 25만 5천 명에 가까웠다. 동양시멘트는 8년에 걸친 남산 절단공사로 생겨난 부지를 삼척시에 헌납했으며, 이때 만들어진 부지는 지금의 삼척 시가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아직 사회적으로 기부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던 시기에 이양구는 이미 기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960년 배재고등학교 교사 신축을 위해 3천만 환을 기탁하고, 1960년대 후반에는 1억원을 이화여자대학교에 기부하여 학교 재정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인재교육에 대한 이양구의 유지에 따라 1987년 동양그룹은 서남장학재단(현 오리온재단)을 설립하고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3. 약력
날짜 내용 1916년 10월 14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풍서리 58번지에서 이교흠과 김성자의 차남으로 출생. 1931년 영신보통학교 졸업 후 식품 도매상 함흥물산 입사 1938년 4월 식품 판매상인 대양공사 설립 1947년 5월 17일 단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외상 거래제로 과자 판매 시작 1954년 5월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 설립, 제일제당공업㈜의 설탕 독점 판매 1955년 5월 이병철, 배동환과 함께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 설립 1956년 7월 동양제과공업주식회사 설립, 대표이사 사장 취임 1957년 6월 15일 동양시멘트의 운영권과 소유권 단독 인수, 대표이사 사장 취임 1959년 4월 동양시멘트 삼척공장 제1차 대보수 공사 완공, 삼척에 육경단 건립 1960년 9월 동양산업개발㈜ 설립 1962년 8월 한국경제인협회 창립 위원 및 이사 1963년 12월 한국양회공업협회 창립, 초대 회장 1967년 1월 동양제과, 동양산업개발 대표이사 회장 취임, 동양종합공업주식회사 설립 1970년 7월 석탑산업훈장 수훈 1972년 1월 동양시멘트 대표이사 회장 취임 1981년 1월 동양제과 대표이사 사장 취임 1985년 6월 동양제과 대표이사 회장 취임 1987년 3월 제14회 상공의 날 유공상공인으로 은탑산업훈장 수훈 1987년 6월 삼척시에 서남장학재단 설립 1989년 10월 19일 정부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 1989년 10월 22일 동양시멘트 삼척공장에서 영결식 후 육경단 인근 묘역에 안장
4. 상훈
5. 저서
- 《새벽의 사색》
- 《제헌의 세계》
- 《문제와 사색》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