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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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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병철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중퇴 후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사과와 건어물 수출업을 시작하며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오늘날 삼성그룹의 기틀을 다졌으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설립하며 제조업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삼성전자 설립 등 사업 확장을 통해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그는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호암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으며, 1987년 사망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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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Lee
이름이병철
한글이병철
한자李秉喆
로마자 표기I Byeong-cheol
Mr 표기Yi Pyŏngch'ŏl
호암(湖巖)
출생일1910년 2월 12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일1987년 11월 19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교육중동고등학교, 와세다대학교 (중퇴)
직업기업인
활동 기간1938년–1987년
배우자박두을 (1926년 결혼)
자녀이인희 (기업인) (딸)
이맹희 (아들)
이창희 (1933년) (아들)
이건희 (아들)
이명희 (딸)
친척이재용 (손자)
이부진 (손녀)
이재현 (기업인) (손자)
정용진 (외손자)
이미경 (손녀)
웹사이트hoamfoundation.org
주요 활동
직함삼성그룹 창업주
CJ그룹 창업주
삼성 회장 (1938년–1987년)
기타 활동한일경제협회 고문
수상
훈장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일본 훈일등서보장
기타미국 세계최고 경영인
기타 정보
본관경주 이씨
별명호암(湖巖)
종교알려진 정보 없음
부모알려진 정보 없음
형제사돈 홍진기
자부 홍라희
사위 조운해
사위 정상희

2. 생애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지수공립보통학교, 수송공립보통학교, 중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1931년 건강 문제로 중퇴했다.[22] 귀국 후 한동안 방황하다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8]

1930년대 대구의 삼성상회
삼성상회는 사과, 건어물 등을 수출하고 운송업과 부동산 사업을 하였다.[8] 1945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9] 1947년 서울에 본사를 두었다.[9]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사업체를 옮겼으며,[10] 1951년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무역업을 재개했다.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며 제조업에 진출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의 경제 지침에 따라 은행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10] 같은 해 대한상공회의소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11]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3년 동양방송을 설립하고, 1964년 한국비료를 인수했으며, 동양방송을 통해 방송에 진출했다.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하여 언론에도 진출했으나,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차남 이창희 (1933년)|이창희한국어가 사퇴하고, 장남 이맹희 (실업가)|이맹희한국어가 회장직을 이어받았으나, 박정희 정권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21]

1976년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로 회복했다.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문화재단, 장학회 등을 설립하고 백화점, 호텔 경영에도 참여했다.[33]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 울산 공단 설립에 기여했다.

1981년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미술품 수집과 호암미술관 건립에 힘썼다. 1985년 폐암 판정을 받았고,[37] 1987년 11월 19일 78세로 사망했다.[34] 묘소는 용인 에버랜드에 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34]

2. 1. 생애 초기 (1910년 ~ 1937년)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의령에 정착한 이래 진주에 거주한 집안이라고 주장한다.[30] 이병철은 경주 이씨 종친회 총재를 오랜 기간 맡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이병철의 할아버지 이홍석(호는 문산, 1838~1897)은 성호학파로 성리학과 실사구시 학풍을 추구한 사대부였으며 서예와 시문에 능했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한 인물로 이승만과 인연을 얻기도 했다. 이병철은 형과 함께 문산정에 가서 가문의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재능은 생각보다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호암자전에 의하면 진도는 늦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히 공부했다고 한다. 스스로 가장 많은 감동을 받고 필요로 한 책은 논어라고 주장하였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22]

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22]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 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1926년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에게 자신의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조홍제에게 일본 유학 경비 500JPY을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조홍제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그의 도움으로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에서 매달 생활비로 200JPY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JPY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대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병철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가족은 대대로 저축에 열심이었고, 할머니는 끼니를 줄이면서라도 더 많은 천을 만들기 위해 베틀에 매달렸다.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용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 1934년 건강 악화로 중퇴했다. 대학 중퇴 후 26세까지 현대의 니트족과 같은 생활을 보냈으나,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1936년 마산에서 친구 2명과 10000JPY씩 출자하여 협동정미소 사업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실패했다.

2. 2. 기업 활동 초기 (1938년 ~ 1960년)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면서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8] 삼성상회는 운송업과 부동산 사업을 하였으며,[8] 사과와 건어물 수출업도 하였다. 삼성(Samsung)은 '세 개의 별'을 의미하며, 초기 회사 로고에 반영되었다. 그 이전 1936년에는 마산에서 친구 2명과 함께 협동정미소 사업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실패했다. 이후 쌀 투기에 성공했지만, 토지 투기에는 실패했다. 삼성상회 경영은 이전과 달리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사업이 확장되자 일본주 양조장을 인수했다. 당시 일본주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통제품이어서 판매가 호조를 보였다.

1945년에는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9] 1947년에는 서울에 본사를 두었다.[9]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삼성은 10대 기업 중 하나였다.[10] 서울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이병철은 사업체를 부산으로 옮겨야 했다.[10] 이후 1년 반 동안 부산으로 유입된 미군 병력과 장비는 이병철의 무역회사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10] 1951년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무역업을 재개했다.

1953년에는 제일제당을 설립하며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1954년에는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병철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고, 한동안 귀국하지 않았다. 이후 귀국했지만, 삼성은 인수했던 은행들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박정희 정부의 경제 지침을 따라야 했다.[10] 같은 해 대한상공회의소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졌다.[11]

2. 3. 사업 확장과 시련 (1961년 ~ 1970년대)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3년 동양방송을 설립했고, 1964년 초 한국비료를 인수했으며, 같은 해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 진출했다. 그해 대구대학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간하여 언론에도 진출했으나,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1980년 언론통폐합 전까지 운영했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2. 3. 1.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31] 부산세관은 같은 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31]

이맹희는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하였다.[31]

1966년 차남 이창희 (1933년)|이창희한국어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일시 사퇴하게 되고, 장남 이맹희 (실업가)|이맹희한국어가 삼성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지만, 박정희 정권에 정보를 흘렸다고 여겨 경영 복귀 후 후계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1]

2. 4. 생애 후반과 사망 (1970년대 후반 ~ 1987년)

1976년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로 건강을 회복했고, 삼성정밀 등을 설립,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이 외에도 문화재단, 장학회 등을 설립하고 백화점, 호텔 경영에도 참여해 사업 다각화를 통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33]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등과 울산 공단 조성에 투자, 기부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 울산공단으로 발전했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 이듬해 재위촉되었다. 미술에 심취하여 많은 소장품을 수집, 호암미술관을 건립했고, 국악, 서예에도 관심을 가졌다.

1985년 폐암 판정을 받았고,[37] 금탑산업훈장,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초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 11월 19일 78세로 사망했다.[34] 묘소는 용인에버랜드에 있다.[34]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호암미술관이 공개되었고, 소장 한국 미술품은 국내 최대 개인 소장품 중 하나로, "국보"로 지정된 미술품을 포함한다.[15]

3. 사회 공헌

1965년, 이병철은 한국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장려하기 위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다.[12][13]

사후, 호암미술관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이병철의 한국 미술품 소장품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개인 소장품 중 하나로 여겨지며, 한국 정부로부터 "국보"로 지정된 많은 미술품을 포함하고 있다.[15] 호암미술관은 에버랜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4. 가족 관계

이름출생사망관계비고
이찬우1879년1957년아버지
권재림1881년1959년어머니
이병각1906년1971년
이병윤1908년1991년누나
이명점1899년1982년첫째 누나배우자 이계동
박두을1907년2000년배우자
구로다배우자일본인
이인희1929년2019년장녀한솔그룹 고문, 배우자 조운해(강북삼성병원 이사장)
이맹희1931년2015년장남CJ그룹 명예회장, 배우자 손복남(CJ그룹 고문)
이창희1933년1991년차남새한그룹 회장, 배우자 이영자(일본인)
이숙희1935년차녀배우자 구자학(아워홈 회장)
이순희1939년3녀제일기획 고문, 김규(서강대 영상대학원장)와 이혼
이덕희1940년4녀배우자 이종기(삼성화재해상보험 회장)
이건희1942년2020년3남삼성전자 회장, 배우자 홍라희(리움 관장)
이태휘1947년4남제일제당 상무, 일본 거주
이명희1943년5녀신세계그룹 회장, 배우자 정재은(조선호텔 명예회장)
이혜자1952년6녀일본 거주


5. 평가

이병철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병철을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선구적인 기업가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의 과감한 투자 결정과 혁신적인 경영 방식은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반도체 산업 진출은 한국이 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병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정경유착, 노동 탄압, 편법 상속 등의 문제는 그의 경영 윤리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 방침은 노동자의 권익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의 논란거리이다. 또한, 족벌 경영 체제는 한국 재벌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며, 이병철은 이러한 체제를 구축하고 강화한 인물로 비판받기도 한다.

이병철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과오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통해 한국 경제와 사회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6. 어록

이병철한국어 회장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1]


  •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
  •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 힘들어도 웃어라. 권력자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 기도하고 행동하라. 기도와 행동은 앞바퀴와 뒷바퀴이다.
  • 있을 때 겸손해라. 그러나 없을 때에는 당당해라.
  •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 남이 잘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 일본과 친해져야 부국강병한다.

참조

[1] 웹사이트 Lee Byung-chul https://www.chosun.c[...] 2024-06-15
[2] 뉴스 Business Philosophy of Lee Byung-chull https://www.koreatim[...] 2010-02-10
[3] 뉴스 Lee Byung-chull: founder of Samsung Group https://www.koreatim[...] 2019-04-11
[4] 웹사이트 Dynasty Korea's corporate roots Samsung founder Hoam risked it all to succeed https://koreajoongan[...] 2021-06-30
[5] 웹사이트 이병철씨도 「경이」 https://www.joongang[...] 2023-03-24
[6] 웹사이트 [정경연의 풍수기행] 의령 삼성 이병철 회장 생가, 완벽한 '부자의 터' https://www.joongboo[...] 2024-08-02
[7] 웹사이트 Hail the Father of Business, Lee Byung-chul http://www.koreaitti[...] 2021-06-30
[8] 웹사이트 Hail the Father of Business, Lee Byung-chul http://www.koreaitti[...] 2016-05-05
[9] 서적 Samsung Rising: The Inside Story of the South Korean Giant That Set Out to Beat Apple and Conquer Tech Paperback Currency (Crown Publishing Group) 2020-03-17
[10] 웹사이트 The Chaebol of South Korea http://www.sjsu.edu/[...] 2011-07-22
[11] 기타 Samsung's development in chronological order
[12] 웹사이트 SAMSUNG FOUNDATION OF CULTURE SAMSUNG FOUNDATION http://www.samsungfo[...] 2021-06-30
[13] 웹사이트 Ho-Am Byung-chull Lee - HOAM http://www.hoamfound[...] 2021-06-30
[14] 서적 Samsung Electronics: The Global Inc https://books.google[...] LEE Dongyoup 2006
[15] 웹사이트 Ho Am Art Museum, "Official Web Site" http://hoam.samsungf[...]
[16] 웹사이트 Meet Samsung's billionaire Lee family, South Korea's most powerful dynasty http://www.businessi[...] 2017-07-15
[17] 웹사이트 Samsung boss Lee Kun-hee wins inheritance case appeal https://www.bbc.co.u[...] 2014-02-06
[18] 뉴스 [SUPER RICH] Lee Maeng-hee's death brings Samsung family together http://www.koreahera[...] 2017-07-15
[19] 웹사이트 李秉喆とは https://kotobank.jp/[...] 2022-11-14
[20] 웹사이트 (6)경주 이씨(慶州李氏)-1,424,866명 http://www.seoulecon[...] 2022-08-16
[21] 웹사이트 長男イ・メンヒが弟イ・ゴンヒに押された理由は…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 2012-02-15
[22] 웹사이트 이병철(李秉喆) http://encykorea.aks[...] 2022-08-23
[23] 웹사이트 [新 한국의 가벌] #1. 삼성 이병철家 - LG 창업주 구인회와 사돈 맺으며 재벌가 ‘혼맥 시대’ 열어 http://www.sisajourn[...] 2023-09-15
[24] 웹사이트 삼성그룹 가계도, 고(故) 이병철 명예회장의 아들과 딸들 https://news.mt.co.k[...] 2023-08-23
[25] 기타 경주이씨대종보 권지 38 판전공파편 전 122쪽 (경주이씨중앙화수회 1987년 인쇄), 일본와세다대학을 수료하고 경제학박사
[26] 웹사이트 의령 삼성 이병철 회장 생가, 완벽한 '부자의 터' http://www.joongboo.[...] 2017-12-27
[27] 웹인용 이병철 (李秉喆). 해방 이후 삼성물산주식회사, 제일제당주식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인.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8] 웹인용 이병철 삼성 창업주 36주기 추도식…이재용 회장은 공판으로 불참 https://n.news.naver[...] 중앙일보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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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웹사이트 http://www.hoamfound[...]
[31] 뉴스 (언론권력)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08-07
[32] 웹사이트 지휘봉 다시 잡은 이병철, 삼성전자 설립해 돌파구 http://sunday.joins.[...] 2010-03-28
[33] 기타 삼성에버랜드의 전신
[34] 뉴스 재벌 ‘조상묘 지키기’ 비상 http://sports.khan.c[...] 스포츠경향 2010-01-31
[35] 웹인용 범삼성家 가계도…고 이병철 회장의 아들과 딸, 면면 살펴보니 http://sbscnbc.sbs.c[...] 2016-03-30
[36] 뉴스 격동 50년 http://www.imbc.com/[...] MBC
[37] 뉴스인용 이병철 회장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 공산당원과…"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1-12-17
[38]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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