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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14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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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李耔, 1480년 ~ 153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사림파 성향을 보였다. 150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껴 외직을 자청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개혁을 추진했으나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충주 수주팔봉으로 은거했다. 그는 학문적으로 사장을 지향하고 현실 문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1583년 충주에 계탄서원이 건립되어 추앙받았다. 현재 묘역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 생애

이자는 종선계를 중심으로 가문의 성향이 훈구파였지만,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사림파 성향을 견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사림파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 노선을 택했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을 지향하고, 현실 대응 면에서는 수기(修己)보다 치인(治人)의 입장에 섰으며,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했다.

《기묘명현록》에 이름이 올라 있고, 충주의 팔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음애일기》, 《음애집》 등이 있다. 노수신이 행장을 썼다.[1]

2. 1. 초기 생애

이자(李耔)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예견의 부임지를 따라 관동과 영남 등지에서 살았다. 14세 때인 1494년(성종 25년)에는 삼척의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 《송사》를 읽고 개연히 발분하여 〈만언소〉를 지어 상소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그만두었다.[1] 어려서부터 시정에 대한 명철한 혜안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 15세 때는 김굉필의 문인이자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에게 나아가 이희보, 김공량, 송세충 등과 함께 수학했다.[1] 15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때 함께 합격한 김안국, 성세창 등과 교유했다.[1] 22세 때인 1502년(연산군 8년) 생원, 진사시에 이수정, 김안국에 이어 각각 2등(총 12명), 2등(총 18명)으로 합격했다.[1] 24세 때인 1504년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1]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의성 현령)을 구해 나갈 정도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1]

2. 2. 중종반정 이후 활동

중종반정으로 발탁되어 수찬, 교리,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과 우부승지에 올랐다.[2] 당시 조광조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다.[2]

그는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남곤, 김안로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2]

1519년 형조판서와 우참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숙청될 때 이자 역시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당했다.[2] 이후 충주시수주팔봉으로 물러나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던 김세필, 이약빙, 이연경 등과 학문을 교유하면서 지내다가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2]

2. 3. 기묘사화와 은거

1519년 형조판서와 우참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숙청될 때, 이자 역시 같은 일파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충주시수주팔봉으로 은거하여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던 김세필, 이약빙, 이연경 등과 학문을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1][2]

3. 수주팔봉과 계탄서원

기묘사화 이후 이자수주팔봉으로 유배를 갔고, 이연경과 교류하였다. 이자가 세상을 떠난 후 1582년 충청감사 김우굉과 충주목사 이선이 이자를 추모하여 1583년 계탄서원을 건립하였다. 계탄은 이자의 호인 계옹(溪翁)과 이연경의 호인 탄수(灘叟)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이들 두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노수신이 계탄서원의 완성을 기뻐하며 '칼바위(劍巖)' 시를 지었다.[1][2]

3. 1. 수주팔봉 유배 생활

1519년 기묘사화조광조와 김정은 귀양 후 사형당했고, 이자(李耔)는 훈구파 남곤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귀양을 갔다. 1차 귀양지는 용인 지곡동, 2차 귀양지는 음성 음애동, 3차 귀양지는 수주팔봉이 있는 충주 토계리였다. 이자가 토계리 칼바위(劍巖)로 귀양 온 것은 1529년이다. 이자는 이곳에 몽암(夢庵)을 짓고, 1519년 기묘사화로 충주에 낙향해 살고 있는 이연경과 교류한다.[1][2]

4. 사후

음애 이자 묘역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다. 1990년 11월 22일 용인시의 향토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6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72호로 승격되었다.

참조

[1] 웹인용 팔봉서원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 https://www.cbfc.or.[...] 충북문화재단 2021
[2] 뉴스 수주팔봉 굽이 도는 칼바위(제61호) http://www.mhj.kr/ne[...] 문화저널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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