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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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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굉필은 1454년에 태어나 1504년에 사망한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자이자 사림파의 영수이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소학을 중시하는 학풍을 따랐고, 성균관 유생으로 활동하며 관직에 나갔으나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형을 당했다. 사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고, 동방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조광조, 이황 등에게 학문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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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굉필
한자 이름金宏弼
김굉필 친필 필적
출생일1454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정동
사망일1504년 10월 7일 (향년 51세)
사망지조선 전라도 순천군 철물시장 앞 (사사)
임기1496년 2월 29일 ~ 1498년 8월 21일
섭정신승선
거주지한성부 정동
경상도 달성군 현풍
경상도 합천군 (한훤당 유래, 합천 일민으로 출사)
평안도 희천 (유배지)
전라도 순천군 승평 (유배지)
국적조선
군주연산군 이융
대유(大猷)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한훤(寒暄)·말곡(末谷)
시호문경(文敬)
학력김종직 문하에서 성리학 수학
1480년 생원시 입격
성균관 생원
직책조선의 형조좌랑
경력문신,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화가
종교성리학
배우자순천 박씨 부인
아버지김유
어머니청주 한씨
친인척외조부 한승순(韓承舜)
자녀아들 김언상(金彦庠)
정당무소속
스승김종직

2. 생애

김굉필은 1454년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나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소학》을 읽고 감명을 받아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했다. 그는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전통을 이었으며, 성리학에 능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학자가 되었다.[3] 그는 소학을 학문과 행동의 근간으로 삼았다.

김종직 문하에서 김전(金詮), 김일손, 권오복, 남곤, 이목, 정여창 등과 교류하였으며, 김종직의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며 조정의 정책에 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484년 스승 김종직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시를 지어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비판했다.[4] 이 일로 김종직과 틈이 생겼으나, 김굉필은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5]

1492년 스승 김종직이 죽은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문하생을 받아들였고, 최산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이심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실천을 중시했으며, 이는 후대 사림에게 영향을 주었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여 남부참봉,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군자감주부,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1]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고, 2년 뒤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1]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조광조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형당했다. 향년 51세였다.[1]

2. 1. 출생과 가계

김굉필은 1454년 어모장군 행충좌위사직(禦侮將軍 行忠佐衛司直) 김유(金紐)와 한승순의 딸 청주 한씨의 아들로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나, 집안을 따라 달성군 현풍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일설에는 그의 고향을 대구광역시경상북도로 보기도 한다.

2. 2. 수학과 소학동자 (小學童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어느날 《소학》의 어느 글귀를 읽고 깊이 감동하였다. 이후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칭하였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었으며, 성리학에 능하고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가 되었다.[3] 그는《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고,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에 나온대로 실천궁행에 힘썼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여 고민하였으나, 김종직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 늦고 빠른 것은 없으며 자신은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천에 힘쓴다면 나중에 크게 발전할 것이라며 권면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였으니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초기에는 힘들었으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 나중에는 새벽에 닭이 울지 않아도 저절로 기상하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전(金詮), 김일손, 권오복, 남곤, 이목, 정여창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김종직의 뛰어난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 있을 때 향시에 합격했는데, "업문유미식천기, 소학서중오작비, 종차진심공자직, 구구하용선경비"라고 쓴 향시의 답안이 전한다.

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에 3등 32위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는 중에도 조정의 정책에 대한 여러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이 된 첫 해에 초시에 합격하였다.

2. 3. 김종직과의 관계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조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하였다.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다.[4]

道在裘不裘 夏在氷不氷|도재구불구 하재빙불빙|도(道)라는 것은 겨울엔 갖옷 입고 여름엔 얼음 마시는 것인데중국어

開則行 雨則止 何以謂之全|개즉행 우즉지 하이위지전|날 개면 가고 비 오면 그치는 것을 어찌 전능(全能)이라 하겠는가중국어

蘭蕙從俗 亦有變 其誰信服牛 馬服乘|난혜종속 역유변 기수신복우 마복승|난초도 속된 것을 좇아 결국 변한다면 어느 누가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중국어[1]

자신을 신랄하게 풍자한 제자의 시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종직은 이에 화답하는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내비치면서 자신의 처세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分不合叨三公位|분불합도삼공위|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중국어

余何能補袞而匡時|여하능보곤이광시|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중국어

爾曹後生 笑其迂|이조후생 소기우|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중국어

非苟求 苟求勢與利|비구구 구구세여리|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중국어 [1]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1]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5]

2. 4.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김종직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수학한 김굉필은 1492년 스승이 죽자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널리 확산시켰다.

수많은 양반 관료들과 중인, 양인 자제들까지도 그의 문하에 찾아왔고, 김굉필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재물 욕심이 없던 그는 일부 뜻있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수업료를 냈을 뿐,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신재 최산두(崔山斗), 모재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 주계정 이심원, 이연경, 이약수(李若水), 문서귀(文瑞龜), 안우(安瑀), 정붕(鄭鵬) 등이 알려졌다.

그는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직접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기와 치인의 직접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현상은 조광조 등을 거쳐 후대의 사림 내에 확산되었다. 그밖에 그는 이(理)를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2. 5. 관직 생활과 무오사화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관찰사로 있던 훈구파 재상 이극균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훈구파의 거물이었던 이극균김종직의 문하생을 대거 발탁해서 요직에 앉혔는데, 그는 후일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이극돈의 친동생이었고, 이극균 자신도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하생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다.[1]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김굉필은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5년(연산군 1년) 12월 28일 북부주부(北部主簿)에 제수되고, 1496년(연산군 2년) 군자감주부가 되었다.[1]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7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7개월만에 사직상소를 내고 내려갔다. 1498년(연산군 4년) 동문 김일손 등이 실록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 폐비 윤씨 복위 반대에 염증을 느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오랜 고문 끝에 김일손이 그해 7월 17일 김종직의 문인이라고 진술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그도 처벌을 받게 된다.[1]

2. 6. 유배 생활과 갑자사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한 김일손, 권오복, 남곤 등은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는데, 김굉필 또한 이들과 동문이라는 이유로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다.[1]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1]

그의 문하에서는 최산두, 이장곤, 김안국, 김정국, 이장길, 정붕, 성세창, 강흔, 정응상, 이연경, 주계부정 이심원, 윤탁, 우성윤, 김구, 정응상, 허경, 박한참, 윤신, 유우, 민구손, 최수성, 이담 등이 수학하였다.[1]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긴 김굉필은, 친한 후배 정여해의 집 근처에서 지냈다. 정여해는 병으로 인해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찾아가 위로하곤 했다.[1] 한번은 정여해가 김굉필을 구하기 위해 신구 상소문 초안을 보였으나, 김굉필은 상소를 올리면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라며 만류했다.[1] 이에 정여해는 상소문을 불태우고 순천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1]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은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순천에서 사형당했다. 그는 유배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정여해 등 친구들의 위문을 받았다.[1] 10월 7일 철물시(鐵物市)에서 효수(梟首)하라는 명이 내려져 향년 51세로 생을 마감했다.[1]

3. 사후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 때 피해를 입은 인물들이 복권되면서, 김굉필은 승정원도승지경연참찬관추증되었고, 자손들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이황은 그를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칭송하며 성리학 도통의 정통으로 인정했다. 그의 제자 조광조와 그 문인 백인걸, 백인걸의 문인 이이, 성혼 등은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이들은 선조서인 당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중종 반정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김굉필은 성리학의 기반을 다지고 인재를 양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 덕분이기도 했다. 1517년(중종 12년) 정광필, 신용개, 김전 등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억울한 죽음을 주장하여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그가 도학을 가르치던 곳에는 사당이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그의 문인들이 화를 입으면서, 남곤을 비롯한 반대 세력은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과 은전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유생들은 중종 반정 직후부터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1575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도동서원, 순천옥천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3. 1. 문묘 종사 논란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7]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김굉필은 학문의 방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 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8]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이 종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조광조는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박팽년에 대해서도[9] 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10] 참찬관 김정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건의했다.[11] 김정을 비롯한 조광조 등의 문묘 종사 주장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 때 가서야 김굉필은 문묘에 종사된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김소형(金小亨)
아버지김유(金紐)
어머니청주 한씨 (한승순(韓承舜)의 딸)
순천 박씨
장남김언숙(金彦塾)
차남김언상(金彦庠)
삼남김언학(金彦壆)
정응상(鄭應祥)에게 출가


5. 저서


  • 《한훤당집》
  • 《경현록》
  • 《가범》

6. 평가

김굉필은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그의 문하에서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배웠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 김종직까지 올라간다.

7. 기타

(내용 없음)

7. 1. 사상과 영향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진다. 김굉필은 조광조 등을 양성하였고, 이들은 후일 동인서인의 연원이 된다.[1]

학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7. 2. 한훤당 고택

한훤당 고택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에 위치해 있다.

김굉필의 11세손인 김정제가 1779년에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서 현풍읍 지리로 이주하면서 생긴 서흥 김씨의 동족 마을에 있는 주택이다.[12]

현재는 카페 및 숙박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2] 서적 중종실록 중종실록 1543-01-04
[3] 백과사전 김굉필
[4] 서적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5] 서적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6] 문서 같은 스승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동문이기도 하다.
[7]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8]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9]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0]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1]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2]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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